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 화상 비명병서 〔智證和尙碑銘 竝序〕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오상(五常)의 방위를 나눌 때 동방(動方)에 배속된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 삼교(三敎)의 이름을 세울 때 정역(淨域)에 출현한 것을 불(佛)이라고 한다. 인심(仁心)은 불(佛)이요, 불목(佛目)은 인(仁)인 것도 필연적인 일이다. 욱이(郁夷)의 유순한 성원(性源)을 이끌어 가위(迦衛)의 자비로운 교해(敎海)에 이르게 하는 것은 돌을 물에 던지고〔石投水〕 모래 더미 위에 물을 뿌려 주는 것〔雨聚沙〕과 같은 일이다. 더군다나 동방의 제후로서 외방을 지키는 자로 우리보다 큰 나라가 없으며, 지령(地靈)이 이미 살리기 좋아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속 또한 서로 양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희희(煕煕)한 태평의 봄날이요, 은은(隱隱)한 상고(上古)의 교화라고 할 것이다.
여기에 또 모든 성씨(姓氏)가 석가(釋迦)의 종족에 참여하는 가운데존귀한 임금님이 삭발을 하고 승려가 되기까지 하였으며, 언어 또한 범어(梵語)의 소리를 답습해서 혀를 굴리는 소리에 다라(多羅)의 문자가 많았다. 이는 바로 하늘이 분명히 서토(西土)를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군자의 고장에 법왕(法王)의 도(道)가 스며드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깊어지고 또 깊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노(魯)나라에서 별이 떨어진 것〔隕星〕을 기록하고한(漢)나라에서 일륜(日輪)을 두른 일〔佩日〕을 징험한 때로부터 상적(像跡)은 백천(百川)이 달빛을 머금은 듯하고 법음(法音)은 만뢰(萬籟)가 바람에 부르짖는 듯하여, 혹은 훌륭한 가르침을 비단에 적어 넣기도 하고 혹은 아름다운 자취를 빗돌에 새기기도 하였다. 그래서 낙양(洛陽) 시내를 범람하고진(秦)나라 궁전을 비추었던 사적(事跡)이 일월(日月)이 걸린 것처럼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삼척(三尺)의 입과 오색(五色)의 붓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사이에 문사(文辭)를 엮고 후대에 언설(言說)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국관국(以國觀國)의 관점에 입각하여 어느 지역에서 건너왔고 어느 지역으로 옮겨 갔는지를 고찰해 보건대, 불교의 바람이 사막과 산맥을 거쳐 중국에 전해지고 나서 비로소 그 물결이 바다 모퉁이 동방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옛날 동방에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있을 당시에, 백제(百濟)에 소도(蘇塗)의 제의(祭儀)가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을 제사하던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서진(西晉)의 담시(曇始)가 처음으로 고구려(高句麗)에 들어왔는데, 이는 섭마등(攝摩騰)이 동한(東漢)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또 고구려의 아도(阿度)가 우리 신라(新羅)에 건너왔는데, 이는 강승회(康僧會)가 남쪽 오(吳)나라에 간 것과 같았다. 이때는 바로 양(梁)나라 보살제(菩薩帝)가 동태사(同泰寺)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되는 해요, 우리 법흥왕(法興王)이 율령(律令)을 제정한 뒤로 8년이 되는 해이다. 그즈음에는 역시 해안(海岸)에 여락(與樂)의 뿌리가 내렸음은 물론이요, 일향(日鄕)에 증장(增長)의 보배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착한 소원이 받아들여지고 땅에서는 수승(殊勝)한 인연이 솟아났다. 그런 가운데 중귀(中貴)가 불교에 몸을 바치고 상선(上仙)이 머리를 깎는가 하면, 비구(比丘)가 서쪽으로 배우러 가고 나한(羅漢)이 동쪽으로 와서 노닐었다.
그러한 까닭에 혼돈이 제대로 개벽되고 사바세계가 두루 교화되는 가운데, 산천의 승경을 가려서 토목(土木)의 기공(奇功)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좌선할 집을 꾸미고 수행의 길을 밝히니, 신심(信心)이 샘처럼 솟아나고 혜력(慧力)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그리하여 실제로 표저(漂杵)의 재앙을 없애고 건고(鞬櫜)의 경사가 있게 한 결과 옛날의 조그마한 세 나라가 지금은 장하게도 한집안이 되었다. 지금은 사원이 구름처럼 배치되어 빈 땅이 없을 정도이고, 쇠북 소리가 우레처럼 진동하여 제천(諸天) 가까이 퍼져 나가니, 앞으로도 점차 여유 있게 교화될 것이요 싫증 냄이 없이 심오하게 탐구할 것이다.
이 땅에 불교가 흥기한 것을 살펴보건대, 비바사(毘婆娑)가 먼저 이르자 사군(四君)이 사제(四諦)의 바퀴를 치달렸고, 마하연(摩訶衍)이 뒤에 오자 일국(一國)이 일승(一乘)의 거울을 비추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경의(經義)에 밝은 용들이 구름처럼 뛰어오르고 계율(戒律)에 철저한 범들이 바람처럼 휘날리면서, 학해(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의 가엽(柯葉)이 무성하게 우거진 가운데, 도인(道人)은 모두 무외(無外)의 경지에 융합하였고 유정(有情 속인)이 혹 중도(中道)의 길을 밟기도 하였다. 어쩌면 지수(止水)처럼 잔물결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고산(高山)처럼 아침 햇살을 맨 먼저 받은 걸출한 자도 대개는 있었을 법하나, 세상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승려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서당(西堂)의 오묘한 경지를 접하고는 지혜의 빛이 지장(智藏 서당)과 비등해져서 돌아온 뒤에 처음으로 선종(禪宗)의 현묘한 계합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러나 교종(敎宗)의 사람들은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혀서 남쪽의 목적지 대신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비호하였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부하면서 남명(南冥)을 향해 높이 날아가는 대붕(大鵬)을 비난하였으며, 이미 교종의 말을 외우는 일에 도취해서 선종을 다투어 마어(魔語)라고 비웃었다. 이 때문에 처마 아래에 빛을 숨기고 선경(仙境) 속에 자취를 감춘 채 동해(東海)의 동쪽인 서울로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北山)의 북쪽인 심산유곡으로 은둔하였으니, 이 어찌 대역(大易)에서 말한 근심이 없다〔無悶〕고 한 사람이요, 《중용(中庸)》에서 말한 후회하지 않는다〔不悔〕고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겨울 산마루에 외로운 솔이 빼어나듯 선정(禪定)의 숲에서 향기가 배어 나오자, 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듯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을 가득 채웠으며, 매가 변화하듯 사람들이 개과천선하여 그 골짜기에서 나왔으니, 도(道)는 폐할 수 없는 것으로서 때가 된 뒤에 행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광대한 선왕(先王)의 공업을 이어받고 선강태자(宣康太子)가 감국(監國)과 무군(撫軍)의 일을 맡게 됨에 미쳐서는 병든 부위를 도려내어 국가를 치료하고 선(善)을 즐겨하여 집안을 살지게 하였다. 그때 홍척 대사(洪陟大師)가 서당(西堂)에게 가서 마음을 증득(證得)하고 남악(南岳)으로 돌아와서 발을 쉬고 있으니, 임금이 순풍(順風)의 요청을 개진하고 태자가 개무(開霧)의 기약을 경하하였다. 현교(顯敎)는 명시(明示)하고 밀교(密敎)는 비전(秘傳)하는바, 아침에는 범부였어도 저녁에는 성인이 되게 함에 교계(敎界)가 울연(蔚然)히 변한 것은 아니지만,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이 발연히 흥기하였다.
