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토머스 머튼, 모순의 바다
은둔은 모든 가면과 위선을 벗기는 일이다. 은둔은 절대로 허위를 참아 주지 않는다.
<The Seven Storey Mountain> <Elected Silence>
직관은 진흙투성이 지성이고, 신비주의는 하나의 도피처이다. 트라피스트의 삶
성 제임스-선행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
겟세마네 수도‘원 -요나의 입장-카말돌리스로 가고 싶어 함(은둔)
우리는 타락하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보다 복잡하게 세상에 개입한다. 우리가 처한 위험은 훨씬 더 절망적이다. 아마 우리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을 것이다.
일과 놀이는 사람들이 하루 24시간 동안 결코 본연의 모습으로 남지 못하도록 한다.
은둔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은 고립되어 있으며 정신세계가 고상하다는 환상을 갖도록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비우라는 부름을 받는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라는 점에서 모두 은자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한 특별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신화와 허구들을 조용히, 그리고 겸손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의 신호가 될 수 있다.
우리 인간이 허구, 특히 정치 및 선동적인 날조에 개입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과 신에 절망했다는 사실을 무언중에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침묵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행해지기 전과 후의 침묵 속에서 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면 말로는 절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이든 고독 없이는 성숙이 이루어질 수 없다. 나의 깊은 자아는 결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다.
은둔은 내면의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
평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사막으로 달아났다.
사막으로 들어 간 이유가 비범해 지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을 그래도 짊어지고 사막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고독을 추구하고 세상을 버리는 이유
침묵과 사방의 벽, 이 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것은 경계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벽하게 마음을 풀어 놓고 감수성을 열어 놓은 상태가 된다. 침묵과 사방의 벽은 온몸이 살갗으로 진리를 듣고 존재의 모든 부분으로 진리를 흡수하도록 한다.
황혼녘에 촛불을 켰다. 드디어 방랑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여정을 끝냈다는 홀가분함이 밀려온다. 내 생애 처음으로 진정으로 방랑과 탐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은둔의 삶은 오직 내면의 경험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을 뿐, 외적 환경에 의해서는 절대로 평가 받을 수 없다.
은자적 삶의 극적 효과를 드러내는 장식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빗소리는 나를 거듭 일깨운다. 이 세상은 엔지니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리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점을.
개인의 자유란 자기도취에 빠져 홀로 살기 위해 단순히 사회적 금제와 의무를 벗어 던지는 것으로는 절대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은 결국 진정한 자아와 그 자아가 자유를 추구하는 능력을 부패시킨다.
인간이란 그 자신으로 남기를 지나치게 고집하면 하나의 환영을 인격화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나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있지요. 그래서 은자는 레지스탕스로도 불리죠.
오늘날 은자는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삶의 평범한 가치를 깨닫고 경험하기 위해 존재한다.
명상가는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은 문제에 관여할 것이다. 하지만 분석하지 않고 이들 문제의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뿌리에 닿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은둔할 수 있는 능력-깊은 자아의 회복 그리고 뒤틀려 버린 진정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이 세사의 반응을 관찰하고, 이 세상에 대해 말하는 ‘나’는 신과 결합되어 있는 진정한 ‘나’는 아니다.
기껏해야 대부분이 죽을 때까지 발견하지 못하는 그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자아’의 옷이요 가면이요 변장일 뿐이다.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결코 끝이 없을 투쟁을 벌이느라 서로 반목하는 불온한 도시 -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도피
진정한 단 하나의 기쁨은 오리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본질과 우리 마음속에 살며 노래하는 생명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 모두는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남을 때 신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의 관념적인 형태와 일치할 때가 아니라 각각 타고난 본래의 모습으로 남을 때 완전해진다.
달리는 사슴에게서는 영이 보인다.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신성하고 신비스런 그 ‘사슴다움’말이다.-세상의 실체
은자들의 전통-이집트 성 안토니, 팔라마스의 성 그레고리-이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통찰을 얻은 뒤 그것을 사람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