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부 내의원 /9 ]
의녀 한 아이가 허준이란 이름을 문득
기억해낸 듯했다.
별 사람도 아니요,
혜민서 근무도 감격이라고 꼭두새벽에
찾아든 시골티 나는 허준에게
금시 흥미를 잃고 흩어지는 의녀들 속에서 그중 나이 어린 그 의녀가 또랑한 소리로
물어왔다.
"외람되오나,
허의원이라 하시면 저번 과차 때 이상을
받으셨던 그분 이시온지요?"
이번에는 허준이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앙증스런 침통을 저고리의 고름깃에 단
전통적인 의녀의 복식이되 ,
나이 13, 4세의 앳된 소녀인데,
말끝에 상큼상큼 들리는 눈빛이 총명해
보였다.
그리고,
궁 생활이 오랜지 취재의 성적을 이르는
'과차'라는 어려운 말을 선뜻 쓰는 것도
나이보다 훨씬 숙성한 인상이었다.
과차란 아홉 등으로 우열을 매기는 취재의 성적을 이른다.
그 분류는 위로부터 이상, 이중, 이하,
다음이 삼상, 삼중, 삼하, 마지막 7, 8, 9등을 차상, 차중, 차하로 평점한다.
그 어려운 과장의 용어를 쓰는 소녀를
허준이 빙그레 웃으며 건너보았다.
"나를 알던가?"
허준이 묻자,
소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두 손을
모았다.
"뵙기는 처음 뵈오나 성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디서?"
"제 자란 곳이 충청도 진천이오라,
허의원께서 그곳 버드네에서 베푸신
여러 은혜를 익히 듣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준이 미소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런 일로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미상불 반가웠다.
"소녀의 이름은 미사라 부르옵니다.
태생이 미천하와 성은 지니지 못하였
사옵고요."
"그래 ..."
미천하다 말하고 있으나,
어느 한 곳 미천한 그늘이 없는 소녀였다.
훤히 밝은 시각이요!
이미 이 구석 저 구석 인기척이 들린
시각인데도 쥐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에
의아해지는데,
미사가 나직하게 혜민서의 공기를
일러줬다.
그 말인즉,
이번 내의원 인사 중 특히,
혜민서의 의원들이 심한 반발을 품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인사가 확정된 어제 2년째
혜민서에 근무하며 이번 인사에야말로
타처로 전근되기를 고대하던 직장(종7품) 한 사람과 부봉사(정7품) 한 사람,
참봉(종9품)한 사람.
그 세 사람이 사표를 던지고,
밤 사이 고향으로 떠났다는 것과 그래서
남은 몇 사람들이 어의 양예수 대감에게
달려갔으나,
그중에도 한두 사람은 저희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인사가 정정되지 않으면,
그도 내의원을 떠나리라는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직소를 하면 더러 시정이
되던가?"
"일차 영이 떨어지고야 시정되지는
않는다는 소문이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미사가 정색하여 허준을 올려보았다.
"스스로 의원이고자 하는 분들이
꼭 몸편한 곳만 찾는 그런 걸 보면 우리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구나,
혜민서란 돈없이 가난한 백성들의 병자만 찾아드는 곳이온데,
의원이 되어 꼭 지체 높고 귀한 신분의
병자만 보려고 안달하는 걸 보면 왠지
그 의원들이 미운 생각도 나고요."
"이 혜민서가 그토록 힘드는 곳인가?"
"궐내에 배치받는 데 비하면 힘들고
빛이 안 나는 곳이긴 합지요.
하지만,
과차가 삼하 이상인 분들은 잘 배치되지
않는 곳인데,
첫등에 올라 구임인 허의원 같은 분이
오시게 됐다니,
혜민설 찾아오는 병자들한테 복이 떨어진 셈올시다."
미사의 나이보다 재치있는 말에 허준이
웃었다.
허준은 느긋했다.
땅을 파고 흙을 져나르는 일도 아니요!
자신이 지닌 의술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라면,
설사 신체의 고단함쯤이야 익히 돌파 할 수 있는 직이라 생각했다.
허준은 미사에게 청하여 혜민서의 각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혜민서의 건물 구조는,
내경, 외형, 탕액, 침구, 잡병 다섯 건물로
나누어져 그 잡병 속에 부인병과 소아병이 또 세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각 건물마다 널따란 통로인 칸막이로
남녀의 병상과 진찰방이 따로 붙어 있는데 소아들일지라도 엄격히 일곱 살이면
남녀 각각의 병동을 사용토록 했고,
그 각 과 각 병동을 의원과 의녀들만
무시로 출입하였다.
