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자연 철학의 시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놀라움과 경이로움(taumazein)을 느꼈으며 자연과 인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런 감정은 먼저 신들의 활동으로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는 신화를 만들어 냈다. 신과 인간이 분화되지 않던 신화 시대에 신인동형동성설(anthropomorphism)과 물활론(animism, hylozoism)은 모든 설명의 중심 태도였다.
hylozoism : hyle(물질, 소재) + zoe(생명)
신화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이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계기는 자연을 설명하는 데 이성(logos)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mythos : myo(닫혀진 상태, 분열 이전의 상태, 어두운 상태)
logos : logein (말하다, 셈하다, 질서지우다)
1.1. Miletos학파 (이오니아 지방에서 활동함)
1.1.1. Thales(624-546 B.C. Circa)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작을 이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데 탈레스를 맨 처음의 자리에 놓고 있다. 그 이유는 탈레스가 이성(logos)에 따라 자연에 대한 탐구를 처음으로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디오게네스는 이 탈레스를 그리스의 7 현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현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탈레스보다 약 150년 후배인 헤로도토스도 탈레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데 그에 의하면, 일식을 예언했으며, 실천적인 정치가로서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이오니아 도시 국가들의 연합을 주창하기도 했다. 피라미드를 측량할 정도의 기하학적 지식도 소유하고 있었다.
탈레스의 주요 철학 사상은 우주의 arche를 물(water)로 보았다는 점에 있다. 실재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 위에서 가장 단순한 원리를 가지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로 탈레스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단순한 원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수행하는 모든 이론적인 작업의 공통된 태도이다.
arche : starting-point, beginning, original cause (Homor가 사용)
: first piniciple (Aristoteles)
: primary substance (Anaximandros)
: original state out of which the many-fold world has developed
: the permament ground of its being, substratum
: cause of motion and change
탈레스가 물을 arche로 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 바빌로니아, 이집트 같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나라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가. 문명의 발생지가 주로 홍수가 많고 강이 많은 나라들이라는 사실은 이를 중명해준다. 이오니아도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인 항구 도시국가였다. 자연적인 환경이 탈레스에게 물을 우주의 근원으로 보게 만들었을까
2) 실험적 관찰의 결과가 아닌가. 땅에서도 나무들에서도 그리고 사람의 몸에서도 물이 발견되는 것을 본 그는 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 않았을까.
물활론의 흔적: 물은 생명력을 준다. 바다은 원인도 없고 정지도 없으나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운동과 변화의 힘을 arche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본 것은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전부의 공통된 견해였다. All things are full of gods(탈레스가 한 말이라고 플라톤이 기록한 것) Soul is mingled in the world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 이런 밀레토스 학파의 물활론은 후에 유물론으로 변화되었다.
1.1.2. Anaximandros (610-545 B.C. Circa)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들, on nature, Description of the Earth, The Fixed stars 등을 보면 그의 관심이 주로 자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본 우주의 arche는 to apeiron(무한정자, the boundless)였다. 자연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를 구체적인 사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그는 보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물은 한계가 있고 한계가 있는 한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apeiron : peras (limit, boudary)의 없음(a)
: 시간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불멸성(immortality)을 포함한다.
: 경계의 불확정성(indeterminacy) 해변에서 뭍과 바다의 경계처럼
: 양적인 무한성(infinity), 고갈되지 않는 것.
: 원형으로 묘사될 수 있다. 경계가 없음은 시작과 끝이 없음을 의미하며 이런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원형 뿐이다.
