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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2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he appointed twelve to be with him; and he called them apostles. He wanted to send them out to preach, and he gave them authority to drive out demons.
(마르코 3,13-19)
말씀의 초대
사울은 다윗을 찾아 나선다. 그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윗을 보호해 주셨다. 그러기에 오히려 사울이 죽을 위치에 있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해치자고 하지만, 다윗은 반대한다. 그 또한 하느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다. 당신의 일을 함께 할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사도라고 부르신다. 주님의 심부름꾼이란 표현이다. 열둘을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구원하시겠다는 암시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일을 계승하게 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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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수석을 좋아하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의 집에서 아름다운 돌을 보았습니다. 돌의 모양새가 너무 마음에 들어 부자는 값은 충분히 줄 터이니 그 돌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돈을 바라며 팔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도 부자는 몇 차례나 더 그를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핑계를 대며 머뭇거렸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돌의 가격’을 더 올릴 방도를 궁리하다가, 예쁘게 갈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정성스럽게 돌을 갈았습니다. 다음 날 부자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허세를 부리며 갈아 놓은 돌을 내놓았으나, 부자는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꾸미고 가꾸었더라면 선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꾸미고 싶은 마음은 언제라도 유혹인 것이지요.
제자들은 훗날 예수님의 일을 계승합니다. 평범한 그들을 스승님께서는 사도로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지식과 학식으로 꾸며진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복음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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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주연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배우는 조연의 역할을 거친 뒤 주연으로 발탁됩니다. 어떤 조연의 역할이든 확실히 소화할 수 있어야 주연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 없이 돈이나 ‘백그라운드’로 주인공이 된다면 극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연극만이 아닙니다. 현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연이어야’ 하는데 ‘조연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자유가 아닙니다. 자신과 이웃을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착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열두 사도 역시 모두 조연들입니다. 예수님을 돕기 위해 선택된 분들입니다. 물론 그분들도 언젠가는 주연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능력을 강화시켜 주십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까지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능력은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진실’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본분을 기억하고 살았기에 사도가 되었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엔 조연인데 ‘주연인 듯’ 행동하고, 주연인데 ‘조연처럼’ 처신하는 이들이 늘어 가고 있습니다. 착각을 깨지 못한 결과입니다.
주님 뜻에 좀 더 가까이
- 강인봉-
어렸을 때부터 성당이라는 분위기에 익숙해져 왔고 천주교 신자라는 나름대로의 자부심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몇 번인가의 위기도 있었고 쉬는 기간도 꽤 있었습니다. "에이, 성당 안 나가."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결국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신앙 문제라기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실망하거나 상처 받는 일이 원인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이긴 하지만 모두 생각이 같을 수 없다 보니 갈등은 늘 존재하기 마련인데 그 핑계를 엉뚱한 곳에서 찾곤 합니다.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녀님이 너무 답답해서" 주님을 외면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나 학식을 가진 사람이 아닌 너무나 평범하고 오류도 많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고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큰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주님께서 가장 가까이하고자 하셨던 '어린양'의 모습이 아닐까요? 나중에 당신을 배반할 제자까지도 받아들이시는 모습에서,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제자를 반석으로 삼으시는 모습에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 ·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합니다. 생각도 다를 수 있고 어떤 일을 함께하는 과정에서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주님 뜻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근사한 설렁탕집> -양승국신부-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음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간의 고통들, 영육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십니다. 하루 온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원뿔 -김연희 수녀- 예수님이 호숫가에서 산으로 가십니다. 산은 활동 장소인 호숫가와 달리,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양승국신부-
<희망의 주님>
산을 좋아하는 아주 좋아하는 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한해의 마지막 순간과 새해의 첫 순간을 산꼭대기에서 보냅니다. 살을 에는 추위도 상관없습니다. 어둠을 뚫고 기를 쓰고 올라갑니다. 뿐만 아닙니다. 뭔가 일이 꼬이면 산을 찾습니다.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도 산을 오릅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산을 향합니다.
