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창가에서 잡은 이번 추석 보름달) 가족사랑 추석 청초 이용분 이제 올 추석은 지났다. 매 집안 행사 때면 어린 손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찾아와야 되는 막내아들도 전주 제집에 돌아가 안정을 찾았다. 추석이나 명절 때면 멀리서 길을 떠나는 이 아들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큰 아들네는 맞벌이라 추석을 지내려면 집안 청소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한다. 필요한 제사물건들 재료를 장만해야 되는 건 큰 아들 몫이다. 그를 가지고 만들고 지지고 하는 건 큰 며느리 몫이다. 이게 다 힘든 일이다. 내가 해본 적이 있어서 나는 잘 안다. “형님, 전을 지지는 건 제가 올라가서 함께 만들어요”하고 작은 며느리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신통하다. 말 한마디에 천량 빚을 갚는다던가. 멀리서 오다보니 매번 전을 큰아들 내외가 지져놓고 준비가 다 된 후에야 뒤늦게 도착을 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우리가 화곡동 큰아들 집으로 가는 교통편은 막내가 분당에 들러 우리를 픽엎해서 데려 가기로 되어 있다. 전주에서 바로 형집에 가면 편하겠지만 이때가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도 되고 모든 게 힘든 맏이가 우리를 데리러 오는 수고를 면케 해주니 형을 돕는 셈이다. 역 상경을 하는 길은 비교적 잘 빠진다. 아버지는 운전을 하는 막내아들 옆자리에 앉아 묵묵 말이 없다. 원래 그는 말이 별로 없다. “여보 당신 기분이 어때요?^^ 오다가다 그의 건재를 확인하려 뒷자리에 앉은 내가 말을 건넨다. “아주 좋아요. 나는 지금 관광을 하는 기분이야” 그는 요 근래 삼년간 병 치례를 하는 중이라 나는 항상 신경이 쓰인다.
뒤 자리에 나 손녀 손자 그 다음에 아이 어미가 함께 앉았다. 반년사이에 아이들은 새둥지 속 새끼 새들 모냥 자리가 비좁게 부쩍 컸다. 서로 팔이 겹치니 불편한 탓인지 티격태격 자리 다툼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바로 밑 남동생과 다툼을 많이 했다. 그 동생은 장난이 심하고 짓궂어서 맨날 나도 덤으로 함께 어머니께 혼이 났다. 이렇게 터울이 밭으면 다투게 마련이다. 오랜만에 올림픽 대로를 달리며 보는 한강은 여전히 유유히 흘러간다. 강변을 달리는 차들도 하행선과는 달리 상행선은 여유롭다. 화곡동으로 달려 보는 길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생각해보니 작년 추석에는 남편이 위중하여 제대로 추석을 지내지 못했다. 강서구청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 풍경은 조금식은 변했지만 여전히 낯이 익은 길이다. 생각하면 삼사십 여년을 살며 보낸 고향 길 같은 정든 곳이다.
화곡동 집에 도착했다. 잘 해야 일 년에 두어 번 오는 아들집이다. 우리가 집을 산지가 사십 여년이 흘렀으니 요즘으로 치면 아주 고옥이다. 맨 처음 이집에 이사 올 때와 달리 아이들이 커지면서 집이 비좁아졌다. 그후 이십여 년 전에 새로 집을 짓듯이 크게 증축을 하여 평수기 넓어지고 지붕과 집 안팍을 모두 새로 수리 하였었다. 그간의 세월에 못 이겨 지붕이 새고 여기 저기 손 볼 곳이 많아졌다.
우선 올 장마가 지기 전에 지붕에 방수공사를 한 다음 집안이 새는 곳은 없단다. \공사비용이 수월찮게 들었지만 우리가 이사 가기 전에 알았던 수리 업자를 찾아서 맡겼 더니 지성껏 잘 해 주었다.잘 알고 믿고 친한 사람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큰 자산이다. 차 한잔을 놓고 식탁앞에 앉아서 밤이 이슥하도록 두 아들과 어릴적 살아 온 지난 이야기꽃을 피우며 마음은 마냥 즐겁다. 피곤한 며느리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나 빨리 흐르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이제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손녀가 얼른 모든 걸 보여 주고픈 마음에 박자는 너무 빠르게 어째 좀 시끄럽다 싶게 피아노를 두드려대지만 그를 성가시러워 할, 또한 말릴 사람도 없다. 다만 이른 아침 차례를 지내려니 마지 못해 손자들을 달래서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 며느리들은 차례 상을 차리기 위해 바쁘다. 시대적 상항에 맞춰 간략하게 차리도록 의논을 하였지만 골고루 준비하여 그만하면 잘 차렸다. 지난 해만 해도 몸이 편찮은 남편으로 해서 못 지낸 차례를 두 아들과 손자 손녀를 데리고 잘 지냈다. 남편의 건강이 그만한 것에 조상의 음덕으로 치하를 올렸다.
