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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1)백일기도
화엄사 장육전 중건불사를 마음으로 결심하고 백일기도를 올리던 계파선사는 아침공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지리산 위로 멀리 파랗게 열린 봄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름철새들이 날아와 우짖는 지리산 계곡에는 그새 봄이 가득 몰려와 푸른 잎들을 너울너울 펼쳐 놓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맑은 바람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지나가고 여기저기서 피어난 봄꽃 향내 따라 벌 나비들이 분주히 날개를 파닥거렸다.
“허허! 지난겨울 하얀 눈이 온산을 뒤덮였을 때 장육전 중건불사 백일기도를 시작하였건만 그새 이렇게 꽃피는 봄이 되어 백일기도 회향(回向)을 맞이하는 날이 되었구나!”
눈썹이 새하얀 계파선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난 밤 꿈을 떠올려 보았다. 웅장한 장육전 중건불사를 하려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가야 비로소 가능할 텐데 그 큰 불사에 대한 원력을 세우고 백일 용맹정진을 결심하고 일심으로 기도를 올렸으니 부처님께서 무어라 소식 한 가닥은 주시지 않겠냐고 내심 작정한 백일기도였다.
인도에서 온 스님인 연기조사가 지리산에 터를 잡아 백제 544년에 처음 이 산문을 연 이래로 훌륭한 고승대덕이 줄줄이 나와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만방에 펼쳤으니 그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장육전을 훌륭하게 중건불사(重建佛事)하여 내일의 화엄사를 기약하고 싶은 것이 계파선사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또한 지혜의 보살이신 문수보살의 가피가 서린 지리산 화엄사 도량인 만큼 낡고 초췌한 도량을 아름답게 정비하여 불도를 닦는 수행자나 마음 어지러운 중생들이 언제고 드나들며 맑고 바른 삶의 지혜를 배우고 평안을 얻어 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이었기에 장육전 중건불사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발원으로 백일기도를 드리던 지난밤 잠깐 잠자리에 들었는데 언뜻 하얀 옷을 입은 신령스런 노인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 계파여, 고생이 많도다! 그대가 지금 세운 장육전 중건불사에 대한 대발원은 쉽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라! 그렇게 큰일을 이루려면 복 있는 화주(化主)를 내어 큰 시주자(施主者)를 얻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웅전에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빼보았을 때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가 능히 될 수 있을 것이니라! 내 말을 명심하거라! 계파여!”
이렇게 말을 마친 신령스런 노인은 문득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순간 눈을 번쩍 뜬 계파선사는 이상스런 꿈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마침 다음날이 드디어 백일기도 회향일이었다. 자신의 백일기도에 드디어 부처님이 답을 주신 것을 알아차린 계파선사는 묵묵히 그 꿈에서 준 계시를 실행하여 장육전 중건 불사를 할 수 있는 화주를 정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2)신인(神人)의 계시
봄 하늘을 바라보고 섰던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이 아침공양을 마치자 대웅전 마당으로 모두 모이게 했다. 계파선사의 부름을 전달받은 화엄사 산내암자의 스님들까지 모조리 사시예불(巳時禮佛) 전까지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대웅전 마당으로 모이게 되었다. 계파선사는 산내의 스님들이 모두 대웅전 마당에 모이자 앞에 서서 말했다.
“오늘 여러분을 여기 이 자리에 모두 모이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이 장육전 중건불사의 백일기도 회향일이기에 그렇소. 지난 겨울 부처님을 모실 웅장한 장육전 중건불사를 발원하였던바 비로소 오늘이 백일기도 회향 일인데 지난밤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계시를 받았기에 그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소. 밤에 신인이 꿈에 나타나 물 항아리와 밀가루 항아리를 대웅전에 놓고 먼저 물 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다시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 그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을 화주로 삼으면 장육전 큰 불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소. 여러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계파선사는 스님들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스님들이 서로 의견을 말하면서 나름대로 생각들을 정리했다. 그 중 한 스님이 말했다.
“계파선사님! 그럼 꿈에 신인(神人)이 가르쳐준 대로 그렇게 한번 해 봐서 진짜로 손에 밀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는 분을 채택하여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 화주로 삼고 일을 추진하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 스님의 말에 다른 스님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가 대웅전에 차려지고 차례차례 스님들이 들어가 먼저 물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은 다음 그 물 묻은 손을 다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넣어 하얀 밀가루가 묻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전혀 묻어 나오지 않는 스님을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로 정하고 그 엄청난 불사를 책임지고 실행하도록 하자했던 것이다. 맨 먼저 들어간 스님들이 대웅전으로 들어가서 물 담은 항아리에 먼저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손을 넣어 펼쳐 보였다.
