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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 르포
공산치하 석 달
강 희 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우리 고향 마을은 딱 3개월 간 공산치하에 있었다. 북에서 쳐들어온 침략자들의 수중에 들다보니 부락머슴과 소작인들의 인민통치가 시작되어 세상은 하루아침에 천지개벽하듯 바뀌었다. 군 면 이단위로 인민위원회와 여성동맹 그리고 노동청년회가 조직되었고 저녁마다 회의를 열어 붉은 사상을 주입시켰다. 반동으로 몰려 처단될까 두려워 전 부락민은 농사도 뒤로 하고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마을 주민들 중에선 앞에 나설 사람이 없어 면의 지시에 따라 동민 스스로 마을책임자를 투표로 뽑았다.
서기장에 아버지가 선출됐고 이때 서기장에 뽑힌 게 화가 되어 수복 후 아버지는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외출이나 나들이를 할 때는 면에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고 모든 작물 심지어 감이나 채소까지도 생산량의 3할을 현물로 바쳐야했다. 벼와 조 이삭까지 일일이 세어 가며 공출할 양을 정하여 농민과 소출조사단원 사이에 마찰도 잦았다. 이렇게 꼬박 석 달을 시달리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서울에 입성했고 우리 마을은 그 다음날 바로 해방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만물이 고요히 잠든 그 시각에 북한 공산군의 불법남침이 시작되었다. 일요일 군인들의 외박을 틈타 삼팔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방위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소총과 육탄전으로 맞서야 했던 국군에 비해 북한군은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소련제 탱크 등으로 중무장 전투를 준비해왔던 것이다. 당시 경제사정은 북한이 월등했다. 그래서 그만큼 북한은 전쟁준비에도 여력이 있었다.
미국이 한반도를 동북아 방어선에서 제외하고 미군을 철수시킨 틈을 이용, 적화통일의 야욕으로 북한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비밀리에 남침을 음모해 왔는데도 남한에서는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평상시 삼팔선에서 가끔씩 벌어지던 충돌쯤으로 간주했던 우리 국민들이다. 그 얼마 전 개성 송악산에서 인민군의 대공세가 있었는데 그것이 남침의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삽시간에 전선이 무너지자 남으로 향하는 길은 피란민으로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적기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피란민들의 발걸음을 더욱 허둥대게 만들었다. 남침 사흘이 지나자 우리 국군의 지친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는 드디어 인민군이 우리 마을까지 쳐들어왔다. 마을은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장상리 양지말로 수인도로를 접하고 수리산(서해 쪽) 입구에 있어 ‘수리산 전투’의 요충지였다. 남침개시일인 6월 25일 라디오에서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평상시와 같이 생업에 전념하라”는 방송이 되풀이해서 흘러나왔다.
우리 국군은 용감하게 대항하여 잘 싸우고 있다고도 했다. 거기에다 풍문에는 일부 전선에서 북진을 시작했다는 말도 떠돌았다. 다음날이 되자 우리 마을로 피란민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이런저런 뜬소문도 난무했다. 서울에서는 지하에 숨어 있던 빨갱이들이 설치기 시작했고 국군은 노량진에 제2의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침 셋째 날, 학교에 갔더니 친구들은 “인민군이 미아리고개까지 왔대.” “아냐 걱정할 것 없어. 국군은 북진해서 해주를 눈앞에 두고 있대.”로 말이 달랐다.
“시흥에 있던 16연대가 옹진으로 옮겼는데 독안에 든 쥐가 됐대.”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토록 불안한 분위기에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어 우린 하교하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인민군이 오면 모두 잡아 죽인대” “아니, 우리야 어디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하루 밥 세끼 먹을 수 있다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뭐.” 등 의견들이 분분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던 친구 형들이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한강다리를 끊는 바람에 아비규환이 되었고 마포나룻배를 겨우 타고 건너 밤새워 오는 중이라 했다.