사물들은 생성과 소멸의 반복 운동을 한다. 소멸이란 무(nothingness)로의 환원이 아니라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반대(opposite)는 속성(attribute)이 아니라 사물(thing)이다. cold - hot, wet - dry의 반대 관계는 속성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진술로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 Everything is an origin 이거나 Everything has an origin 이거나 이다. 전자는 거짓된 명제이다. The unlimited(apeiron) has an origin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이것도 거짓 명제이다. 왜냐하면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계지어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한정자는 다른 모든 것들의 기원이 되지만 그 자체로 다른 기원을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무한정자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1) 존재자들의 원인이 된다. 2) 존재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moving force, directive power)이 내재되어 있어 다른 것들을 생성, 소멸하게 만든다.
arche에 대한 설명이 물에서 무한정자로 이행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록 무한정자도 물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추상화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구체적인 한 사물에서 보다 추상적인 무한정자로의 이행은 철학적인 진보라고 볼 수 있다.
1.1.3. Anaximenes (6c. akoume=40세의 전성기)
무한정자의 성질에 맞는 사물을 찾았고 그것을 '공기'라고 보았다. 모든 존재자들이 환원되어 돌아가야 할 시원으로서 공기가 가장 적절하다고 간주. 이런 Anaximenes의 설명은 과학적으로는 진보를 한 것처럼 보이나 철학적으로는 후퇴를 의미한다. 추상에서 다시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하고 있다. 아낙스메네스의 관심은 arche로부터 어떻게 모든 사물들이 변화 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가에 대한 물음에 있었다. 농후와 희박의 변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기를 arche로 간주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신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영혼도 공기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바람은 공기의 활동이고 바람(pneuma)은 숨, 영혼(psyche), 생명과도 연관되어 있다. 단순히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물리적인 공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 Pythagoras (582? - 500? B.C.)
소아시아의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로 여행을 하였으며 수학과 신비주의를 배우게 된다. 그의 주요 활동 무대는 크로톤(Kroton)이었으며, 여기서 학파를 이루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피타고라스 자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그의 학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과 혼돈되어 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와 학파의 사상을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피타고라스 자신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두 가지 사상은 분명하게 지적될 수 있다. 하나는 수(number)에 대한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영혼의 구원과 순결성의 유지에 대한 이론이었다.
세 종류의 사람: 올림픽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을 세 부류로 구분하고 있다. 1)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 2) 장사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 3) 경기를 관조하는 사람들이다. 철학자는 관조(觀照)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수(數) 사상: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에서 불변의 것을 찾으려는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노력은 공통적이었다. 감각적 대상들을 추상화하여 남는 것은 오직 수적인 배열들 뿐이라고 피타고라스는 발견하였다. 따라서 우주와 인간, 사회를 모두 수의 조화와 질서 그리고 그 반대 작용의 결과로 설명하고 있다. 질서(cosmos)와 혼돈(chaos)는 수적인 조화와 부조화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건강과 질병, 평화와 정치적 혼란 등은 모두 조화와 질서의 관계로부터 나온 결과들이다.
1은 점, 2는 선, 3은 평면, 4는 입체를 의미하는 숫자였다. 그리고 1, 2, 3, 4의 합은 10으로서 이는 완전수를 의미했다.(테트락튀스 tetraktys) 삼각형의 구조로 이루어진 수의 배열은 조화와 질서 그리고 완전성을 상징으로 나타낸다. 또한 그리스 현악기의 줄이 4개로 이루어진 것은 음악에서 화성학 이론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기본수 1은 모든 수의 기본 값이며 우주의 근원인 제우스 신을 상징하기도 했다.
영혼 윤회론: 음악의 신을 믿었던 오르페우스 종교의 교설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모든 활동에는 영혼이라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영혼은 모든 사물들 속에 들어 있으며 사라지지 않고(불멸성) 영원히 윤회한다고 믿었다. 이런 피타고라스의 이론은 동양 불교의 영혼 윤회설과 거의 같은 이론이다. 영혼의 윤회는 동시에 구원의 필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이 종교적인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육체(soma)와 영혼(psyche)의 결합과 분리는 무한히 반복되나 궁극적으로는 영혼이 더이상 육체의 감옥에 갇히지 않는 것이 최선의 목적이었다. 유한한 육체와 무한한 영혼의 이질성은 증명이 필요치 않다.
