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하나의 공간 지표로 생각해 볼 때가 있다. 큰 산맥과 같은 웅장한 시인이 있고 낮은 둔덕과 같은 편안한 시인이 있는가 하면, 끝 간 데 없는 모래바람의 사막과 같은 시인이 있고 파란 하늘 찰랑대는 냇물 같은 시인이 있기도 하며, 인조대리석의 호화궁전이 연상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아까시꽃이 익어가는 동구 밖 과수원길에 빗소리 들리는 움막 같은 시인이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광활한 공간이냐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공간이냐의 구별일 것이다. 그것도 바싹 마른 배경을 두르고 있느냐, 아니면 촉촉한 풍경이 어우러지는 눈물겨운 배면을 둔 공간이냐로 구분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태주 시인은 시골, 그것도 봄이면 민들레와 꽃다지들이 자옥이 피어나는 흙길의 정겨운 오두막집이 그의 공간 지표가 된다. 뒷짐을 지고 풀꽃들에게 눈을 맞추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 더 신이 나면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화폭에 연필화로 그려 담으며 그는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인은 세 가지를 바랐다고 하는데, 시인이 되기, 착하고 예쁜 부인 얻기, 공주에서 떠나지 않고 살기 등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이루었으니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으나, 그의 생을 지향한 공간 지표가 그토록 소박하고 자애로운 마당에서 출발했으니 그의 소원 역시 작은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는 시골에서 고요히 살고자 한 검박함으로 인해 그의 시와 생은 모두 작고 낮고 좁디좁은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나태주 시인이라고 하면 단박에 망설임 없이 ‘서정시인’이라고 말한다. 그의 시가 ‘서정’이라는 자장 안에서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서정은 시인의 내면이 신성한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궁극적 본향을 우러른다는 점에서 아름다우며, 시적 형상이 시간의 축적 안에서 발효해가는 과정을 숨김없이 리듬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맑고 눈부시다. 서정성을 논의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훼손되기 이전의 ‘시원’을 어떻게 발현해 가느냐의 문제인데, 나태주 시인의 경우에는 ‘순정’이라는 태도가 개입된다. 여기에서의 순정이란 지순함이다. 시력 사십 년을 한결같이 한 세계를 향한 올곧은 발화, 한 번도 의심하거나 버리지 않고 시인을 지켜낸 인고의 자세, 그리고 더 작고 더 약하고 더 여린 대상을 찾아 낸 의지의 세월을 일컫는다. 그러기에 나태주 선생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골에서 문학을 살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 순정을 바친 시인이 되셨다. 도회지에서 자연을 도외시하는 젊은 시인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구름과 새와 풀꽃들을 노래하시면서 그들과 친구로서의 우정을 이제껏 지켜 오시며, 그들과의 훈훈하고 정감 어린 우정담友情談을, 그 서정과 사랑을 독자들에게 한없이 퍼부어주고 계신다.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은 4월의 햇살이 활짝 피어난 날이었다. 딱 한 문장으로, 선생님처럼 따사로운 햇빛이 복슬대는 오후였다. 공주 진입로에서 만난 금강은 비단 길 적시는 윤슬로 반짝거렸고, 차창 곁으로 지나가는 계룡산 산허리는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대숲 그늘의 노래로 다가왔다. 지난달에 선생님을 뵈었는데도 유달리 봄빛 탓이었는지, 첫 만남을 준비하는 양 나는 마냥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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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로에서 돌아보는 생의 궤적 - 시련과 실연
■ 김명원: 선생님, 대전에서 공주는 지척인데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러운 심정 가득합니다. 요즈음 건강은 좀 어떠신지 부터 여쭙고 싶은데요. □ 나태주: 지난 2007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큰 병에 걸려 죽을 만큼 앓다가 그야말로 신의 보살핌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일이 있지요. 그렇기에 김시인이 제 건강 상태부터 물으시는 것 같군요. 실은 그 뒤, 그러니까 2009년도에 두 차례의 대수술을 받았어요. 당초 아팠던 것은 10만 명 중에 한 사람이 살아날 확률로 아팠던 것이었고요. 다시 한 수술은 그 때 엉망이 된 뱃속을 정리하는 수술이었습니다. 쓸개를 절제하고 간을 일부분 잘라냈습니다. 이 또한 쉽지 않았고요. 두 차례의 대수술 중 첫 번째 수술이 잘못되어 하루 만에 재수술을 받기도 했지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교적 좋은 편이에요. 앓고 난 뒤에는 술을 통 마시지 못하고 고기를 맘 놓고 먹지 못하는 것이 섭섭한 일이긴 하지만요. 어차피 나이든 입장이니 조심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요즘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문화원에 나가서 문화원 일을 돌보기도 하고 지역의 문화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그 정도면 제 건강이 입증된 셈인가요? ■ 김명원: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문화원에 나가서 문화원 업무를 보신다면 제가 선생님의 주치의는 아니어도 이미 건강안심권에 진입하신 것으로 판명할 수 있겠는데요. 시의 스승이 적은 우리 시단에서 선생님께선 오래도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들이 선생님의 사랑과 지도를 오래 받을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의 부모님께서도 건재하시다고 들었는데, 화목한 가족 분들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 나태주: 부모님께서 살아계셔서 자식 건강을 걱정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고된 병을 치뤄 내고 나서 출간했던『꽃을 던지다』를 두 번이나 읽으시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종교를 바꾸셨어요. 얼치기 불교 신도셨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신 거지요. 