인민군이 서울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어 벌써 빨갱이들이 설치면서 민간인 학살이 시작됐다고 했다. 점심때가 되자 소련제 MIG 전투기가 마을 앞 다리를 폭격했다. 끊지는 못했지만 피란민 몇 사람이 팔이 잘리는 등 중경상을 입었다. 듣도 보도 못한 날쌘 비행기의 위용을 놓고 소련군의 참전여부가 관심사였다. 탈옥한 죄수가 도망가다 총탄에 맞아 장바대 논두렁과 마을 앞 논 가운데 죽어 있었다. 남침 넷째 날은 줄을 이은 피란민 속에 국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민간인 복장의 패잔병과 다리를 저는 장병 그리고 전우 등에 업혀 가는 부상병 등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시낭골과 부로지에서 어제저녁 경찰에 붙잡혀 갔던 서넛이 박달동에서 총살당했는데 한 사람은 용케도 도망쳐 왔다고 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빨갱이로 몰려 즉결처형된 것이다. 진짜 빨갱이는 신속히 피신하고 주변 마을의 양민 100여 명만 억울한 변을 당했다. 비료 수령용으로 모아 놓은 도장을 이장이 보도연맹 가입원서에 임의로 찍어 정작 부락민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빨갱이가 되어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이상한 비행기가 나타났다. 북한군 전투기가 서울에서 수원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반대 방향에서 날아온 미군 전투기를 만나 공중전이 벌어졌다. 미군 전투기는 재빨리 급상승했다가 강하하며 급회전하는 적기와 전투를 벌였다. 미군 비행기의 직격탄에 명중된 적기는 힘도 못 쓰고 연기를 뿜다가 하늘로 머리를 들더니 불을 뿜으며 곤두박질했다. 적기는 소련제 최신예 MIG 전투기였고 미군기는 광복 전에 맹활약했던 쌍발 전투기로 이번 전쟁에 처녀출전한 제1호였다.
북한군 조종사는 안양 뒷산에 떨어져 마침 제2전선을 구축하고 있던 국군에 생포됐는데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해서 그때까지 떠돌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을 일축했다. 다섯째 날은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공무원이며 일부 인사들은 지하로 숨었고 우리 마을 출신 순경은 전투에 참가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 없이 당당히 마을 앞 도로를 행진하며 남하해 갔다. 인민군 몇 명이 마을에 들어와 소마차를 차출해 군수품을 싣고 따르게 했는데 수원 아래 서정리에서 인수인계를 하고 다음날에야 돌아왔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은 평택에서 미군의 반격에 부딪쳐 일진일퇴 공방을 시작했다.
9·28수복과 1·4후퇴
정부는 6·25남침 때와 같은 희생을 막기 위해 1·4후퇴 때는 미리 20세 전후의 청년들은 현역으로, 40세까지의 중년들은 제2국민병으로 징집해 소개시켰고 거동이 가능한 주민들은 모두 피란을 떠나 마을에는 일부 어린이와 노약자, 피란민들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군은 한강을 마지노선으로 삼았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이마저 무너져 안산 땅은 또다시 한 달간 적지가 되고 말았다.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의 무차별 폭격에 중공군은 남하를 멈추고 숲이 우거진 마을 뒤 마산麻山과 건너편 수리산에서 격전을 대비한 진지구축을 강화해갔다.
서해바다의 군함과 전투기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마을 앞 벌터 뜰을 경계로 4~5일간 진격과 후퇴를 거듭하던 터키군은 마을에 입성하여 양민들을 모두 집에서 나오게 한 다음 주변 윗버대와 아랫버대 원디 마을에 일제히 불을 질러 삽시간에 150여 호는 잿더미가 됐으나 중공군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날이 바로 설날이었고 당시 난 15세 소년으로 약 3km 떨어진 수리산 자락 동막골 집에서 치열했던 전투현장을 직접 목격했었다. 그러나 선영 뒷산인 마산에서의 무자비했던 함포와 공중폭격을 멀리서 바라봤을 뿐 얼마나 중공군이 희생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9·28수복
9월이 다가오면서 유엔군이 제공권을 완전 장악했다. 9월 하순경부터 인천 앞바다에는 군함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서울과 인천 일대에 폭격이 강화되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드디어 9월 29일 유엔군이 보무도 당당하게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 주력부대는 서울을 향했지만 일부는 남하하며 인민군의 퇴각로를 광주~용인~춘천으로 유도했다. 국군이 진주하자 즉시 청년자치대가 조직되어 치안을 맡았고 행정력이 가동되면서 질서도 잡혀갔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아군은 파죽지세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여 불과 한 달 만에 압록강과 두만강에 태극기를 꽂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이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압록강·두만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인해전술로 맞선 중공군의 대공세와 매서운 추위에 국군과 유엔군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이렇게 참전하여 훗날 백두산을 절반이나 빼앗아갔다. 중공군에 밀려 하루에 수백 리씩 후퇴하면서 희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4후퇴
한 달이 못 되어 빼앗았던 북한 땅을 버리고 다시 한강 이남으로 밀려 내려왔다. 서울을 내준 날이 1월 4일이서 그때부터 1.4후퇴로 불렀다. 개전 초 허겁지겁 후퇴하던 때와는 달리 1·4후퇴 때는 그래도 정부가 체계적인 피란계획을 세웠다. 만 18세부터 30세까지는 현역으로, 40세까지는 군단위로 제2국민병을 편성해 단체로 피란을 시켰다. 이제 어린이와 노약자, 여자들만 집에 남았다. 피란민의 숫자는 날로 늘어나고 민심은 어수선해졌다. 우리 가족도 피란이 문제였다.