“온통 새하얀 손이로구나!”
차례차례 눈 맑은 산내의 스님들이 밀가루 묻은 손을 펼쳐 보이면서 자신은 화주가 아님을 확인하고는 대웅전 문을 나왔다. 벌써 열댓 명의 스님들이 그렇게 해보았으나 손에는 하얀 밀가루가 묻어있게 마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3)공양주보살
구름처럼 많은 스님들이 마당 가득 줄줄이 늘어서서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끊고 맑고 밝은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 고통 지옥에 시달리는 중생 구제의 대원력을 세우고 출가한 수행자들이기에 누군들 장육전 대불사의 화주를 맡을 주인공이 결코 없지는 않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천여 대중을 모조리 실험을 해도 결국 손에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이렇게 아무런 기대에 대한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자 계파선사는 마음이 답답했다.
지난밤 꿈에 나타나 말하던 신령스런 노인의 계시는 공허한 망상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래도 아직은 실망할 때가 아니었다. 출가하여 한평생을 용맹정진으로 수행한 고승대덕의 큰스님들이 줄줄이 그 차례가 남아있지 않는가? 적어도 일심으로 출가 수행한 노스님들 중에는 장육전 불사를 담당할 만큼의 큰 화주의 원력을 짊어질 경지에 이른 분들이 있지 않겠는가? 계파선사는 내심 속으로 커다란 기대를 하는 것이었다.
노스님들이 차례차례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손을 물 항아리에 넣은 다음 다시 밀가루 항아리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계파선사는 초조하게 노스님들의 손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모두 손에 새하얗게 밀가루가 묻어 나오지 않는가! 천여대중이 넘는 산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실험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실망의 빛이 얼굴 전면에 역력히 감도는 계파선사는 자신의 장육전 중건불사를 위한 백일기도가 이렇게 맥없이 끝나 버리는가 하는 깊은 회한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으음!……이 실험을 아직 하지 않은 이가 없을까?’ 계파선사가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속으로 헤아려보는 순간 공양간 앞에서 중년의 공양주보살이 캐온 봄나물을 다듬고 앉아있는 것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옳지! 저 공양주보살님은 아직 실험을 하지 않았구나!’
계파선사는 대중스님에게 일러 나물을 다듬고 앉아 있는 공양주보살을 불러오게 했다.
“저 공양주보살님을 얼른 불러 오시게나!”
산나물을 다듬다말고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부름을 받고 황급히 달려왔다.
“선사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가요?”
“다름이 아니오라 오늘 장육전 중건불사 발원 백일기도 회향 일인데 간밤의 꿈에 계시를 받아 화주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 공양주보살님도 한번 실험을 해보시지요.”
“선사님! 저 같은 일자 무식쟁이 공양 간에서 공양만 짓는 사람이 무슨……”
공양주보살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오! 큰 불사를 이루는데 서로 차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만물을 자비와 평등으로 대하는 게 우리 불제자의 기본 정신입니다. 어서 한번 해보시지요!”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4)화주(化主)
계파선사의 말에 공양주보살은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먼저 물 묻은 항아리에 떨리는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물 묻은 손을 그대로 밀가루 담은 항아리에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넣은 손을 대중스님들 앞으로 번쩍 들어 내밀었다.
“아악! 저게 뭐야!”
“아! 이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밀가루 하나 묻지 않았다니!”
대중스님들이 공양주보살의 손을 제 눈을 의심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사실 그 손을 보고 더욱 놀란 것은 공양주보살 바로 자신이었다. 물 묻은 손을 밀가루 깊숙이 넣고 뺐는데 이렇게 밀가루 하나 묻어 나오지 않았다니 벌렁 까무러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화엄사 공양 간에서 오직 밥 짓고 나무 해 불 때고, 나물 캐 나물 만들고, 국 끓여 올리고 설거지하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그런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대불사의 화주가 되다니 그건 절대로 말이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험! 참으로 신이한 이적입니다. 공양주보살님의 일심정진에 대한 부처님의 응답이시옵니다. 이로써 장육전 중건불사의 대화주로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정해진 것입니다.”
계파선사는 대중스님들에게 엄숙히 선언했다.