부모 뿐 아니라 형제들도 모두 생존해 있으니 더불어 고마운 일이고, 자식들 모두 속 안 썩이고 서울대, 충남대 등 국립대를 졸업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고요. 주위에 가족이 있고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 ■ 김명원: 선생님의 따님은 현장비평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나민애 문학평론가이지요. 문인 일가를 이루셨으니 흐뭇하시겠어요. 일전에 선생님 글에서 읽었는데요. 선생님께 세 가지의 소망이 있으셨다고요. 첫째는 시인이 되는 것, 두 번째는 착하고 예쁜 여자한테 장가가는 것, 세 번째는 고향을 좋아해서 공주에서 계속 살고 싶은 소망들을 들고 계셨지요. 이 세 가지 소망들을 모두 이루셨네요. □ 나태주: 아, 젊은 시절에, 아니 청소년 시절에 그런 소원을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좀 더 큰 소원을 세울 것을 하는 생각도 하는데요. 허지만 그런 소원이나마 이루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김시인이 일깨워 준 세 가지의 소망 중 첫째, 시인이 되겠다는 소원은 내 자신의 아이덴티티나 자아실현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쨌든 나 자신을 찾고 싶었고, 나 자신을 성장시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변모하는 나 자신, 진화하는 나 자신을 꿈꾸었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일정 부분 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고 행복했다고 여겨지고요. 둘째, 예쁜 여자에게 장가가고 싶었던 소망은 가정에 대한 소망입니다. 예쁜 여자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선하고 성실한 아내를 만나 아들 아이 딸 아이 낳고 잘 살았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그 아이들 이제 모두 결혼해서, 서울에서, 그리고 대전에서 잘 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노릇이구요. 나는 본래 경제 개념이 부실한 사람인데 다행히 집사람이 경제 개념이 분명해서 그 덕에 오늘날 의식주에 크게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또한 커다란 축복이거니 싶네요. 셋째로 공주에 살고 싶은 소원은 주거와 생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지금보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공주가 참 아름다운 도시였지요. 지금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래서 많이 어정쩡한 도시가 되었지만요. 고도로서의 공주, 수려한 자연 경관을 지닌 도시 공주, 고전적인 조용한 분위기가 살아있는 도시 공주가 아주 많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많은 장점들이 희석되어서 참으로 아쉬운 심경인데요. 어쨌든 살고 싶은 고장에서 살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노릇이고 또 축복받은 일이거니 생각합니다. ■ 김명원: 이 세 가지 소망 중에서 첫째로 꼽으셨던 ‘시인되기’ 말인데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셨다기 보다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하셨던 계기가 있었나요? □ 나태주: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실은 좀 복잡합니다. 시인들은 근본적으로 심장병 환자라서 조그마한 일에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는데, 어려서부터 저는 충격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저는 집안 사정상 주로 외가에서 성장하였는데, ‘길’ 때문에 충격을 몹시 받았지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친가와 외가가 있는데, 이 두 군데를 왔다갔다 하다보면 길이 말이지요. 이 길이 저를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한 일곱, 여덟 살 무렵였는데요. 외가에서 친가 쪽으로 가다 뒤를 돌아다보면 길이 멀어졌다는 사실, 제 몸은 본가 쪽으로 가고 있는데, 내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 쳐서 외가 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이게 저를 미치게 하는 거예요. 본가로 가면 갈수록 본가는 점점 낯설어지고 외가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죠. 이런 걸 릴케 식으로 말하면 추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길이란 제게 바로 추억이었지요. 마치 이 여자를 안고서 다른 여자를 생각하는 거와 같은 건데, 이게 정말 비극 아닙니까? 아마도 이런 정서가 시인이 되는 단초가 되었을 거 같아요. 그 후 저는 성장하여 고등학교를 사범학교로 다녔는데요. 사범학교는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면 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학교인데, 이 학교를 다니면서 심하게 열등의식에 휩싸이고 우울증 같은 걸 앓았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한 여학생을 숨어서 좋아하기도 했고요. 모든 학교 공부가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지요. 그 방법으로 시 쓰기를 택한 것이에요. 아마도 그림에 마음을 주었다면 화가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도 10여 년간 시를 마음에 품고 살았는데요. 초등학교 선생 생활 3년, 육군에 입대하여 3년을 포함해서요. 군대 생활 중엔 월남에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교직에 복직해서는 한 여교사를 만나 호되게 실연의 고배를 마셨고요. 그 때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 그 마음이란 것을 표현해보고 싶었지요. 그 글들을 모아서〈서울신문〉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된 것이 바로 등단작「대숲 아래서」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시련 내지는 실연이 시인을 꿈꾸게 했고, 시인이 되게 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일종의 전화위복인 셈이지요.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대숲아래서」전문