그의 종취(宗趣)를 시험 삼아 엿보아 비교해 보건대, 닦되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고, 증득하되 증득할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였다. 고요히 있을 때에는 산처럼 서 있고 움직일 때에는 골짜기처럼 응하였으며,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동방 사람들의 마음속 경지가 신령스러워졌는데, 정리(靜利)로 바다 밖의 이 땅을 이롭게 하면서도 이롭게 한 바를 말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이후에도 조각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 불법을 구하며 도에 융합한 자들이 나왔다. 그러한 걸출한 선배 고승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런 이들이 많았다. 혹은 명검(名劍)이 연진(延津)에서 변화하듯 하고, 혹은 진주(珍珠)가 합포(合浦)로 돌아오듯 하였는데, 거벽(巨擘)이 된 이들을 손가락으로 꼽으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 그대로 머문 자들로는 정중(靜衆)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을 들 수 있는데 선보(禪譜)에 나온 익주(益州)의 김(金)과 진주(鎭州)의 김(金)이란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동방으로 귀환한 자들로는 앞에서 소개한 북산(北山)의 의(義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척(陟 홍척(洪陟))을 비롯해서 그 뒤에 나온 태안(太安)의 철(徹 혜철(慧徹))과 국사(國師)인 혜목(慧目)의 육(育 현육(玄育))과 지력(智力)의 문(聞)과 쌍계(雙溪)의 조(照 혜조(惠照))와 신흥(新興)의 언(彦 충언(沖彦))과 용암(涌巖)의 체(體)와 진구(珍丘)의 휴(休 각휴(覺休))와 쌍봉(雙峯)의 운(雲 혜운(惠雲))과 고산(孤山)의 일(日 품일(品日))과 양조(兩朝)의 국사(國師)인 성주(聖住)의 염(染 무염(無染))과 보리(菩提)의 종(宗 광종(廣宗)) 등이다.
이들은 덕이 깊어서 중생의 어버이가 되고 도가 높아서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온다고 한 격이라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이 세상에 교화가 미쳤고 큰 비석에 업적이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동기들도 훌륭하고 제자들도 번창해서 선정(禪定)의 숲이 계림(雞林)에서 빼어나게 돋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의 물결이 접수(鰈水 동해)로 안온히 흐르게 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문을 나서거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대도(大道)를 보고,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서도 상보(上寶)를 얻은 분이 있다. 그는 고요히 망념을 잠재우고 담담하게 세간의 재미를 모두 잊었다. 그리하여 굳이 이르려 하지 않아도 피안(彼岸)에 이르렀고, 굳이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도 차안(此岸)이 다스려졌다. 그러니 칠현(七賢)의 어느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십주(十住)로는 그 위치를 정하기가 어렵다.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현계산(賢溪山)의 지증 대사(智證大師)이시다.
그는 대성(大成)할 초기에는 범체(梵體) 대덕(大德)에게서 몽매함을 계발받았고, 경의 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품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상달(上達)해서는 엄군(嚴君 부친)이라 할 혜은(慧隱)에게서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였고, 영자(令子 아들)라 할 양부(揚孚)에게 묵계(默契)를 전수하였다.
대사의 법계(法系)를 보면, 당(唐)나라의 4조(祖)가 5세(世)의 부조(父祖)로서, 그 법맥이 해외의 동방에 전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흐름을 따라 헤아려 보면, 쌍봉(雙峯 4조의 별칭)의 아들이 법랑(法朗)이요, 손자가 신행(愼行)이요, 증손이 준범(遵範)이요, 현손이 혜은(慧隱)이요, 그다음 내손이 바로 대사이다.
법랑 대사(法朗大師)는 대의(大醫 4조의 시호(諡號))의 대증(大證)을 통과하였다. 중서(中書)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비명(碑銘)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원방(遠方)의 기사(奇士)요 이역(異域)의 고인(高人)인 그가 험도(嶮道)를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온 사람이 우리 법랑 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 법이라서 다시 은밀한 곳에 숨겨 놓았는데, 비장(秘藏)한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오직 신행 대사뿐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운세가 이롭지 못하여 도가 형통하지 못하자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기까지 하였다. 당시에 숙종황제(肅宗皇帝)가 은총을 내려 시를 하사하기를, “용아(龍兒)가 뗏목도 없이 바다를 건넜고, 봉자(鳳子)가 달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하늘에 올랐네.”라고 하자, 신행 대사가 산조(山鳥)와 해룡(海龍)의 두 구절을 가지고 답하였는데,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동방으로 돌아와 3대(代)를 전하여 우리 지증 대사에 이르렀으니, 필만(畢萬)의 후손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는 말이 이에 증험되었다.
대사의 속세의 인연을 상고해 보건대, 왕도(王都) 사람으로 김씨(金氏) 성의 자손인데, 호는 도헌(道憲)이요, 자는 지선(智詵)이다. 부친은 찬괴(贊瓌)이고, 모친은 이씨(伊氏)이다. 장경(長慶) 갑진년(824, 헌덕왕16)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中和) 임인년(882, 헌강왕8)에 세상을 떠났으니, 승려 생활 43년에 향년이 59세였다.
그의 생김새를 보면, 신장이 7자가 넘었고 얼굴은 1자쯤 되었으며, 풍채가 호걸스럽고 언어가 호방하였으니,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威而不猛〕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잉태로부터 입멸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자취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신출귀몰하듯 해서 붓으로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인데, 이제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할 여섯 가지의 기이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게 할 여섯 가지의 정대한 조리(操履)를 간추려서 각각 나누어 드러내 보려 한다.
처음에 모친이 꿈을 꾸니, 한 거인(巨人)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옛날 승견불(勝見佛)의 말세에 승려가 되었는데, 성을 잘 냈으므로 오래도록 용(龍)의 과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업보가 끝나서 법손(法孫)이 될 예정이기 때문에 묘한 인연에 의탁하여 자비의 교화를 넓히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 꿈을 꾸고는 임신하여 거의 400일이 지난 관불일(灌佛日) 아침에 탄생하였다. 이는 망정(蟒亭)의 일과 증험되고 상실(象室)의 꿈과 부합되는 것으로서 가죽을 차고 다니는 자로 하여금 더욱 경계하게 하고, 가사(袈裟)를 착용한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닦게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함이 그 첫째이다.
태어난 지 며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았으며 젖을 짜서 먹이면 울면서 토하려고 하였다. 그때 홀연히 도인(道人)이 문 앞을 지나가다가 충고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게 하려면 훈채(葷菜)와 비린 고기를 참고서 끊어야 한다.”
하였으므로, 모친이 그대로 따르니 마침내 아무 탈이 없었다. 그리하여 젖 먹이는 자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게 하고 고기를 먹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였으니, 숙습(宿習)의 기이함이 그 둘째이다.