“선사님! 저는 아닙니다. 일자무식인 저는 오직 밥 짓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제발 거두어 주소서! 선사님!”
파리하게 얼굴이 질린 공양주보살은 계파선사의 말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이 이 화엄사 절에서 10년을 공양주로 열심히 일한 공력이 일심으로 참선 수행을 해온 천여 대중스님들보다 더 뛰어나니 이렇게 오늘의 실험에서 신비로운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실험한 것이 아니라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보살님께서 꿈에 나에게 지시한 것이니 공양주보살님을 오늘 화주로 선택한 것은 바로 문수보살님입니다. 그러니 아무 말 마시고 이제 대시주자를 얻어 장육전 중건불사를 잘 이루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계파선사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단호하게 자르며 말했다. 다른 대중스님들도 공양주보살이 장육전 중건 불사의 화주로 정해진 것을 알고는 공양주보살에게 엎드려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의 중임을 그 자리에서 맡기게 되었다. 꼼짝없이 그날 화주의 중책을 맡게 된 공양주보살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오직 밥 짓고 설거지하며 부처님 앞에 조석으로 공양 올리는 일밖에 모르는 자신이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장육전 대불사의 책임을 맡다니 자다가도 기절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일자무식에다 시쳇말로 땡전 한 푼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수 천만 냥의 거금이 들어갈 그런 커다란 대불사의 큰일이 맡겨졌단 말인가!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5)참혹한 인생사
가슴속으로 가득 밀려오는 답답함에 도무지 몸을 가눌 수 없었던 공양주보살은 억세게도 불운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해 보는 것이었다. 땅 한 평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집에 붙어살며 온갖 궂은일이란 일은 혼자 도맡아 다해가며 살다가 나이 열여섯에 바닷가 가난한 어부에게 시집이라고 갔는데 이듬해 고기 잡으러 선주 따라 여수 앞바다로 나섰다가 남편 혼자만 물에 빠져 죽어버렸으니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과부 신세를 한탄하며 젖먹이 어린 아들 하나 데리고 품 팔아 겨우 목에 풀칠하고 사는데 그 어린 아들마저 그해 여름 병마에 덜컥 잡아먹히고 젊은 여자가 혼자 못산다며 중신하는 이웃집 늙은 아낙의 말 따라 논 서 마지기 준다기에 나이 많은 먼 동네 영감 후실로 들어가 그 집 일곱이나 되는 어린아이들을 다 길러 주고 영감이 병으로 죽자 자식들이 재산을 독차지하려고 내쫓아버려서 세상 바닥을 구르는 돌처럼 이리저리 사람들 발길에 차이는 대로 떠돌다가 마침내 찾아들어 온 곳이 이 화엄사 공양간이었다.
전생에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으면 이런 업을 뒤집어쓰고 사느냐 싶어 새벽에 스님의 도량석 소리에 깨어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가 백팔 배를 하고 매일 공양 지어 올리고, 절 살림을 해가며 철 따라 나물 캐 무쳐 올리고, 삼밭에 무 배추 길러 김치 담아 올리고, 스님들 밥 지어 올리며 오직 배곯지 않고 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면서 부지런하게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제 이 화엄사 절과도 인연이 다했는지 그 어마어마한 장육전 중건불사의 화주를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신이 떡하니 맡게 되었으니 재수 없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는 그 말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렇다고 천여 대중 스님들 앞에서 피할 새도 없이 계파선사로부터 바로 화주로 정해진 터라서 어떻게든 부처님을 붙잡고 늘어지는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지엄하신 계파선사가 화주 소임을 딱 맡겨버린 판이라서 마음대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저녁 공양을 지어 올리고 공양 시간이 끝나자 공양주보살은 대웅전으로 홀로 들어가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았다. 부처님께 오늘 소임으로 맡은 화주의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일심으로 기도를 올렸다. 멀리서 가까이서 밤새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새 산개구리들 우는소리가 시끄러웠다. 그 소리도 다 잊어버린 채 어느새 깊은 기도의 삼매경에 들어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일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일념을 집중했다.