■ 김명원: 말씀하신 것처럼 시「대숲아래서」로 선생님께서는 1971년도〈서울신문〉을 통해 등단하셨지요. 많은 독자들이 이 등단작을 즐겨 낭독하는 이유가 선생님의 시련과 실연이 절절하게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네요. 당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셨던 박목월과 박남수 선생님은 심사평에서 “현대시의 혼탁한 번역조 시풍詩風의 풍미와 생경한 관념적인 무잡성, 응결력이 약화된 장황한 장시長詩의 유행 속에서 시류詩時에 초연하여 잃어져 가는 서정의 회복을 꾀하고 시의 본도를 지켜 침착하게 자기의 세계를 신념하는 그의 작품이 오늘날 우리 시단의 반성적인 계기가 되리라는 뜻”에서 선작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전통적 감수성을 그리워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요. 여기에서 주목하여 볼 구절은 ‘시의 본도를 지켜’간다는 것이겠지요. 여기에서 시의 본도라 함은 서정이 함의하는 낭만적 이데올로기를 일컫는다는 것보다는 시가 본능적으로 결합하여 시의 외장을 갖추는 리듬일 테니까요. 박목월, 박남수 선생님과는 등단 이후에도 계속 교분이 있으셨나요? □ 나태주: 그분들은 제 인생의 제2의 어버이 같은 분들이지요. 박목월 선생은 계속해서 저를 지도해주시기 위해 대전의 박용래 선생을 소개해 주셨고, 첫 시집 서문을 써주셨고, 결혼식 주례를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박남수 선생님은《현대시학》주간이던 전봉건 선생을 소개 해주시어 작품발표를 쉽게 하도록 도우셨고요. 나름대로 저는 행운아였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게 해서 시골의 보잘것없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의 시인이 조금씩 시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눈물겹도록 감사한 분들이지요. 그런데 그분들의 생전에 충분히 잘해드리지 못해 오늘날에 와 송구스런 마음입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 등단하실 때의 문단 분위기랄까요, 지금의 문단 형편과 문학적인 환경을 비교해서 말씀해 주신다면요. □ 나태주: 다들 그래요. 자신이 젊었을 때, 옛날이 좋았다고요. 그건 나도 그렇습니다. 우선은 시인의 희소가치가 있었고, 시에 대한 존경, 신비, 위의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특히나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간 시인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또 기억해주는 바가 되었으니까요.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시단에 나갔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발표지면은 요즘처럼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빈곤한 형편이었지요. 그에 비하면 요즘은 지나치게 풍요합니다. 어찌 보면 풍요 속 빈곤을 느끼는 바도 있겠지만요.
3대 서정시인, 그리고 스타시인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시인이 되고자 한 소망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시는 스타시인이 되셨는데요. 방송 출연도 빈번하셨으니 많이들 선생님을 알아보는 편이지요. 스타시인이어서 덕을 보신 일이 있다면요? □ 나태주: 스타시인은요 뭘…. 글 쓰는 사람들은 늘 자기 과시욕 같은 것이 강하고 에고가 강한 사람들이라서 결코 자기가 만족할만한 사람이라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더더구나 스타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언제나 갈급한 목마름에 살게 되지요. 아니 허덕이게 되지요. 나도 마찬가지여서 시인은 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이 늙은 나이의 나 같은 사람을 괴롭히는 요인이 되고요.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요. 대중들로부터의 사랑은 주로 인터넷에 작품이 오르내리는 것과 책이 팔리는 것으로 판가름 나는데 그것 역시 충분치 못한 형편이랍니다. 그리고 김시인이 방송 출연을 말했는데, 가끔 지역방송에 나가는 정도입니다. 그쪽 방송국 측에서 필요해서 나 같은 나이든 사람을 끌어내겠지 싶지만, 실은 이런 일로 해서 내 쪽에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있지요. 세상, 즉 인간이나 자연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는 점은 방송 경험에서 큰 도움을 얻고 있으니까요. 제가 사는 공주 사람들은 모르거니 해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자주 방송에서 만났다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 김명원: 저희가 8·90년대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시사에서 ‘3대 서정시인’이라고 하면 선생님을 위시하여 송수권 시인과 작고하신 이성선 시인을 꼽고 있는데요. 세 분의 문학적 활동도 충청, 전라, 강원권으로 나뉘어 있어서 제각기의 특색 있는 향토적 정서를 만끽할 수도 있고, 서로 간에 멋진 우정을 나누셨던 터라 저희 후배들에게 세 분 모두 귀감이 되고 있고요. 선의의 경쟁 관계이셨던 송수권, 이성선 선생님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좀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 나태주: 젊어서는 몰랐는데 나이 들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얘기가 조금은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네요. 나는 비교적 까발리는 성격인데도 그렇습니다. 이성선, 송수권과 나태주, 이렇게 세 사람이 한 시절 좋았던 때가 있었지요. 서로가 좋은 시를 발표하면 그 일이 마음에 걸리고 자극이 되어 밤을 새워 상대방의 시를 읽고 읽었던 그런 시절이요. 그래서 나에게 이성선과 송수권의 시는 한편도 읽지 않은 시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 점이 시인으로 성장하는데 또한 도움을 주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이성선 시인이 타계한 뒤로는 그 삼각관계鼎立關係가 깨졌습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우정을 나눈 시인이 있었다는 걸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벌써 올해 5월로 이성선 시인의 10주기가 돌아오네요. 허망한 인생 가운데 더욱 허망한 세월과 인간사를 실감하고 있지요.
네 손을 잡고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지.
돌계단 하나에 석등이 보이고 돌계단 둘에 석탑이 보이고 돌계단 셋에 극락전이 보이고 극락전 뒤에 푸른 산이 다가서고 하늘에는 흰구름이 돛을 달고 마악 떠나가려 하고 있었지.
하늘이 보일 때 이미 돌계단은 끝이 나 있었고 내 손에 이끌려 돌계단을 오르던 너는 이미 내 옆에 없었지.
훌쩍 하늘로 날아가 흰구름이 되어버린 너!
