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추억 "영식아 노올자~~~" / 원용숙
초등학교에서 내가 제일 먼저 배운 글자는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고 철수, 영희였다.
사실 그 때 친구들 이름들 중에는 철수 보다는 영수나 영식이가, 영희보다는 영숙이나 정숙이가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왜 굳이 철수, 영희를 교과서에 올렸는지 궁금하다.
예전에는 보통 아이가 태어나면 돌림자를 사용해서 이름을 지었다.
그래서 명절이 되거나 집 안에 큰 일이 있을 때면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 이름을 바꿔 불러 아이들의 웃음보를 터뜨리게 했다.
당시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던져두기가 바쁘게 밖으로 뒤어 나가서는 골목길 입구에서 두 손을 입에 모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영식아~ 노올자~~~~~~”
“영숙아~ 노올자!~~~~~~"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누군가가 튀어 나온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 시절 우리의 방과 후는 그렇게 시작 되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한달음에 놀이터로 달려가면 벌써 모인 아이들은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 구슬로 홀짝 하기, 고무줄넘기, 공기돌 놀이, 말타기 놀이....
그중에 짖꿎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시절 영식이와 영숙이는 몸에 상처와 딱지를 달고 살았다.
2009년 1월27일 대법원이 발표한 출생신고 통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꾸준히 아기 이름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남자는 '민준', 여자는'서연' 이라고 한다.
'민준' 과 '서연'이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중성적인 이름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이제는 이름에서도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싶은 게 젊은 부모들의 마음인가 보다.
이름에도 트랜드가 있어서 한동안은 남자아이는 남자다운 이름으로 여자아이는 여자다운 이름으로 지었었고, 또 한동안은 한글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서 온갖 예쁜 이름들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19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는 일본식 잔재가 남아서 '자'자가 들어간 이름이 꽤나 많이 있다. 영자, 숙자, 민자, 애자.......
또 아들이 많은 집에서는 순서에 따라 일룡이, 이룡이, 삼룡이....
딸만 많이 낳은 집에서는 딸 그만 낳으라고 딸막이, 끝냄이, 또는 여자아이에게 '복남이'같은 남자아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시대를 불문하고 학창시절에는 이름을 가지고 놀림거리를 삼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1학년 신입생 담임을 맡게 된 첫 날, 첫 시간 출석을 불러 나갔다.
중간쯤 불렀을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부른 이름 '배신자'
아이들은 발을 구르고, 책상을 두드리며 웃어대고 교실 안은 난리가 났다.
고등학교에서의 첫 날, 나의 부주의로 신자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부모님께서는 믿음직한 아이로 자라라고 믿을 '신' 자를 써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이었을텐데 말이다.
그 날 이후 나는 신자를 위해 출석부에 작은 메모를 붙여 놓았다.
"1학년 4반 출석을 부르시는 각 과목 선생님들께, 17번 배신자는 그냥 신자라고 불러 주세요. 꼭 부탁드립니다. 꼭~~"
그렇게라도 해서 신자의 아픔을 달래주고 싶었었다.
민준과 서연이 트랜드라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그때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던 신자가 생각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遊戱)하는 인간) 학설이 인간의 본능이고 보면 예쁜 이름의 '민준' 이나 '서연' 이도 놀이터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제기차기, 비석치기, 고무줄놀이, 오징어놀이 하느라 몸에 상처도 나고 옷에 모래도 묻혀 가지고 오는 그런 아이들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의 유년의 추억 속에도 "민준아 노올자~~~ 서연아 노올자~~~" 하는 울림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요즘에야 흉도 안 생긴다는 좋은 약에, 항균처리까지 되는 세탁기까지 있으니 민준엄마나 서연엄마는 예전 우리의 어머니들 같은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한번쯤 고려해 보면 어떨까?
세월이 지나면 또 새로운 이름이 트랜드에 따라 유행하겠지만 아직도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 귓가에 쟁쟁한 "영숙아 노올자~~~~" , "영식아 노올자~~~~"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