9세에 부친을 여의고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정도로 몸이 상하였다. 이에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는 승려가 가련하게 여겨 타이르기를,
“허깨비 같은 몸은 사라지기 쉽고, 장한 뜻은 성취하기 어렵다. 옛날 부처가 부모의 은혜를 갚을 적에 큰 방편을 사용한 일이 있으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깨달은 점이 있어서 호곡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모친에게 아뢰어 불도에 귀의하겠다고 청하니, 모친이 그가 어린 것을 애처롭게 여기고 또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가 왕성(王城)을 몰래 빠져나간 옛일을 귀로 듣고는 도망쳐서 부석산(浮石山)으로 가서 수학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가슴이 뛰며 마음이 불안해져서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이윽고 의려(倚閭)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에 급히 귀성하자 병도 따라서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 일을 완효서(阮孝緖)의 고사에 견주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사가 병에 전염되었는데 의원에게 보여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고, 여러 곳에 점을 쳐 보아도 누구나 말하기를,
“큰 신령인 부처 아래에다 이름을 두어야 좋을 것이다.”
하였다. 모친이 예전의 태몽을 떠올리고는 시험 삼아 방포(方袍 가사(袈裟))를 몸 위에 덮어 주고 울면서 맹세하여 말하기를,
“이 병이 낫기만 한다면 부처님의 자식으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틀 밤을 자고 나자 병이 실제로 깨끗이 나았다. 이렇게 하여 위로는 염려하는 모친을 깨닫게 하고 끝내는 평소의 뜻을 이룸으로써, 지독(舐犢)하는 자로 하여금 애정을 끊게 하고, 음사(飮蛇)한 자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감(孝感)의 기이함이 그 셋째이다.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되어 비로소 계단(戒壇)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반짝이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탐색하여 하나의 구슬을 얻었으니, 이것이 어찌 의식적으로 구해서 된 것〔有心而求〕이겠는가. 발이 없어도 저절로 이른 것〔無脛而至〕이니, 이는 참으로 《육도경(六度經)》에서 설명한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배고파 울부짖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누워 있는 자로 하여금 깨어날 수 있게 하였으니, 여심(勵心)의 기이함이 그 넷째이다.
하안거(夏安居)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할 즈음에 밤에 꿈을 꾸니 변길보살(遍吉菩薩)이 이마를 어루만지며 귀에 대고 간절히 말하기를,
“고행(苦行)을 행하기 어렵겠지만, 행하면 반드시 이룰 것이다.”
하였는데, 꿈을 깨고는 송연(悚然)해져서 아무 말 없이 이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나 솜옷을 입지 않았고, 실로 기워야 할 때에도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의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신발도 가죽으로 된 것은 신지 않았다. 그러니 더군다나 깃털 부채나 털 담요와 같은 물건들을 사용했겠는가. 이렇게 해서 솜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눈이 번쩍 뜨이게 하고 비단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얼굴이 달아오르게 하였으니, 율신(律身)의 기이함이 그 다섯째이다.
젊은 시절부터 노성(老成)한 덕이 다분하였으며 게다가 또 계주(戒珠)가 빛났기 때문에 후생(後生)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큰 병통은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억지로 혜택을 베풀려고 하면 혜택을 주지 못하는 법이다.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이 모범이 되지 못하는 데야 어떻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바다에 떠 있는 지푸라기와 같아서 자기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림자를 쫓아다니다가 으레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행태는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다가 나무하는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말하기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쳐야 하는 법〔先覺覺後覺〕인데, 어찌하여 꼭 빈껍데기인 몸을 아끼려 하시는가.”
하기에, 그에게 응대하려고 하였으나 벌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달은 점이 있어서 가르침을 청하러 오는 자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雞藍山) 수석사(水石寺)에 사람들이 대숲처럼 빽빽이 들어차게 되었다. 그런데 또 얼마 뒤에는 다른 곳에 터를 잡아 건축을 하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책의 글자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고, 살 곳을 경영하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재점검하게 하였으니, 수훈(垂訓)의 기이함이 그 여섯째이다.
증(贈) 태사(太師) 경문대왕(景文大王)은 마음속으로 정교(鼎敎)를 융회(融會)한 분으로서, 법륜(法輪)을 굴리는 대사를 무척 만나고 싶어 하였다. 멀리서 대사를 깊이 사모하며 자기에게 나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서한을 부쳐 보내기를,
“이윤(伊尹)은 걸림 없이 나아와 자신을 보여 주었는데, 송섬(宋纖)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교를 불교에 견준다면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먼 곳으로 가는 종교라고 할 것입니다. 도성 주변의 산중에도 좋은 곳이 꽤나 있어서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 고를 수 있을 것이니, 봉황의 자태를 드러내는 일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하였다. 그리고 근시(近侍) 중에서 적임자를 엄선하여 곡릉(鵠陵 원성왕(元聖王))의 후손인 김입언(金立言)을 사신으로 보냈는데, 일단 왕의 분부를 전하고 나서는 대사에 대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하려면 조용한 곳을 놔두고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앉듯 하라는 분부야말로 저를 위해서 제대로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부디 도중(塗中)에 편안히 거하도록 허락해 주시고, 문상(汶上)에 있는 일이 없게끔 해 주십시오.”
하니, 상이 듣고는 더욱 진중(珍重)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대사의 성예(聲譽)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날아가고, 대중은 말이 없어도 변화하여 일신되었다.
함통(咸通) 5년(864, 경문왕4) 겨울에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이라고 칭하면서 당래불(當來佛 미륵불(彌勒佛))에게 귀의하고는 대사를 공경하여 천상에서 하계에 강생한 분이라고 일컬으며 상공(上供)을 후하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읍사(邑司) 관할의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에 아름다운 산수의 경치가 많다면서 대사에게 그곳의 원학(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그 문도(門徒)에게 고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인의 계곡〔賢溪〕이니, 그 땅이 바보의 골짜기〔愚谷〕와는 다르다. 그리고 사원의 이름이 안락(安樂)이니, 승려가 주지(住持)할 곳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요청한 대로 그곳에 옮겨 거주하니 주변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산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더욱 고요해지게 하고, 땅을 택하는 자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하게 하였으니, 행장(行藏)의 정대함이 그 첫째이다.
어느 날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고(故) 한찬(韓粲) 김공 억훈(金公嶷勳)은 나에게 도첩(度牒)을 주어 승려가 되게 하였으니, 공의 은혜를 불상(佛像)으로 보답하려 한다.”
하고는, 장륙(丈六 1장(丈) 6척(尺))의 불상을 현금(玄金 철(鐵))으로 주조하고 그 위에 황금을 입혀서 사원을 진호(鎭護)하고 저승길을 인도하는 데에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이 갈수록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자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도 신속히 호응하게 하였으니, 지보(知報)의 정대함이 그 둘째이다.