그러나 그 일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도무지 가당찮은 일이었다. 밥 짓고 나물 장만하고 국 끓이는 허드렛일이나 할 줄 아는 자신이 수천억 금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아아! 그것은 이 절에서 당장 나가란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양주보살은 부처님을 응시하다가 그만 끝없이 세상에서 버림받아온 파란만장한 제 참혹한 인생사를 돌아보고는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깊숙이 떨구고 쓰러져 소리 없이 흐느껴 울고 말았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6)일심기도(一心祈禱)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속울음을 흐느껴 울던 공양주보살은 손끝으로 눈물 얼룩진 눈가를 쓸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보았다. 대웅전 안에는 공양주보살과 단 위 가운데 높이 앉은 부처님만이 나란히 적막의 밤을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의 막연한 서로의 응시는 결국 혼자만의 것이었다. 공양주보살은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시 비끄러매며 부처님을 응시했다. 자비로운 부처님의 원력으로 지금의 발원을 이루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 외에 자신에겐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불쌍하고 힘없는 아녀자에게 이리도 무거운 짐을 내려주신 건가요? 죄 많은 여자, 여기서 쫓아내시기로 작정한 것인가요? 부처님! 참으로 매정하고 가혹하십니다! 으흐!… 흐흐흐흑!”
공양주보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 터져 오르는 울음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움막집 한 칸 지을 능력이 없는데, 아니 어디 가서 누구에게 엽전 한 닢 융통할 능력이 없는데, 지금 당장 숨이 끊어져 죽는다고 해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사람 하나 없는데 수천억 금이 들어갈 장육전 중건 불사의 화주를 맡게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언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만 같았다.
“부처님! 차라리 그럴 바엔 이 자리에서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공양주보살은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내려다보는 부처님을 바라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도무지 소용없는 일이었다. 공양주보살은 애써 그 원망의 마음을 지워버리며 맡은 소임을 잘 수행하도록 해달라고 뜨건 눈물을 손끝으로 훔치며 부처님께 일심으로 간절히 기도(祈禱)를 올렸다.
“부처님의 신이(神異)한 원력(願力)으로 화주 소임을 잘 이루도록 해주시나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자꾸 머릿속으로 중얼중얼 되뇌면서 기도를 하는 공양주보살의 눈꺼풀이 어느 결 무거워지더니 스르르 감겨 내렸다. 그리고 순간 그 눈앞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공양주보살은 듣거라!”
노인이 공양주보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예!”
공양주보살은 다급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들고 합장했다.
“그대는 화주를 맡은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일 아침 일찍 화주 소임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거라! 그리고 길을 가다가 맨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거라! 그러면 뜻대로 되리라! 알았느냐!” 공양주보살은 번쩍 눈을 떴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7)처음 만나는 사람
눈앞에 노인은 없었다. 대신 부처님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촛불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공양주보살은 잠시 전 생시처럼 생생하게 꾸었던 꿈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내일 아침 길을 떠나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청하라고?……아아! 이는 다름 아닌 지리산의 주인인 문수보살님의 현몽(現夢)이로구나!”
공양주보살은 그런 생각이 들자 뛰는 듯이 기뻤다.
다음 날 아침 공양을 마친 공양주보살은 꿈에 노인이 말한 대로 화주 소임을 위해 길을 떠났다. 꿈에 노인의 말처럼 길을 가다가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매달려 장육전 대불사의 시주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도무지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아무런 방법도 생각해 낼 능력이 없었던 공양주보살에게는 어쩌면 그 방법이 최상의 방법이었다.
맑은 지리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는 길 따라 내려가면서 공양주보살은 진달래꽃이 피고 진자리에 파릇하게 돋아난 새순들을 바라보면서 다시금 어젯밤 대웅전에서 기도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든 새 나타난 노인의 말을 되새겨 보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어젯밤 꿈에 신령스러운 노인이 나타나 길 위에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무조건 장육전 중건 불사 시주를 부탁하라고 했으니 그 어려운 일이 그 계시로 다 풀린 것이 아닌가! ‘적어도 천 석지기나 만 석지기 재산을 가진, 아니 그보다 수만 배를 더 가진 사람이거나, 나라의 큰 벼슬을 사는 권력자 대감 같은 마음씨 좋은 시주자를 만나게 되어 무사히 일이 잘 풀리게 되겠지!’ 하고 공양주보살은 낙관해 보는 것이었다. ‘이 아침 과연 이 길 위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 길 멀리 눈빛을 응시하며 가는 공양주보살의 가슴이 콩닥콩닥 자꾸 물 방아질 해댔다.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을 무조건 붙들어 잡고 시주를 부탁만 하면 되다니! 그 어려운 일이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해결된다고 했으니!’ 그것을 생각하는 공양주보살은 어마어마한 화주 소임 일이 이미 다 해결되어 버린 것만 같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들뜨기도 하는 것이었다. ‘과연 누구일까? 어디에 사는 어느 귀하고, 돈 많은 훌륭한 사람일까?’ 자꾸 기대하며 가는 공양주보살의 눈빛 멀리 사람 하나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아슴아슴 아침 안개 때문에 분명하게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분명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저 사람이 장육전 불사를 해줄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진 훌륭한 시주자이겠거니 하고 공양주보살은 들뜬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가갔다. ‘반드시 시주자가 되도록 단단히 붙들어 잡으리라!’ 굳게 마음을 정하고 다가가서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그 사람 얼굴을 공양주보살은 바라보았다. 순간 공양주보살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아악!”