숙부는 인민군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당시 18세인 형을 피란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형은 비상금과 쌀 3말을 짊어지고 피란길에 나섰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 울부짖었다. 형은 “우리 3형제는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 했는데 혼자 떠나니 발길이 안 떨어지는구나. 희설이 네가 식구들과 집을 잘 돌보라”며 떠났다. 숙부는 형에게 “너를 또 만날지 못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모두 함께 있다가 폭격에 몰살하면 어쩔 것이냐. 집 걱정은 말고 너만은 살아서 우리 가문을 잇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음이 울렸다. 이미 전선이 코앞에 다다랐다는 신호였다. 숙부는 탈장환자로 움직이질 못했다. 그해는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강이 꽁꽁 얼어붙어 우마차와 자전거 심지어는 트럭까지도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야했다. 서울에서 안양~수원~오산~평택을 잇는 경부국도는 작전도로로 지정돼 피란민의 진입을 막았다. 대신 서울 인천에서 소사 뱀내장터~안산~남양~발안~안중~평택을 잇는 지방도를 열어놓았다. 바로 우리 고향마을 앞길이었다.
갈수록 피란민이 많아졌다. 대대병력이 마을 앞 벌판에 진을 치더니 하루 만에 철수하고 앞마을인 수암리에 최전방 검문소가 섰다. 이미 방어부대는 수원으로 옮긴 후였다. 북에서 내려온 난민들은 빈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면서 있는 쌀로 떡도 해먹고 아군의 후퇴 속도에 맞춰 비상식량까지 챙겨 떠났다. 도둑놈이 그릇에 대변을 보고 간다더니 그들이 그랬다. 과연 아군이 어디까지 후퇴를 할 것인지 불안했다. 중공군이 들어오면 여자는 욕 뵈고 남자는 모조리 찢어 죽인다는 등 별의별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노부모까지 모시고 오는 피란민도 많았는데 이들 사이에 적의 척후병이 끼어들었다. 수색대원들이 도로를 가로막고 달구지의 짐들을 마을 앞 들판에 내려놓게 하고 개별 휴대만 허용했다. 소달구지마저 버리고 떠나게 되니 노약자는 자식들 등에 업혀 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또 지났다. 큰길을 걸을 수 있는 것만도 행운이었다. 논두렁 밭두렁이 꽉 차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식구를 잃을세라 새끼줄로 매고 가는 가족들도 있었다. 아이를 잃고 자식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아낙도 있었다.
어떤 이는 잃은 손자손녀를 찾으러 되올라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피란민이 버린 짐꾸러미에서 귀중품을 거둬들이느라 혈안이 되기도 했다. 값비싼 재봉틀이며 공단이불, 라디오 등 없는 것 없이 다양했다. 나는 양식이며 중요한 물품을 땅에 파묻었다. 절박한 상황에 다다르니 모두 자기 살기에 급급했다. 마을 앞 도로변 고목 느티나무가 있는 서낭당에 아이가 버려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점점 늘어나더니 급기야 열 명이 넘었다. 어떤 엄마는 아이 품에 이름과 생일을 적어두고 떠났다.
또 다른 엄마는 마음에 걸렸던지 되돌아와 다시 안고 가기도 했다. 또 하루가 지났다. 날씨가 얼마나 추웠던지 버린 아이들은 밤새 얼어 죽었다. 생각다 못해 숙부를 제외한 우리 12식구는 수리산 깊은 곳 속달리 고모 댁으로 찾아갔다. 나는 지게에 쌀 다섯 말을 짊어졌다. 눈이 쌓인 바람개비 고개를 힘겹게 넘어서니 세찬 바람은 더욱 매서웠다. 차라리 집에서 가만히 있다 죽는 게 낫지 않았나 싶었다. 깊은 산골로 피란을 오니 고모는 오히려 피란을 떠나는 것 아닌가.
