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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端의 追憶 #115, 동방교의 대기처들
‘이단의 추억’기록중에서 여러군데에 흩어져 있는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들에 관련된 기록들을 한군데 모았다. 대기처(待機處)라고 하면 이는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대기(待機)라고 하면 ‘때나 기회를 기다린다’는 뜻이겠는데 여기에 장소를 뜻하는 처(處)字가 붙어 있으니 동방교에서 사용하는 은어(隱語)적 의미로서는 ‘빈집초월(무단가출)해서 천국 가기위해 이 땅에서 임시로 대기하는 장소’라는 뜻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대기처라고 하면 말 그대로 ‘대기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세칭 동방교의 여러 은어(隱語)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지구의 종말, 곧 닥아올 불심판을 피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로 가기 위해 빈집(원래 자기가 살던 집)을 초월(가출)해서 임시로 이 땅에서 머무는 장소라는 뜻이다. 즉, 무단가출한 동방교 신자들이 머무는 ‘집단합숙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소는 서울에만도 여러 곳이 있었다. 수원정(용산), 수원장(명수대), 향림정(흑석동), 성무대(마포), 성수대(마포), 큰집(상도동), 기도처(후암동), 청해약국(도동), 청산루(후암동), 청해장(용강동), 주학목장(천안), 평택농장, 시흥농장, 삼청동, 용강동, 약수동, 옥수동, 성지(소사)등등... 기억나는 것만 이 정도다. 주로 알려진 곳이 이 정도이고 숨겨져 모르는 곳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뭇 요정이름 같기도 하고 무슨 누각이름 비슷한 이런 명칭들은 풍류가연 하는 노광공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異端의 追憶 #109, ‘동방교의 대기처 생활 모음’ 중에서)
이외에도 옥당, 별장, 기도처, 향림정, 청수대, 성무대등 요정이름 비슷하기도 하고 요상한 명칭이 붙은 많은 대기처들이 각처에 산재해 있고 시흥농장, 안양농장, 천안 주학목장, 소사의 성지등 수천 평에서 수만 평에 이르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농작물이나 목축, 과수를 재배하던 곳도 있어서 무임금 노동력 착취의 최적지였다. 각각의 장소마다 빈집초월(무단가출)한 대기자들과 선님들이 거주하는 집단수용시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중에는 물론 교주와 그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장소도 있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선님들의 지성(헌금)과 교주에 의한 중앙집권체제하의 전국의 지교회에서 들어오는 지성(헌금)으로 사 들인 이 재산들이 후일 부동산가격의 폭등으로 세칭 동방교재산이 엄청나게 증식되는 기틀을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중에서)
당시 세칭 동방교에는 연일 쏟아져 들어오는 연단선님들과 전국 지교회에서의 지성(헌금)을 100달러짜리 외화로 바꾸어 군대에서 사용하는 탄창에 차곡차곡 쌓아 비닐로 몇 겹씩 포장해서 땅에 묻어놓고, 금괴로도 바꾸어 탄창에 가득 넣어 교주만 아는 어떤 곳의 비밀장소에 땅을 파고 묻어놓기도 하였다. 땅을 파고 그런 탄창을 묻어놓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아모스장로라는 분이었는데 카투사 운전병 출신으로 두뇌는 그리 명석하지 못했던지 실세 간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교주 노광공의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그의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신임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그런 일을 시켰겠는가, 바로 이분이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 . 샬롬 요엘’의 저자 문정열의 사수였는데 그도 세월이 흐른 후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을 간파하고 그곳을 빠져나와 연단선님출신 여신도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고 부산지방에서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껌팔이등 행상을 시켜 긁어모은 연단선님들의 지성(헌금)을 위시하여 곧 닥칠 말세의 공포심을 주입시켜 전국지교회에서 매주일 알토란같이 거둬들인 현금으로 장만했던 세칭 동방교의 부동산중 일부가 충성심 강했던 그의 명의로 된 것들이 꽤 있었는데 그가 동방교를 떠난 이후 세칭 동방교의 관계자가 수십 번 찾아와 부동산의 명의를 돌려주면 어떻게 어떻게 해주고 사후에는 이래 할아버지(노광공교주)의 옆에 안장해주겠다느니 하면서 온갖 감언으로 회유하더니 이전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후 다시는 가물치 콧구멍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의 부인은 술회하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중에서)