신기한 것은 산만 갔다 오면 언제 그랬냐는 얼굴입니다. 말짱한 모습으로, 명랑한 모습으로 다시 산뜻하게 일과로 복귀합니다.
저도 가끔씩 산에 오르는데,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산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인간에게 선사합니다. 우리를 치유시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아줍니다. 우리에게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를 건네줍니다. 강한 자연치유력을 선물로 줍니다.
언젠가 산 정상에서 하루를 지냈는데, 자정 무렵 밤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세상에, 하늘이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밤하늘은 해가 없기에 그저 어두컴컴한 하늘, ‘별 볼 일없는’ 하늘로 알았는데, 매 순간 별빛의 축제가 계속되는 황홀한 하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녘 구름바다 사이를 뚫고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떠오르는 신비스런 색조의 태양에 만물이 제 색깔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묘한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마음 깊숙이 다시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이 일어났습니다. 좀 더 넓게 생각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기쁘게, 좀 더 행복하게, 좀 더 여유롭게 살아가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산으로 오르십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도 힘드실 때 마다 산으로 가신 것 같습니다.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참 인간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수난의 고통, 빤히 예견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너무나 괴로우셨던 예수님, 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때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구름 같은 백성들로 인해 피곤을 느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끝도 없는 그들의 현실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다 보니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하셨던 예수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역시 아주 중요한 일, 당신 사업의 최측근 협조자, 사도단을 선발하시기 전, 심사숙고 하시러 산으로 향하셨습니다.
열렬한 기도 끝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사이동’ 명단을 발표하십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심사숙고와 오랜 기도 끝에 선발된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는 ‘안심’ ‘편안함’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부족한 사람들, 우리처럼 나약한 사람들, 우리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듬뿍듬뿍 희망만 선물로 안겨주시는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부르심의 첫 번째 목적 -전삼용신부-
요즘 저희 교구 한 신부님이 로마에 일이 있으셔서 와 계십니다. 오늘 오전에 바티칸에 일 보실 것이 있어서 제가 차로 여기저기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 곳에 그 분을 내려드렸습니다. 그 분은 금방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빨리 차를 빼라는 것입니다. 저는 잠깐이면 된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저를 보고 한 경찰관이 ‘Vatene!’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한다는 것은 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뉘앙스 상으로는 “꺼져버려~!”하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이태리어를 못 알아들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외국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수위아저씨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태리 경찰들은 친절하지 않아요.” 저도 모르게 그 한 사람의 잘못을 이태리 경찰 모두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나중에 그 중에 몇몇만 좋지 않고 친절한 경찰들도 많다고 말을 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수위아저씨도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경찰직을 삼십 년 이상 한 분입니다. 아저씨는 저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생각해버리는 저의 잘못도 없지는 않지만, 또한 크게는 그리스도인, 작게는 사제의 한 명으로서 전체 그리스도인이나 사제들을 욕 먹이게는 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래에 교황 요한바오로 2세나 마더 데레사 성녀가 가톨릭의 인상을 좋게 했었습니다. 성인 몇 명이 전체 종교의 이미지를 좋게 한다면, 반면 몇 명의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신자들이 그 이미지를 깎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르심을 받을 때 주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불러주신 이유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단순한 일꾼을 뽑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꾼들을 뽑으실 때 첫 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머물고 관계를 맺고 또 가르쳐 또 다른 당신의 모습을 지닌 제자들을 만드는데 있었습니다. 그 다음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고민하여 뽑으신 첫 번째 목적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는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본당에 있다 보면 어떤 때는 너무 바쁜 나머지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는 외적인 일에 더 치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항상 실수를 하고 안 좋은 모습을 신자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기도가 우선인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떤 좋은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한 명의 경찰관을 보면서 다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채우고 활동은 그 다음 소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실 ‘저런 신자 때문에 성당 나오기 싫어요!’란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르심의 이유가 그 분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다른 것은 이차적인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도록 합시다.
