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어린양
어릴 적 여름성경학교 때 노래도 좀 하는 연극에 출연했 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였는데 제가 이사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린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하자 이 사악이 노래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제가 뭘 잘못했나요? 하느님 말씀 잘 들었고요, 거짓말도 전혀 하지 않았어요.” 40년쯤 된 추억인데 이상하리만치 이 노래는 가사도 가락도 생생합니다. 참고로 저는 잘못도, 거짓말도 무수히 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진 어린 아들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 까?”(7절) 하고 묻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8절) 부자(父 子)는 번제를 바치러 산에 오르는 중입니다. 번제(燔祭)란 가 죽 벗긴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태워 연기로 바치는 희생 제사를 말하는데, 이로써 죄를 씻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레위 1장 참조). 어린 아들은 번제를 바치러 가는 아버지가 제물로 쓸 짐승을 잊은 걸까 조바심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아브라함도, 하느님도!) 번제물을 한시도 잊은 적 없습니다. 아들의 걱정에도 아버지는 무사히 제사를 지냈을까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1,29)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그분은 요한보다 “앞서신 분”이며(요한 1,30)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자(요한 1,33)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요한 1,34). 요한은 이토록 신비롭고 특별하고 은밀한 분,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상징적 표현으로 요약해버립니 다. 어째서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날에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대신해 죽었습니다(탈출 12장 참조).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말로 예수님이 바로 세상을 위한 대속(代贖)의 희생 제물임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 종은 하느님께서 마음에 들어 선택한 종으로,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칠 종이자 만민의 빛이 될 자입니다(이사 42장 참조). 동시에 그는 ‘고난 받을 종’입니다. 입 한 번 열지 않고 온갖 굴욕을 참아 받으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억울 한 재판을 받고 죽어갈 종입니다(이사 53장 참조).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 아브라함 과 이사악을 돌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어린양’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분 예수님께서 내 죄를, 우리 죄를,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당신을 내어주십니 다. 흠도 티도 없는 그 어린양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섭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 1,14)
- 유환민 마르첼리노 신부 /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