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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
St Clare - SIMONE MARTINI
1317.Fresco,Cappella di San Martino,Lower Church,San Francesco, Assisi
그리스도의 연인,우리의 연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 한국 관구장)
- 클라라의 향기 2002. 제2호에서
....(중략)
교회는 그녀가 이 지상에서 하늘로 옮아가신 지 750년이 되었지만
그녀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녀의 귀천 750주년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기념하려고합니다.
그것은 성녀의 이름이 의미하듯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두분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역사에 빛나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성중심적 사회와 문화를 비판하고 여성의 위대성과 그 역활을 새롭게 들추어내는 요즈음
이 운동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신 분으로 성녀 클라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클라라 성녀가 모든 여성의 선구자인 이유가 당시 여성을 연약한 존재로 치부하고
그래서 기존의 수도 생활 회칙을 받아들이라는 교황들의 요청을 죽을 때 까지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요즈음 여성 운동처럼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녀가 남성 중심적 문화가 강요하는 대로의 그런 여성적 여성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그런 남성들과 싸우는 남성적 여성도 아닌, 즉 하느님적 여성이었기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적 여성이었습니다.
성녀는 남성을 혐오하지도, 남성과 싸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그것은 그녀와 프란치스코가 만나 대화를 나눌 때에
사랑이 타올라 마치 집에 불이 난 듯 멀리서도 환할 정도였습니다.
신문을 보면 만인이 우러러 볼만한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일컬어 세기적 사랑이라고 떠들썩하는데,
그녀와 프란치스코의 사랑이야말로 세기적 사랑 중에서도 세기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신을
’그의 작은(나무)가지’라고 할 정도로 존경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닮게 하고 마침내는 하나가 되어 같은 것을 바라보게 하지만 서로를 ’그’로서 있게 합니다.
이것이 풋사랑과 다른 점입니다.
미숙한 사랑은 서로에게만 머물고, 서로에게 빠져 서로를 삼켜바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진정한 사랑은 삼위일체의 사랑과 같이 따로 또 같이 존재하고 바라보며,
’우리의 사랑’을 ’우리 너머의 사랑’ 에로 확장케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양평 성클라라수도원.2000년.이태리.원목조각
성녀는 프란치스코가 바라 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프란치스코가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보고,소명을 받은 다미아노 십자가의
그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는(바라보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꾸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갔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치스코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ti)’라 불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두고 한 형제가 갖가지 병고의 기나긴 형극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인내하라고 격려하였을때,그녀는 매우 편안한 어조로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분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한 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떠한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었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나의 사랑하는 형제여!"라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주십사고 청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프린치스코는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큰지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고, 그러한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오상을 은혜로 받았는데, 성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Passion)을
수난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 은총, 고통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강인한 사랑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셩녀 클라라-양평 성클라라수도원.2000년.이태리.원목조각
성녀는 프란치스코를 사다리 삼아 예수 그리스도께 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다리 삼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에 안기고 잠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난 것 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이며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고,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가 형제라 부른 모든 것들도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배로 사랑한 그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인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연인입니다.
우리가 그녀의 연인이라면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바라보며 치장하고 닮아갔듯이
우리도 거울인 그녀를 바라보며 치장하고 닮아
"말구유 위 강보에 싸여 계시는 그 가난을,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워 계시는 그 겸손을,
그리고 십자가나무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항상 깊이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클라라의 향기2002.제2호에서- 양평 성 클라라 수도원 www.cla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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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미아노 성당은 글라라가 봉쇄 관상생활을 살았던 곳이었는데,
1253년 세상을 하직하던 그 날까지의 한 번도 성 다미아노 성당을 떠난 적이 없었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Order of Poor Ladies of San Damiano)가
창설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녀의 삶은 사도적 삶의 엄청난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여성들의 역할에 필적하는
훌륭한 신비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 독자적인 중세여성이었다.
성프란치스코는 21세의 그녀를 여자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명으로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음적 가난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재물조차도 소유하지 않았다.
성녀는 교황으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허락받고 이를 유지하는데
너무나 엄격하다는 주장들 때문에 많은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글라라회원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첼라노 2생애는 세 동료들의 전기 24항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
즉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로부터 들은 명령에 따라 그 성당을 수리하면서,
산 다미아노 수도원, 혹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의 창설에 대해서 예언했다는 내용을
반복해서 전하고 있다.