함통 8년(867, 경문왕7) 정해(丁亥)에 단월(檀越 불교 신도)인 옹주(翁主)가 여금(茹金) 등을 시켜 가람의 토지와 노비 문서를 건네주며 승려의 전사(傳舍)로 삼게 하고 영원히 바뀌는 일이 없게 하였다. 대사가 이 일을 계기로 생각하기를, ‘왕녀도 법희(法喜)에 이바지하고자 해서 이와 같이 희사(喜捨)하였는데, 불손(佛孫)이 선열(禪悅)을 맛보면서 어찌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나의 집안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당(親黨)도 모두 죽고 없으니, 길 가는 행인의 손에 떨어지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문(佛門)의 제자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건부(乾符) 6년(879, 헌강왕5)에 장(莊) 12구(區) 전(田) 500결(結)을 희사하여 사원에 소속되게 하였다. 누가 밥주머니라고 기롱하였던가.죽 먹는 일을 솥에다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천(民天)이 있게 된 덕분에 불토(佛土)를 기약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토지라고 하더라도 왕의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왕손인 한찬(韓粲) 김계종(金繼宗)과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팔원(金八元)과 김함희(金咸煕) 및 정법사 대통(政法司大統) 석현량(釋玄亮)에게 질의하였던 것인데, 구고(九皐)의 학 울음소리가 천리 밖에까지 울려 퍼지자, 증(贈) 태부(太傅)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윤허하고는, 그해 9월에 남천군 통승(南川郡統僧) 훈필(訓弼)로 하여금 별서(別墅)를 표시하고 정장(正場)을 구획하게 하였다. 이는 밖으로는 군신(君臣)이 땅을 보태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천상에 태어나도록 이바지한 것으로서, 속명(續命)한 자로 하여금 인(仁)에 감격하게 하고, 상가(賞歌)한 자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으니, 단사(檀捨 단월로서 희사한 것)의 정대함이 그 셋째이다.
간혜지(乾慧地)에 머물고 있는 심충(沈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사가 정혜(定慧)의 칼날을 놀리는 것이 여유작작하고, 건곤(乾坤 천문 지리)의 감식안이 투철하며, 뜻은 담란(曇蘭 동진(東晉)의 승려)처럼 확고하고, 학술은 안름(安廩 남조 진(陳)의 승려)처럼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는, 대사를 찾아와 극진한 예를 표하고 나서 아뢰기를,
“제자의 사용하지 않는 땅이 희양산(曦陽山) 중턱에 있는데 봉암(鳳巖)과 용곡(龍谷)의 형세를 지니고 있어서 그 절경이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부디 그곳에 선궁(禪宮)을 지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대사가 차분히 대답하기를,
“내가 몸을 나눌 수가 없으니, 그 땅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으나, 그의 요청이 워낙 간절한 데다가 무장한 기병이 선도하러 달려 나오는 산령(山靈)의 기이한 현상이 있었으므로, 석장(錫杖)을 짚고 나무꾼이 다니는 오솔길을 더듬어 올라가 지세를 살폈다.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친 것을 보니, 봉황이 날개를 치며 구름 위로 솟구치는 형상이요, 물이 띠처럼 백겹으로 에워싼 것을 보니, 규룡(虯龍)이 허리를 바위에 걸치고 똬리를 튼 형상이었다. 대사가 이를 보고는 놀라워하는 한편으로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런 땅을 얻게 된 것이야말로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곳에 승려가 살지 않는다면 필시 도적의 소굴이 되고 말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을 방비할 기초를 다지면서 기와지붕을 올린 네 기둥을 세워 주위를 진압하고, 2구(軀)의 쇠 불상을 주조하여 사원을 호위하게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881, 헌강왕7)에 왕이 전(前) 안륜사(安輪寺)의 승통(僧統) 준공(俊恭)과 숙정대(肅正臺)의 사(史)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강역을 표시하여 정하게 하는 한편 사원의 편액(扁額)을 내려 봉암(鳳巖)이라고 하였다. 대사가 그곳에 가서 교화를 펼친 몇 년 사이에 산속의 백성 가운데 도적이 된 자가 처음에는 감히 법륜(法輪)에 거역하다가 끝내는 뽕나무 오디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선정(禪定)의 고요한 물을 깊이 떠서 마군(魔軍)의 산에 미리 물을 댄 큰 힘 덕분이 아니겠는가. 팔을 끊은 자로 하여금 그 의리를 표시하게 하고,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치려 한 자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개발(開發)의 정대함이 그 넷째이다.
태부(太傅) 대왕(大王 헌강왕)이 중화(中華)의 풍속으로 폐풍(弊風)을 일소하고 지혜의 바다로 마른 땅을 적시면서 평소부터 영육(靈育)의 이름을 흠모하고 법심(法深)의 강론을 듣고자 갈망하였다. 이에 계족산(雞足山)에 마음을 기울여 조서(詔書)를 보내 초빙하며 이르기를,
“밖으로 소연(小緣)을 돌보다 보니 일념(一念) 사이에 삼제(三際 한 해)를 넘기고 말았습니다. 안으로 대혜(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부디 한번 왕림해 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조서에서 언급한 “이 세상 어디서나 좋은 인연을 맺고 어느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라는 말에 감동되어, 가슴속에 옥을 품고서〔懷玉〕 산에서 나오니, 수많은 거마(車馬)가 길에 나와 대사를 영접하였다. 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을 취하며 이틀 밤을 편안히 석장(錫杖)을 머물게 하고는 월지궁(月池宮)으로 인도한 뒤에 마음이란 것에 대해서 대사에게 물어보았다. 이때는 바야흐로 가느다란 등라(藤蘿) 덩굴에도 바람 한 점 일지 않고 궁정의 온실(溫室)의 나무에 바야흐로 밤이 깃들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황금빛 파장의 달그림자가 옥빛 연못의 한복판에 엄연히 드리워져 있었는데, 대사가 달그림자를 굽어보다가 고개를 들고 고하기를,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것은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의 의혹이 해소되면서 흔연(欣然)히 계합하여 말하기를,
“금선(金仙 부처)이 꽃을 들어 보이며 후세에 전한 염화시중(拈花示衆)의 풍류가 진정 이것과 일치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경배하며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궁궐을 나설 즈음에 왕이 충직한 신하로 하여금 왕의 뜻을 전하게 하면서 조금만 더 머물러 있어 주기를 청하자 대사가 답하기를,
“우대우(牛戴牛)라고 말을 합니다만 값어치는 별로 나가지 않습니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러 준다면〔以鳥養鳥〕 그 은혜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작별을 고하려고 하니, 만약 굽히게 한다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안타까워하며 운어(韻語)로 탄식하며 말하기를,
“끌어당겨도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학(支鶴)인데, 나는 조구(趙鷗)가 아니로구나.”
하고는, 십계(十戒)를 받은 제자인 선교성 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를 호송해서 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토끼를 기다리는 자로 하여금 그루터기를 떠나게 하고,물고기를 탐내는 자로 하여금 그물 짜는 것을 배우게 하였으니, 출처(出處)의 정대함이 그 다섯째이다.
대사는 세상을 여행할 적에 멀거나 가까운 곳이나 평탄하거나 험한 곳을 막론하고 모두 걸어 다녔을 뿐 도보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말이나 소의 신세를 진 적이 한번도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산으로 돌아갈 무렵에 얼음과 눈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을 방해하자 왕이 종려나무로 제작한 보여(步轝)를 하사하여 타고 가게 하였다. 그러자 대사가 사자에게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쩌면 정대춘(井大春)이 말한 사람이 끄는 수레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돌아보면 영준(英俊)한 인물도 꼭 타야 할 물건이 아닌데, 하물며 머리를 깎은 승려의 경우이겠는가. 그러나 왕명이 일단 내려진 이상에는, 이를 받아들여서 고통을 구제할 도구로 삼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 때문에 안락사(安樂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석장(錫杖)을 짚고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된 뒤에야 비로소 그 보여를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알고서 근심하는 자로 하여금 공(空)의 도리를 요달(了達)하게 하고, 어진 이를 어진 이로 알고서 미련을 두는 자로 하여금 그 집착에서 떠나게 하였으니, 용사(用捨)의 정대함이 그 여섯째이다.