우리는 모두 흰구름이에요, 흰구름. 육신을 벗고 나면 이렇게 가볍게 빛나는 당신이나 저나 흰구름일 뿐이예요. 너는 하늘 속에서 나를 보며 어서 오라 손짓하며 웃고 나는 너를 따라갈 수 없어 땅에서 울고 있었지. 발을 구르며 땅에 서서 울고만 있었지. -「돌계단」전문
■ 김명원: 일부 평자들은 선생님에 대해서 청록파 이후의 신자연파의 등장이라고 운운하며 우리 시단을 이끌고 갈 주요 서정 시인으로 지목하였는데요. 선생님 시에서 자연은 기존 서정시에서보다 더 인간 친화적인 매체로 나타납니다. 선생님께서 자연으로부터 얻어내어 시의 생산까지를 책임지시면서 자연과 인간, 시를 묶어 느끼신 점을 말씀해 주신다면요? □ 나태주: 청록파 삼가시인들의 시를 사무치게 사랑하고 좋아하고 따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그분들의 시는 저에게 교과서가 되었고 모범이 되었고 고향이 되었으니까요. 원점의 시라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저의 시는 그분들의 시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분들의 시보다 인간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간 시가 제 시거든요. 물론 자연시, 서경시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안경을 통해서 본 자연이요 서경일 것이지만요. 그러나 저의 자연시는 철저히 인간의 정한, 소망, 미달감에 의해 건져진 자연이요 서경이라 할 것이에요. 물론 제 시는 조그만 시이지만요. 커다란 주제도 담지 못하고 사회적 이슈도 건드리지 못하니까요. 그냥 저의 이야기만을 지지부진하게 동의어 반복으로 계속할 따름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조금씩은 변화하고 발전하고자 노력하는 중이고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요즘 발간되는 있는 종합문예지나 시지들을 두루 정독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처럼 변변치 못한 시인에게조차 시지에 실린 신작시를 잘 읽었다고 격려 전화를 주곤 하시니까요. 그 때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요즘 시단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젊은 세대의 일부 시인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으면서 독특한 경향의 시들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선생님께서 정의하시는 서정시와 비교해서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 나태주: 언제든 시의 흐름에는 전통지형적인 서정 계통과 전위적인 실험시 계통과 사회적 관심에서 우러나오는 현실비판의 시가 있다고 보아집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요? 그들의 자리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도 독자란 것에 대해서, 소통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언제나 자기가 할 만큼 책임을 지게 되어 있고 자기가 한만큼의 칭찬이나 보답 등 독자의 호응을 받는다고 보거든요. 시는 영혼의 울림에서 나와서 시인을 울리고 독자를 울려야 하는데, 놀랍게도 일부 젊은 시인들은 시인인 본인은 울지 않고 시를 쓰고 있어요. 아마도 약아서, 똑똑해서 그렇겠지요. 아니면 울어서 쭈그러지는 게 싫어서 그렇던가요. 그도 아니면 재능이 없어서일까요? 서정시란 인생에 대한 감상문이거든요. 돈, 권력, 학문, 모두 다 좋지만 결국은 인생에 대한 소감이 남을 뿐인데, 그걸 서정시가 담당하고 있어요. 지금처럼 봄이 와서 봄에 대한 살아 있는 느낌말이에요. 타고르가 나무에게 신을 보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더니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것 처럼요. 시는 오랜 생을 거친 감상에서부터 오는데, ‘나였던 나’에서 오는 체험과 ‘나인 나’의 현실 인식, 그리고 ‘나 이후의 나’에서 파생되는 상상이나 동경의 세계가 깊이 깔려서 그 든든한 뿌리로부터 오는 것이거든요. 요즘 시인들의 시가 맛이 없는 것은 이 층위가 얇아서 그런 거예요. 무덕스러워도 층위가 두꺼워져야 해요.
사랑은 인생과 예술의 영원한 주제
■ 김명원: 이제는 좀 화제를 바꿔서 선생님 시들의 중요한 주제를 이루는 사랑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는지요? 일종의 재미를 기대하는 연애담을 듣고 싶은 것이지요. □ 나태주: 저 서양의 화가 르노아르는 만약 장미꽃과 여자 없었다면 자기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건 저도 그렇습니다. 화가는 아니지만 저는 여자와 꽃을 너무나도 좋아하거든요. 아내가 여자이니까 아내도 좋아하고 딸도 여자니까 딸도 좋아하고 가족이 아닌 여성들도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사랑의 주제는 영원히 인생과 예술의 주제입니다. 살아있다면 날마다 행운이겠고 사랑한다면 날마다 기적이겠다는 말처럼 사랑보다 더 강력하고 아름답고 좋은 주제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사랑의 테마는 폭이 넓습니다. 인간, 자연, 사회 등 모든 분야에 사랑의 테마는 적용되지요. 예수님의 사랑, 공자님의 인, 석가님의 자비도 실은 사랑의 테마거든요. 그리고 사랑의 극치는 측은지심, 즉 안쓰러움에 있습니다. 이 안쓰러움을 쓸 때 시든 예술이든 감동의 지경을 넓힐 수 있어요. 젊은 시인들이 이 사실을 알아두셨으면 해요. 우리 집사람과의 연애담요? 없어요. 우리는 중매결혼을 했으니까요. 그저 맹물 같은 사람, 콜라나 사이다, 커피가 아닌 숭늉 같은 사람이 저의 아내입니다. 그래서 오래 동안 함께 살면서 편안하고 좋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사랑한다는 말 차마 건네지 못하고 삽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끝까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모진 마음 내게 있어도 모진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나도 모진 말 남들한테 들으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기 때문 외롭고 슬픈 마음 내게 있어도 외롭고 슬프다는 말 차마 하지 못하고 삽니다