열혈당원 시몬처럼 - 이창걸- 지난해 10월 28일 아침에 은퇴하고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며 지내시는 김수창 신부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혼배성사를 집전해주신 신부님이시다. “시몬, 잘 지내지? 영명축일 축하해.” 몇 년 만에 신부님과 통화를 해서 반가웠고 더구나 성 시몬 축일도 모르고 바쁘게 생활하는 중에 신부님의 축하 전화는 힘이 되었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줍시다..
소명과 사명 -이중섭 신부-
-문화순 수녀- 알래스카에도 사계절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음과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짧지만 사계절이 엄연히 존재하고 자연은 짧은 기간에 자신의 소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천국의 계절인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면 초록으로 빛나던 잎들이 8월 중순부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9월 중순까지 절정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50배가 되는 이곳은 자연의 보고다. 한국과는 달리 노란 단풍만 있는데 잎들이 노랗게 변하면 천지에 노란 등불을 밝힌 듯 아름답다. 바람에 나뭇잎이 사뭇 떨어지고 숲속 작은 집들이 불을 밝히면 이곳이 동화 속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안 간다. 다섯 시간을 차로 달려도 단풍숲이다. 저절로 하느님 찬미가 나온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인데도 한국 관광객들은 시시하다며 실망한다는 것이다. 돈 들여 꾸며놓은 곳이 아니므로 볼 게 없다는 것이다.
부르심 - 김홍태 신부 -
1. 예, 하느님은 우리의 가능성을 보고 부르십니다. 2. 그 다음은 우리를 부르셔서 어떤 목적으로 쓰실 것인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3. 하느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말은, 내 시간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맡겨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름 부르기 -이회진신부-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죠, 어떤 이는 그 이름을 아름답게 세상에 남기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추하게 남기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사람들을 부릅니다. 제자들 중 눈여겨 보아 두었던 12명의 이름을 불러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눈여겨 보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 이름은 이제 세상에 남았다가 사라질 그런 이름이 아니라,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이름, 하늘에 남겨질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갈릴래아의 이름없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자 이제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불같던 성격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어 오늘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사랑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같은 동포의 돈을 걷어 로마 정복자에게 바치면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마태오는 오늘부터 하느님 말씀의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이름이 자신의 삶에 의미가 되도록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무지랭이 촌구석 어부가 신앙인의 반석이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칼만 들고 설치던 열혈당원 시몬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다 순교할 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이름을 예수님이 불러주시자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꽃과 같이 아름다운 생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우리에게,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을 주는 의미 있는 이름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담아두고 계십니까? 어머니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동생이나 언니의 이름, 친구의 이름, 아니면 나와 오늘 이 공동체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이름들을 어떻게 부르고 계십니까? 예수님처럼 마음에 담아둔 사랑으로 부르고 계신가요? 아니면 지난 날 내게 아픔을 준 것 때문에 미운 마음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계신가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이 내 삶의 의미가 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오늘 예수님처럼 마음에 담아 불러준다면 그는 이제 더 이상 내게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을 함부로, 막, 아무렇게나 부른다면 그 이름은 허공에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 이상이 아닙니다. 소리라면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부르는 이가 그 이름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누군가의 이름을 세상에 살아있는 꽃이 되도록 불러본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누군가의 이름을 세상에 살아있는 의미가 도도록 불러본 적이, 혹은 여러분의 가슴에 사랑이 되도록 불러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매일 많은 이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리고 압니다. 그 소리에 사랑이 담겨 있는지, 희망이 담겨 있는지,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압니다. 그리고 느낍니다. 그 소리에 사랑이 담겨 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 그 목소리에 희망이 담겨 있을 때 이 땅에서 그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용솟음쳐 오는 지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소리에 의미가 담겨 있을 때, 나도 세상에서 생명을 피울 수 있는 꽃이 될 수 있다는 것마저, 다른 이의 생명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마저 느끼게 합니다. 이름을 부를 때, 그리고 그 이름을 기억할 때, 여러분 자신의 이름만을 기억하며 부르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름을 마음에 담아 부르십시오, 그러면 그 이름들이 살아나 꽃이 되고, 힘이 되고, 생의 의미가 되어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오늘 제가 부르는 이름이 제 삶에도, 그의 삶에도 의미 있는 이름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꽃 김 춘 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를 아십니까? -이기양 신부-