음악과 수학: 순수 학문으로서의 수학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은 피타고라스 학파 사람들에게는 영혼 구원의 두 가지 적극적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영혼의 정화(katharsis)가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관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수학과 음악 교육이 반드시 요청된다. 음악은 오락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영혼의 도덕성을 가르치는 교육적 기능이 더 우선적이라고 피타고라스 사람들은 믿었다. 음악은 인간과 자연(우주)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교향곡)이며 우주의 조화와 질서는 음악에서의 화음처럼 수적인 비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1.3. Herakleitos (534-475 B.C.)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에페소스 출신으로 페르시아 문화에 대한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수께끼를 이야기 하는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그의 진술들은 비유와 상징성이 많은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배중율을 범하는 비논리적인 철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가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를 옹호할 수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 그는 변화와 운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변증법을 사용했고 이 변증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연역 논리의 황금율인 동일율과 모순율 그리고 배중율을 부정하는 변증 논리의 특징에 대해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다른 자연철학자들과는 달리 우주의 본질로서 아르케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만물이 변한다"(panta rhei)는 유명한 명제를 말한다. "누구도 동일한 강물에 두 번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단편 91) 불변의 실체로서 아르케를 말하지 않고 대신 현상의 실재 모습을 변화와 운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자연(physis)은 애초부터 있어왔으며 창조와 소멸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스 신들도 자연의 창조와는 무관한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히브리 사람들의 사상인 우주 창조론, 즉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그리스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자연은 처음부터 그냥 있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연은 마치 불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불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불이 아니라 신성함의 상징이며 영원이 꺼지지 않고 활동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생성, 변화, 운동의 힘을 상징하는 불을 가지고 우주, 자연의 실제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로고스(logos) :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로고스(logos)의 개념을 도입하여 자연, 즉 physis를 설명하고 있다. 로고스의 어원은 동사 lego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모으다, 셈하다, 열거하다. 말하다 등의 뜻이 들어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수집, 계산, 법칙, 질서, 말, 비율, 등의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변화하는 자연의 법칙적 질서로 이해하고 있다. 존재자들의 집합인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이며, 보편적인 성질을 지닌 규칙으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의 변화와 운동은 대립과 갈등 그리고 무질서처럼 보이지만 로고스에 의해 조화와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 현상적인 생성, 소멸 뒤에 숨어 있는 로고스의 질서와 통일, 조화의 힘을 그는 강조하고자 했다. 자연의 질서 부여자인 로고스는 인간의 정신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동일한 법칙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특징은 보편성과 내재성 그리고 공통성이라는 세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자연의 사물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로서의 보편성과 그 원리가 사물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내재적 존재 원리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누구나 로고스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대립과 투쟁 그리고 통일: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만물은 투쟁에 의해서 생성, 소멸의 변화 과정을 겪는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다." 투쟁은 대립적인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냉과 온, 큼과 작음, 위와 아래, 밤과 낮, 등 모든 것을 대립적 관계로 파악한 그는 이들 사이의 관계 변화를 통해 자연을 설명하려고 했다. 변화의 운동 방향은 두 가지가 있다. 상향 운동과 하향 운동이 그것이다. 상향운동: 흙 →물 →불, 하향운동: 불→물 →흙
이 두 방향으로의 운동은 순환 운동이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다. 대립자들은 로고스를 통해 통일성을 가진다.