공양주보살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벌린 입을 닫지 못했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8)늙은 거지
“세상에! 이런 저주받을 일도 다 있단 말인가!”
공양주보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덕지덕지 기운 헌 누더기를 걸친 쭈글쭈글 주름이 온 얼굴에 새집을 짓고 앞니가 다 빠진 허연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나무 지팡이를 짚고 오는 흡사 진흙 구렁에 사는 짐승과 진배없는 거지 할머니였다. 화엄사 앞 개울 돌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살면서 가끔 화엄사 공양간에 와서 나물도 캐 주고, 불도 때주고, 잔심부름을 거들어주면서 한 끼 공양을 얻어먹고 가거나 누룽지나 과일을 얻어 가던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 공양주보살보다도 더 참담하게 살아가는 늙은 거지 할머니였다.
“돈 많고, 권력 많은 대 시주자를 만나겠거니 했는데… 에잇! 재수 없이 저런 거지 할머니라니!”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 눈앞이 캄캄해 오고 머리가 어지러워진 공양주보살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만 그 자리에 짚단처럼 맥없이 풀썩 쓰러질 뻔했다.
“어머나!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아침 일찍 어딜 가시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시네!”
거지 할머니가 누더기를 걸친 몸으로 맥이 풀린 듯 백지장처럼 얼굴이 허연 공양주보살을 얼른 부축하며 말했다.
“에구머니나! 할머니, 하필이면 오늘 아침 무슨 일로 이리 일찍 절에 오시나요?”
공양주보살은 속마음을 표현할 길 없어 그만 그렇게 불쑥 볼멘소리로 말했다.
“에구! 먹을 게 없어 어제부터 탈탈 굶다가 몸도 아프고 배가 고파 죽겠길래 공양주보살님에게 뭐 좀 얻어먹을까 하고 가는 참인디, 가는 날이 장날이고 공양주보살님이 오늘 어디 다니러 가시나 보네!”
거지 할머니가 휑하니 꺼진 눈망울로 허기가 진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공양 간에 서너 날 건너 한 번씩 오곤 해서 찬밥에 남은 나물이라도 얻어먹고 가곤 했는데 요사이 며칠 동안은 나타나지 않아 어디가 아픈가 보다 하고 잊고 있던 터였는데 하필 오늘 아침 이 길에서 맨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꿈에나 알았을까!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 쿵! 하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동안 길 가운데 털썩 주저앉아있는 공양주보살의 머릿속에 문득 어젯밤 꿈이 선연히 떠올랐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맨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장육전 시주를 부탁하면 그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꿈을 철석같이 믿고 이렇게 길을 나섰는데 맨 처음 만난 사람이 하필이면 세상에서 제일 복 없고 천하고 가난한 저 거지 할머니라니!’ 정말 가슴을 치고 펄쩍 뛸 일이었다. 공양주보살은 너무도 기가 막혀 자신도 모르게 ‘나무관세음보살’을 외며 땅이 꺼지도록 다시 절망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런데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9)대 시주자
‘비록 맨 처음 만난 사람이 저 거지 할머니라지만 저 거지 할머니라고 하여 장육전 중건불사를 할 대 시주자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공양주보살의 뇌리를 스치고 갔던 것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자비의 눈으로 공평히 보고 또 세상 만물을 누구나 분별없이 똑같이 사랑한다지 않던가! 그리하여 생명 있는 모든 세상 만물은 서로 평등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공양주보살의 머릿속에 계파선사를 비롯해 오랫동안 수행을 해온 공부를 많이 한 늙은 스님들이 하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공양주보살은 자신이 거지 할머니를 맨 처음 만난 것은 억세게 재수가 사나운 일이다고 여기며, 한 생명을 장육전 중건 불사 재물과만 관련 지어 보고 마구잡이로 천시하고, 무시하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대자연의 섭리 따라 똑같이 귀중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에 대해 그 소중함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외향의 것에만 의존하여 저 거지 할머니는 장육전 불사의 대 시주자가 절대로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미리 속단해 버리고 무시하고 천시해 버린다면 이 또한 매우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공양주보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거지 할머니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면서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우리 화엄사 장육전을 크고 훌륭하게 지어주소서!”