하늘의 별처럼 -이수철신부- 다음 대목이 언뜻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제 너희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다.”(신명10,22ㄴ). 어둔 세상에 기쁨으로 반짝이는 별들처럼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빛나는 별들처럼 솟아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찬미와 감사로 빛나는 별 같은 인생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허무와 고독의 어둠을 몰아내고 빛과 기쁨으로 가득 채웁니다. 믿는 이들에겐 의미 충만한 인생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제자공동체를 형성하십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 역시 주님께서 부르신 이들입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둔 세상 기쁨으로 빛나는 별들처럼 살라고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수도승적 측면과 선교사적 측면이 함축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내적 충만의 관상적 삶이요, 여기서 자연스럽게 열매로 드러나는 복음 선포와 구마활동의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관상적 수도승의 삶 자체가 그대로 선교사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관상의 깊이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넓이에로의 선교 활동이 자연스런 순리입니다.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우리의 대사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삶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주님과의 깊은 친교를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이런 아버지와의 신뢰와 사랑이 깊어질수록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삶이요, 안팎으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양승국신부- <이 사람 정도라면> 예수님에 대한 오랜, 그리고 면밀한 예의주시 결과 바리사이들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로, 조만간 처형대에 세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첫 번째 수순으로 헤로데파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만민의 구원과 세상의 복음화란 사명을 지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녕 큰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신이 시작한 전도 사업이 이제 출발선에 서있을 뿐인데, 그 세력이 만만치 않은 흉악한 적대자들로부터 치명적인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제 막 구원사업을 시작한 예수님인데, 벌써 생명의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고민이 크셨겠지요. 피를 말리는 번민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의 고민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결국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당신 사업을 계승하고 협조할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사도들의 선발은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중대한 선발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들어가십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사도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렬한 기도 끝에 선택하신 사도들의 명단은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 특히 ‘가방끈이 긴’ 사람들, 재력가들, 명망가 출신의 사람들, 공직자들, 전문가들...그들은 내심 자신의 이름이 사도들의 명단에 포함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발표되는 이름 하나 하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많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사도들은 대부분 소박한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사도들의 명단에는 당시 잘 나가던 바리사이 사람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대사제나 율법학자들도 없었습니다. 하나같이 정통 유다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인 면에서나 ‘이 사람 정도라면’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이렇게 모든 것을 뒤집는 분이셨습니다. 알량한 인간적 지식이나 하잘 것 없는 지식으로 교만에 들뜬 인간들의 생각을 꺾어놓으십니다. 인간적 야심이나 사리사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가장 밑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하십니다. 그 유식하고 잘난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과 함께가 아니라, 그 부족한 사도들을 주추삼아 당신의 사업을 전개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성격이 좋아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뛰어나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아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자라서 부르시지 않습니다. 일을 잘한다고 부르시지 않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세속적 야욕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불같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 때문에 부르십니다. 결국 주님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이토록 형편없지만 언젠간 반드시 그분께로 돌아설 사람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정말 보잘 것 없었던 사도들을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흠도 티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쓰러워서, 죄인이어서, 병자여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셔서, 우리 내면 안에 긷든 변화 가능성을 눈여겨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허세를 부릴 일 하나도 없습니다. 뻐길 일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어깨 으쓱할 일도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기쁜 얼굴로 ‘예!’ 하고 따라나서는 일, 주님의 부르심에 지속적으로 응답하는 일, 고달픈 매일의 성소여정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것이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도 부족한 우리를 생명에로 부르신 자비의 하느님께 찬미 드리는 일. 부족한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은총의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일이 부르심 받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모으기와 가르기 -박상대신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어제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1단계 활동은 마무리됐다.(1,14-3,12) 오늘 복음으로 예수님의 제2단계 활동이 시작된다.