겨울의 마지막 달 기망(旣望)에서 이틀이 지난 날에 가부좌를 하고 대화를 나눌 즈음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사는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 별은 하늘 위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닷속으로 떨어졌다. 하루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서 울부짖으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물이 오열하는 듯하였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부러뜨리니 그 색깔은 곡수(鵠樹)와도 흡사하였다. 외물의 감응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으니 사람의 비통함이 어떠했을지 헤아릴 수 있다. 이틀 밤을 묵고 나서 현계산(賢溪山)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 희양산(曦陽山)으로 옮겨 장례를 행하였다.
태부(太傅) 왕(王 헌강왕)이 의원을 급히 보내 문병하게 하고, 역마(驛馬)를 내려보내 재(齋)를 올리게 하였으니, 공정하게 정사를 행하느라 겨를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대사에 대해서 생전과 사후 모두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제자인 건공향 영(建功鄕令) 김입언(金立言)으로 하여금 여러 제자들을 위문하게 하고, 지증 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이와 함께 비석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대사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문인(門人)인 성견(性蠲), 민휴(敏休), 양부(楊孚), 계휘(繼徽) 등이 모두 문재를 발휘하여 대사의 과거 행적을 간추려서 위에 바쳤다.
을사년(885, 헌강왕11)에 이르러 백성 가운데 유도(儒道)를 매개로 하여 제향(帝鄕)에 가서 급제자의 명단에 이름이 오르고 시어사(侍御史)의 직함을 띤 최치원이라는 자가 한후(漢后 당 희종(唐僖宗))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회왕(淮王 고변(高騈))의 예물을 지참하고서 귀국하였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오는 상서에 견주기에는 부끄럽다고 하더라도 학(鶴)이 돌아온 것과는 자못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상이 충직한 신하이면서 불교 신자인 도죽양(陶竹陽)에게 명하여 문인이 작성한 대사의 행장을 전해 주게 하고, 수교(手敎)를 내려 이르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방의 성사(聖師)가 서방 정토로 떠나서 슬펐는데, 수의(繡衣)를 걸친 중국의 조사(詔使)가 동방으로 돌아와서 매우 기쁘다. 불후하게 할 일이 이제 인연이 닿아서 이르렀으니, 아낌없이 외손(外孫)의 글을 지어 대사의 자비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이 동전(東箭)과 같은 훌륭한 재질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남관(南冠)을 쓰고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는데,바야흐로 운부(運斧)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느닷없이 호궁(號弓)의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또 나라에서는 불서(佛書)를 중히 여기고 집안에서는 승사(僧史)를 간직하고 있는 터에 불법(佛法)의 비갈이 서로 바라다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선종(禪宗)의 비석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절묘하다는 작품을 두루 열람하고 나머지 빠뜨린 글들을 시험 삼아 찾아보아도 무거무래(無去無來)의 언설을 다투어 쏟아 내어 말〔斗〕로 헤아릴 정도요, 불생불멸의 담론을 걸핏하면 논하여 수레에 실을 정도가 되었을 뿐 노사(魯史 춘추(春秋))의 신의(新意)는 전혀 없이 간혹 주공(周公)의 구장(舊章)을 쓰고 있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돌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고, 도가 멀기만 하다는 것을 더욱 징험하였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신이 늦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애체(靉 靆)라는 글자에 대한 전생의 인연을 누가 고해 주겠는가.소요(逍遙)에서 강의한 진결(眞訣)을 들을 수가 없었다.매양 손을 다칠까 걱정만 하였을 뿐 주먹을 펴는 숙연(宿緣)이 있음을 깨닫지는 못하였다. 때를 탄식하노니 이슬이 가고 서리가 내려 수심 어린 귀밑머리가 어느새 쓸쓸해지고, 도를 얘기하려니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워 겨우 몽당붓을 잡고서 머뭇거릴 따름이다. 장차 한만(汗漫)의 유람을 함께 즐길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공동(崆峒)의 아름다운 행적을 서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인(門人) 영상(英爽)이 와서 수신(受辛)을 재촉했지만 금구(金口)의 고사를 떠올리며 철석같은 마음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러나 뼈를 깎는 것을 참는 것보다도 더 인내하였지만, 요구하는 것은 몸에 새기는 것보다도 더 심하였다. 그리하여 등불 아래 그림자와 더불어 8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반복하여 되뇌이면서 언어를 다듬었다. 여섯 가지 기이함〔六異〕과 여섯 가지 정대함〔六是〕으로 글을 지은 것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어 남은 용기를 팔 정도로 자신이 있다. 