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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을 허락해 주셨고 저와 여러분들 다른 곳에 가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성전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귀한 삶과 가정과 일터 가운데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앞뒤 좌우에 계신 분들과 우리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동상이몽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어요. 거기 보면 이렇게 같은 잠자리에 있지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꿈을 꾼다는 의미의 사자성어로 우리가 알고 있죠. 이는 서로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생각이나 이상이 다르거나 겉으로 행동은 같이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진짜 행복하려면 동상이몽이 아닌 1심 동체 내지는 이심전심이 돼야 그래야 진짜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 내의 가정들을 보면서 깨우치게 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를 위하여서 자신을 주심 생명을 주심 같이 그렇게 사랑하고 또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죽게 하듯 하면 한마음 한 육체가 될 것이다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 간의 관계만 이야기하지 않죠. 성도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성경은 기록해 주었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에 보시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 부르심을 받았다면 거기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다음에 주신 말씀이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키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 이러한 덕목들을 같이 세워가다 보면 한 목적을 향해서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한 소망 안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우리가 가야 할 목표 지향적 그 방향이 동일해야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축구 대표 선수들을 소집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요. 나라의 대표로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누구보다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를 부른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승이라는 여기에서 우승이라는 목적 그 단어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한마음으로 출전하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기가 뛰어난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할지라도 우승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것이죠. 부름 받은 목적을 알고 그것을 위해서 협력해서 하나가 되어 나아갈 때 그래도 우승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구는 정말 잘하지만 이타적인 플레이는 안 하고 이기적인 플레이만 하는 사람들 감독이 선호하지 않아요.
유럽에 여러 명문 클럽들이 있잖아요. 가끔 보면 야 저 팀에는 진짜 훌륭한 선수들이 너무 많아 그런데 경기를 해보면 져요. 자기의 것을 잘 표현할 줄 아는데 함께 나가는 법을 모르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 성도 간에 함께한 지향점을 가지고 달려간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죠.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하게 사랑하시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아 그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면서 기뻐하시고요. 즐거워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요 진짜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사랑을 완전히 다 보여주셨어요. 그렇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사랑을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살아갈 때 하나님 뜻보다는 내 뜻,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더 많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너희의 생각이 다르며 내 길과 너희의 길이 다르다. 그러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돌아와라.
우리가 생각하는 길은 악하고 그 생각하는 바는 불의한 것이니 돌아오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인간의 길과 생각을 악인의 길과 생각으로 동일시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육신의 길과 생각을 펼쳐가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의로 말미암아 영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6절에 보시면 육신의 생각은 뭐라고 합니까?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육신의 생각은 바로 악인의 생각, 이 땅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물은 사망 에 이른다라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은요. 생명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 가운데 평안한 삶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라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 두 가지 갈래길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는가 나의 것을 생각하는가라는 이러한 부분을 놓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하나님 나라의 일 일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 있죠.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까지 뭐 하라고요? 기다리라.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기다려야 했습니까? 그다음 구절에 보니까 요한을 통해서 물로 세례를 받았다면 몇 날이 지나지 않아서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즉 그 목적 성령 세례라는 목적 때문에 너희들은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된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 질문을 해요. 오늘 본문 6절 말씀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6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하니
질문을 보시면 이스라엘 나라에 회복시키는 그 타이밍 시점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때가 이때냐라고 묻는 거예요. 그때가 이때냐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이 임하는 그때 그때가 바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때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회복의 때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를 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이들이 질문한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이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사상이 있었냐면 로마의 통치 하에 있다 보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이스라엘 회복이라는 것은 로마 제국에서부터 해방되는 것 그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죠.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 아니 가장 유일한 소망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바로 국권 회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는데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제자들 역시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부탁한 사건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주님 주님 이 땅에 이스라엘 나라 즉 주님이 왕이 되셔서 로마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하나는 주의 자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청탁을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었던 나머지 열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화를 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12명 모두가 예수를 바라보고 따라다녔지만 그 목적이요. 어쩌면 정치적으로 회복시키실 분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따랐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예루살렘까지 멋지게 입성하시더니 그 예수님께서 잡혀 죽으시는 거예요. 여러분 왕으로 등극해야 그들이 소망하고 꿈꾸던 하나님 우편의 좌편에 앉을 수 있는데 이 예수님께서 맥없이 너무나 처절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죠.이들은 전혀 상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이 소망하고 있던 것, 그들이 바라고 꿈꿨던 것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죠. 그러니 예루살렘에 더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왜 머물러 있다간 자신의 생명에도 위협이 느껴지니 야 빨리 가자 가자. 그래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는 승천하기 직전에 이들이 다시 모인 그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나라 일을 말씀하셨고 그들이 듣게 된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 그리고 성령 세례를 받으라. 이 말을 들은 거예요. 문제는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에 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만나기 전과 다르지 않게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즉 이들의 관심은요. 어쩌면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더 크게 소망 가운데 임했을지 몰라요. 야 저 주님이 부활하셨으니 이제 진짜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하면서 질문하게 된 것이죠. 이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정치적인 것 세상적인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같죠. 나라 예수님은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이야기했다는 것 이것을 가지고 동상이몽이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믿기 전의 모습과 다르지 않는 세상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되죠. 그래서 관심사를 보면 여전히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사업 성공을 위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해서 먹고 사는 것에 매진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사실 그것을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 믿음의 본질 아니겠어요?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했던 이스라엘 나라처럼 우리도 땅의 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한번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정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 땅의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가 어떻습니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이 아닌 진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자들이 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이것을 잘 아셔야 돼요.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구원은 받습니다.