외롭고 슬픈 말 남들한테 들으면 나도 덩달아 외롭고 슬퍼지기 때문 사랑하는 마음을 아끼며 삽니다
모진 마음을 달래며 삽니다 될수록 외롭고 슬픈 마음을 숨기며 삽니다.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전문
■ 김명원: 사랑 말씀을 하시니 제 마음이 이 곳 탁자 화병에 담겨져 있는 프리지아 꽃 노란 색으로 물드네요. 선생님 시들에는「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처럼 이런 노란 꽃잎 같은 풋풋한 연애 심경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 많은데요. 좀 전에도 말씀하셨듯이, 선생님께서 이력이나 대담에서 용감하게 밝히셨던 동료 여성교사 분께 향하는 그리움도 있는 것인지요? 이런 실감 나는 연시들은 앞으로도 선생님 시에서 면면히 이어질까요? □ 나태주: 굳이 동료 교사라고 할 것도 없어요. 주변에 있는 모든 여성분들이 제 시의 대상이니까요. 그리고 사랑의 대상이니까요. 큰 병을 앓고 나서 병원에서 나와서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누이라 부르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어요. 이제 저의 여성관은 보다 확대되고 일반화되고 지극히 인간적인 범주에 머무는 그런 여성관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성에 대해서도 많이 편한 입장이 되었거든요. 이 꽃병에 담겨져 있는 프리지아 꽃은 얼마 전에 여류시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건데, 너무 예뻐서 한 단 더 사왔어요. 제가 꽃을 엄청 좋아해서요. 프리지아 꽃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요. 첫 째는 딸아이가 중학생일 때 제가 선물했던 프리지아이고, 또 하나는 삼십 년 전에 교생 실습생이 실습을 마치고 가면서 저에게 전해주었던 프리지아예요. 다른 하나는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담당의사에게 고마워서 선물했던 프리지아이구요. 꽃과 여성, 지금 이 프리지아처럼 제게는 모두 사랑 시의 주제입니다.
풀꽃과 놀다, 풀꽃을 그리다
■ 김명원: 지난달에는 제가 참여하고 있는 대전 MBC 생방송 ‘아침이 좋다’의 한 코너인 ‘책이랑 놀자’에서 선생님의 산문집『풀꽃과 놀다』를 소개했답니다. 선생님께서 ‘풀꽃시인’으로 불리워지는 이유를 이 책을 통해 알아냈지요. 저마다의 전설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풀꽃들과 만나신 사연들이 절절했습니다. 특히 그 풀꽃들을 쪼그리고 앉아 꼼꼼히 그려내신 연필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책의 매력이라고 시청자들에게 강조하였고요. 저는 이처럼 선생님 책자 홍보부장으로 일선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는 이 책자 말고도 직접 그리신 그림을 글에 삽입하거나 문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넣어 주시는데요.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던 것인지요? □ 나태주: 고마운 일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나의 책『풀꽃과 놀다』를 소개해 주었다니 감사한 일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서는 나를 ‘풀꽃시인’이라고들 부르지요. 매우 사랑스럽고 감사한 이름이에요. 내가 풀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시를 쓴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이고요. 자연지향적인 시를 썼으니 아마도 시를 출발시킬 때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풀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랍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일도 이제는 15년이 넘은 일이 되었군요. 그러니까 초등학교 교감으로 근무할 때, 50대 중반였지요. 공주가 아닌 논산, 아주 산골의 조그만 학교로 좌천당한 때가 있었는데, 그때 심정이 솔직히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장학관이나 교장으로 나가는데, 저는 집 근처도 아닌 다른 동네로, 그것도 교장도 아니고 교감으로 나가게 되어 답답하고 저 자신이 한심스럽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그 학교에 부임하고 보니 아이들 소리가 참 좋았어요. 그래서 5월이었는데,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으로 와이셔츠 바람에 수건을 두르고는 합판에다가 복사지 한 장과 4B연필 하나를 구해서 나갔답니다. 허튼 짓 좀 해보려고요. 아이들이 노는 운동장 한 쪽에서 풀꽃이나 그려보자는 심정으로요. 거기서 아주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지요. 그게 뭐냐면 축구 골대 앞에 민들레가 나 있는데, 아이들이 얼마나 밟고 짓이겼던지 이게 나오다 죽고 나오다 죽고 해서 이파리가 찢어진 채로 조그맣게 나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이로 꽃대가 하나 올라왔는데, 작은 이파리에 비해 꽃대는 참 굵게 나왔더군요. 거기에 꽃이 피어 있었고요. 그걸 보는 순간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잘 이겨내고 살 수 있었을까, 너무 놀라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민들레는 투정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순간 제가 거기에서 심퍼시랄까요, 감정 이입이겠지요. 나를 느낀 거예요. 그래, 네가 바로 나로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걸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죠. ■ 김명원: 선생님께 새로운 세계를 안내한 굉장한 민들레였네요. □ 나태주: 그렇지요. 그 민들레를 발견하고 그린 뒤로는 틈만 나면 밖에 나가서 꽃과 풀들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말했듯이 땅에서 넘어진 자는 절대로 다른 무언가, 즉 나무나 지팡이를 짚지 말고 땅을 짚고서 다시 일어서라, 이런 마음가짐으로 근무를 하려고 마음먹었고요. 