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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용봉산
2025년 03월 15일(토요일)
산행코스 : 용봉산자연휴양림(10:15) - 최영장군활터(10:55) - 용봉산(11:15) - 노적봉(11:45) - 악귀봉(12:05) - 용바위(12:30) - 병풍바위(12:45) - 용봉사(13:00) - 자연휴양림(13:25)
산행거리 : 6km
용봉산 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갑니다.
자연휴양림에서 바라본 용봉산
복수초
노적봉 0.6km, 최영장군활터 0.5km, 산림전시관 0.2km
최영장군활터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미륵불 1.2km, 산림휴양타운 0.2km, 최영장군활터 0.4km
철제 난간길도 있습니다.
용봉산 방향 파노라마
최영장군활터, 노적봉
노적봉, 악귀봉
악귀봉
흔들바위
내포신도시가 보입니다.
최영장군활터 정자
유양림관리사무소 0.6km, 정상 0.3km
정자에서 바라본 오서산 방향 파노라마
홍성읍
우측으로 오서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우측 백월산
가야할 용봉산
뒤돌아본 최영장군활터
정상 0.1km, 노적봉 0.3km
용봉산 정상이 보입니다.
용봉산 정상
투석봉 0.22km, 노적봉 0.23km
사자바위를 지나갑니다.
악귀봉, 노적봉
덕숭산, 가야산, 악귀봉, 노적봉
산림휴양관 갈림길
정상 0.3km, 산림휴양관 0.7km, 노적봉 0.3km
뒤돌아본 최영장군활터, 용봉산
노적봉
정상 0.36km, 악귀봉 0.3km
노적봉
노적봉 정상 아래에 있는 옆으로 크는 나무
바위 위가 아닌 바위틈에서 옆으로 자라는 소나무입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오랜 세월 버틴 이작은 소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이겨내고 싶은 의지가 솟아오릅니다.
가야할 악귀봉
용바위, 병풍바위, 용봉사가 보입니다.
솟대바위
행운바위
작은 돌멩이를 던져 바위 위에 올려놓는데 성공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미 수많은 작은 돌들이 바위 위에 올려진 것을 보아하니 수많은 소원들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악귀봉 갈림길
악귀봉 100m, 노적봉 240m, 임간휴게소 170m
악귀봉으로 올라갑니다.
지나온 노적봉, 용봉산
악귀봉
전망대로 갑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덕숭산, 가야산, 두꺼비바위
당겨본 두꺼비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노적봉, 용봉산
악귀봉
물개바위
삽살개바위
정자
용바위, 병풍바위
임간휴게소
악귀봉 0.4km, 용봉사 0.3km, 윗가루실 1.1km, 정상 1.0km, 용바위 0.3km
신경리 마애여래입상 방향으로 내려갈수 있습니다.
임간휴게소에서 용바위로 올라갑니다.
용바위가 보입니다.
용바위
용바위에서 바라본 최영장군활터, 용봉산, 노적봉, 악귀봉
용바위, 최영장군활터, 용봉산, 노적봉, 악귀봉
병풍바위 갈림길
병풍바위 0.3km, 악귀봉 0. 7km, 최고봉 1.2km, 전망대(덕산)
병풍바위
의자바위 뒤로 최영장군활터, 용봉산, 노적봉, 악귀봉
용봉사 갈림길
구룡대 0.8km, 용바위 0.1km, 용봉사 0.3km
병풍바위
용봉사
돌계단을 내려가면 고려 시대 승려 수가 1천여 명에 달했다는 용봉사가 병풍바위를 등지고 앉아 있습니다. 백제 말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용봉사는 조선 후기 평양 조씨의 가문에서 조상 묘를 만들면서 폐사시켰다고 전합니다. 용봉사는 수덕사의 말사로, 절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으로 보아 백제 말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사채
정면 5칸 중 4칸은 스님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는 요사채이며, 용봉사 편액과 적묵당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용봉사(龍鳳寺) 편액
七月日 隱休子書(칠월일 은휴자서) 관지가 있습니다.
적묵당(寂黙堂) 편액
불기2532(1988)년 정월 심관(佛紀二五三二年 正月 沈貫) 관지가 있습니다.
용봉사지 석조(충남 문화재자료 제 162호)
용봉사 한쪽에는 용봉사지에 있던 석조(물통), 석구(절구), 마애(맷돌) 등 부조물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약사여래불
대웅전 앞 석축에 감실처럼 공간을 만들고 약사여래불을 안치하였습니다.
약사여래불이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약함을 받쳐 들고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보이는 시무외인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용봉사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리 주심포집으로 1982년에 새로 지었습니다.
카운데 칸에는 네 짝짜리 띠살문을, 좌우 옆 칸으로 두 짝짜리 띠살문을 달고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은 수덕사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역임한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2008) 스님이 쓴 글씨입니다.