이제 말세지말(末世之末)이 다 되었으니 하늘에서 곧 불벼락이 떨어져 인간세상을 심판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년왕국의 도래가 임박했다고 공갈협박을 일삼아 이렇게 긁어모은 재물들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꼬... 이단 사이비교주들의 엄청난 축재와 치부였다. 땅과 논밭을 사들이고 은금과 부동산을 장만하고... 그리고는 그 자식들과 후손들의 몰락이었다. 마약, 도박, 알코올중독, 간통, 추태와 물의, 사회적 매장, 요절단명의 병사(病死), 절손, 자살... 그것이 이단이든 사이비든 종교에 헌납된 피땀 어린 재물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게 되면 엄청난 재앙이 뒤따르는 법... 인간의 지혜밖에 장치된 하늘의 섭리, 하늘의 이치는 과연 신명스러워 두려워 할 만 했다. 통일교가 그랬고 전도관이 그랬고 ‘세칭 동방교’가 그러했다. 아직도 그 부정한 재물의 끝자락에 붙어서 생존하는 군상들은 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그 실체를 감추고 부끄러움을 모른 체 활개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異端의 追憶 # 93, 生死의 彼岸(생사의 피안) -洪鐘基 著- 중에서)
실제 기거하거나 가 본곳 중에서 기억나는 것 몇 군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원정--세칭 동방교의 본부격이다.
서울의 용산에 소재해 있었지만 지금은 재개발에 휩쓸려 철거되어 버려 세칭 동방교의 산 역사의 현장인 이곳은 사라지고 없다. 서울의 용산에 소재해 있었던 세칭 동방교의 중심거점이었던 '수원정', 경부선과 경인선이 상호 교차하여 지나가는 지점에 위치하여 삼각이 철(鐵)로 감싸이고 막혀있다고 해서 악한 기운이 범접할 수 없는 중앙오토수(周易用語에서 차용한 듯?)라고 선전하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세칭 동방교의 중심거점이었다. 유일한 출입문이 있던 서편 대문의 반대쪽, 즉 동편 쪽으로는 조그만 도랑이 한강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수처리시설이 엉망이던 시절이라 그 도랑위에 얼기설기 말뚝을 막아 널빤지를 덧붙여 화장실을 설치해 놓고 사용하면서 집안의 온갖 오폐수를 수챗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장마철이 되어 한강의 수위가 올라가게 되면 오폐수가 역류하여 '수원정'의 마당이며 마루에 까지 화장실의 오폐수가 넘쳐나고 분뇨 덩어리가 물위에 떠다니기도 했다. 바지를 한껏 걷어 올리고 이리저리 물살을 헤집고 다니던 기억도 생생하다. 물이 빠지면 엉망진창이 된 '수원정'의 내부를 정리하고 청소하고 오폐수를 걷어 낸다고 '수원정'에 상주하던 대기자들이 말할 수 없이 곤욕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왜정 때 지은 전형적인 구(久) 일본식 건물인데 적산가옥(敵産家屋)인 듯하다. 외벽 사방으로 견고한 나무기둥의 틀을 만들고 주름함석(경양철)을 덧붙여 거기에 검은 콜타르를 칠해서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방벽을 둘러 싸 놓았다. 서쪽으로 나 있던 유일한 대문은 항상 잠가 놓은 채 조그만 쪽문을 통하여 출입하고 대문 안쪽에는 24시간 경비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외부인은 물론 도둑도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철의 장막 같은 곳이다. 밖에서 ‘똑, 똑’하고 두드리면 안에서 누구냐고 묻고 밖에서 ‘성민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신분이 확인되면 쪽문을 열어주어 출입하는 방식이다. 대지가 100평(坪) 정도 되었을까, 외벽을 따라 ‘ㄷ 자’로 연결된 좁은 통로에 협소한 마당이 가장자리를 따라 조성되어 있고 대지의 한가운데 40, 50평 정도의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내부는 여러 개의 방과 복도로 구성된 일본식 내부 구조를 개조(리모델링)하여 수십 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나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툭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이단의 추억 # 38, '수원정'을 말한다 중에서)
순회를 마치고 오후 2시경 용산 '수원정'으로 돌아와 새벽에 나갔던 쪽문을 통해 다시 '수원정'으로 들어와 오른편으로 돌아 실내로 들어서는 출입구 문을 열고 쪽마루에 올라서면 내부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닫이 출입문이 하나 더 있다. 건물의 현관문이 별도로 있지만 이곳으로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 오직 이래 할아버지(교주 노광공)나 아브넬 할아버지(2대교주 노영구)만 출입할 수 있다. 오른편으로 돌아서 출입구로 들어와 쪽마루에 올라서면 내부로 들어가는 출입문위에 사각액자가 여러 개 진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서울시경과 용산경찰서, 검찰청등에서 세칭 동방교(당시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 목사들에게 발행한 ‘청소년 선도위원 위촉장’‘경찰 선도위원 위촉장’‘OO위원 위촉장’등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아마 돈이 꽤 들어갔을 듯싶다.