(3,13-6,6) 우리는 예수님의 제1단계 복음선포의 활동을 통해서 복음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았다. 인격적 매력까지 지니신 예수께서는 몇 사람을 뽑아 가까이 두시면서 가르침과 병자치유 및 구마기적을 통하여, 그리고 죄사함과 안식일법,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한 식탁공동체 등의 문제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은 특별 부류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밝혀 주셨다. 그러니까 제1단계 활동은 예수님의 탐색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2단계 예수님의 활동은 비유설교와 병자치유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의 핵심적 의도는 설교와 치유에 있다기보다 이를 통하여 ’모으기’와 ’가르기’를 하는데 있다. 복음의 본질이 원래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제2단계 복음선포 활동의 시작으로서 전형적인 ’모으기’ 작업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일단 산으로 올라 가셔서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놓고 그 중에서 열두 명을 뽑아 제자로, 그리고 동시에 사도로 삼으셨다. 복음의 보도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눈을 감고 이 장면을 재구성하여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 주교서품식 내지는 사제서품식과도 같은 것이다. 산은 거룩한 장소다. 산은 야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다. 산은 기도하는 곳이며, 하느님의 영(靈)과 명(命)과 계약을 받드는 장소이다.(출애 3,1-4,17; 19,1-31,18; 1열왕 19,8) 그 옛날 시나이 산이 바라보이는 광야에서 모세를 시켜 이집트를 탈출한 온 이스라엘 백성을 12지파로 갈라주신 하느님처럼 예수께서도 이러한 산에서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신 것이다. 12명의 제자를 특별히 뽑아 세운 목적 또한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선발의 목적은 "열둘을 당신 곁에 있게 하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14-15절)이다. 이 목적을 하나씩 분석하여보자. 첫째, 열둘을 예수님 당신 곁에 두게 하심은 그들을 제자(弟子, disciple)로 삼는다는 뜻이다. 열둘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운 것이 없으면 가르칠 수도 없을 것이 아닌가. 둘째,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심은 그들을 사도(使徒, apostle)로 삼으심을 의미한다. 사도란 실제로 세상과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제자로서 배운 바를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신다 함은 복음선포의 목적이 하느님의 구원임을 뜻하는 것이다.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은 늘 마귀의 세력에 노출되어 있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도 그렇거니와 세상을 향한 사도들의 파견도 마찬가지로 마귀의 세력을 세상에서 몰아내고 하느님의 영(靈)이 다스리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2제자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마르코복음의 12제자 명단은 마태오복음(10,1-4)과 루가복음(6,12-16)의 명단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요한복음에는 아예 없다. 마르코는 12제자들 중에서 시몬을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열거하지 않고 ’베드로’ 라는 이름을 붙여 따로 떼어놓았고, 베드로 다음 자리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배치하고 그들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들) 라는 이름을 덧붙였다. 베藥? 야고보, 요한은 예수께서 특별히 아끼던 제자들이었고, 이들은 마르코복음에서 예수활동의 특별한 목격자이자 동시에 증인이 되기도 한다.(5,37; 9,2; 14,33)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는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배반자였으니(14,10) 꼴찌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줄을 처음부터 아셨을 것인데 왜 제자로 뽑으신 것일까? 예수께서 차라리 그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나, 성서의 기록이 성취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14,21)고 말씀하셨지만, 유다의 선발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유다를 수없이 보아왔다. 어쩌면 나도 그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를 경계로 삼아 우리 자신의 제자와 사도의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E-Mail 답장은 받은 즉시 해야 감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에 하지 뭐, 시간나면 하지 뭐.. 이런 식의 마음 때문에 감응을 잃어버려서 답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E-Mail을 받고 곧바로 답장을 했을 때는 어떤가요? 그 상대방과 소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저 스스로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매 순간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뜨거운 감응을 갖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음에 하지 뭐, 나중에 시간나면 하지 뭐...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님께 답장을 드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렇게 미루고 미루면, 결국 처음에 느꼈던 감응이 사라져서 결국은 주님과 아무런 관계도 아닌 것이 됩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를 절대로 내치시지 않습니다. 마치 E-Mail 교류를 통해 점점 친분이 쌓이는 것처럼, 주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수록 친분이 점점 쌓여져서 매순간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라는 구절을 보입니다. 산은 성경에서 거룩한 곳, 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해서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게 하고, 예수님의 사명인 복음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처럼 지금 우리들에게도 주님의 부르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당신의 사명인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우리들을 끊임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곧바로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지요? 혹시 다음에 하지, 나중에 시간나면 하지 뭐.. 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늘 열심히 일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나이도 들만큼 들었으니 그만 쉬어도 되지 않겠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결승점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만 멈추어야 하겠는가?”