가치 상대주의자인가?: 대립자들은 단순히 대립자들로 보지 않고 통일성을 지향하고 있는 대립자로 보고 있다. 대립자는 관점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순환운동의 논리는 대립자들 사이의 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보게 만든다. "당나귀는 금보다 여물을 더 좋아한다."(단편 9) "돼지들은 깨끗한 물보다 진창을 더 좋아한다."(단편 13) 이런 진술들은 莊子의 逍遙有편에 나오는 麗姬의 이야기와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1.4. Elea학파
1.4.1. Parmenides
그의 출생과 죽음에 관한 정확한 기록 년도는 없으나 플라톤의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그가 65세 정도의 나이에 아테네를 방문하여 20세의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것으로 되어있다. 이 때가 450년 B.C. 였으므로 역산하면 대략 515년 B.C.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존재(eon, einai):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적 관심은 '있음', '존재'에 집중되어 있다. 있음에 관한 탐구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그의 명제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진술이다. 비존재는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있음' 또는 '이다'의 문제인데, 그러면 '있음'과 '이다'의 주어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생각', '사유'를 그 주어의 자리에 놓았다. "생각할 수 있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동일하다."(단편 3)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을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17세기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말함으로써 사유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밝힌 것과 비교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또 '존재가 사유를 구속한다'는 마르크스의 진술과도 비교해 볼 만하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은 최종적인 개념이며 현실적이고 가사적인 존재자들의 존재 근거를 제공하는 사유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존철학자들이 주요하게 간주한 존재 개념에 대해 기초를 제공한 이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의 지적대로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이 존재 망각의 역사였다'면 다시 새로운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복원하는 일에서 찾아질 것이다.
존재의 특성: 존재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최종적인 것으로 본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적 구도로 자연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존재만이 존재한다는 동일성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논리적 모순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존재의 특성들이 주장되어야 한다.
1) 不生 不滅: 존재는 영원하다. 따라서 낳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 논리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생성과 소멸은 대립, 반대 개념이다. 생성을 가정하는 것은 '없음(비존재)'으로부터의 기원을 가지게 되고 소멸은 다시 없음으로의 이행을 가정한다.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모순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존재의 근거를 부정해야 한다. 존재의 시간적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다.
2) 不可分: 존재는 분리될 수 없다. 하나 뿐인 존재가 분리된다는 것은 나누어진 존재들 사이에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데, 빈 공간은 없음이고 없음은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분리는 불가능하다. 존재의 공간적 동일성 역시 확보된다.
3) 不動: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다. 운동은 공간을 필요로 하나 공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이 불가능하다.
1.4.2. Zenon
파르메니데스의 제자로서 스승의 '존재' 개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주목하였다. 그의 증명 방법은 '부정의 변증법'이라 불리운다. 왜냐하면 제논은 존재의 유일성, 부동성, 영원 불멸성을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雜多와 다양성을 반박,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상대방 주장 안에 모순된 결론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주장의 근거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이다. 제논은 존재의 유일성과 부동성을 부인하고 잡다를 주장하는 다원론자를 공격하기 위해 다원론의 근거가 모순에 빠짐을 보여주고 있다. 논증: 만약 잡다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있을 수 있는 만큼 많이 존재한다. 그 수보다 더 많거나 적을 수 없이 존재한다. 잡다의 수는 유한하다. 그러나 동시에 잡다가 존재한다면 잡다는 분리가 가능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분리 가능성은 무한한 분활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 무한 분할과 분리는 잡다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잡다는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순을 일으킨다. 따라서 잡다는 없다.
제논의 역설(paradox): 운동을 부정하여 존재의 부동성을 증명하기 위해 제논이 사용한 논증 방식들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1) 경주장의 역설;
A e d c B
--------------------------------------------------
경주장의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의 운동은 불가능하다.
A와 B 지점의 중간 c를 통과해야 하고 다시 d, e, f,.....를 통과해야 한다.
중간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무한한 것을 통과하여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2)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
A B B1 B2 B3
------------------------------------------------------
아킬레스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
아킬레스는 거북이의 출발점 B로 가는 동안 거북이는 B1으로 이동할 것이고 아킬레스가 B1으로 가는 동안 거북이는 B2로 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따라서 영원히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 잡을 수 없다.
3) 날으는 화살의 역설;
날으는 화살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정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시간은 현재 뿐이고 현재 점유하고 있는 공간만이 있을 뿐 비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날으는 화살은 정지되어 있다.