(이단의 추억 # 38, '수원정'을 말한다 중에서)
세칭 동방교에서 제일 유서깊은 이‘수원정’이 재개발에 휩쓸려 지금은 자취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사진 한 장도 남아 있는게 없어서 아쉽다. 지금은 철거되고 없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과 똑같은 구조의 건물을 경기도 포천에 지어놓고 노광공의 유품들을 전부 거기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의 현존 동방교 신도들은 수소문해서 함 찾아가 보는것도 이단사이비종교 세칭 동방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금은 청남수양관으로 옮겼는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수원정 평면도 한 장을 남긴다.
이 사진이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수원정 내부의 사진인데 ‘節’자가 보이는 방안이
성소라고 부르는 제단이 모셔진 방이다.
(수원정에서의 행사 모습, 제물을 차려놓고 신도중의 누군가가 고깔모자를 쓴 특유의 복장을 차려입고 행사 중에
웃기는 장면인 듯한데 신도들에게 둘려 쌓여 있는 우측 중간부분에 아브넬 노영구, 베드로 양학식이 이빨을 드러
내고 웃는 모습이 보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여자가 사르멘 김숙자인 듯하다.)
(이단의 추억 # 35, 천국잔치 중에서)
수원장--서울 흑석동의 한강변 명수대 인근에 위치한 건물,
수원정과 이름이 끝자 한자 차이로 비슷하나 위치는 전혀 다른곳에 있었다.
동방교의 본부격인 ‘수원정’은 용산에, 수원장’은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었다.
동방교의 새노래라고 부르는 성가 제17장의 가사에 이 수원장이 등장한다.
1절. 보름달도 이미그제 기울어 졌고
내마음도 옛추억이 요새 자주나
같이울며 또즐기던 손자들 조차
기적소리 전해오나 못보는 마음
2절. 명수대에 수원장이 무슨인연인가
이리저리 생각해도 조는 성민뿐
지난날을 곰곰이도 생각을 하니
땅을치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아 ~아멘~
곡조는 어디서 따 왔는지 알 수 없으나 퍽이나 구슬픈 가락이었던 세칭 동방교의 애절한 성가곡 제17장‘명수대에 수원장이 무슨 인연인가, 지난날을 곰곰이도 생각을 하니 땅을 치고 통곡해도 시원치 않아’라는 무슨 신세한탄같은 이 노래에 등장해서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꽤 알려지고 궁금해 하는 명소인데 그냥 단층짜리 평범한 일반 가옥이다. 원래 명수대라는 명칭은 일제시대 이곳의 서달산 꼭대기에 일본인 부호가 건립했던 별장 이름이다. 경성의 남쪽지역을 흐르는 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서달산 꼭대기에 별장과 놀이시설을 만들어 즐기던 곳이었는데 해방이후 이 건물은 철거되었다. 서달산은 지금의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대통령의 묘역에서 북서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말한다. 이 명수대가 노광공교주의 작품이라는 뻥은 들은일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큰집--서울 흑석동의 수원장에서 고개하나를 넘으면 상도동과 연접되는 곳에 있었던 단층
가옥인데 큰집이라 불렀다. 1대교주 노광공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이승을 하직한
곳이기도 하다.
