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대령의 이름은 에드워드 하우스입니다.
하우스는 발기인의 자격으로 뉴욕에서 국제사무협회를 발족하였으며, 1921년 7월, 하우스는 국제 사무협회를 ‘외교협회’로 개명하였습니다. 미국 대표와 정계와 금융계 엘리트들이 이 협회에 가입하였습니다. 월 가의 은행가들이 이것을 위하여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세계 정치를 통제하는 데 열중하는 조직은 이렇게 탄생하였습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하우스는 그의 참모가 되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아이디어 대부분은 바로 이 외교협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루스벨트 대통령이 자기 생각대로 정책을 밀고 나간 것이 아니라 외교협회에 소속된 엘리트들의 생각대로 정책을 밀고 나간 것입니다.
1. 악한 자들은 마음속에 악한 일을 생각합니다.
시편 140편 1~3절에 “야훼여, 악(惡)한 인류로부터 나를 구조하시고 폭력들의 사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소서. 그들은 마음속에 악한 것들을 생각하며 모든 날에 전쟁들을 계획하며. 그들이 혀를 뱀과 같이 날카롭게 하며 독이 입술 아래”라고 하였습니다.
록펠러재단은 1913년 뉴욕주의 법인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록펠러재단은 세계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동유럽과 서러시아 지역을 차지하는 자가 곧 세계의 심장을 지배하며, 세계의 심장을 차지하는 자가 곧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장악하며,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차지하는 자가 곧 전체의 세계를 제패합니다.
지금 곧 세계의 심장 지대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싸우고 있는데, 남한은 동유럽 우크라이나를 돕거나 러시아를 적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만일 남한이 우크라이나를 도우면 러시아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1939년 뉴욕의 외교협회는 장기연구에 착수하였습니다. ‘전쟁과 평화연구’라 불린 이 연구는 5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록펠러 사람들과 미국 기업이나 은행의 총수들은 그 야심에 비추는 때 미국 시장만으로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1939년에 록펠러가는 매우 위력적인 정책 집단을 하나 꾸렸습니다. 록펠러 세력이 설정한 그 비밀집단의 임무는 간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전후 미국의 정치·경제적 목적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전쟁과 평화연구 집단은 전후의 중요한 계획을 도맡아서 짰습니다.
록펠러재단은 전쟁과 평화연구 집단에 35만 달러나 되는 돈을 기부해 미국이 전후에 경제 주도권을 장악할 방안을 모색해보게 하였습니다. 록펠러가가 나중에 수천 배로 돌려받게 될 수지맞는 투자였습니다. 그 연구는 전쟁 후 미국의 산업제국을 세계 차원에서 정의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창한 미국의 세기란 기실 록펠러 제국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다수 미국인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외교협회는 이후 전쟁과 평화연구에 관해 공식 성명을 발표합니다.
전후 시대를 이끌 미국 외교정책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이 제안되고 그 사업이 바로 전쟁과 평화연구라고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외교협회 산하에 있는 이 기밀연구가 추구한 것은 아주 간단하였는데, 해가 지지 않은 대영제국이 차지하던 역할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서서히 쇠약해져 가는 영국의 역할을 미국이 승계하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야심은 그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점령하는 것에 있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대기업들이 ‘식민지 민족’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자유기업’과 ‘개방경제’ 같은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엘리트에게 전쟁이란 그 금융제국을 넓히려는 정책 실현 도구요, 어떠한 유럽의 잠재적인 강국이든지 그들의 경제생활권을 빼앗음으로써 ‘미국 경제생활권’을 창출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화란 잠정적 휴전상태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영역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였음을 깨닫고 새로운 정복 전쟁을 일으키는 때까지만 지속되는 휴전상태 말입니다.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할 세계구도를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영국 원탁회의의 인사들은 독일의 생각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었으며, 히틀러도 지정학의 핵심을 오판하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계대전의 비극은 서로 다른 지정학 전략들이 충돌한 결과입니다. 영국인들은 유럽을 나누고 바다를 통제한다는 지정학을 고수하였으며 처칠은 ‘강국’인 미국과 연대하겠다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영국을 세계권력으로 유지할 방법이란 계산에 따른 것입니다.
이처럼 영국이 약한 적국에 대항하려고 강한 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영국의 세력균형 외교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미국의 핵심세력은 유럽 국가들이 싸우다가 함께 멸하게 할 작정이며, 그들은 중유럽을 독일이 차지하러 나서는 싹을 자르려고 하였습니다. 히틀러 반대파들은 경제 제국주의라는 것에 더욱 많이 기울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동유럽으로의 ‘평화적 침투’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 반면 히틀러는 슬라브족을 무자비하게 굴복시킬 때 얻어낼 수 있는 지정학 전략을 선택하였습니다. 사실 제3 제국(나치 독일) 내의 두 계파가 추구한 목적은 같은 것인데, 그 목적은 곧 독일이 경제생활권으로 유라시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국제주의자들은 매우 독특한 지정학 의제를 채택하였습니다.
미국 금융계와 산업계의 거두들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였습니다.
러시아와 독일과 영국이 전쟁을 치르느라 저마다 만신창이가 된 틈에, 미국은 독일의 싹을 확실히 잘라버려야 하였습니다. 미국은 히틀러와 독일을 지원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인데, 록펠러와 그들을 둘러싼 세력은 영국이나 독일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독일과 소련을 한꺼번에 쓰러뜨려 유럽을 잿더미로 만든 후 ‘미국의 세기’를 건설하려는 미국의 야욕에서 비롯된 전쟁이었습니다.
영국으로서는 결국 독일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됭케르크(Dunkirk)는 프랑스 도버 해협 해안가에 있는 중소 도시인데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이 적군을 프랑스 됭케르크의 바다로 밀어낸 때, 1940년 5월 이틀간 휴전하기로 하였습니다. 히틀러의 그러한 결정에 처칠만큼이나 히틀러의 군사령부도 놀랐는데 히틀러는 영국에 거래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썩 좋은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히틀러는 연합군이 영국 해협으로 도망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영국의 선전기구들은 그 일을 가리켜 ‘됭케르크의 기적’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사실 기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독일 히틀러, 영국 체임벌린, 프랑스 달라디에,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열린 4대국 회담에 참석하였습니다.
독일 국방군이 무력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까지 점령하자 영국 상층부는 대독일 전쟁에 대비하는 쪽으로 정책을 급선회하게 되며, 처칠은 미국과 유대를 맺는 능력 덕분에 선택된 인물입니다.
1940년 5월에 독일 국방군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부분 지역,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와 중요한 군사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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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는 오직 이익만 있을 뿐 친구는 없다”라는 말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며 미국도 자기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미국이 영원히 우리나라의 친구인 나라는 아닙니다. 적국도 그러합니다.
한국전쟁 때는 소련이 남한의 적이었으나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와 별 상관없는 러-우 전쟁에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여 러시아를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