그 학교가 동쪽 편에 있었는데, 제가 차가 없어서 학교를 마치면 들판 건너 서쪽 편으로, 그때 당시 4시 반쯤 나가면 5시 반 버스를 타야 했어요. 좀 일찍 나가면 들판 가는 길에 주저앉아서 서쪽으로 지는 해를 쳐다보며, 어느 때는 소주 한 잔 얻어먹으면 취해서 엉엉 울기도 하며, 4년 반을 그렇게 살았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지낸 기간이 아주 좋았어요. 한번은 강아지풀을 그리려고 교장선생님 눈치를 보아가면서 나가서 그리기 시작했는데, 한 3분지 2정도 그렸을 겁니다. 가을 해가 짧잖아요.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안 보이는 거예요. 돋보기를 쓰고 그리는 데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때 문득 그 강아지풀이 “나도 그려줘요. 나도 마저 그려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 소리가 마치 “아빠 나도 데려가줘요. 여기다 놓지 말고, 이 어둡고 춥고 바람 부는 벌판에 그냥 놓아두지 말고 나 좀 데려가요.”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말고 울었던 적도 있었지요. 이처럼 사는 일도 힘들고 시 쓰는 일도 제대로 안될 때 풀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실은 복사지에 연필로만 그리는 아주 단순한 그림 그리기였는데요. 그림 그리기를 통해서 저는 아주 많은 위로를 받고 아주 많은 시사를 받았어요. 후반부에 쓴 제 시의 특징으로 단순성과 명료성을 든다면 그것은 모두가 연필 그림 그리기에서 얻은 암시요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풀꽃 그림 그리기는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에요. 무엇보다도 풀꽃 그림을 그리다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통일이 되고 집중되는 것이 참 좋아요. 허니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명상 과정과 통하는 정신적 수련 행위이기도 하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전문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시지요. 미술 작품이나 화론집에서도 시적 영감을 받으시는지요? □ 나태주: 시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주변 예술에 흥미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건 단순한 교양이나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시 쓰기를 위해서이고 감성을 수련시키기 위해서지요. 음악을 통해서는 생명 감각과 리듬 감각을 배우고, 그림을 통해서는 공간 감각 내지는 직관력을 배우게 되거든요. 특히 관점 내지는 시점, 시각에 대한 배움은 대단한 도움이 되요. 시인들은 이것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또 종교나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는 인을 배우고 영혼의 깊이를 알게 되니까요. 영감을 받고 안 받고는 그 다음의 문제예요. 말하자면 영감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얘기입니다.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1973년에 첫 시집인『대숲 아래서』이후로 2010년에『시인들 나라』를 상재하셔서 무려 시집만 29권에 이른데요. 어느 시집에나 선생님의 열정과 애정이 묻어 있겠지만 특별히 더 마음이 가는 시집과 아끼는 시가 있다면요? □ 나태주: 시집을 많이 냈습니다. 중기에 더욱 많이 냈는데 약간의 회한 혹은 후회가 없지 않아요. 작품의 완성도나 시정신의 정제성에서 그렇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시집은 아무래도 첫 시집인『대숲 아래서』고요. 그리고는『막동리 소묘』,『슬픔에 손목 잡혀』,『산촌엽서』,『눈부신 속살』등이 기억에 남고, 최근에 낸 시집『시인들 나라』도 마음이 가네요. 이렇게 말하니 제가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그리고 아끼는 시라? 역시 여러 편인데요.「대숲 아래서」,「돌계단」,「시」,「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기쁨」,「풀꽃」,「행복」,「부탁」등을 들 수 있겠네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시상에 잡혀 일필휘지로 시를 창작하시는 편인가요? 그리고 퇴고 과정을 어떻게 거치시는지요? 선생님만의 창작 비법이 궁금합니다. 시원하게 공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 나태주: 시를 씀에 있어서 끙끙거리며 쓰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당시唐詩에 비긴다면 이백과 두보의 시작 스타일이 있겠는데 그 가운데 이백의 스타일이라 할 것입니다. 오래 동안 가슴 안에 묵혔다가 일단 써지기 시작하면 대번에 써버리지요. 그런 다음엔 될수록 고치지 않아요. 때로는 외워서 쓰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외워질 때까지 입안에서 굴리고 있다가 때가 되면 확 종이에 뱉듯이 쓰는 방법이지요. 요즘엔 잠을 자다가도 가끔 시 비슷한 문장을 떠올립니다. 여행길, 걸을 때, 버스 안, 대화 중, 등등, 어떤 때든지 시가 떠오르면 종이에 쓰는데요. 그것이 저의 시 쓰는 습관이라면 습관이랍니다. ■ 김명원: 선생님 시들 중 노랫말이 된 작품들이 꽤 많은데요. 그 곡들 소개를 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노래로 불리워지는 가사로 된 시에서는 지면상의 시와는 좀 더 다른 감흥을 느끼시나요? 또 선생님께서는 선생님 시로 된 가곡을 즐겨 부르시기도 하는지요? □ 나태주: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시로 작곡 된 노래를 들려줘야겠다면서 컴퓨터 쪽으로 향하셨다. 인터넷을 통해 다운 받아 둔 노래라고 하며 들려주신 노래는 처연하고 비감 어린 곡조로 인하여 참 슬펐다.) 제 시로 작곡된 노래가 50여곡 되요. 지금 들려 드리는 노래 제목은「은방울꽃」이고요.「은방울꽃」은 동시로 쓴 건데, 비장하게 곡이 만들어졌더라고요. 올 해에는 이들 가곡의 악보집을 정리해서 내년 쯤 CD로 내려고 해요. 그리고 별 재미는 없지만 제 시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를 가끔 불러 보기도 하지요.