아미타 삼존불
아미타불을 가운데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조선 숙종 15년(1689) 장희빈으로 널리 알려진 희빈 장씨가 아들 균(경종)의 탄생을 축하하며 아미타불 좌상을 제작하여 용봉사에 봉안하였는데, 1906년 평양 조씨가 터가 좋다는 용봉사를 없애고 조희순의 묘를 쓰고는 아미타불 좌상을 방치하자 서산 부석사로 옮겼다가 1980년 도난당했습니다.
아미타불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하품중생(또는 중품하생)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의 협시보살 역시 동일한 모습으로 손의 위치만 달리하여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아미타 삼존불 뒤에 걸려있는 후불탱화는 아미타회상도가 아닌 영산회상도이며,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주위에 10대 제자, 6대 보살, 사천왕, 분신불 2위, 발부중 3위가 묘사되었습니다.
칠성탱화와 신중탱화
칠성탱화
삼존불 좌측에 칠성단을 마련하고 2021년 비구니 태희가 조성한 칠성탱화를 걸었습니다.
치성광여래가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금륜을 받쳐 들고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의 수인을 하였고, 좌우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구슬이 표현된 연꽃 가지를 든 일광보살과 달을 상징하는 흰 구슬이 표현된 연꽃 가지를 든 월광보살이 협시하며, 상단에 칠여래를 두고 그 밑에 남극노인성을, 하단에는 칠성성군을 배치하였습니다.
신중탱화
칠성단 옆으로 신중단이 마련되어 있고, 1982년 돈웅이 그린 신중탱화가 걸려있습니다.
화면 중앙에 예적금강을 크게 부각시키고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을, 우측에 동지보살을 배치하였으며, 주위를 천부, 보살, 명왕, 무장한 신장 등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예적금강은 세 개의 얼굴에 각각 세 개의 눈이 달렸고, 송곳니가 뻗치고 머리 칼은 하늘로 치솟아 분노를 표현한 위압적인 인상을 하면서 등 뒤로 불꽃이 이글거리는 광배를 하였고, 원래의 두팔 외에 각종 지물을 든 여섯 개의 팔에 아홉 마리 용이 휘감긴 채 불 바퀴 위에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산신각
사각기둥을 세워 지은 산신각은 사방 한 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1998년에 신축하였습니다.
산신각(山神閣) 편액
전각 안에는 2021년 비구니 태희가 그린 산신탱화와 독성탱화가 걸려있습니다.
산신탱화
깊은 산속에 산신이 파초잎을 들고 무릎을 세운 윤왕좌로 풀방석 위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배 깔고 엎드려 왼쪽을 바라보는 흰 호랑이와 복숭아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처녀, 향로에 향을 넣고 있는 동자가 묘사되었습니다.
독성탱화
독성도 산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산중에 홀로 풀방석 위에 앉아 염주와 지팡이를 들고 앞을 바라보고, 뒤에는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학이 물가에서 물속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장전은 원래 1998년 극락전으로 복원하였으나 이후 아미타불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이곳에 지장보살을 안치하였습니다.
정명 3칸, 측면 3칸에 이익공 양식의 공포를 한 겹치마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으로 지었으며, 가운데 4칸에는 4짝짜리 띠살문을, 양옆 칸에는 3짝짜리 띠살문을 달았습니다.
지장전(地藏殿) 편액은 수덕사 덕숭총림 4대 방장을 역임한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 )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당 안에는 고주 사이에 불단을 조성하였고, 보궁형 닫집 아래 지장보살과 후불탱을 봉안하였으며 영산회괘불탱과 신중탱화를 걸었습니다.
지장보살
두건을 쓰고 머리띠를 두른 지장보살이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왼손을 다리 위에 올려 보주를 받쳐들고 오른손으로 육환장을 쥐고 있습니다.
지장보살 뒤에 걸려 있는 후불탱은 지장시왕 목각탱으로, 지장보살을 가운데로 좌우에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며 주위에는 열 분의 시왕과 판관, 녹사, 사자 그리고 옥졸인 우두와 마두를 비롯해 선악동자 등 여러 권속이 묘사되었습니다.
신중탱화
화면 중앙에 예적금간을 크게 묘사하였고, 좌우에 범천과 제석천을, 아래에 동진보살을 배치하였으며, 화면 전체를 천부, 명왕, 천룡팔부 등으로 가득 체웠습니다.
영산회괘불탱(축소모사본)
괘불이란 큰 법회나 의식을 치를 때 법당 앞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로, 용봉사 영산회 괘불탱은 석가모니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화면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두고 주위를 10대 제자, 8대 보살,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그리고 분신불 2구가 에워싼 구도를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하고 앉아 왼손을 배 부분에 갖다 대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으로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고, 상단에 분신불 2구와 10대 제자가 배치되었고, 그 밑으로 좌우 끝에서 화관을 쓰고 합장한 제적천(좌)과 원유관을 쓰고 조복을 입은 범천(우)이 제왕의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8대 보살과 사천와이 좌우로 반씩 나뉘어 배열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숙종의 아들이 일찍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저선 숙종 16년(1690)에 화사(畵師)는 해숙(海淑), 한일(漢日), 처린(處璘), 수탁(守卓), 덕름(德凜), 형린(泂璘 ), 심특(心特) 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 1년(1725)에 그림을 고쳐 그리고 적은 글이 그림의 아랫부분에 있습니다.