204항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있어서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첼라노는 이 동정녀들이 겸비한 덕들을 찬양하고 있으며,
프란치스코가 1212년에 클라라에게 생활양식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언급하고 있다.
205-207항에서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그들과의 영적인 일치가
실제로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가난한 자매들을 방문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별 이유 없이 산 다미아노를 방문함으로써
가난한 자매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지 말 것을 자주 권고하였다.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자매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 받게 되면,
자매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머리에 재를 쓰고 시편 51편,“Miserere”를 낭송하고 왔다고 한다.
자매들은 이러한 행동을 다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좋아하였다.
아시시의 클라라(1193-1253)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현명한 사람”(the enlightened one)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녀의 삶은 종종 프란치스코의 철저한 복음적 삶에 반대되는 배경을 지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런데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아주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 부상되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서,
1993-94년에 클라라 탄생 800주년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클라라는 자신을 종종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불렀다(회칙 I,3; 유언 37; 49).
그녀의 이상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나,
복음에 대해 참으로 여성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철저한 복음적 삶이
남성들의 사도적 영성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특권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녀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고,
그 다음으로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여성들의 역할에 필적하는
훌륭한 신비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 이 독자적인 중세 여성에 대해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그녀의 글들을 연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클라라의 관상의 삶은
외적으로 설교를 하러 다녔던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의 삶을 보충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가 관상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전기 12장 2항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관상과 사도적 설교 중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던 그 중요한 순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실베스텔 형제와 클라라 자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대답을 하게 되었다.
즉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사자(herald)로서 설교하는 것이” 하느님의 원의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통 몇 명의 형제들과 함께 몇 달 동안이나
자신이 이태리의 Appennines 산맥을 따라 만들었던 여러 은둔소들 중 한 곳에서 지냈다.
이 은둔소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시시 위쪽에 위치한 수바시오 산에 있는 Carceri 은둔소일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은둔소에서 살고자 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짧은 회칙을 써주기도 하였다.
1213년 5월 8일에 프란치스코는 San Marino 가까이 있는 San Leo에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자신과 형제들에게 Casentino에 있는
라베르나 산을 기증한 Chiusi의 Orlando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산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이 산이 은둔소를 위해서 이상적인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이 산은 1224년 9월,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았던 곳이다.
성 다미아노 성당 내부 모습과 성 다미아노 성당의 옛 가대
가난한 자매들의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성격을 드러내 준다.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자극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형제들과 아주 가까워서“작은 자매들”이라고도 알려졌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봉쇄생활이었으나,그전의 수도승적 수도원의 생활양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 다미아노에서의 봉쇄구역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더 영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가난한 자매들은 시가지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이것은 자신들과 관상적 삶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작은 형제들의 사도적 활동에 가까이서 협력하려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가난한 자매들의 삶은 그들의 아무런 소유도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들의 수도생활 운동들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가난의 특전은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지녔던 특징적인 점으로 여겨진다.
클라라는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그녀의 카리스마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 명의 교황은 그녀의 가난의 특전을 인가해 주었다:1216(인노첸시오 4세); 1228년(그레고리오 9세).
그러나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자신이 보호자 추기경이었을 때인 1218년에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준 회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다른 회칙을 만들어 주었다.
이 두 개의 회칙은 모두가 베네딕도회의 이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성 다미아노 공동체에 안정된 생활양식을 보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클라라는 교회가 인정해 주는 그녀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갖고자 결심하였다.
그녀가 실행해 간 계획은 그녀의 용기와 결심을 잘 보여준다.
제 4차 라떼란 공의회(1215년)는 수도회들이 새로운 회칙을 가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클라라는 1212년에 프란치스코가 자신에 생활양식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짧은 기록은 생활양식과 함께 클라라가 자신의 회칙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실제로, 죽음에 이르러서 더 이상 클라라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었던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유언이다.
이 유언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모델 삼은 복음적 가난의 이상에 대해 강조하고 있고,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에게 그 이상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클라라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즉 교황에 의해 자신의 회칙을 인준되는 것을 보는 그 순간까지
이 말들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간직하였다.
이 생활양식은 1223년 11월 29일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인준된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그녀의 회칙에 근본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의 회칙은 새로운 회칙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것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지키기로 약속한 복음적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1253년 8월 9일 자신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준을 받아 내었다.