노광공교주가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하직한 이듬해인 1968년 12월에 당시의 거금 1600만원(현재의 화폐가치로 수십억 원에 해당)의 현금과 금괴 도난사건이 바로 상도동 ‘큰집’이라는 대기처에서 발생했다. 그 돈은 세칭 동방교에서 당시 대구의 어느 건물을 매입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어서 내일이면 잔금을 치르려고 전날 은행에서 현찰을 찾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돈이라고 했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권병찬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창틀을 뜯어내고 침입한 흔적과 발자국, 보관하고 있던 현금과 금괴의 도난사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던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구속되어 상당한 고초를 겪은 후 출소했고 당시의 도하 각 매스컴에는 자작극이라고 발표되었지만 거액의 현금인출을 눈치 채고 은행에서부터 따라붙어 미리 소재를 파악해둔 도둑의 소행이거나 내부를 잘 아는 누군가와 모의해 외부침입에 의해 실제 일어난, 짐작은 가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도 알 수 없는 대담한 희대의 도난사건이었다.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중에서)
청해약국 --'도동 사무실' 이라고도 불렀다
서울역 맞은편 남대문경찰서 뒤쪽편 도동 후암삼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1층에는 청해약국이 있었고 2층에는 세칭 동방교가 변신해서 위장 개업한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교단 사무실이 있었고 3층에는 강당이 있었다. 위의 사진에 총회장 입구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총회를 이 건물 3층에서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찍은 사진인데 동방교의 사주(四柱-네사람의 기둥이라는 뜻) 가운데 한 사람인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얼굴도 보인다. 연접해서 곡각지점을 돌면 의사는 없고 간호원만 있었던 청해의원이 붙어 있었다. 청해약국 뒤편으로 연접된 마당안으로 들어가면 동방교의 대기처 가옥이 있었고 내부는 미로처럼 상당히 복잡했다. 마당에는 한반도 모양을 본떠 만든 자그마한 연못도 있었다. 도동 사무실(동방교가 변신한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의 사무실이 있었다고 그렇게 불렀다)에는 변국장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전화가 걸려오면 ‘나 변이요’하면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곤해서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면 똥이라는 말이냐’고 킥킥거리고 웃던 기억도 있고 대머리가 시원한 ‘임도상’ 이라는 분도 책상 하나를 차지하고 근무하고 있었고 후일 동방교가 외부 바람막이 용도로 재단총무에 채용한 선세은이라는 분도 선교사라는 명칭을 달고 이곳 사무실에 출입하면서 자기의 위세를 으시대곤 했다. 지금은 고급 아파트단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천지개벽을 한 것 같이 변해서 옛 자취는 전혀 찾을 수 없다. 다음은 청해의원의 입원실 침대 하나를 숙소처럼 사용하면서 '청해'라는 잡지를 만들어 내던 세칭 동방교의 어느 열혈 여신도가 남긴 기록이다.
동방교에서의 6년 중 가장 긴 시간을 차지했던 ‘청해’ 발간의 일을 맡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청해’ 는 노광공의 호이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포요하고 정화시키고, 그러고도 여전히 푸르고 맑은 바다라는 뜻이겠는데 그것이 동방교의 기관지이면서 일반종교 잡지의 성격을 더 많이 띤 잡지의 제목이 된 것이었다.‘청해’는 처음에 서울대학에 다니던 김휘O, 두O 형제를 주축으로 하는 몇몇 대학생들이 편집진이 되어 발간했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외부 원고도 제법 받고 대외적인 내용이 많았으나 후에는 비영리적인 책인지라 재정상의 어려움과 인력부족, 소재빈곤 등으로 외부 원고는 거의 없어졌고, 노가계의 대를 이은 교주 외에 동방교의 총책이던 양학식 목사의 신앙이론을 특집으로 하여 사회단체에 대한 탐방기사, 성민이 쓴 수필, 동화, 소설 등을 실었다. 처음에는 사륙배판이다가 나중에는 국판 크기로 바뀌었는데 김휘O, 두O 형제와 대부분의 사원들이 주간기독교로 빠져나가고 난 뒤엔 200쪽 정도의 잡지를 나를 포함한 여자 셋이서 만들어야 했다. 그 세명 중 하나는 주간 기독교와 청해를 왕래하며 사진을 담당했으니 ‘청해’는 결국 두 사람이 원고 작성, 편집, 교정을 다 한 셈이었다. ‘청해’는 군부대와 종교단체 등에 보내졌는데 발송은 여러 성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낮에는 교직에 종사하고 밤이 되면, 동방교 즉 대외적으로 기독교 대한 개혁장로의 본부사무실 곁에 있는 청해 병원에서 숙식하며 뒤에 설명하게 될 김재경과 함께 ‘청해’를 만들었다. 청해병원에서 기거하기 전에는 마포 공덕동의 어느 빌딩, 삼청동의 대기처, 후암동의 대기처 등을 잠깐씩 전전하기도 했다.