시동생이 국군으로 참전하고 있어 인민군에게 당할 보복이 두려워 안중리 친척집으로 간다고 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떠나는 고모나 우리나 할 말을 잊은 채 서로 눈물만 흘렸다. 중공군은 이미 수리산에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는 다음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숙모께 어린애같이 어제 왔다 오늘 돌아갈 피란을 미쳤다고 왔냐며 짜증을 냈다. 1951년 1월 7일로 기억된다. 부락은 이제부터 적지가 되어 미군의 공습이 시작됐다. 전투기의 사격은 전율적이어서 위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안산국민학교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아랫마을을 기총사격으로 휩쓸고 사라졌다. 사람이 죽고 집에 불이 났다. 영춘네 지붕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쫓아가 피란민과 합세해 불을 껐다. 찬영이네 집에 가니 피란 나온 소년이 어쩔 줄 모르고 안방을 가리키며 “어쩌면 좋아! 지금 우리 엄마가 저기 총탄을 맞고 돌아가셨어…”하며 실성한 사람같이 하늘을 쳐다보고 웃고 울지 않는가. 수창이네 집을 가보니 한 여인이 팔에 관통상을 입고 절규하고 있었다.
죽은 이가 셋, 부상을 입은 이가 넷인데 모두 피란민이었다. 낮이면 공습이 시도 때도 없었으나 우리 집은 윗마을 외딴 집인데다 마침 집 앞산 고깔봉 벌목을 해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피란 통로인 수인협궤철교 갯벌다리인 야목교에 미군기가 포격을 가했다. 난민에 끼어 침투하는 적군을 차단할 목적이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난민이 희생됐다. 이렇게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이 더 많았다. 다음날부터는 일출과 동시에 공습이 이어졌다. 사람이나 자동차의 이동을 원천봉쇄하려는 목적이었다.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온 식구가 이불을 덮어쓰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우리 집에 든 피란민만도 열둘이나 됐다.
저녁 땅거미가 질 무렵 동산 바람개비 고개에서 흰옷을 입은 군인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내려오고 있었다. 산 중턱까지 내려오다 망을 보더니 되올라갔다. 이날 밤부터는 등화관제에 들어갔다. 새벽 3시나 되었을까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어쩌면 좋으냐고 떨고만 있는데 남자인 나더러 나가 보라고 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누구십니까?”하며 대문을 열었다.
중공군 대여섯 명이 “쏼라 쏼라” 하며 들어와 총부리를 대고 살피더니 우리 모두를 안방으로 몰아넣고는 쌀을 꺼내다 밥을 지어 먹었다. 이웃집에도 조를 편성해서 같은 짓을 했다. 그들은 동이 트자 모두 뒷동산으로 올라가 숨었다. 밥을 하는 새 일부 병력은 뒷산에 은폐시설을 만들었다. 집집마다 한두 명씩 보초병이 남아 피란민을 감시했는데 생각보다는 야만적이지 않았다. 식량을 가져가면서 인수확인서도 발급해 주었다. 손짓, 발짓과 한자를 써 가면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비행기 폭격으로 식량배급을 못 받아 공출을 받는 것이니 해방되면 보상해 준다고 했다. 닭을 한 마리 달라고 해서 주었더니 북한 돈 200원을 내밀었다. 그들은 어두워지자 저녁을 차려 먹고는 어디론가 떠났다. 새벽에 또 한 팀이 몰려왔다. 오늘은 난민 아주머니에게 밥을 짓게 하더니 아주머니가 먼저 먹어 보라고 했다. 이날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 젊은이는 대학 2년생으로 징집됐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수리산을 출발하여 전진하는 중공군은 모두 우리 마을을 거쳐서 나는 이들을 모두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병력이 줄잡아 500명은 넘을 것 같았다. 그런데 후퇴할 때 다시 찾아온 병력은 절반 남짓했고 이들과 하룻밤씩 식사도 하고 함께 지내며 대화를 나눴는데 전혀 경계심이나 적대감을 느끼지 못했고 이웃집 형제와도 같이 아주 친절하고 예의가 발랐다. 듣자하니 모택동의 ‘전쟁 10훈’ 때문이란다. 중공군은 한 사람이 쓰러지면 열 사람으로, 열 사람이 쓰러지면 백 사람으로 대응하는 소위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소총은 일본식 장총으로 이마저 전원 휴대하지 못하고 주무기가 수류탄이었다.