1.5. 다원론자들
1.5.1. Empedocles of Akragas
새로운 철학의 제안자라기 보다는 선철인들의 사상을 결합, 화해시키려고 했던 철학자였다. 특히 Parmenides와 Herakleitos의 이론을 절충, 화해를 시도 했던 절충주의자였다.
from Parmenides : Being의 물질적 이해 (구형), Being의 불생, 불멸, 불
가분을 받아들임.
from Herakleitos : change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변화와 운동의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Parmenides의 원리, 즉 존재가 물질적인 것이며 결코 파괴되거나 有에서 非有, 비유에서 유로의 변화는 아니다라는 점을 절충. 즉 사물들은 존재를 시작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을 멈추기도 하지만 이 사물들은 물질적인 요소(material particles)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monism을 부인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가지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4가지 elements로 설명함.
4가지 elements : earth, air, water, fire ...rhizomata(뿌리)
: unchangeable, indestructable (Parmenides적 요소)
: inter-mingle을 통해 사물들이 존재
: 사물들이 존재를 멈추는 것은 elements의 분리일 뿐
: 사물들이 변화, 운동하여 존재에서 비존재 상태로 되는
것처럼 보이나(Herakleitos적 요소), elements 자체는
불변한다.
Ionian 철학자들은 process of nature, world process에 대해서 物活論,
animism으로 설명하나 이는 불충분하고 신화적이고 주술적이다. 이에 대해 Empedocles는 active power, force 가 필요하다고 전제함. 4가지 요소들과 독립되어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는 이를 사랑과 미움(Love and Hate)
조화와 불일치(harmony and discord)라고 부름. 그러나 이 사랑과 미움, 조화와 불일치는 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physical, material force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힘은 elements의 이합 집산의 원동력이다.
1.5.2. Anaxagoras
소아시아의 clazomenae에서 500 B.C. 경에 태어남. 페르시아인으로 군대를 따라 아테네에 와서 안주함. 아테네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로 되는 시기에 첫번째 철학자로 간주됨. Pericles의 스승이었다. 후에 그의 정적들에 의해 불경죄로 고소되나(450.B.C.) 감옥에서 나와 이오니아 지방으로 이주, 거기서 학교를 세우고 교육함. 6세기 경 Simplicius가 Anaxagoras에 관한 기록을 보유함으로써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의 철학:
Parmenides의 「존재」 의 성질에 관해서 Empedocles처럼 받아 들임. 즉 존재의 indestructability, unchangeability, matter적 성격, elements의 혼합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인정. 그러나 Empedocles의 4가지 요소에 대해서는 인정치 않음.
all things : 무한히 많은 particles (질적으로 다름)의 혼합으로 이루어짐. 이는 Herakleitos적 요소를 인정한 것임. 이를 spermata (seeds)라고 부름. spermata의 변화와 운동을 가능케하는 power, force를 전제하고 이를
Nous, mind라고 부름.
Nous, mind: 모든 사물들의 운동을 일으키는 원동력, 원리(principle)
: 무한하고(infinite), 자율적인(self-ruled) 힘이다.
: 가장 미세하고(finest), 가장 순수하고(purest), 물질적인 성
격을 지닌 것이다. matter and spiritual의 엄격한 구분이 불
가능한 시대 였다.
: 모든 것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다.
: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현존하며 같은 원리이다.
cf. Aristotle : nous 개념을 deus ex machina로 이해, 세계의 구성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석.
Anaxagoras 철학의 중요성은 그리스 철학에 nous 개념을 도입하여 principle의 개념으로 추상화하는데 기여.
