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호칭어와 호적 제도
우리 나라의 호적제도가 어느 때에 확립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본 정창원(正倉院-쇼쇼인) 소장의 신라 촌적(村籍)이 8세기 중엽 신라의 청주(淸州) 부근 어느 촌락의 촌세(村勢)를 기록하고 있어, 그것이 후세 호적(戶籍) 또는 장적(帳籍)의 선구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고려시대에는 이후 조선조의 모범이 되는 호적제도가 완비되어 있었던 바, 그 원칙은 3년에 한 차례 호적을 개수(改修)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원칙은 또한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어져 왔음을 경국대전 등 제법전에서 볼 수 있다. 호적의 개수를 위하여 우선 각 호(戶 )는 정해진 서식으로 ‘호구단자(戶口單子)라 일컬는 호적신고서 2통을 작성하여 관아에 올렸다. 관아에서는 그것을 구호적과 대조를 한 후, 한 통은 확인을 거쳐 ‘단자’를 올린 호주에게 되돌리고, 나머지 한 통으로써 편호(編戶)하여 호적을 개수하는 자료로 삼았음을 ‘고려사’나 경국대전의 호전(戶典) 등에서 살필 수 있다.
한편 백성들은 소송이나 성적(成籍)할 때의 확인용, 노비 소유의 근거 자료, 가계 및 신분의 증명 자료로 필요할 경우, 오늘날의 호적등본격인 문서를 호주의 요구에 따라 관부(官府)로부터 등급(謄給)받을 수 있었다. 그 문서를 ‘준호구(准戶口)’라 하고, 그것 또한 정해진 서식이 있었다. 호구단자식으로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18세기 후기에 간행된 전율통보별편(典律通補別編)에 보이고, ‘준호구식’과 ‘호구식’은 경국대전에 나타난다. 그러나 고려의 서식은 남아 전하지 않으므로 당대의 자료로 지금껏 남아 있는 실제의 호구단자나 준호구로 비교해 볼 수밖에 없는데, 두 왕조의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곧 고려의 것은 ‘호주와 4조(四祖)와 4조처(四祖妻)’가 열록되었지만 조선조의 것은 ‘4조의 처’가 빠져 있고, 도 고려의 것은 호주의 가족 및 인척을 중심한 부분인 기본호(基本戶) 외에 ‘조모, 증조모, 외조, 처외조’ 등의 선대 4조를 추적하여 열록한 추심호(推尋戶)의 부분이 있으나, 조선의 것은 그 부분이 없는 등 차이가 있다.
광산김씨 예안파(禮安派) 종택 소장의 호구 관계 고문서 46건 가운데에는 고려 시대에 살았던 김련(金璉, 1215-1291, 충렬왕 때 贊成事)의 준호구와 그의 손자 김진(金稹, 1292-?, 충혜왕 때 정당문학)의 호구단자가 당시의 호구 서식을 보존한 채 후세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다. 이 고문서는 비록 필사본이기는 하나 고려의 호구 서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면에서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호구 관계 문서로 보이며, 조선 중기 이전의 족보들이 지녔던 형식들의 연유를 해명할 수 있게 하고, 고려 시대의 친족 범위와 용어의 분화를 짐작할 수도 있게 하는 중요한 문서이다. 서식상으로는 그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등극 전 호적으로 판명되어, 국보로 정해진 호적보다도 앞서는 자료로 알려진 것이다.
이 김씨 호구 문서는 1261년 개성부(開城府)의 호적에 의거 1301년에 발급된 김련의 준호구와 1333년 호주 김진이 개성부에 올린 호구단자가 ‘孫-祖’ 차서로 거꾸로 합쳐져서 편차된 것인데, 이 두 문서에서만 모두 9세에 74명의 혈연과 인척 관계인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다.
기본호를 중심으로 등급된 김련의 준호구에서만도 관념적 친족일 수밖에 없는 “처조부, 처외조‘ 등이 추적되는데, 김진의 호구단자에서만 48명의 혈족 및 인척 관계 인물이 다음처럼 열록된 바 ’자부의 증조, 자부의 외조‘ 등 현대인들이 친족 의식을 갖지 못하는 많은 인척들이 포함되어 있다.