각 병사마다 붙박이로 오래 치료할 이와 나날이 오가며 치료받는 병자,
격리해야 할 병자와 한 방에 잠자도 되는
병자들의 병동이 온돌방과 목상 10여
개씩을 배치한 방들로 나뉘어,
혜민서 전체의 규모는 꽤나 컸으나,
그러나 중부를 비롯, 동서남북 합해
그 다섯 부 마흔아홉 방의 한양성 내외의
병자들이 몰려드는 유일한 국립무료의료원인 혜민서는,
진시 개문 후 유시 폐문까지 도성 안의
온갖 병자가 밀어닥쳐 서울에서 가장
소란하고 복닥거리는 관청이었다.
미사를 따라 각 방의 구조를 둘러보며
허준은 병사 앞에 내걸린 의명들이 흥미로웠다.
내의원 도제조나 혜민서 제조로 직책을
받은 이들이 썼다는 그 각 방의 현판글을
보고 있으면 병일랑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내용이었다. .
박람군서 정통도예는 서리들의 직숙방에 붙은 현판이고,
절충고금 명지운기는 내경의 병동,
대증투제는 외형병동, 인병제방 약판온량은 탕액, 기사회생 맥분표리는 침구 병동에
그리고 잡병 병동의 부인과 소아의 병사에는 통효음양 병심허실 치용보사 등 각각의 의명이 굽어보고 있었다.
허준이 서리의 방 앞으로 돌아오자,
그 사이 등청해온 이공기가 뜻밖에도
그 서리들의 방에서 나와 허준을 끌고
한쪽으로 갔다.
이공기가 그 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귀띔했다.
어의에게 3년째 혜민서에 떨어진
억울함을 직소하러 간 황오복 이라는
주부가 기어이 양예수로부터 내국
(대궐 내 약방) 근무로 이동이 되었으며,
그 황오복과 행동을 함께 한 박모라는
부봉사도 전의감으로 새로 발령이 났고,
여타 인물들에게도 내년의 인사에는 반영되리라는 언질을 받아왔다는 그런
얘기였다.
"혜민서에 온 걸 후회하지 않겠다 하더니 왜 새삼 미련이 남소?"
하고,
허준이 묻자 이공기가 수염을 쓸며
겸연쩍게 말했다.
"우리야 어차피 첫배치요!
억울하네 어쩌네 떼를 쓸거리도 없지.
하지만 ..."
"..."
"양대감이 일차 결정한 인사를 다시
바꾸어준 걸 보면,
자신의 인사에 각사의 불만이 쌓인 것을
인정한 듯도 하여 내년쯤엔 우리도 살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 핫핫.
그리고,
모두 그대가 온 걸 궁금히 여기고 있네.
가 인사하세."
신참 두 사람이 고참 의원들과 새삼
통성명하여 인사를 나누었을 때,
갑자기 혜민서 안이 악머구리 끓듯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몰려든 병자와 그 가족들이 진찰 순번을
정해주는 진료패를 저마다 먼저
받아쥐려는 매일 아침 벌어지는 광경
이었다.
허준은 자신이 배치된 침구의 병동에서
그 밀려드는 병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종을 전담하다가 혜민서 발령에 사표
던지고 사라진 또 한 사람의 몫을
떠맡았다.
"어의께서 곧 결원을 보충할 의원을
배치해 줄 것이니 그때까지 가외로 수고를 좀 하시게."
어의에게 직소한 덕분에 드디어 혜민서를 벗어나,
대궐 안 내국 배치를 받은 감격이 겨운지
황오복이가 들뜬 얼굴로 허준에게 이르며 옮겨갈 자기의 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허준의 혜민서 첫날 일과는 그렇게
침을 놓고 종기를 째고 약을 발라 주는
일로 시작됐다.
병자가 끝도 없었다.
더구나 실무의원 세 사람이 빠져나간
혜민서는 옆 돌아볼 새 없이 바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허준은 오랜만에 자기 손으로 다루는
수많은 병자들을 대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의원으로서의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내 고단함은 병자의 고통에 비하면
열 배도 백 배도 가벼운 것이다!'
점심상을 물리고,
미사가 떠주는 숭늉은 이미 병사로 향해
걸으면서 마시며 허준은 뇌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남다른 의욕.
그것은 수많은 병자를 무시로 대하면서
자신의 경험이 더더욱 쌓이리라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결의에 찬 불같은 희망이었다.
'나야말로 가장 와야 할 곳,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곳에 배치된지도
몰라.'
허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일 계속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