이렇게 끊임없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타협과 안일한 마음으로 대충대충 살아간다면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불충한 제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승점이 가까워졌으니 더욱 더 힘내어 그 결승점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시와 권위가 드러나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는 묘사는
관상할 때마다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완전하게 일치를 이루신 예수님 주위를 빙 둘러서
열두 사도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참 행복을 선언하셨던 장소(마태 5장 이하)와
연결해봅니다. 마이크도 확성기도 없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그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군중들에게 직접 가까이 다가가 그 복된 말씀을
전합니다. 이 모습을 아주 큰 원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그 원은 점점 더
확장되어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한 점에서 시작하여 여러 개로 퍼져나가는
원입니다. 옆에서 보면 하나의 원뿔입니다. 교회의 구조를 피라미드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계제도의 상하를 구분해놓습니다. 수직선에
초점을 맞춰서 강조하기보다 수평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일치선을 이으면
최종적으로 우리는 파견하신 예수님을 향해 모아지는 원뿔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모습입니다!
87년 세례 받을 때 대부님인 김영섭(시몬) 님이 “대자도 시몬으로 해서 큰 시몬, 작은 시몬 이러면 어떨까?” 해서 세례명을 시몬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이 시몬이 시몬 베드로의 시몬인지, 아니면 십자가의 길에 나오는 키레네 사람 시몬인지,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분인 혁명당원 시몬인지 잘 몰랐다.
1998년 세례를 받은 지 11년 만의 일이다. 미국 연수 시절 보스턴에서 성령 세미나를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삶의 방향이 달라졌다. 귀국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호스피스 활동을 하다 실장으로 6년간 근무하고, 2000년 대희년에 병원에서 가톨릭 신자 동아리인 등잔회를 만드는 산파역을 했고, 병원에서 천주교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수녀님을 도우면서 봉사하고 있다.
근무하던 과에서 99년부터 전 직원이 함께 모여 매주 성경 공부와 기도모임을 해오던 것이 이제 암센터 월례모임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내가 영동세브란스병원 방사선종양학과로 파견나간 2007년 3월부터 과 직원들과 시작한 매주 기도모임에서 탈출기와 마르코복음서는 이제 모두 끝낸 상태다.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면 내 본명은 열혈당원 시몬이 분명하고 그 시몬 성인의 열정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낀다. 시몬 성인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별로 없다. 예수님이 사도로 뽑기 전까지 유다인의 독립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한 당원이었고 예수님의 사도로서 활동하다 순교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신앙 활동은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만큼 없는 시간을 내야 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손해가 많을 수도 있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래도 해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명을 받은 시몬 성인이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시몬 성인의 옷자락만큼도 못되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소리 없이 그러나 열혈한 마음으로 시몬 성인의 길을 따라가려 한다.
어떤 청년이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청년은 그날부터 그 아가씨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지요.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는지에 대한 말을 종이에 가득 써서 보냈습니다. 한 통, 두 통, 편지는 매일 아가씨에게 배달되었지요. 그러나 청년은 아가씨 앞에 쉽사리 나서지 못했습니다. 편지에는 그토록 절절한 사랑을 담아 보내면서도,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타기 때문에 혹 아가씨로부터 거절을 당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던 것이지요. 아가씨는 거의 매일 청년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 왔습니다.”
우체부의 목소리가 들리면 아가씨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르며 뛰어 나갔지요. 이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청년이 보낸 편지도 600통 가까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600통이나 사랑의 편지를 받은 아가씨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의 모습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의 신랑은 과연 누구일까요? 편지를 보낸 청년이라고 생각되지요? 하지만 이 순백의 신부를 맞아들인 사람은 바로 날마다 편지를 배달했던 그 우체부라고 하네요. 결혼식이 끝나고 누군가가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날마다 편지를 보냈던 청년이 아니군요.”