서울 안의 각 대기처, 지방의 파송 전도사 및 연단선님들 중 지병을 가진 성민들이 이따금씩 병원에 와서 주사를 맞고 약을 얻어 갔다. 때로는 입원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의사는 없었지만 간호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던 것 같다. 나는 가끔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환자들은 여자가 월등 많았는데 대부분 위장병, 심장병 등의 고질적인 병들이었고 계속되는 긴장, 조악한 식생활 등이 원인이었다. 지방 파송전도사일 경우엔 사이비 종교라는 이유로 주위의 핍박을 받기 일쑤여서 평성민들의 가족들로부터 기습적인 가택수색, 침입 등을 당할 위기감 속에 살다보니 심장병을 얻게 된 것이었고, 대기자나 연단선님들은 열악한 주거환경, 영양의 결핍 등으로 위장병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내 영혼에 햇빛비치니 ⑤ 갈등과 탈퇴(1) 중에서)
청산루와 기도처--청해약국에서 남산 올라가는 길, 후암동 삼거리 근방에 있었으며
청산루와 기도처는 약간씩 떨어져 있었다.
아마 그들은 노광공이 이땅에 살아있을때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청산루라고 하니 수호지에 나오는 무슨 호걸영웅들의 청정한 누각을 연상할지 모른다. 후암동 도로변에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실내계단이 있었던 그 2층 양옥집, 말로만 전설처럼 들었던 그 청산루를 그들은 직접 가 보지는 못했을것 같다. 거기에 이레 노광공의 큰아들 아바 노영도가 밥을 챙겨주는 대기자를 거느리고 껌팔아오는 연단선님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었고 청산루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기도처라는 대기처도 있었다. 대문옆쪽에 조그마한 창고가 하나 붙어있던 단층집이다. 아브넬 노영구가 젊은 시절 대구에서 올라와 대기자가 챙겨주는 밥을 받아 먹고 하릴없이 무위도식 소일하면서 껌 팔아오는 연단선님들과 같이 기거했던 곳이다.
('좁은길문서선교회'라는 카페가 있네요. 하하... 중에서)
향림정--흑석동 중앙대 정문 맞은편 비탈진 길 위쪽에 위치
왼쪽 상단에 노광공교주가 기거했던 방이 보이는 흑석동 명수대 소재 동방교의 대기처 향림정, 향림정이란 이름답게 잡목이 우거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동방교에서 대기처로 구입하기 이전에는 무슨 병원의 입원실을 하던 건물이었는지 여러개의 방들을 1호실, 2호실 이런식으로 불렀던 기억이 있다. 건물의 뒤편으로는 당시의 동방교 대기자들이 파 놓은 자그마한 토굴이 하나 있다. 토굴을 파 낸 흙더미는 향림정 아래 중앙대 쪽으로 뻗어내린 골목길에 리어카로 실어다가 쉬엄 쉬엄 깔았다고 한다. 골목길이 포장이 되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리고 이곳 향림정 대기처에는 서울의 각 처에 분산되어 있는 대기자들에게 이발을 해 주던 노인도 한분 계셨는데 특이하게도 이분은 대기자들에게 돈을 받고 이발을 해 주었다.
삼청동 대기처
지금의 서울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이 자리 잡고 있는 언덕의 아래쪽에는 기와를 덩그렇게 얹은 고가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동네가 있었다. 이곳에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가 한 곳 있었다. 본채와 사랑채가 있는 상당히 규모가 큰 한옥이었는데 번듯한 사랑채의 한 칸에는 성전이라 이름하여 제단이 모셔져 있고 이곳에 거주하는 대기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 마당에서 언덕 위를 쳐다보면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쳐놓은 국무총리 공관이 바로 머리위로 보였다. 마당이 건물 입구의 도로보다 한층 정도 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출입은 대지의 왼편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걸어 올라가 세워진 솟을대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오른편으로 도로와 연접한 마당의 끝부분에 정자식으로 약간 튀어나오게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부속 건물이 하나 붙어 있었다. 이곳이 초기의 ‘청해’라는 월간 잡지와 주간지 타블로이드판 교계신문 ‘주간 기독교’가 출판 업무를 보던 장소이기도 하다. ‘청해’는 초대교주 노광공의 ‘호’인데 이 이름을 따서 잡지를 발행하여 주로 군종교기관 중심으로 배포하던 월간잡지였다. 세칭 동방교의 신도들 중에서 몇 명이 주로 이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곳 삼청동 대기처에서 잠시 기거한 적이 있는데 삼청동이라는 지명도 노광공의 선조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선조 중에 -그것이 노광공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삼형제가 있었는데 이름이 각각 ‘자청, 지청, 군청’이었다고 한다. 그들 삼형제가 이 동네에서 살았다고 해서 삼청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세칭 동방교에서는 선전되고 있었고 그때 나는 그것을 일말의 의심 없이 굳게 믿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중에서)
약수동 대기처—서울의 장충체육관 근처 산비탈에 있었던 단층 가옥인데 큰 방들이
여럿 있었다. 아마도 이전에 요정을 운영했던 장소인 듯 한데 동방교
에서 사들여 대기처로 활용했으며 한 두 번 밖에 가 본 적이 없어 기억
이 가물가물하다.