그 이유는 실로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동을 취하면 육도(六度)를 포괄하고 가만히 있으면 육통(六通)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짓는 일이 꽃의 꿀을 채취하는 것과 같아서 그 글의 초고를 없애 버리고 쉽사리 마무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에는 잡목이 송백(松柏) 속에 함께 뒤섞인 것처럼 되었는가 하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는 것처럼 되어 부끄럽기만 하다.자취가 난전(蘭殿)에서 노닌 것을 뒤따랐으니, 누가 월지(月池)에서의 대면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백량(柏梁)의 작품을 본받아 게(偈)를 지으면서 해 뜨는 고장의 고상한 이야기로 널리 전해지기를 나름대로 기대해 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 麟聖依仁乃據德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 鹿仙知白能守黑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 二敎徒稱天下式
석가(釋迦)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 螺髻眞人難确力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 十萬里外鏡西域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 一千年後燭東國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 鷄林地在鼇山側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 仙儒自古多奇特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 可憐羲仲不曠職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 更迎佛日辨空色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 敎門從此分階墄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 / 言路因之理溝洫
몸은 토굴에 의지해도 마음은 쉬기 어려운 법 / 身依兎窟心難息
발이 양기를 밟으니 눈이 또 현혹될 수밖에 / 足躡羊岐眼還惑
불법의 바다로 순항할지 그 누가 헤아리랴 / 法海安流眞叵測
마음과 눈으로 통해야만 진극을 안으리라 / 心傳眼訣苞眞極
증득 속의 증득은 상망의 얻음과 비슷하고 / 得之得類象罔得
침묵 속의 침묵은 한선의 침묵과 다르다오 / 默之默異寒蟬默
북산의 도의(道義)와 남악의 홍척(洪陟)이여 / 北山義與南岳陟
홍곡의 날개 드리우고 대붕의 날개 펼쳤도다 / 垂鵠翅與展鵬翼
해외에서 제때에 돌아와서 도를 한껏 떨쳤나니 / 海外時來道難抑
멀리 뻗는 선의 물줄기 막힘이 없었어라 / 遠派禪河無擁塞
삼대 밭 속의 쑥은 절로 곧게 자라는 법 / 蓬托麻中能自直
구슬이 옷 속에 있는데 옆 사람에게 빌리리오 / 珠探衣內休傍貣
담연하여라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 湛若賢溪善知識
육이(六異)와 육시(六是)의 인연이 허식이 아니도다 / 十二因緣非虛飾
무엇하러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을 것이며 / 何用攀絚兼拊杙
무엇하러 붓끝을 빨며 먹물을 먹일 것인가 / 何用砥筆及含墨
남들은 혹 멀리 유학하여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 彼或遠學來匍匐
나는 가만히 앉아 마적을 항복받을 수 있었다오 / 我能靜坐降魔賊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 것이요 / 莫把意樹誤栽植
정욕의 밭을 잘못 가꿔 거두지 말 것이다 / 莫把情田枉稼穡
항하(恒河)의 모래에 만억을 논하지 말 것이요 / 莫把恒沙論萬億
외로운 구름에 남북을 정하지 말 것이다 / 莫把孤雲定南北
덕의 향기는 사방 멀리 치자꽃처럼 번져 가고 / 德馨四遠聞薝蔔
지혜의 교화는 일방의 사직을 안정시켰도다 / 慧化一方安社稷
천화를 직접 받들면서 누더기 옷자락 휘날렸고 / 面奉天花飄縷栻
수월에 마음을 비유하며 선풍(禪風)을 드날렸어라 / 心憑水月呈禪栻
부잣집 이을 후계자 누가 가시밭길에 들어서랴 / 家嗣佳錦誰入棘
유자(儒者)의 눈먼 지팡이로 더듬는 것이 부끄럽네 / 腐儒玄杖慙擿埴
자취가 보당에 빛나니 그 이름 새길 만한데 / 跡耀寶幢名可勒
재주는 금송에 뒤져서 글을 짜내기 어렵도다 / 才輸錦頌文難織
선열에 굶주려서 실컷 맛보고 싶은 이는 / 囂腹欲飫禪悅食
이 산중에 와서 전각을 한번 볼지어다 / 來向山中看篆刻
序曰:五常 【仁義禮智信】 分位,配動方 【東是萬物始生之方,故曰動方。】 者曰仁;三敎 【儒、佛、老】 立名,現淨域者曰佛。仁心卽佛,佛目能仁,則 【音測,法也。】 也。導郁夷 【東方】 柔順性源,達迦衛【竺國】 慈悲敎海,寔猶石投水,雨聚沙然。【言易也】 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也,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讓爲先?熙熙 【和樂之貌】 太平之春,隱隱 【安適之貌】 上古之化。加以姓參釋種,遍 【削也】 頭居寐錦 【音昧金,緇衣也。】 之尊;【眞興王剃頭爲僧,自號法雲。】 語襲梵音,彈舌足多羅 【西域木名,其葉廣大潔白,故寫經文。】 之字。寔迺天彰 【明也。或云“指漢明帝”,未詳。】 西顧,海印【佛之證法也。《會玄記》:“七寶山間香水海中閻浮提,有情無情一切物像,炳現其中,故謂之海印。”】 東流,宜君子之鄕,染法王之道,日深又日深矣。
且自魯記隕星,【《春秋》:“魯莊公七年夏四月,星隕如雨,恒星不見,而夜明如日。” 卽佛生之應。】漢徵佩日,【漢明帝永平三年,夢見金人項佩圓日,飛行殿庭。帝覺,問傅毅。遣中郞將蔡諳,往西域求佛法來。】 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緝 【績也】 懿 【美也】 縑緗,【淡黃帛,謂繡織佛像。】 或鐫 【刻也】 花琬琰。【玉石也,謂雕刻佛像。】 故濫觴洛宅,【洛邑也。周昭王二十四年甲寅夏四月八日,江漢泉池忽然汎漲,大地震動。五色光氣貫紫微,遍於四方。王問太史蘇由。對曰:“必有聖人生于西方。” 一千年後,聲敎及此。因刻石,埋南郊祀側,此佛法將來之始。】懸鏡秦宮 【始皇時,有外國沙門悉利防等十八人,持佛經來。始皇囚防等。夜有丈六金身,面如懸鏡,破獄出之,乃驚懼謝焉。此佛法現著之事。】 之事跡,昭昭焉如揭合璧,【此明白之意。古詩“日月如合璧,五星如連珠”。】 苟非三尺喙、 【孔子曰:“願有三尺喙。” 出《莊子》。】 五色毫,【江淹夢受五色筆,自後文藻日新。】 焉能措辭其間,駕 【傳也】 說于後?就以國觀國,考從鄕至鄕,【此用《道經》文“一國觀一國,一鄕觀一鄕”。】 則風傳沙嶮而來,【沙嶮,流沙蔥嶺峙也。】 波及海隅之始。