클라라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여성 수도회를 위한 회칙을 쓴 첫 번째 여자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회칙 6장을 프란치스코가 그녀와 그녀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준
두 개의 중요한 글들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쓰고 있다.
이 두 개의 글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들 중 첫 번째 것은 1212년에,
즉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이 산 다미아노에 정착하자마자,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써 준 것이다.
자신의 회칙 6장에서 클라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 없는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이 했던 복음적 삶에 대한 약속에 있어 기초를 형성한 것이고,
그래서 이 생활양식이 클라라 회칙의 근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 그리고 하느님과의 삼위일체적 관계성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것이 형제들에게로 이어져 형제들의 의무로까지 확대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죽음이 가까워 올 무렵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클라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는데,
클라라는 그때 교황께 자신의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이 회칙을 1253년 8월 9일에 이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이틀 후인 8월 11일 클라라는 성 다미아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시성 절차에 있어서 세 번째 증인이었던 필립파 자매에 의해 기록되었다:
“여러분은 훌륭한 호위를 받을 것이기에 평화 안에서 고요히 가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을 지켜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를 창조해 주셨으니 찬미 받으소서” (시성조사서 III, 20).
1260년 가난한 자매들은 전에 San Giorgio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시시의 새로운 수도원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이사하면서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와 클라라의 유뮬들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녀가 죽은 후,자매들의 수도회는 성녀 클라라의 수도회(OSC)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무덤은 1850년 8월 30일에 발견되었고, 9월 23일에 그녀의 유물들이 공개되었다.
1872년에 순례자들이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유물들은 대성당의 안치소에 있는 유골단지에 보관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회칙 원본은 이 회칙을 인준해 준 칙서인 “Solet annuere"와 함께 1893년에 발견되었다.
- 작은형제회홈에서 www.ofm.or.kr -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아가2,6;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아가2,6;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
*제주 성 글라라 수도회에서 www.jejuclare.com
축일: 8월11일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
Santa Susanna di Roma Martire
Susanna = giglio, la donna pura, dall'ebraico (in aramaico Shoshana)
(Lily, the pure woman, from the Hebrew)
AD 295년
수산나는 '백합'이란 뜻이다.
가비니우스라는 어느 사제의 딸인 성녀 수산나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로 교황 성 카이우스(Cajus)의 조카였다.
그녀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기 조카인 막시미아누스와 결혼하라는 요구를 뿌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결혼을 종용하도록 파견했던 궁중 관리인 클라우디우스(Claudius)와
막시무스(Maximus)까지 개종시켰다.
분을 참지 못하던 황제는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아내 프레페디냐(Praepedigna)는 물론
그들의 두 아들과 막시무스를 쿠메에서 죽이고, 수산나와 그의 아버지는 참수시켰다.
(가톨릭홈에서)
[(백)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3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녀는 같은 아시시 출신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인도로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성녀는 철저하게 가난을 실천하는 클라라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클라라 성녀는 기도와 선행으로 많은 선업을 쌓다가 1253년에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은 그녀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입당송
이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마중 나갔네.
본기도
하느님, 가난을 사랑하도록 복된 클라라를 자비로이 이끌어 주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가난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마침내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우상 숭배와 불의한 행위는 되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온갖 종류의 우상으로 얼룩진 성전의 파괴와
우상 숭배에 빠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학살을 예고한다.
그러나 그의 기도로,
주님께 충실하고 주님께 이마에 구원의 표를 받은 사람들은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
.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단죄를 의미한다(제1독서).
어떤 형제자매가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을 침해하여 죄를 지을 때, 공동체는
그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노력하면서 올바르고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같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서로 일치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형제자매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당신도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 독서
<예루살렘의 역겨운 짓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1-7; 10,18-22
1 주님께서는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3(112),1-2.3-4.5-6(◎ 4ㄴ)
◎ 주님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드높은 곳에 좌정하신 분,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
복음 환호송
2코린 5,19
◎ 알렐루야.
○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 알렐루야.
복음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주님, 주님의 놀라운 일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복된 클라라 동정녀 축일에 그의 깨끗한 삶을 정성된 제물로 받아 주셨듯이,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5,6 참조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클라라를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하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공동체라는 말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말은 곧 공동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정 공동체, 마을 공동체, 교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등.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집단일 따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그분의 정신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선익(공동선)을 해치는 어떤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에서 얼마만큼 주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상처 준 일은 없는지,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참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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