그런데 생활 문제는 다르다는 거예요. 구원 받았지만 내 생활이 하나님 뜻과 먼 삶이 있을 수 있고요. 하나님의 뜻과 가까운 삶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이들이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분 8절 말씀을 통해서 보시면 알 수 있는데 그 시작이 이러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니라 그들의 관심사가 바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변하는지 우리가 8절 한번 읽어보실까요? 8절 같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쉽게 정리를 하면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으면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증인의 삶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나누었던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책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말씀으로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실수할 때 있고요. 잘못할 때 있어요. 그때 왜 저렇게 하노 책망하고 뭐라 하지 마시고 그 앞에 우리가 말씀을 펼쳐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 내가 어떤 잘못된 길을 간다 그래서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오늘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성령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본성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우리의 본성이 쉽게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모르세요? 내 본성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쉽게 변하던가요? 안 변하던가요? 변하지 않아요. 참 어렵죠. 하지만 성령을 받으면요. 본성은 안 바르고 삶의 태도는 바뀝니다. 그게 다르다는 것이죠.
성령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겠다. 즉 말씀 가운데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시라고요? 성령님이라는 거예요. 또한 장래 일을 알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오시면 가르치시고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겠다. 즉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떤 것이 진리의 길이신지 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요. 예수님을 통해서 들었던 말씀들이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가 이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거예요. 즉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때를 따라 생각나게 하셔서 옳은 길, 바른 길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지혜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 외에도 서신서에 보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이 참 많죠. 우리 로마서 8장 16절 말씀을 함께 큰 소리로 읽어보실까요?
성령이 치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께서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데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어떻게 생깁니까? 내 스스로 나 하나님의 자녀지 이거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확신이라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구나라는 이 확신을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죠. 구원의 확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구원받은 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예수 믿었으니 구원받았다. 그렇게만 정리할 게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셔서 맞다. 내가 죽었지만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으로 내가 살아났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 자녀의 확신, 구원의 확신, 기도의 응답의 확신 등등 여러 가지 확신들은 누가 주시는 건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라는 사실을 우리가 또한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성령의 열매를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성령의 열매가 무엇이었어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 양성, 충성 절제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열매다. 그렇게 말씀하세요.
그런데 여러분 당장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만히 있어도 미운 사람 있잖아요. 저 사람은 그냥 봐도 얄미워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 마음이 우리 안에 있어요. 그런데 성경이 말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며 왼뺨을 돌려대라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아니 더 하시죠 원수까지도 사랑해라.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를 주관하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면 옳은 뺨을 맞을 때 왼뺨을 돌려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거 성령이 하셔야 되는 것이죠.
희락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삶이 너무 비피해요. 환란과 고통뿐이 없습니다. 무엇 하나 잘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옆사람하고 비교해 보면 내가 과연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왜 나는 예수 믿는데 이 모양으로 살아가야지 하는 의문점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즐거워합니까? 그런데요. 성령께서 주를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 어려움 그 고통을 다 뒤로 하고 우리의 시선을 여호와께로 고정시키게 하는 분이 성령의 역사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여호와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즐거워하는 거예요. 평강을 주시는 그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누가요? 성령께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시선을 내 아픔과 고통과 슬픔에 머물게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 그래서 보예사로 오신 것 아니겠어요?
여러분 문제와 환경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면 더 좋은 것이고요. 그러나 그 문제 앞에서도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그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말씀 속에서 그런 말씀도 하시잖아요. 너희가 스스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서 헤매고 있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해 주사 내가 기도하지 못하는 그 부분,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부분을 놓고 우리 성령님께서 탄식하면서 대신 기도해 주시겠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라. 걱정하지 말아라. 성령께서 말씀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성령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이죠. 이 마지막에 어린 양을 따라가 어린 양을 어떻게 따라갑니까? 우리가 여러분 내 힘으로 따라갈 수 있는 줄 아십니까? 못합니다. 성령께서 따라가게 하셔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러한 것들 속에서 나타나는 결과물이 뭐예요? 성령의 열매라는 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고린도전서 2장 10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함께 읽습니다. 시작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쉽게 말해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아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 통찰력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성령이 내 안에 있어야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근데 내 안에 성령이 없으면 뜻대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말하는 것도 동일합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이 가르치는 말로 선포하게 돼 있다는 거예요. 우리 고린도전서 2장 12절 우리 같이 한번 또 읽어보실까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알게 한다. 여러분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 받아 영적인 일을 영적으로 분별하는 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여러분 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은 누가 하는 거예요? 성령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다시 오셔서 성령이 임하시면을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 그렇게 말씀하죠. 권능이라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이나마이트라는 이 단어, 듀나미스라는 언어 이제 폭발하는 힘 능력이라는 것 즉 권능이 우리로 하여금 증인되게 한다는 것이죠. 내가 나가서 증인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 우리를 증인으로 만드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증인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어요. 증인이 되라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증인이 되리라 원문에 보시거나 영어 성경을 보시면 되리라라는 이 표현이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증인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주시겠다라는 거예요. 즉 하나님이 증인 되게 하심으로 우리가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성령을 받으니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대로 가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말씀이라는 거예요.