오늘도 희망을 노래하며
■ 김명원: 평생을 시를 품고 살아오신 선생님께서는 자신 스스로를 평가할 때, 어떤 시인이었다고 생각하세요? □ 나태주: 나 스스로를 워즈워드 수준의 시인이라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농경 사회의 전근대적인 시인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를 통해서 지구의 한 모퉁이를 스치고 지나간 제 삶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한때 ‘참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마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요. 시인이 시인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여’라고요. 대사회적인 발언을 하든 안 하든, 시를 쓰고 있는 한 우주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어디엔가 제가 썼습니다만,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라는 글이요. 마당을 쓰는 것 하나도 작지만 지구를 깨끗하게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심정이에요. 이런 걸 제 시와 연계시켜보면 “가슴 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졌습니다.”가 되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인들이시여, 절대로 남을 위해서 자신이 구원자라고, 혹은 예언자라고 말하지 말자고요. 맑은 샘물이 솟아 나와서 흘러갈 때, 자기가 맑다고 이야기를 안 하고 흘러가잖아요. 그냥 솟아나올 뿐이지요.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먹어보고, 또한 산새들이 그 물을 찍어 먹어보고, “아, 물이 참 맑구나, 차구나” 이러지 않느냐는 거죠. 시인들이 스스로를 마치 세상의 무엇인 양, 그럴 필요가 없질 않느냐 하는 겁니다. 시인들이 너무 거창해요. 제 생각에는, 시인이란 그저 세상에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듯이 그냥 존재할 뿐이거든요. 시도 마찬가지로 존재할 뿐이고요. 그러니 뭐, 아주 소박하게 저도 제 시도 그저 존재해 온 것이랄 수 있겠어요. ■ 김명원: 선생님의 시처럼 너무도 진솔하고 소박하게 대답을 해 주셨네요. 이런 진실 된 아름다움을 저희들이 배우고 깨우쳐야 할 텐데요. 질문 드리기 저어되지만, 선생님의 겸양적 성품은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일까요? □ 나태주: 예전에 한양출판사에서 나온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라는 사람이 쓴『인도 방랑』이라는 책을 좋아했는데요. 책의 서문에 이런 말이 나왔지요. 사진을 찍으려고 인도에 갔는데, 사실 별 생각 없이 대충 갔대요. 그런데 돌아다니다 보니 인도가 좋아져서 10년 정도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여행도 하면서 있다가 왔다고 해요. 그런데 그 즈음에 만난 한 젊은이가 인도에는 왜 갔느냐고 묻더래요. 순간 할 말이 갑자기 없어지더라네요. 그래서 한참 동안 생각을 하다가 내놓은 답이 ‘나한테 내가 지기 위해서’였다고 썼더라고요. 그렇다면 신야라는 사람은 인도에 가서 자기가 자기에게 지는 법을 배웠으니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술 마시고서 참 불편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술 마시고 술한테 안 지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술 마신다는 게 무언가요. 술한테 지기 위해서 마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술한테 점령당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한테 잡아먹히려고 마시는 거거든요. 그런데 술을 마시면서도 전혀 술한테 안 잡아먹히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결국 되레 취하게 되지요. 취할 수밖에요. 그래서 후지와라 신야의 ‘내가 나한테 지기 위해서 인도에 갔다’라는 말을 듣고는 이젠 슬슬 좀 나한테 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지요. ■ 김명원: 오늘 찾아뵙고 참 귀중한 말씀을 얻고 갑니다. 억세게 탐욕스러웠던 저 자신에게 지는 방법을 저도 터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날들 중 가장 행복하셨던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세요? □ 나태주: 까까머리 초등학생이었을 때, 제 고향 서천지방에서 저는 외할머니랑 둘이서 사는 아이였습니다. 외갓집 마을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집, 꼬작집에서였는데요. 그 서향으로 비틀어 앉은 꼬작집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아주 잘 보였지요. 유리로 보는 세상처럼 맑고도 깨끗한 세상이었어요. 하늘이 우선 크게 보였고, 마을의 집들이 눈 아래로 보였고, 방문만 열면 봉긋한 산봉우리 하나가 이마를 치며 와락 달겨들기도 했고요. 이름 하여 천방산이었는데, 그 천방산이 서천지방에서 제일로 높은 산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뒷날의 일이었지요. 또 서남방으로는 고개가 하나 보였어요. 넉배재라는 황토빛 비단 피륙을 풀어놓은 듯한 고개는 길고 긴 곡선의 길을 끌고 어디로인 듯 멀리 사라지고 있었는데요. 외할머니는 가끔 그 넉배재를 넘어 질매장이란 델 다녀오시곤 했지요. 질매장은 시오리라던가, 이십리라던가… 아주 먼 곳이라 했는데, 세상에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했어요. 군입정거리를 사오시곤 했고요. 오늘은 무엇을 사 오실까? 학교에서 일찍 돌아온 저는 방문을 열어젖히고 넉배재를 바라보며 질매장에서 돌아오는 외할머니를 기다리곤 했죠. 차라리 외할머니가 들고 오는 장보따리 속에 들어있을 군것질감을 기다렸다는 말이 더 옳았을 것이에요. 가난했지만 외할머니와 토방에서 살았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고요. 그리고 지금이 또 행복합니다. 늙은 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좋은지요. 젊은 시장에게 ‘그래’라고 해라체로 말해도 그냥 넘어가주고, 조금 실수가 있어도 노인이 그랬으려니 질끈 눈감아 주기도 하니까요. 게다가 죽었다가 살아나고 나자 딱지가 떼어내 지고 난 후 새 살이 돋듯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대단해요. 