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폭설과 시각장애인의 겨울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전원생활 10년 만에 이렇게 많은 눈을 본 적이 없다. 창밖에서는 차들이 눈을 밟으며 지나가는 둔탁한 소리,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그리고 누군가 삽질하며 눈을 치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려온다. 눈이 오면 세상이 더욱 고요해진다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소리들이 변하면서 세상이 낯설어진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겨울은 내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계절이다. 평소 익숙하던 길도 눈이 쌓이면 전혀 다른 곳이 되어버린다.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보아도 감촉이 다르다. 보도블록의 촉감도, 길가의 경사도, 사람들의 발소리마저 달라진다. 눈은 소리를 머금어 버려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워지고, 발밑은 미끄러워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어제 집 앞 골목을 나서는데 낯선 감촉이 발끝에 전해졌다. 평소 단단해야 할 길이 푹신하고 불안정했다. 지팡이를 몇 번 더 휘둘러 보니 그제야 알았다. 눈이 녹았다 얼어붙으면서 생긴 얼음층이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 발 잘못 내디뎠다간 그대로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이럴 때면 더 이상 혼자 외출할 수 없다.
문득 든 생각. 나보다 더 연로한 이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 혼자 사는 노인들은 이 폭설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몇 해 전, 홀로 살던 장애인이 얼어붙은 집에서 동사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수도관이 얼어 물이 넘쳐흐르고, 방 안이 냉기로 가득 찼다고 했다. 그때 깨달았다. 눈은 그저 하얗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이웃들이 안부를 물어온다. 골목길을 함께 걸어주고, 팔을 잡아주며, 눈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음을 맞춰준다. 마치 폭설이 내린 마을에서 주민들이 서로 길을 내주고 챙겨주듯이.
겨울이 아무리 혹독해도, 사람들의 온기가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이겨낼 수 있다. 차가운 눈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다 보면, 머지않아 따뜻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과 함께, 얼어붙은 겨울을 지나 봄을 향해 걸어간다.
2025.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