“뭐? 뭐라!…”
그 말을 들은 거지 할머니는 공양주보살이 자신을 보고 해괴망측한 장난질을 하는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헤!’ 하고 입을 벌리고 웃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원! 공양주보살님! 무슨 농담을 그렇게 잘도 하시나! 나같이 한 끼 끼니도 때울 수 없는 땡전 한 푼 없는, 오늘 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 든 노망난 다리 밑에 사는 거지더러 농담도 잘하시네. 어여! 장난 그만하고 일어나요! 어여! 그만 일어나요!”
“아닙니다! 대 시주자님이시여! 저의 간절한 소원이오니 우리 절의 장육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주소서!”
공양주보살은 길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지 할머니는 기가 막힌 듯 피식 웃으면서 장난질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라며 억지로 공양주보살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양주보살은 길바닥 위에 허리를 납작하게 구부리고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거지 할머니는 처음에는 공양주보살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계속 그렇게 말하자 혹시 공양주보살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었다.
늙은 거지와 공양주보살 (10)꿈 이야기
그렇다면 저 공양주보살은 분명 실성을 한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거지 할머니는 ‘이거! 참 큰일이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어허!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오늘 아침 실성을 했나보네 그랴! 새로 장육전 불사를 한다고 계파선사님이 백일기도를 드린다고 그러시더니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우리 공양주보살님이 아주 실성을 했어. 그랴!”
“아닙니다. 대시주자님이시여!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 장육전을 새로 짓게 시주를 해주시옵소서!”
공양주보살이 엎드려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지 할머니가 설마 하고 공양주보살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실성한 것도 아니고 또 농담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돌다리 밑 거지 움막집에서 겨우 한 몸뚱이 죽을 날만 바라보고 사는데 이렇게 크나큰 대 시주를 부탁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공양주보살님, 이 불쌍한 늙은 거지에게 진짜로 그 큰 시주를 부탁하는 것인가요?”
공양주보살이 하도 집요하게 시주를 부탁하자 거지 할머니가 정말인가 하고 엉겁결에 확인하듯 말했다.
“그렇다마다요! 할머니, 내가 왜 거짓을 말하겠어요.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
공양주보살이 그렇게 말하더니 일어나 길가에 앉았다. 그러더니 거지 할머니에게 자신이 장육전 중건 불사의 화주로 선택된 내력과 어젯밤 대웅전에서 밤새 기도를 드리다가 잠깐 졸았을 때 머리가 허연 노인이 꿈에 나타나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공양주보살의 신이한 이야기를 귀담아들은 거지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공양주보살님 덕분에 내가 절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맛난 과일도 얻어먹고, 이렇게 늙은 몸을 홀로 지탱하고 잘 살아왔는데 그 은공을 생각하면 내 장육전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무엇인들 해주지 못하겠어요. 다만 내 이 가난을 한탄할 뿐이라오.”
“할머니! 나는 어젯밤 꿈에 머리가 허연 노인이 나타나 무조건 오늘 길을 가다가 맨 처음 만난 사람을 붙잡고 장육전 시주를 부탁하라고 하여 그렇게 한 것뿐이랍니다. 할머니!”
공양주보살이 말했다.
“부처님도 무심하시지! 왜 나 같은 땡전 한 푼 없는 병든 거지를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되게 하여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부탁하라 했나요. 내가 젊었을 때는 술과 도박과 계집을 좋아했던 우리 아버지 탓으로 집안이 다 망해서 가난한 늙은 남편에게 팔려 시집가서 아이 일곱을 낳고 살았는데 전염병이 돌아서 다 죽어가고 나 혼자 이렇게 살아남아 말년에는 천덕꾸러기 거지가 되고 말았지요. 의지가지없는 거지가 되어서 하도 배가 고파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밥을 뒤지다가 주인에게 발각되어 붙잡혀 맞아 죽을 것을 그 동네 앞을 지나가던 어느 늙은 스님이 불쌍한 거지를 그리 때리지 말라고 말려주어 살았지요. 그때 그 늙은 스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도 내 가슴에 잊지 않고 있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