올해는 일본의 후꾸시마 원전사태로 생선전이 빠졌다. 동구랑 땡은 만들었지만 어인 일인지 야채전이 보이지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고추전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진 것에 대해 생각은 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다음 번에는 차질이 없도록 타일러야지. 아들이 미처 재료를 못샀던지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모든 걸 마련해야 하는 맏이 자리가 힘이 든다는 걸 이해 하기 때문이다. 온 가족들이 모든 음식이 맛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맛이 있기도 하지만 수고를 한 며느리들에 대한 진심어린 위로의 말이다.
이번 가을에는 대대적인 정원 정리를 하게 되 있는 집 안 팍을 돌아보기 위해 집밖으로 나갔다. 길 건너쪽 우리 대문 맞은편 오랜 이웃인 우리 나이 년 배의 아주머니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어제 저녁 늦은 밤에 손수 빚은 송편을 수북하게 한 접시 보내주어 모두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렇잖아도 명절 때면 무어라도 자그마한 선물을 해야 되겠는데 마음이 켜는 이웃이다. 아들에게 “무어라도 좀 선물을 해야 되지 않겠니 하려던 참인데...” 말을 하니 벌써 제가 먼저 사온 송편을 선물 했다나... 평소에도 쥬스니 때때로 작은 선물로 고마움을 표한다고 한다.
“참 잘했다. 네가 엄마 마음을 혜아리는구나” 맞벌이라 항상 집을 비우게 되는 우리아들네 집을 자기네 집 돌보듯 택배가 오면 받아 챙겨 주고 겨울이면 눈도 쓸어주고... 고마운 이웃이다. 주변 사방 모두 집들을 헐고 다세대를 지어 파니 사람들 얼굴도 미쳐 알기 전 이사를 오고 가니 유일하게 오래 살아 해묵은 정을 나누는 사이로 되었다.
그들은 오래 전 큰 아들이 다니던 컴퓨터회사일본지점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를 않고 눌러 앉아 버리고 작은 아들은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고 있단다. 오후나 되어야 시집간 딸이 찾아 와서 그나마 쓸쓸함을 면케 해 준단다. 그 부인은 젊어서 두부만들어 팔기, 떡 장사, 시장 길거리 노점상, 노력 봉사등 평생 안해 본것이 없이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의 남편은 평생 백수로 지나다가 늙으막 몇년 아파트 경비를 하는듯 했다. 이제는 그도 그만 두고 파지를 주어 팔더니 그도 그만 둔 조금 어려운 이웃이다.
"아드님이 어쩌면 만날때 마다 인사가 깍듯 한지 민망 할 때가 많아요."한다. "무슨 그런 말씀을...아드님 보듯이 그냥 보세요.^^ 나는 멀리 있어 매일 보지도 못하잖아요." 라고 했다. 되 돌려주는 송편 접시에 우리는 다시 과일 몇개를 담아 돌려주었다.
목동 시댁에서 차례를 지낸 딸네 가족들이 도착했다. 새로운 식구의 물갈이다. 점심 무렵 이다. 딸네들과는 스치듯 별 이야기도 못 나누고 부랴부랴 점심을 대충 먹고 대천 처갓집을 향해 떠나는 막내아들의 차를 타고 돌아온다. 매해 겪는 일이지만 우리가 막내의 차를 타고 돌아 와야 큰 아들이 편하기 때문이다.
큰아들은 오랜만에 오셨는 데 하루 밤을 더 자고 내일 제차로 모셔다 주겠다는 걸 손사례를 하였다. 알아 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게 우리 나름대로의 사랑 방법이다. 우리를 분당집에 내려놓고 손자 손녀를 태운 막내아들은 길을 떠났다.
추석이나 명절에 이렇게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이 만나고 함께 먹을 음식을 장만하려면 너무나 힘이 드니 세상 인심은 이를 점차 경원하는 추세로 몰고 간다. 세상살기가 편해지고 점점 개인주의에 치우쳐진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누군가가 이런 희생을 감내 하지 않는다면 사람 평생을 두고 서로 만날 일도 정을 나눌 기회도 없을것이다. 그는 모두가 바라는 바도 아닐 것이니 어떻든 추석명절은 꼭 지켜나가야 될 미풍양속임에 틀림없다.
올해도 남편이 무사하게 병석을 떨쳐 내고 일어나서 우리 아이들과 행복하고 다정한 추석을 보내게 된 것에 기쁨을 금치 못하겠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사람의 행복은 이 세상 무엇보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함과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가정에 있다는 단순한 진리에 통감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2013.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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