昔當東表鼎峙 【三韓也】 之秋,有百濟蘇塗之儀,【蘇,木;塗,土也。言土木爲像而祀也。《說文》:“謂塔曰浮屠,亦曰蘇塗。” 《東夷傳》:“三韓立蘇塗,似浮屠也。”】 若甘泉金人之祀。【漢武帝元狩中,霍去病入西域,獲渾邪王及金人一軀來,長丈餘。帝以爲大神,置甘泉宮,燒香禮拜。】 厥後西晉曇始始之貊,【今春川】 如攝騰【西域僧】 東入;【漢明帝時入中國】句驪【今平壤】阿度度于我,【一本作羅○新羅訥祗王時,墨胡子自高句麗來,至善山,刱立桃李寺。】 如康會南行。【《吳書》:“赤烏四年,康居國大丞相之康會,棄俗歸緇,以遊化爲任。行至建康,立茅茨設像行道,限三七日。甁中乞得舍利有驗,權喜立寺塔。”】 時乃梁菩薩帝反同泰一春。【《南史》:“普通八年,改元大通。而帝幸同泰寺捨身。”】 我法興王制律條八載也。【法興王十三年】 亦旣海岸植與樂之根,【慈能與樂,悲能拔苦。】 日鄕曜增長之寶。【信能增長智功德也】 天融善願,地聳勝因。爰有中貴 【《廣利傳》“中貴從廣”。註“居中用事之貴人”。】 捐軀,上仙 【王子也】 剔髮;苾蒭西學,羅漢東遊。
因爾混沌能開,【東國佛敎之初世界】 娑婆 【堪忍也】 遍化,莫不選山川勝槩,窮土木奇功。藻 【音早,文飾也。】 宴坐之宮,燭修行之路,信心泉涌,慧力風揚。果使漂杵 【《武成》“血流漂杵”。】 蠲灾,【兵亂息也】 鞬 【弓衣】 櫜 【音高,箭韜。】 騰慶,昔之蕞爾 【小也】 三國,今也壯哉一家。【武烈王滅百濟,文武王滅高麗也。】 雁刹 【《西域記》云:“昔有伽藍僧懷小乘敎,食五淨肉。見群雁飛,戲曰:‘今日廚供有缺,宜善和。’ 時有一雁折翼而下。上應大德曰:‘此佛菩薩憐愍,愚迷示現。’ 因以瘞雁爲塔,故云雁塔。”】 雲排,將無隙地;鯨桴雷振,不遠諸天,漸染有餘,幽求不斁。
其敎之興也,毗婆娑 【廣海,小乘敎也。】 先至,則四郡 【樂浪、臨屯、玄菟、眞蕃】 驅四諦之輪;摩訶衍 【大乘敎也】 後來,則一國曜一乘之鏡。然能義龍雲躍,律虎風騰,【《高僧傳》云:“義淨能通義學,故曰義龍;贊寧能解律學,故曰律虎也。”】 洶學海之波濤,蔚鷄林之柯葉,道咸融乎無外,情或涉於有中。抑止水停漪,【水波也,比妄想。】 高山佩旭 【初出日,比心印。】 者,蓋有之矣,世未之知。
洎長慶【唐穆宗年號】 初,有僧道義西泛,睹西堂之奧,智光 【自心也】 侔智藏而還,【西堂,馬祖弟子智藏禪師。】 始語玄契者。縛猿心,護奔北之短;【節終適越而北轅也】 矜鷃翼,誚圖南之高。【《莊子》,斥鷃笑大鵬曰:“彼奚適也?我騰躍而上,不過數仞而下。翶翔蓬蒿之間,此亦飛之至也。” 喩禪之見謗於世。】 旣醉於誦言,競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棄玉也】 斂跡壺中,【長房壺也】 罷思東海東,終遁北山北,【佛陀耶舍謝秦使曰:“脫如見禮羅什,則貧道當遠遁於北山之北。”】 豈《大易》之无悶?【遯世无悶】 《中庸》之不悔者耶?【不見知而不悔】 然秀冬嶺,芳定林,【東坡詩“冬嶺秀孤松”。】 蟻慕 【《徐无鬼》云:“羊肉不慕蟻,蟻慕羊肉,羊肉羶也。舜有羶行,百姓悅。故三徙成都,至隥之墟而十有萬家。”】 者彌山,鷹化 【變惡爲善,如鷹化爲鳩。】 者幽谷,道不可廢,時然後行。
及興德大王纂 【繼也】 戎,【大也】宣康太子監撫,【古詩“監國撫軍太子事”。】 去邪醫國,樂善肥家。有洪陟大師去西堂證心,來南岳休足,鷩 【似山鷄而小,乃華蟲。】 冕 【天子玉冕,公衮冕,侯、伯鷩冕,子男毳冕,大夫絺冕,士玄冕。盖朝祭之冠,上玄下纁,前後有旒各十二,每旒十二玉。玉之色以朱白蒼黃玄爲次。冕者,略俛之意,前低一寸二分。】 陳順風之請,【黃帝往崆峒山,順下風而問道於廣成子也。】 龍樓 【王者所居】 慶開霧之期。顯示密傳,朝凡暮聖,變非蔚也,興且勃焉。【《左傳》,臧文仲曰:“禹、湯罪己,其興也勃焉。”】
試覰較其宗趣,則修乎修沒修,證乎證沒證。【無修無證,言虛無也。】 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不爭而勝。於是乎東人方寸地 【心地】 靈矣,【言溺於佛也】 能以𩇕 【靜同】 利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
爾後觴 【盃也】 騫 【飛也】 河,【盃度和尙,携一木盃渡河。】 筌融道。【卽道義,明宗旨之意。】 無念爾祖?寔繁有徒。或劒化延津,【言得道中原而不還也。西晉惠帝時,張華使雷煥掘豐城獄,而得雌雄二劒,各佩其一。華誅,失劒所在,煥死,其子雷華持劒渡延平津,劒躍入水。使潛水者求之不得,但見雙龍蜿蜒而去。】 或珠還合浦,【言得道而還也。後漢孟嘗爲合浦太守,郡不產穀,海出寶珠,民以爲業。先是太守貪取珠,民不勝其苦。珠徙交趾郡,至是革袪舊弊,珠卽還來。】 爲巨擘者可屈指焉:
西化則靜衆無相【無相大師燒指求指,衣草食土,居靜衆寺。保唐、無住皆其門人。唐玄宗西幸時,禮敬殊深,柳尙書按東川,畫無相、無住、道一、地藏四祖師影,起四證堂。李尙書作銘云:“猗歟靜衆,來隔天潯,遣珪擲紐,爐指求心。柔菅伐毳,掬土延陰,蘇含檀鉢,露濕瓊針。” 碑在東川惠義寺。○天潯指中原】,常山慧覺,【金雲卿弟也,馬和尙弟子。】《禪譜》益州金、鎭州金者是也。東歸則前所敍北山義、 【道義】南岳陟【洪陟】 而降,太安【寺也】徹、 【惠徹】 國師慧目育、智力聞、雙溪【寺名】照、 【惠照】新興【寺名】彦、 【沖彦】涌巖體、珍丘【寺名】休、 【覺休】雙峯【寺名】雲、 【惠雲】孤山【寺名】日、 【品日】 兩朝國師聖住【寺名】染、 【無染】菩提宗。
德之厚爲父衆生,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故得皆化被恒沙,蹟傳豐石。有令兄弟,宜爾子孫,俾定林標秀於鷄林,慧水安流於鰈水矣。
別有不戶不牖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上寶。【二句言不去中原而得道】 恬然息意,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 【伯夷、叔齊、虞仲、夷逸、朱張、小連、柳下惠】 孰取譬?十住 【發心,治地,修行,生貴,具足,正心,不退,童眞,法王子,灌頂。】 難定位者,【不歷階位而證大道】賢溪山智證大師其人也。
始大成也,發蒙于梵體大德,稟具于瓊儀律師;終上達也,探玄于慧隱嚴君,受默于楊孚令子。【嚴、令,尊美之稱。】 法胤,【《說文》“子孫相承續也”。】唐四祖爲五世父,東漸于海。遡流【逆流上曰溯洄,順流下曰溯流。】 數之,雙峯【四祖號也】 子法朗,孫愼行,曾孫遵範,玄孫慧隱,末孫大師也。
朗大師從大醫【指四祖也】 之大證。按杜中書正倫纂 【撰同】 銘 【法朗銘】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嶮道,來至珍所”。則掬 【兩手承之也。《曲禮》“受珠玉者以掬,恐墮破也”。】 賲 【寶同】 歸止,非師而誰?【朗師】 第知者不言,復藏于密,能探秘藏,惟行 【愼行】大師。然時不利兮,道未亨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躳貽天什 【詩篇】 曰:“龍兒渡海不憑筏,鳳子沖虛無認月。” 【龍鳳兒子指朗師,筏、月喩方便也。】 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山不擇鳥,鳥能擇山;海不擇龍,龍能擇海。】 有深旨哉!東還三傳至大師,畢萬之後,於斯驗矣。【《左傳》:“晉卜偃曰‘畢萬之後必大’。指魏文侯斯能興宗業。” 言今大師能復振祖風。】
其世緣則王都 【慶州】 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贊瓌,母伊氏。長慶甲辰歲,現于世;中和壬寅曆,歸于寂。宴坐也四十三夏,歸全也 【曾子曰:“父母全而生之,子全而歸之。”】 五十九年。其具體則身仞 【七尺】 餘,面尺所,【餘也】 儀狀魁岸,【高也】 語言雄亮,【淸也】 眞所謂威而不猛者。始孕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筆不可紀。今撮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驚人心者六是,而分表之。