초대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고 이제 120년 도안 다락방에 앉아서 기도합니다. 오로지 기도 기도 성령님을 위해서 성령님 약속하신 성령 내려주십시오. 지금이 그런 기간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이제 50일이 지나면 오순절이 옵니다. 그 오순절 기간 동안 이들이요. 뜨겁게 기도를 성령을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그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이 임하자 어떻게 됐습니까? 그들이 즉시 나가서 복음을 증거했다. 자기들이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라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그래서 여러분 초대교회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 교회가 진정한 교회 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시은이 성령의 능력과 권능으로 이 시대 참 교회로 급부상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으세요? 우리 개인도 그렇고 우리 교회가 우리 귀한 성도님 보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사십니다. 우리 신은교회 보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교회 같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그런 교회가 되겠죠.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하나님의 일 말씀하시면서 사명을 주셨어요. 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하기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을 기다려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으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에 다른 도에서 도우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았기 앞서 말씀드렸잖아요.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삶의 문제는요. 성령이 배우셔야 돼 그래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를 터치하지 아니하고서는 여러분 그냥 내 인생 사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사는 거예요. 그러나 다르다라는 것은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이죠. 그래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죠? 사명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힘듭니까? 어떠세요? 나에게 사명이 있는데 장이 있는 왜 힘들까요? 사명 때문에 즐거우신 거 없으세요? 혹시 나는 이 사명이 있어서 너무 행복해 몇 분 웃으시는 분 있어서 감사합니다.
왜 힘들까요? 여러분 과거에 여러분 기도 열심히 해보신 적 있죠? 그때 밤낮 수고하며 일하고도요. 기도하는 자리가 즐거웠어요. 왜 그렇습니까? 과거의 이야기들 많이 하시잖아요. 물론 이제 신앙생활 처음 하시는 분들은 좀 모르시겠지만 신앙생활 열심히 해보시는 분들이 내가 그때 진짜 열심히 기도했는데, 야 내가 아침저녁으로 일하고 밤늦게 가셔도 기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육신은 힘들었는데 그래도 너무나 행복했어요.
왜 행복했을까요? 그때는 지금의 시대가 그때보다 더 어려울까요? 무슨 차이일까요? 여러분 성령의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죠. 성령께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힘들어도 모일 때마다 기쁨이 있었고 식탁에 교재를 나누어 구역 예배를 드릴 때 기쁨이 있었고, 급여 철회에 열심히 나와서 기도하면서 부르짖을 때 야 놀라운 능력이 나에게 임하는구나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고, 새벽 메바마다 다투어 나오면서 새벽을 깨고 기도했던 것 아니겠어요?
육체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그것마저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성령이 허락하신 기쁨이 차고 넘쳤다는 거예요. 저는 우리 신은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기도할 때마다 하는 기도가 있어요. 하나님 우리 신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과거의 모습으로 그냥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안주하는 그러한 교회가 아니라 다시 한 번 한 번 기회를 주셔서 우리 신은을 통해서 이 지역이 살아나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마음으로 함께 성령의 역사를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허락하셔서 모든 것이 기쁜 것이죠. 모이는 것이 기쁘고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말씀 공부하는 것이 기쁘고 서로 격려해 주시는 것이 기쁘고 식탁의 공동체를 나누는 것이 기쁘고 아멘을 해야 뭔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 아니겠어요? 혼자 앞에서 저만 하면 되겠습니까? 다시 합니다. 모이는 것이 기쁘고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말씀 공부가 기쁘고 전도하는 것이 기쁘고 기도하는 것이 기쁘고 그래야 우리가 신앙생활 한 발 나는 것 아니겠어요?
교회는 나가는데 주일날 예배드리고 나면 일주일 내내 내가 뭐 하는지도 모르고 세상에 치여 살다가 또 주일날 나와서 예배드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예수를 믿으면 내 안에 충만한 기쁨이 있어서 세상 가운데 그 기쁨이 흘러가고 그러려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그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목회를 하면서 사실 기도회 열심히 나오십시오. 중식자분들에게 새벽 예배 나오셔야 됩니다. 왜 말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제가 말하는 순간 그렇게 따라가면 율법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게 하십시오. 정말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마음 가지고 금요 기도에도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새벽도 내가 다는 참석하지 못하겠지만 하루라도 가서 주님 앞에 기도하고 내가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고 드리는 그러한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이 땅을 살아가는데 수만 해야 될 것 많지만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제는 그 삶의 마땅한 삶을 위해서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그 자리를 사모하고 따라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