16세부터 40세에 이르는 민간인들 같았다. 어떤 사람은 기침을 심하게 하는가 하면 대부분 촌스러운 사람들이어서 온후한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밥을 해먹는 솥을 짊어진 병사도 있었다. 직경 40cm나 되는 긴 자루에 콩을 볶아 넣고 양어깨에 멨다. 우리 집 콩으로 비상식량을 챙긴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인천 쪽으로 간다고 했다.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큰 건물이나 공공시설, 창고, 교량 을 모두 폭파했다. 한편 도보행진으로 침투한 적군은 북한산을 통해서 서울에 진입하여 관악산·수리산을 거점으로 수원과 인천 쪽을, 청계산을 거점으로 용인·이천 쪽을 공격했었다.
일주일 동안 통과한 인원만도 대대병력은 될 성싶었다. 이제 마을에는 그들에게 빼앗길 식량도 고갈되었다. 그들은 감춘 식량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다. 중공군으로부터 받은 공출증명서와 현찰 인민폐를 보이며 양식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루는 인민군 한 명이 불쑥 들이닥쳤다. “쌍간나 새끼들, 순반동이야! 우리 해방군이 왔는데 협조하지 않는 놈은 반역자란 말야! 쌀이 어디 있는지 순순히 대라우! 만일 안 댔다가 뒤져서 발각되면 바로 총살이야 총살, 알갔어?”하며 위협했다. 군량보급이 끊어져 현지 착취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중공군 지휘본부가 수리산 납다골에 있었고 중대본부가 수암리인 안산에 있다가 일주일 만에 철수하는데 한밤중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직사포를 끌고 가는 소리였다. 마차에 싣고 바람개비 고개를 넘어간 것이다. 사람이 맨몸으로 다니기도 힘든 곳을 어떻게 마차에 짐까지 싣고 넘어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개를 넘어간 수레의 흔적이며 넘어져 있는 포를 보고 놀랐다. 추위와 산악전에는 누구도 당할 수 없음을 실감했다. 우리는 적군 치하에서 꼭 한 달을 보냈는데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숨어 살아야 했다.
비행기 포격으로 모든 공공시설을 잃었다. 6·25남침 당시와는 차원이 달랐다. 포탄소리가 종종 들리더니 차차 그 소리가 가까워졌다. 처음 지나갔던 중공군이 다시 되돌아오는데 이때는 내려갈 때보다 반으로 준 듯싶고 사흘을 두고 밤마다 후퇴가 계속됐다. 낮에는 포탄이 수리산·수암봉 바로 우리 집 앞 쓰레봉에 떨어졌다. 융단폭격을 받기도 했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폭격이었다. 하루는 전투기 3대가 편대를 지어 날아들었다. 정찰기 신호에 따라 사격이 시작됐다.
앞 전투기가 쓰레봉에 휘발유통을 투하하자 뒤따라오던 비행기에서 기총사격과 함께 포탄 3발을 쐈다. 굉음을 발하며 화염이 온 산을 덮었다. 이는 불과 20~30초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쓰레봉에는 중공군이 없었다. 수리산 능선 위에 엄호를 파고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포사격과 공중포격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내일이면 아군이 입성할 것 같아 우리는 밤새워 태극기를 그려 환영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아군 지프차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마을 입구까지 와서 잠시 망을 보고는 돌아갔다.
한편 바람개비 고개를 넘어 내려오던 중공군이 이 광경을 보더니 급한 발길로 되넘어갔다. 밤새도록 앞마을 부곡리·벌터 뜰에는 계속 조명탄이 터져 천지가 대낮같이 밝은데 우리 마을은 암흑이었다. 이날 아군은 중공군의 직사포 공격을 받았다. 건너 숲이 울창한 양상리와 장하리 뒤 마산에서 쏘는 직사포였다. 다음날 점심 때 앞마을을 쳐다보니 온통 불바다였다. 어젯밤 중공군의 반격을 받은 유엔군이 마을 사람을 모두 집에서 나오게 하고 3개 마을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
중공군은 마산 깊숙이 숨어 있었다. 우리 마을 앞산에 비행기 폭격과 함포 사격이 일주일을 두고 계속됐다. 마을에는 터키군이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했다. 이날은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었다. 이렇게 나는 15살 설을 마을전투로 맞았다. 이제부터 전투기의 엄호 아래 중공군 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수리산 탈환전투가 시작됐다.