성지(聖地)--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래리 소재, 노광공의 무덤이 있었던 곳.
지금은 이곳에 동방교의 ‘한빛수도원’이 들어서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단종교의 자칭 하나님인 교주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에 사망했을 때 무슨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옥체(玉體)를 어느 공동묘지에 임시 가매장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박태선의 신앙촌에서 서쪽 방면)에 있는 산을 단장 하더니, 가매장한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그리고 왕릉처럼 무덤을 성역화 해 놓고(그 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밤 산속에서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나는 랜턴을 들고 순찰을 하며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1)
마태목사 탈출사건이 있었던 그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난 2011년 어느 봄날 저녁, 부산의 동래 농심호텔앞 ‘부산 한정식’이라는 식당에서 세칭 동방교의 김태문 삼손목사와 만나 저녁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2대교주 노영구시절에 동방교의 대기처를 떠나 간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2대교주 노영구가 그를 다루기 힘드니까 무슨 구실을 붙여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알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무슨 지시를 받아 어떤 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굳세게 믿고 있는 불통의 사나이다. 창립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시신을 안양의 어느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가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의 성지로 이장한 장본인이기도 한다. 노광공 교주의 묘지가 있는 성지(聖地), 경기도 소사면 ‘소래’라는 지명의 뜻이 원래 성민(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통칭)들이 ‘솟아나서 오라’는 뜻이라고 그때는 한창 말하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28, 팔십대의 노인이 된 삼손목사 중에서)
이렇게 얼러고 달래면서 촌놈 혼쭐을 빼 놓듯이 난리법석을 벌여 회개기도를 하면서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정신무장을 시켜 소사에 있는 성지(聖地-노광공의 무덤이 소재한 곳)로 모두 출발하는데 그 순간 몇 사람을 찍어 아무개 아무개는 성지(聖地)에 참례하지 못한다는 지시가 내렸다고 하면서 못 가게 하는 것이다. 찍힌 사람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가 그리 많아서 이러한가, 낙심천만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무슨 지시가 어떻게 내리는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아니다. 사생결단으로 눈물 콧물 흘리면서 다시 회개기도에 매달리는 것이다. 패자부활로 다시 성지행사에 합류하도록 허락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허락이 안 떨어져 '수원정'에서 종일 대기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부산에서 부터 몰고 올라왔던 먹구름 때문에 그렇게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던 날씨였다가도 부산지방의 성민들이 회개하고 용산 '수원정'을 출발해서 소사의 그곳 성지에 들어서면 그곳에만 햇살이 환하게 비친다고 하는 소리를 몇 번인가 들었다. 할아버지(이미 세상을 떠난 노광공교주)께서 손자(신도)들의 정성에 감복하여 진노를 거두시고, 회개하고 성지에 들어오는 손자들을 반가워하시는 표시라는 것이다. 용산 '수원정'에서 매일 자정 전후하여 모이는 점호형식의 예배때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에게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약간 뻐기는 듯한 그의 특유의 몸짓으로 이런 현상을 강조하곤 했었다. 하도 강조를 하니 그렇다고 믿게 되는데 그것이 착각인지 사실인지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이단의 추억 # 41, 먹구름을 몰고 오는 그들 중에서)
주학목장--충남 천안에 소재했었는데 지금은 재개발로 천지개벽이 된 듯한 지역이다.