그러자 그 아가씨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백 마디 애절한 사연보다는 한 번의 따스한 눈빛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아가씨에게 애절한 사연을 담아 편지를 보냈던 청년은 분명히 그 아가씨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만 편한 사랑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편지로만 사랑을 전했던 것이지요. 오히려 적극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진실을 전했더라면 결혼식의 신랑은 우체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편안한 사랑을 선택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으로만 사랑을 실천했고, 내게 관계되는 사람만 그리고 나에게 잘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랑을 실천하곤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직접 뽑으시지요. 그런데 어이없는 것은 당신을 배반할 제자까지도 뽑으셨다는 것입니다. 앞일을 다 아시는 분께서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셨을까요?
바로 그 순간, ‘혹시 편안한 사랑만을 하려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경고의 메시지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최고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셨던 것이지요.
편안한 사랑, 이기적인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이 우리들의 사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야 우리 역시 주님의 선택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산으로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루카 6,12 참조). 그렇게 기도하신 다음 뽑은 사람들을 사도라 이름하고,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그들을 파견하여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무릇 소명에는 사명이 따르는 법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생명이라 합니다.
생명(生命)은 살라는 명령입니다. 생명체(生命體)는 살라는 명령이 몸을 이룬
것입니다. 생명에는 반드시 사명(使命)이 있습니다. 사명이란 살아 있는 생명이
이루어야 할 어떤 것입니다. 사명이 없다면 생명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사명은 살되,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소명과 더불어 사명을 받고, 새로운 생명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사명을 가진 인생, 사명을 가진 생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왜 사는 것인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 역시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을 충실히
따르며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열두 사도를 부르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사명도 주십니다.
우리 생명에 새로운 의미를 주시기 위해서.
단풍 등불
오늘 예수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셔서 열두 사도를 뽑으셨다. 12명의 사도를 특별히 뽑으셨지만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다. 물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그저 그렇고 별 볼일 없는 이들이 모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는 이런 별 볼일 없는 제자들을 통해 늘 위안을 받는다.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이는 날, 마음이 바늘구멍만하게 되는 날, 나 자신에게 실망하여 좌절하는 날 열두 제자의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는 것이다. 베드로의 다혈질적인 실수를 보면서,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던 야고보와 요한의 성급함에서, 남의 등이나 쳐먹는다는 세리였던 마태오, 오늘날 같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가담했던 열혈당원 시몬, 무엇보다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 이들이 예수님이 부르시고 세우신 제자들이다.
우리는 자주 주위에서 ‘백’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찾는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사귀어 보아야 내 돈만 쓰고 이익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높이 올라갈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문지식을 갖추지 않아도, 건강하지 않아도, 돈 없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도 나를 내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부르신다. 내가 가장 평범하고 별 볼일 없을 때 부르시는 것이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처럼. 내가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분이 쓰신다는데 그분이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겠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쓰시기 위해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무엇을 보고 부르실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몇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① 베드로
주님은 급한 성격(덜렁거림, 신중하지 못함)에다 겁도 많아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던 시몬 속에서 ‘베드로’라고 하는 교회의 반석을 발견하셨다.
② 야고보와 요한
주님은 천둥(번개)의 아들이란 별명을 가진 대로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속에서 교회의 기둥을 발견하셨다.
③ 토마
반드시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토마의 성격 안에서 주님은 신앙의 확실성을 보셨다.
④ 자캐오
주님은 사리사욕에만 정신이 팔려있던 자캐오 속에서 가난한 이들과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새로 날 희망을 발견하셨다.
⑤ 사울
주님은 극단적인 열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 속에서 오히려 역으로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강렬한 에너지를 발견하셨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오늘날은 우리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지식이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우리 신앙인들의 인생 가운데서 최대의 발견은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고,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성취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최선의 방법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는 순종의 대답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신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하고 헌신을 결심하면 그 뒤에 신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맡기십니다.