터키군은 붉은색 휘장을 짊어지고 마을 앞산을 진격해 갔다. 이에 맞추어 공중포격도 따랐다. 아군 수백 명이 기관총을 발사하면 이쪽저쪽 계곡에서 ‘딱쿵 딱쿵’으로 응사했다.
전의를 상실해 공격이 아니라 방어일 뿐이었다. 실제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했지만 200~ 300m씩 떨어진 능선에 설치한 호 속에서 엄호 사격만 하고 있었다. 전투를 중단하고 들것에 부상병을 메고 내려가는데, 얼굴을 가린 것으로 보아 전사한 듯했다. 해상포격과 비행사격에 보병의 입체공격으로 중공군은 저항력을 상실해 갔다. 아군은 안산~안양~서울, 안산~수원/인천으로 진격하며 수리산에서 대대병력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일부 포로를 제외하고는 퇴각한 중공군은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 마을은 중공군 치하에 든 지 한 달여 만에 터키군에 의해 수복됐다. 며칠 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수리산에 올라갔다. 방공호 밑에 쭈그리고 죽은 자, 배가 터져 죽은 자 등 사방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납다골 마을도 둘러봤다. 돌담 틈바구니, 계곡, 능선, 집 마루 등에 널린 게 시체들이었다. 대부분 폭탄, 포격, 비행기 기관총에 희생된 자들이었다. 한 달이 지나자 날씨가 따뜻해졌다. 여기저기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가운데 부락민들이 모두 나서 까막까치와 여우들이 물어뜯다 만 시체를 묻기 시작했다.
시체는 놓인 대로 흙을 긁어모아 흉한 꼴이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두 다 어느 집 귀한 자식들이련만 누구를 위해 이곳에 와서 무참히 죽어야 했던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더우면 시원한 바람과 이 떡갈나무가 돌볼 것이요, 외로울 때면 산새들이 와서 노래 불러줄 것이오. 보소 형님네요, 나도 이산 밑에 살고 있으니 이웃하면 형 아우가 아니겠소. 외롭고 심심하거들랑 주저 말고 꿈속에서라도 찾아 주소. 그래서 어리고 막막한 이놈을 친동생같이 돌봐 주소.'
잠시 앉아 앞을 보니 확 트인 바다가 답답한 가슴을 풀어 준다. 아까운 청춘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가버린 아들들이여, 저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고 편히 잠드소서. 내 가족같이 정성스레 한 삽 두 삽 흙을 떠서 시체를 덮어 나갔다. 다행히도 울창했던 쓰레봉~수리산 자락 뒷동산이 전쟁 직전 해에 벌목했던 덕분에 무사했고 숙부는 지병으로 제2국민병으로 차출되지 않아 나와 함께 집에서 전쟁을 맞았다. 격전장에서 우리가 무사한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자 구원이었다. 벌채목은 뒷동산에 방치되었다가 국군 전사자 6명의 두 차례에 걸친 화장목으로 쓰였다.
수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중공군이 몰살한 참상을 목격했는데 우리 마을 전투에서만 유엔군이 두 명이나 전사했다. 앞산 쓰레봉은 전투기의 포격으로 화염에 휩싸이고 낙하산 전투병이 산속에 낙하하는 광경도 목격했다. 하지만 선영 뒷산인 마산에서의 무자비했던 함포와 공중폭격의 전황은 멀리 집에서 바라봤을 뿐 얼마나 중공군이 희생되었는지 모른다. 이곳 중공군 진지로 인해 벌말과 우리 진주강씨 500년 세거지 윗버대·아랫버대양상동 세 마을이 터키군에 의해 전소됐다.
[출전] 강희설 지음 「내가 겪은 수리산전투」 -글은 다음 회로 더 이어집니다.
강희설
1936 경기 시흥 출생 / 1961~1971 한국전력공사 근무 / 1983~1991 대림산업 포항/광양제철소 건설사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