1.6. 원자론자들(atomists)
창시자: Leucippus of Miletus, Demokritos
Empedocles철학에 대한 논리적 발전 형태로 원자론이 등장. 즉 사물들의 질적인 차이(qualtative difference)를 양적인 차이(quantitative difference)로 설명하지 못한 Empedocles, Anaxagoras를 발전시켜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과 미움, 정신 같은 개념 대신에 「기계적」 설명을 전개 시키고 있다. atoma의 개념을 도입함.
atoma : 무수히 많다.(양적으로)
: inperceptible (너무 작기 때문에 감각으로는 인식 불가능)
: 크기과 모양이 다르다.(quantitative difference)
: solidity, impenetrability 외에 다른 성질이 없다.
: 공간(void)을 인정. 운동하기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 Parmenides
를 부인하면서, "없는 것도 있는 것 못지 않게 있다."
: 운동을 위해 다른 외부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world : 개별적 윈자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여기서 원자들은 결합하게 되
며 원자들의 집합이 이루어지면서 혼동은 질서의 세계로 바뀐다.
: moving force, power 는 불필요한 가정, 전제일 뿐이다.
: 처음부터 원자와 공간만이 존재하며 그것이 전부이다.
: 운동의 원리는 내재적이며, 자기 충족적, 기계적이다. 원인을 설
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대해 Aristotle은 비판하고 있다.
1.7. Sophists
자연 철학자들의 후계자들로서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는 별명을 얻음.
도시 국가들을 전전하며 많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시켜 가던 이들이었다. 이들의 철학을 sophism이라 부른다.
sophists: 우주의 궁극적 본질에 관해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가짐. 특히 Parminides와 Heraklei-
tos의 이론적 대립은 sense-perception의 불확실성을 인식케
하였다. 그래서 자연철학의 기초가 무너지기 시작함.
: object에서 subject의 문제로 관심이 전환되기 시작함.
: 그리스 문명에 대한 반성을 심각하게 제기함. 왜냐하면, 희랍
의 문명 이외에 Persia, Babylon, Egypt 문명, 인종을 경험
[Are the various national and local ways of life, religious and
ethical codes, merely conventions or not?] [희랍의 문화는 다른 문화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함.
: 자연철학과 내용상의 결별을 함. 즉 자연의 문제보다는 인간과
문명, 관습의 문제를 다룸.
: microcosm을 macrocosm보다 중요하게 간주. "세상에는 많은 기
적이 있지만 인간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다." Sophocles
: 자연철학과 방법론적인 결별을 한다. 즉 자연철학자들이 주로
사변적이고 deductive method에 주로 의존했다면, sophists은
실천적이고 empirico-inductive method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
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실천적인 기질 때문에 현실 정치에 많이 관여하였는데 주로 정
치가들의 교육에 참여. 이들이 궤변론자라고 오명을 얻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이 주로 수사학(rhetoric)과 변론술 등
을 가르치고 치부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수사학은 주로 정
치가들의 정치적 생명과 관계가 있던 학문이었다.
: 이들의 공헌은 철학의 중심 문제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전환했
다는데 있다. 나는 이를 제 1차 인간학적 전환이라고 부른다.
또다른 공헌은 계몽주의 정신에 기여 했다는데 있다.
1.7.1. Protagoras of Abdera
Platon의 대화편 「Protagoras」에서 언급되고 있다. 481 B.C.에 태어났다.
500년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A.E. Taylor, John Burnet 등)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로 두번째 방문. Pericles와 교분.
Diogenes에 의하면, 신성모독죄로 고소, 탈출하다가 강에서 익사.
그의 철학적 명제: Homo mensura satz;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of those that are that they are, of those that are not that they are not.
이 명제가 가지는 의미는 incommensurability의 문제를 다루고 common
measure의 불가능성을 제시했다는데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개인인가? 집단인가? 또 만물(all things)은 감각 지각(sense-perception)의 대상인가? 아니면 value(가치)의 영역까지를 확대해서 말하는 것인가? Socrates는 前者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같은 바람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차갑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어떠한가에 대한 답은 둘다 맞는다고 말한다.
Platon는 [Theaetetus], [Protagoras]에서 상대적 가치를 갖는 것은 단지
감각적 대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봄.