예전에는 세상이 나빠서 내가 잘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세상은 여전히 반짝이고 아름다운데 내가 너덜 너덜거리므로 세상을 그렇게 바라 본 거더라구요. 저의 인식 체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요즘은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로워졌어요. 그래서 지금이 얼마나 마음 편하고 좋은지 몰라요. ■ 김명원: 선생님께서는 현재 공주문화원장으로 계시지요. 공주의 문화를 창출하고 홍보하는 요직에서 느끼시는 점들이 있다면요. □ 나태주: 2009년 7월부터 공주문화원장 일을 맡았습니다. 임기가 4년인데 이제 절반쯤 지나가고 있네요. 봉급은 없고 약간의 활동비가 있는 비상근직이에요. 그래도 공주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돕고 후원하는 위치에 서서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해요. 퇴임 전까지 ‘시인교장’이란 말을 들었는데, 이제 ‘시인원장’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은 나름대로 내 인생에서 좋은 경험이요, 기념이라고 여깁니다. ■ 김명원: 선생님의 좌우명을 여쭤 보아도 되겠습니까? □ 나태주: 예전에는 ‘최선을 다하자’였습니다. 중간엔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이었다가, 요즘은 ‘아침을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저녁을 세상 마지막처럼 정리하며 살자’로 바꾸었어요. 요즘은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버킷 리스트로 채워져 있지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최초의 날인 것처럼 산다면 이 버킷 리스트를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의 날들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백년을 사는 것과 나의 날들이 적다고 생각하며 일년을 사는 것과는 인생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겠어요? 죽을 동 살 동 살아야 합니다. 싸우듯이 전쟁하듯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놓을 때는 팍 놓아야 하죠. 제가 정년퇴임 후 4년 동안에 시집『지상에서의 며칠』,『시인들 나라』, 산문집『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풀꽃과 놀다』등 12권을 출간했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책을 안내고 쉬려고 하는데 시는 열심히 쓰려고 해요. 또 언제 출간할지는 모르겠지만, 죽은 지 50년 된 외국 시인들의 시들로 ‘명시 산책’과 제 시를 중심으로 해설을 붙인 ‘청소년을 위한 시 감상’집을 준비하고 있고요. 생명이 허락되는 한, 열심히 쓰고 읽고 배우고 말하고 일하고 그러려고요. 이것이 저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지요.
날이 개면 시장에 가리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힘들여 페달을 비비며
될수록 소로길을 찾아서 개울길을 따라서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 새로 피어나는 과꽃들 보며 가야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할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이라도 불 것이다
어느 집 담장 위엔가 넝쿨콩도 올라와 열렸네 석류도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고개 내밀고 얼굴 붉혔네
시장에 가서는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리라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 가지고 오리라. -「희망」전문
김명원의 시인탐방[16]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공자가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고 말한 것처럼 사邪와 잡雜이 없는 깨끗한 영혼이 나태주 시의 정신이고 시인이 설파하는 삶의 희망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지금’, ‘곁’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생님의 시「희망」에서처럼 ‘자전거를 타고 ‘소로길’과 ‘개울길’을 지나 이웃들과 악수하는 삶, 소박한 이야기가 있고, 생활의 땀 냄새가 배어 있고, 아내의 심부름으로 시장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희망으로 노래하는 나태주 시인, 선생님께는 작은 사랑과 생명에의 레토릭이 있다. 어렵지 않게 읽혀지고 전달해져 오는 시적 형상, 노래 운율처럼 불리게 하는 시적 생기, 낯익고 지극한 삶일수록 소중하다고 속삭이는 작고 낮은 기적들이 감사로 약동하는 것이다. 결국 나태주 시인의 지극한 서정성이란 시로써 빛날 때 가벼워지고, 삶으로써 드러날 때 두터워진다. 그리고 무수한 세월이 지나 지금이 되어도 변함없이 ‘나태주’ - 공주를 끝끝내 지키는 향토시인 나태주, 학생들에게 시를 심어준 시인교장 나태주, 풀꽃을 섬세하게 그리는 연필화가 나태주, 구름과 새와 강물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나태주, 사진을 찍어 반드시 보내주는 사소한 약속마저 지키는 인간 나태주, 후배 시인들에게 시의 길을 원력으로 제시하는 시단의 큰 스승 나태주 등 수많은 사랑의 모습으로서 언제나 우리에게 방순하게 존재하시는 것이다. 대담을 하기 위해 만나 뵈었을 때도 선생님께서는 여느 때와도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중절모를 쓰시고 공주문화원 앞에서 기다리셨다가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다정하게 맞아 주셨다. 그리고 긴 시간을 시간가는 줄 모르도록 너무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다. 모든 문학 행사장에서 뵐 때마다 항상 수첩을 꺼내 메모하며 누구의 말에도 경청하시는 겸손한 모습, 격려 뿐 아니라 적절한 충고를 잊지 않으시는 스승으로서의 면모, 이웃 주민들을 푸근하게 대하시는 정다운 미소, 그런 선생님을 나는 언제라도 마음에 품고 연애할 것이다. 봄이 무르익고 있다. 오늘은 저 봄 속을 걸어보아야겠다. 아마도 선생님의 친구인 구름과 햇빛과 새와 풀꽃들이 나를 알아보고, 나를 졸졸졸 호숩게 따라올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도 친구해 주겠다고, 어쩌면 정다웁게 말 걸어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