이 괘불도는 본존인 석가모니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 등에서 17~18세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중용한 작품으로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여겨 1997년 보물 제1262호 용봉사 영산회 괘불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크기는 615cmX508cm입니다.
관음보살
사각형 돌을 파내고 마애불처럼 조각된 관음보살이 왼손으로 정병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시무외인의 수인을 하고 있습니다.
조희순(趙義純)의 묘
원래 용봉사 자리에 염치없는 평양조씨(平壤趙氏) 희순의 묘가 터를 잡고 있습니다.
흥선군(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전하려고 가야사를 불태운 형태와 똑같은 짓을 평양조씨가 했는데, 그 당시의 사대부들이 명당터를 차지하기 위해서 절집하나 없애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안성의 칠장사도 원래의 터는 사대부에게 뺴앗기고, 현재의 자리에 재창건한 것입니다.
조희순(趙義純)의 묘비
조선가선대부 공조판서 평양조공 희순묘, 정부인문화유씨부재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 입상(洪城 新耕里 磨崖如來 立像) (보물 제355호)
마애여래입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까지 내려뜨려 법의(法衣: 불상의 옷) 자락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겨드랑이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밖으로 내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시무외인(施無畏印: ‘두려워하지 마라.’는 뜻의 손 자세)을 결한 불상들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불상은 왼손을 들어 올리고 있고, 오른손으로 법의 자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법인(說法印: 설법하는 손 자세)을 결한 듯합니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한손으로 옷자락을 잡고 다른 손을 들어올려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수인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된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에서 그 전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애여래입상은 통견(通肩: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를 착용하였는데, 가슴 앞부분에서부터 U자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배꼽 아래부터 옷주름 선이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지고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형식은 U자를 그리며 갈라져 양 다리 위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법의의 옷자락 표현이 통일신라시대 8세기부터 유행하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그 모습이 많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 입상(洪城 新耕里 磨崖如來 立像)
4m가 넘는 자연석의 한 면을 오목하게 파들어 간 다음, 여래입상을 고부조로 새긴 것입니다.
마애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입체적인 모습을 이 불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애여래입상은 머리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넓은 어깨에 비해 상체가 약간 짧아 보이나, 전체적으로 장대한 모습입니다.
얼굴의 양 볼과 턱, 드러나 있는 가슴 등에서 상당히 살찐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종교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불상의 상호(相好: 얼굴)는 마모가 심하지만, 높고 둥근 형태의 육계(肉髻: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와 소발(素髮: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는 것)의 머리카락, 미간(眉間)의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 반원을 그리고 있는 눈썹, 가늘게 뜬 눈, 오뚝한 코, 살짝 다문 입, 어깨까지 닿아 있는 긴 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 부분도 마모가 심하여 삼도(三道: 세 개의 선)의 표현이 선명하진 않으나, 원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용봉사와 병풍바위
용주사 마애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일주문으로 내려가면 799년에 만들어진 2.3m짜리 마애불(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커다란 바위 아래에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머리 부분은 뚜렷하게 돌출되었고, 몸과 옷 주름은 앝게 조각된 형태입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과 코가 선명하고 입은 작게 표현되었으며,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인 머리 위의 상투가 뚜렷하고, 귀는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와 있습니다.
입체적으로 조각된 머리에 비해 몸통은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앝게 조각되어 평면적으로 보이며, 오른속을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위로 올려붙인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어 수인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마애불은 조성연대가 기록된 매우 드문 사례로 통일신라 불상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어 1985년 충남 유형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애불조성명문은 3행 31자이며 몇 글자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貞元十五年己卯四月日仁符(入村?) 정원 15년 기묘 4월일 인부(인촌?)
○佛願大伯士元烏法師 불원대법사 원오법사
○香徒(行?) 官人長珎大舍 향도(행?) 관인장인대사
대략 해석해보면 정원 15년(799) 4월에 운오법사가 발원하고, 향도 장진대사가 시주하였다.
위의 31자의 조성기를 보면 이 불상은 통일신라 후기인 799년(소성왕 1년) 4월에 조성된 작품입니다. 작가(元烏法師) · 발원자(長珎大舍) 등도 있어서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연구에 한 기준 작품이 된다는 점에서 이 불상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상 우측에 새겨진 정원 15년이란 글자를 통해 신라 소성왕 1년(199)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8세기 말부터 9세기 초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특징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봉산용봉사 일주문
주간포를 2개만 넣고 공포도 놓게 짜 올리지 않아 규모가 작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리 작지도 않습니다.
용봉산용봉사(龍鳳山龍鳳寺) 일주문 편액은 수덕사 덕숭총림 4대 방장을 역임한 송원 설정(松原 雪靖 1941~ ) 스님의 글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