(1) 호주(金稹), (2) 호주의 부(金士元), (3) 호주의 조부(金璉), (4) 호주의 증조(金大鱗), (5) 호주의 모(順興安氏), (6) 호주의 외조(安珦), (7) 호주의 처(安東權氏), (8) 호주의 처부(權允明), (9) 호주의 처조(權濟), (10) 호주의 처증조(權得公), (11) 호주의 처모(安東金氏), (12) 호주의 처외조(金方慶), (13) 호주의 장자(金光利), (14) 호주의 장자부(原州元氏), (15) 호주의 장자부의 부(元忠), (16) 호주의 장자부의 조(元瓘), (17) 호주의 장자부의 증조(元傅), (18) 호주의 장자부의 모(南陽洪氏), (19) 호주의 장자부의 외조(洪奎), (20) 호주의 손녀(6세), (21) 호주의 손자(5세), (22) 호주의 손자(4세), (23) 호주의 손자(3세), (24) 호주의 손녀(1세), (25) 호주의 장녀(化平郡夫人), (26) 호주의 장녀서(朴德龍), (27) 호주의 장녀서의 부(朴遠), (28) 호주의 장녀서의 조(朴全之), (29) 호주의 장녀서의 증조(朴輝), (30) 호주의 장녀서의 모(南陽洪氏), (31) 호주의 장녀서의 외조(洪敬), (32) 호주의 외손(朴龍眠), (33) 호주의 외손녀(5세), (34) 호주의 외손(4세), (35) 호주의 외손(3세), (36) 호주의 외손(1세), (37) 호주의 2남(金英利), (38) 호주의 차자부(南陽洪氏), (39) 호주의 차자부의 부(洪承演), (40) 호주 차자부의 조(洪敬), (41) 호주의 차자부의 증조(洪子藩), (42) 호주의 차자부의 모(延安李氏), (43) 호주의 차자부의 외조(李得良), (44) 호주의 손자(15세), (45) 호주의 3남(金成利), (46) 호주의 4남(金安利), (47) 호주의 차녀(3세), (48) 호주의 5남(金天利)
이 호구단자는 전게 국보호적과 마찬가지로 ‘조모’등의 4조를 추적하는 ‘추심호’의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호주를 기준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혈연자, 인척인의 계보를 파악할 수가 있다.
(49) 호주의 조처의 부(曺著), (50) 호주의 조처의 조(曺樞財), (51) 호주의 조처의 증조(曺子廉), (52) 호주의 조처의 고조(曺思旦), (53) 호주의 조처의 모(廣州李氏), (54) 호주의 조처의 외조(李永弼), (55) 호주의 증조(金大鱗), (56) 호주의 고조(金光存), (57) 호주의 5대조(金珠永), (58) 증조처의 부(金俊齡), (59) 호주의 외조(安珦), (60) 호주의 외조의 부(安孚), (61) 호주의 외조의 조(安永儒), (62) 호주의 외조의 증조(安子美), (63) 호주의 외조의 모(剛州禹氏), (64) 호주의 외조의 외조(禹成允), (65) 호주의 처부(權允明), (66) 호주의 처부의 증조(權思拔), (67) 호주의 처부의 모(安東金氏), (68) 호주의 처부의 외조(金光厚), (69) 호주의 처외조(金方慶), (70) 호주의 처외조의 부(金孝印), (71) 호주의 처외조의 조(金敏成), (72) 호주의 처외조의 증조(金義和), (73) 호주의 처외조의 모(金海宋氏), (74) 호주의 처외조의 외조(宋耆)
위 26인 가운데에서도 (55), (56), (57), (59), (65), (69)를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실제적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관념적 친족에 불과한 예가 된다.
위 연인원 74명 가운데서 거듭 나타나는 (55), (59), (65), (69)를 제외한 70인을 나누면 혈족이 겨우 19명, 인척이 51명이 되어 자신의 호적에 오히려 입혼(入婚)한 여자들의 혈족이 숫자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나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
앞에서 본 종법과 함께 이와 같은 호적제도와 문서의 탓으로 연면한 혈연 및 인척의 계보 파악이 가능하여 전게 김씨 종택 소장 46건의 호구 관계 문서로서 11세(김주영)로부터 현재 39세인 종손(김준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29세 900여 년간의 세계(世系)를 확실히 더듬을 수 있게 한다. 어느 한 단위 가족의 한 건 호구 관계 문서로써 인척을 포함한 9세간의 계보 추적이 가능한 이러한 고문서들이 여러 대 쌓인다면 거기서 밝혀낼 수 있는 친족 관계는 무척이나 넓고 복잡한 것이 된다. 이런 호구 문서의 누적에 의해 우리도 중국이나 마찬가지로 그만큼 많은 수의 친족어의 넓고 복잡한 체계의 친족 조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