Protagoras는 국가의 법률에 대해서도 상대적 가치만을 인정하고 있다.
즉, 법률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윤리적 경향에 의존해서 제정된 것이며 따라서 국가 사이의 여러 개별법은 단지 어떤 것이 더 useful, expedient 하느냐에 따라 sounder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 truer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윤리적 전통을 주입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고 교육의 임무가 여기에 있다고 인정. 보다 나은 법률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적이다. Protagoras의 상대주의적 진리관은 언뜻보아 혁명적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는 전통과 권위를 보강하는데 자신의 지혜를 이용하고 있다. 개인보다는 국가가 더 현명하다는 생각을 함.
1.7.2. Gorgias of Leontini
Leontini의 대사 자격으로 아테네에 방문. Syracuse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방문. Pan-Hellenism의 정신을 확산 시킴.
Empedocles의 제자로 알려짐. Sextus Empiricus(Pyrrho와 더불어 고대 제일의 회의주의 철학자)에 의해 Gorgias에 대해 전해짐.
자연 철학에 대한 관심으로 철학을 출발했으나 Zenon의 변증법으로 인해
회의주의로 기울어짐. Protagoras 처럼 정치교육자는 아니었고 수사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 왜냐하면 정치적 불안기에서 생존의 방법으로 수사학이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Pericles 죽음이후 몰락해가는 그리스 사회를 반영.
그의 철학적 명제들:
1)[nothing exists];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원하거나 無로부터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없
는 것으로 부터는 「있음」이 나올 수 없으며 영원한 것은 무한한 것인
데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2)「존재한다고 해도 알수 없다.」
3)「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 예) 색에 대한 지식을 말로 전할 수 없다. 귀로 듣는 것은 음성이지 색갈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해 똑같은 표상은 불가능하다. 대상과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 (개념)은 같지 않다. Gorgias는 결국 不可知論으로 빠지게 되었다.
Protagoras가 common sense에 의존해서 [everything is true]를 가르쳤다면 Gorgias는 [there are no truth at all]을 가르침. 이를 철학적 회의주의 또는 허무주의라 부른다. (philosophical nihilism) 그래서 그는 주로
수사학(rhetoric)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 수사학은 설득의 한 방법으로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2. Socrates (469-399 B.C.)
부친: 석수 또는 조각가로 알려짐. 모친: 산파. 중산계급의 출신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으나 주로 부친의 기술을 배우며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B.C. 431년 Peloponnesus 전쟁 이후 알려지기 시작한다.
Aristophanes의 「구름」이라는 희곡에서 Socrates가 소개됨. 「변명」 B18
40세 이후 철학을 시작하여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아테네 청년들과 철학적 대화를 계속하다 70세에 고소당하고 재판에 의해 철학적 순교를 함. 그는 최초의 철학적 순교자인가?
그가 고소 당한 이유: 1)아테네 청년들을 도덕적으로 부패시킨다. 2)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daimon이라는 신을 인정한다는 瀆神罪
Socrates를 알 수 있는 기록: [Apology], [Criton], [Phaidon],[향연]
Socrates의 중심 문제: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
소피스트들과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들이 인간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Socrates는 객관적 탐구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들이나 산의 나무들은 내게 가르쳐 주는 바가 없지만 거리의 인간들은
나에게 가르쳐 준다."
인간에 관한 지식의 두 종류: 윤리학; 인간의 행위를 문제 삼음
지식론; 윤리학의 기초로서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목적으로 함
Socrates의 지식론
소피스트의 주관주의, 상대주의를 반대하고 인간에 대한 객관적이고 명백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 이성을 인식의 기원으로 보고 객관적인 인식, 지식, 진리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고 출발.
객관적 진리의 획득 방법: 대화(dialogue)의 방법을 중요시함.