서울역에서 토요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 내리면 백석동 가는 버스가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0여분 아산방면으로 달려가다 보면 지방도로 양쪽으로 완만한 구릉지가 펼쳐져 있는데 도로변에 주학목장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두루周자 학鶴자 주학(周鶴)목장이다. 세상을 학처럼 높이 날아 주유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세칭 동방교 사주(四柱)중에서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호라고 하는데 세칭 동방교 교주인 노광공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같은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와는 같은 연배요, 그를 세칭 동방교로 인도한 인물이지만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그는 결국 노광공교주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세칭 동방교내에서 실권을 잡은 베드로목사를 위시한 강경파의 득세로 인해 배척을 당해 세칭 동방교 밖으로 밀려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주학목장은 6만여 평의 목초지와 축사가 있었고 수십 마리의 젖소를 길러 우유를 채취해서 우유 가공공장에 납품하던 목장이다. 물론 세칭 동방교의 수십 개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중의 하나다. 전국 각지의 지교회에서 믿음이 특출하다고 인정받으면 이런 대기처란 곳으로 불러 모으는데 천국가기 전까지의 이 땅에서 임시 대기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실상은 무임금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얕은 꾀임수다. 월급을 줄 필요도 없으며 밥만 겨우 먹이고 일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집합시켜 점호겸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순회자가 매일 다니면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곧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끝날 것처럼 종말론을 강조하면서 긴장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매일 정신무장을 시키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56, 주학목장의 밤 중에서)
여기던가, 저기던가. . .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시 완만한 구릉지대 언덕받이 고개길을 회상하고 천안시와 아산시의 경계지점 근처에 다달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산세와 풍광이 웬지 눈에 익은곳이 있다. 눈여겨 자세히 보니 틀림없는 그곳이다. 세월은 바뀌고 도시화는 많이 이루어져 옛 모습은 찾을길 없으되 눈에 익은 풍광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그것이다. 둑길을 따라 울창하게 자라고 있던 그 아카시아 나무들이다. 아직도 그 나무들이 한곳에 무리지어 서 있다. 수십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반기는듯 하다.
신작로와 인접한 곳에 자리잡고 있던 숙소와 축사, 우물이 있던 자리, 식당으로 사용하던 건물, 그리고 안쪽으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던 6만여평의 초지와 농작물을 재배하던 논밭들, 소똥 냄새 향수삼아 거닐던 그 소로길들, 그때 그시절이 눈에 선하다. 눈을 들어 현실을 바라보니 아카시아 무성하던 뚝길 왼편으로는 신도시 주택건설이 한창이고 숙소와 우물, 식당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는 어느 에어컨 공장건물이 우람하게 들어서 있고 축사가 있던 쪽으로는 보일러 공장건물이 나를 압도하듯 거대하게 자리잡고 우뚝 서있다. 아, 세월 한 번 참 무상한지고.
(네이버카페 샬롬요엘, 주학목장을 찾아서 중에서)
평택농장
잡동사니 가방 속에서 히스기야의 편지를 발견했다. 가로로 줄이 그어진 편지지에 가장자리에서
부터 안쪽으로 원형으로 돌아가면서 쓴 편지인데 수신처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로 되어있다.
아마 용산 '수원정'에 잠시 있다가 또 다른 대기처인 평택농장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보낸 듯하다.
형 보이소.
낙엽 지는 소리에 허전한 마음이 더해가는, 그리움에 지쳐 가을밤 바람에 딩굴며 가는 낙엽에 저에 마음 전하고 싶은. . . 허공에 나의 숨결이 닿아도 무감각한 가을 하늘 찬란히 빛나는 별에 속삭입니다. 마치 별빛과 같이 빛나던 추억속에 도저히 잊지못할 형께 늦은줄 알면서 몇자 적습니다. 화내지 말고 읽어주이소. 형, 많은 세월이 흘렀지예. 제가 지금 있는 이곳은 한없이 한없이 넓은 평야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다가 있고 이름모를 물새가 떼를지어 나르고 따가운 태양이 서쪽 하늘을 살짝 넘는 그 순간을 바라보노라면 그져 인생무상함이 요마음을 울적하게 만듭니다. 또 황금물결이 출렁이던 곡식들이 농부들 손에 폭폭 스러지고 여기저기 탈곡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단의 추억 # 55, 히스기야와 돈까스 중에서)
시흥농장
지금은 이름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세칭 동방교의 내 동료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 그는 언제나 잠이 모자라 게슴츠레한 눈동자로 '수원정'에서 밤낮으로 대문가에 붙어 앉아 경비를 서고 있었다. 특별히 무슨 다른 일을 맡길 수 없을 정도로 ‘뚱’ 하다고 할까. 내가 대기처 '수원정'에 들어온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빳빳하게 군기가 들어있을 때였다. 나에게 특별한 임무가 떨어졌다. ‘뚱’과 함께 시내에 소재하고 있는 어느 대기처의 재래식 변소를 퍼서 시흥농장까지 싣고 가서 그곳 농장에 퍼 부어놓고 돌아오라는 특명이었다.