예) 마리아도 그러하셨다. 먼저 마리아의 그러한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
이 모든 성공이 부르심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필요에 응해 사는 헌신을 뜻합니다.
- 부르심이란 나의 명함을 버리고 낮은 곳이라 할지라도 기쁘게 내려가는 결심을 뜻합니다.
- 부르심이란 나의 체면을 포기하고 누구와도 함께 어울려, 주께서 주신 사명을 달성하겠다는 겸손을 뜻합니다.
- 부르심이란 어려운 환경과 핍박과 반대에 부딪치더라도 주를 위해 참으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봉사직을 맡아 달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1) 겸손해서... 2) 십자가를 지기 싫어서, 3) 욕먹기 싫어서...
- 어느 자매님이 저를 찾아와 엉엉 우는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봉사한다고 하는데 온갖 질시와 판단을 받으니 다시는 봉사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러니 누가 자기 시간 내 가며 봉사하려 하겠습니까? 약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직을 맡았으면 그 사람을 지원해 주고 밀어주어야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예) 저는 20대 초반 때 국가의 부름을 받고 군복무를 춘천에서 했다. 국가의 부름에도 응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이 부르시는데...
- 그러므로 부르심이란 하느님의 병사가 되기 위한 소집 영장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같이 읽어보시면 더 의미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기 시작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유심히 보시고 마음에 두신 열두 명을 뽑아 제자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운 목적이 오늘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㰡’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㰡“(마르3,14-15)
바로 말씀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고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셨고 이런 목적에 부합되게 제자들을 실습시키시고 파견도 하셨습니다. 마르코 복음 6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원래 뽑은 목적대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하시지요.
㰡’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㰡“(마르6,8-9)
오로지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라는 당부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파견된 제자들은 돌아와서 그에 걸맞는 결실들을 보고합니다.
㰡’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㰡“(루카10,17)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셨는데 제자들이 말씀은 전하지 않고 딴짓만 하다가 돌아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당부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㰡’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㰡“(마르16,15)
그 말씀의 실천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안티오키아, 터어키, 그리스, 로마, 아시아 그리고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와서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당부하셨지만 제자들에 의해 말씀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을 살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신자들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단지 나의 수신과 내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살고 그 말씀이 너무 기쁘고 복되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말씀을 전하는 것, 이것이 세례를 받는 목적이며 세례를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신자들을 도와주며 미사 전례 중에 하느님을 만난 신자들을 파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㰡’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㰡“
우리 삶의 모든 것은 복음의 선포로 귀결이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언행 속에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체험입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무서움에 숨어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뜨겁게 만날 수 있었지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2000년 역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발걸음에 성령이 함께 하셨고 또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면서 끝도 없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인 것이지요.
그러면 성체 안에서 만나는 주님, 그리고 말씀 안에서 체험한 주님을 실제로는 어떻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사가 끝나면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사제는 신자들을 파견합니다만 신자들은 입으로만 㰡’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㰡“하고는 그것으로 그만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이 내 삶과 가정과 사회 속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이 하느님을 전하지 않는다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의 몸을 모시는 미사 전례가 다 끝나고 㰡’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㰡“묻는 여러분에게 저는 언제나 이렇게 제시합니다.
㰡’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㰡“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또 파견하셨듯이 여러분들을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로서의 첫째가는 사명인 복음 선포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올 일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는 명확한 답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적어도 일 년에 한 명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하느님의 말씀이 내 삶을 움직이고 하느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였다면 어떻게 그런 분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함으로써 그분은 더욱 크게 살아 움직이고 살아 계신 주님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주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의 참 자녀로 거듭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새벽 성무일도의 신명기 독서 중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어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허무와 고독의 어둠에서
믿지 않는 이들이게는 허무와 고독의 어둔 인생이지만,
하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허무한 인생이지만
이래서 주님은 우리를 찬미의 수도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역시
다음 대목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재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공동체의 관상과 활동,
우선적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며 관계를 깊이 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게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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