대화법: dialektike, dia + logue(logos)
: maieutike(산파술)로 비유된다. 즉 진리는 스스로 낳는 것이 아
니라 진리를 잉태한 아테네 청년들이 순산하도록 도와 주는 기술
즉 가능태를 현실태로 구체화 시켜준다. 이런 자신의 역할을 등
에(godfly)에 비유하고 있다. "아테네라는 순한 짐승에 자극을
주어 성실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
: 변증법적 과정을 겪는다. 왜냐하면, 대화에는 언제나 충돌과 갈
등이 생긴다. zig-zag process가 있다.
: 대화의 목적은 진리의 발견에 있다. 따라서 대화법은 발견의 논
리(logic of discovery)라고도 부른다.
Socrates가 생각한 진리: 독자적 생산의 결과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협조를 통해 발견되는 것. cf) a-letheia
대화의 두가지 방법:
1) 소극적 방법....Socrates적인 반어법(eironeia, irony)
irony = 상대방을 유도하여 그의 아는 것을 전부 이야기하도록 하고 그
것을 반박함으로써 그의 無知를 자각하도록 함.
무지 = 지혜가 없다는 것. 즉 자신들의 지식이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
이 소극적 방법의 결과는 무지의 자각이었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
로 표현된다. (Gnothi Seauton, know youself)
cf) 논리학에서는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이라 부름
2) 적극적 방법....귀납법(epagoge): 개별적인 것에서 우연적인 것을 제거
하고 보편적인 것을 산출해내는 것(추상). 그러므로써 사물의 본질만 남
게 하는 것. 즉 사물 본질 규명이 목적이다. cf) Bacon's induction과
비교하면, 그는 철저히 경험 세계에 관한 것으로 현상과 실례들을 수집
하여 공통된 것들로 법칙화하는 과정을 말하며, Socrates의 귀납법은 경
험 세계 뿐만 아니라 경험할 수 없는 사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체계화
시켰다. 이 귀납법을 통해 Socrates는 개념과 정의(definition)라는 논
리적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객관적 지식의 목적
Socrates는 현학자는 아니었다. 즉 그의 진리 탐구의 목적은 그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천적 목적에 있었다. a clear knowledge of the truth 는 right control of life가 본질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主知主義의 전통을 세웠지만 동시에 德(arete)의 본질을 탐구하고 대답함으로써 실천적 문제에도 관심을 가짐.
Socrates의 德論
knowledge is sought as a means to ethical action. knowledge와 virtue
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Socrates 윤리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知德一體,
知行合一. 앎이란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아는 것이고, 또 앎이란 옳은 것을 행동할줄 하는 것을 의미한다. [knowing=right=doing=virtue]
이를 도덕적 지성주의(ethical intellectualism)이라 부를 수 있다.
Socrates의 arete는 단지 도덕적 개념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물의 가장 좋은 상태, 완성태 또는 본질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의 목적은 그 사물의 arete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 앎은 곧 행동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옳은 것을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無知(ignorance)때문이다. 이 무지에 대한 자각은 곧 진리에의 첫걸음이며 진리는 완결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열려진 세계에 숨겨진 것으로 대화의 변증법을 통해 찾아져야 하는 것이다.
cf) Aristotle의 비판: Socrates는 개인들의 도덕적 약점(moral weakness)을 간과했다. 즉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대해서 무시했다. 인간은 잘못인줄 알면서도 행동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무지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무지때문에 잘못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문제삼을수 없다고 보는 것이 Aristotle의 입장이다.
Aristoteles는 arete 대신에 eudaimonia를 윤리적 행동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Socrates가 본 옳음은 pleasure를 주는 대상, 행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pleasure를 주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예; 알콜, 마약..)
쾌락은 선(善)이나 참된 쾌락은 영속적이고 물질적 대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moral action, arete의 실현을 통해 얻어진다.
행복은 외적인 물질의 많은 소유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知와 德의 동일화는 덕의 교육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Socrates의 덕의 교육은 단순한 notional instruction 이 아니라 참된 직관에로 사람들을 인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