그는 서울 시내 대기처 곳곳마다 돌아다니면서 똥을 퍼서 시흥농장에 갖다 붓는 이 일에 이력이 난 친구였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 . 추억속의 친구다. 용산 '수원정'에서 출발하여 다른 대기처로 가서 똥 한 바리를 리어카에 싣고 시흥농장까지 갔다가 다시 한강을 건너 용산 '수원정'까지, 맨몸으로 걸어도 수월찮은 거리인데 똥통에 한 짐 실어서 끌고 다녀왔으니 도착한즉 한밤중이었다. '수원정'에 도착하니 내 사수 왈, ‘똥통 끌고 시흥농장까지 한번 갔다 오는 것은 지교회에서 6개월, 반년 도(道) 닦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면서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지금은 본명도 잊어버린 이분 내 사수 갈렙목사...
(이단의 추억 # 39, 똥장군 수송 작업 중에서)
옥당--세칭 동방교의 초기 발상지라고 할 만한 장소, 대구에 소재하고 있다.
사진의 중앙부분 간판에 자그마한 글씨로 ‘옥당’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아마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기념표식인 듯 한데 지금은
식당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아마도 동방교의 대기자가 운영하고 있는 듯 하다.
부산 초량12교회--동방교의 본부에서 관리하는 본격적인 대기처라고는 할 수 없었지
만 부산경남지방의 중심교회 역할을 하면서 부산경남지방에서 빈
집초월(무단가출)한 신도들이 많이 상주하고 있었다. 지금은 부산
의 문현동으로 옮겨 부산한빛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서울의 용산에 '수원정'이 있다면 부산에는 '초량12교회'가 있었다. 세칭 동방교에서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지교회에 숫자가 붙어있다. 서울에 있는 대기처들은 숫자가 없고 수원정, 수원장, 청수장, 청산루, 성무대, 청해장등 풍류연척 하는 요정이나 누각 같은 이름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서 단연 동방교의 중심은 용산에 있는 '수원정'이었다. 이곳을 외부적으로는 제일교회라고 칭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동방교의 간부들이 모이고 훈련받고 지시를 내보내고 결과를 보고받는 중심장소였다. 부산에 있는 '초량12교회'는 부산, 경남지방에 산재해있는 동방교 지교회의 중심거점이었다.
(이단의 추억 # 19, 어느 신고식 중에서)
부산의 '초량12교회'는 지금의 초량 대로변 정발장군 동상이 있는 길 건너편 골목 안에 위치해 있었다. 전형적인 일본식 구조의 2층 목조 건물로 대지는 40여 평 되었을까, 건물은 1층과 2층이 똑 같이 2-30평 내외, 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에 연접해서 서향한 대문에 붙어있는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있었다. 왼편으로 수도가 있었고 그 안쪽에 부엌시설, 대문에서 오른편으로 장독대, 안쪽으로 쑥 들어간 마당 끝에 화장실이 별도로 있었다. 남향으로 된 건물의 1층은 중앙부위에 2층으로 올라가는 실내 나무 계단이 일직선으로 2층까지 연결되어 있고,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기준으로 왼편에 마루와 큰방 하나, 침구며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골방 하나, 오른편으로 작은 방 하나와 그 안쪽에 잘 사용하지 않는 조그만 부엌 하나가 딸려 있었다. 이 부엌에는 바깥의 작은 옆 골목과 연결되는 쪽문도 하나 있었는데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다가 비상시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단의 추억 # 15, 초량12교회, 인초(人草)가 건너는 다리 중에서)
건물의 소유주가 바뀌고 리모델링된 ‘초량12교회’의 현재모습, 외관이 판자로 덮인 왜식건물
이었으나 그것을 걷어내고 타일시공을 한듯하나 전체적인 구조는 변함이 없다. 사진의 중앙
부분 상위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두 짝의 창문이 평면도상의 회의실이라고 표시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