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勝見 【毘波尸也】 佛季世爲桑門,以嗔恚故,久墮龍報。報旣 【盡也】 矣,當爲法孫,故托妙緣,願弘慈化。” 因有娠,幾四百日,灌佛之旦 【四月八日】 誕焉。事驗蟒亭,【《高僧傳》云:“漢安息國沙門安淸,字世高。至廬山𨛺亭之廟,艤舟,廟神語高曰:‘吾與汝俱出家學道,吾則好施而多嗔。故受蟒身爲此廟神,周回千里,皆吾所轄。報形極醜,又朝暮且死,必入地獄。吾有縑千端並雜寶玩,當爲造塔建寺,以資冥福。’ 高許之,徐曰:‘能出形相。’ 於是從帳中出頭,乃巨蟒也。高出梵音㕨之,蟒垂淚如雨,俄不見。高舟未發,有少年跪前,高報曰‘得離惡形生善處’云。後人於山西澤中,見一死蟒,頭尾數千里。高至預章,以其物建大安寺。” ○世高,本世子,當嗣位,讓叔父出家。聰敏好學,內外典籍無不綜達也。】 夢符象室,【佛母摩耶夫人夢見大聖乘六牙白象,從天而入胎。】 使佩韋者益誡,【西門豹性急,佩韋自警。】 擁毳者 【着袈裟者】 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㝅 【音樓,壓乳而飮之。】 之則啼欲嗄。【音愛,嘔逆也。】 歘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葷腥。” 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食者懷慚,宿習之異二也。
九歲喪父,殆毀滅。有追福僧 【卽證師主齊體者】 憐之,諭曰:“幻軀易滅,壯志 【出家度生之志】 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 因感悟輟哭。白所生 【母也】 請歸道,母慈其幼,復念保家無主,確不許。耳踰城古事,【佛之踰城出家之事】 則亡去,就學浮石山。忽一日心驚,坐屢遷,俄聞倚閭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方之阮孝緖。【梁武帝時人,家世仕宦。年十四五,通經大旨;十六,丁外艱。終喪,入鍾山聽經。久之,在席驚心而歸家,母果罹疾而合用蔘。躳入終南山,有鹿引指蔘處,采用而母疾愈。】 居無何,染沈疴,謁醫無效。枚卜之,【枚,非一也。】 僉曰:“宜名隷大神。” 【佛也】 母追惟曩夢,試覆以方袍 【袈裟】 而泣,誓言“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 【再宿也】 果大瘳。【音秋,愈也。】 仰悟慈念,終成素志,使䑛犢者割愛,【楊彪子修,爲曹操所殺。操見彪曰:“公何瘦之甚?” 答曰:“恨無金日磾先見之明,猶有老牛䑛犢之愛。” 操改容謝之。○日磾,漢昭帝臣,見其子與宮人戲,遂殺之。】 飮蛇者釋疑,【晉樂廣親客杜滿飮酒,見盃中有蛇影,惡之成疾,于時壁上有弓。廣知其弓影,復置酒請飮,盃中果有其影,因疑解病除。】 孝感之異三也。
至十七,受具,始就壇。覺袖中光熠熠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孔融云:“珠玉無脛而至者,人好之也。” 善言不行而至者,類是。】 眞《六度經》所喩矣。【以戒喩珠】 使飢呼者自飽,【喩敎學】 醉偃者能醒,【喩禪學】 勵心之異四也。
坐雨竟,【西域之法,一年分爲熱雨寒三際:自二月十六日,至六月十五日爲熱際;六月十六日,至十月十五日爲雨際;十月十六日,至二月十五日爲寒際。】 將他適,夜夢遍吉菩薩【普賢也】 撫頂提耳曰:“苦行難行,行之必成。” 形開㾕然,【心驚聳縮貌】 默篆肌骨。【言銘佩也】 自是不復服繒絮焉,條綫 【音線】 之須,【補破之具】必用麻楮,不穿韃【音達,小羊皮也。】 履。矧羽翣、 【扇也】 毛茵 【氈也】 餘用乎?使縕黂者開眼,衣蟲者 【錦繡衣者】 厚顏,【恧怩也】 律身之異五也。
自綺年 【妙年也】 飽老成之德,加瑩戒珠,可畏者 【後生也】 競相從求益。大師拒之曰:“人之大患,好爲人師。【用《孟子》語。】 強欲惠不惠,【言無惠人之才而強欲惠之也】其如模不模何?【言模不可以爲模也 ○《淮南艸木譜》曰:“模木生周公冢上,其葉春靑夏赤秋白冬黑,以色得其正也;楷木生孔子冢上,幹枝踈而不屈,以質得其直。正與直,可爲法。況在周、孔之冢乎?”】 況浮芥海鄕,【所得者小,如浮芥舟於大海。】 自濟未暇?無影逐 【《楞嚴》演若達多迷頭逐影之事】 爲必笑之態。”
後山行,有樵叟假【音格,至也。】 礙前路曰:“先覺覺後覺,【用伊尹語】 何須悋空殼?” 【幻身】 就之則無見焉。爰愧且悟,不阻來求,森竹葦 【衆多貌】 于鷄籃山水石寺。【卽連山開泰寺。或云尙州龍興寺,未詳。】 俄卜築他所曰:“不繫 【孔子所云“吾豈匏瓜”之意】 爲懷,能遷是貴。” 使佔畢者 【《學記》:“佔,視也;畢,簡也。” 謂但諷誦其佔視之簡牘,不能通其藴奧之義。】 三省,營巢者九思,【重復思之】 垂訓之異六也。
贈太師景文大王心融鼎敎,【三敎也】 面渴輪工。【大轉法輪之工,指大師。】 遙深爾思,覬裨我則,乃寓書曰:“伊尹大通,【何事非君?何使非民?治亦進,亂亦進。】宋纖小見。【《晉書》:“宋纖有遠操,不與世俗交遊。太守馬岌造焉,高臺重閣,拒不可見。岌嘆曰:‘名可望而身不可見,德可仰而形不可覩,然後知先生人中之龍也。’ 乃銘詩於石壁曰:‘丹岸千尺,靑壁萬尋。奇林鬱鬱,蔚若鄧林。其人如玉,維國之珍。室邇人遠,實勞我心。’”】 以儒譬釋,自邇陟遠。甸邑 【畿內】 巖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 妙選近侍中可人,鵠陵 【宮名】 昆孫金立言爲使,旣傳敎已,因攝齊 【弟子禮】 焉。答曰:“修身化人,捨靜奚趣?鳥能之命 【應擇木語】 善爲我辭。幸許安塗中,【莊子釣於濮水,楚王使大夫二人往先焉,願以境內累矣。莊子持竿不顧曰:“吾聞楚有神龜,死已二千歲矣,王巾笥而藏之廟堂之上。此龜者,寧其死爲枯骨貴乎?寧其生而曳尾於塗中貴乎?” 二大夫曰:“寧生而曳尾於塗中。” 莊子曰:“往矣!吾當曳尾於塗中。”】 無令在汶上。” 【季氏使閔子騫爲費宰,子騫曰:“善爲我辭焉。如有復我者,則吾必在汶上。” 言遠去也。】 上聞之,益珍重。自是譽四飛於無翼,衆一變於不言。
咸通【唐憲宗年號】 五年冬,端儀長翁主【景文王之姊】 未亡人 【寡婦之自稱】 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 【翁主所封之地】 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大師乃吿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柳子厚所居之地名】 寺名安樂,僧盍住持?” 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 【音蓼】 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藏之是一焉。
佗日吿門人曰:“故韓粲 【官名】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 乃鑄丈六玄金像,傳之以銑。【金之光澤者】 爰用鎭仁宇,【寺也】 導冥路。使市恩者日篤,重義者風從,知報 【知恩而報也】 之是二焉。
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茹金【姓名】 等,持伽藍南畝 【卽賢溪田地】 曁贓 【男奴】 獲 【女婢】 本籍 【文簿】 授之,爲壞袍 【袈裟】 傳舍,【奴隷車馬之所。或云補縫破衣之舍。】 俾永不易。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哉?我家非貧,親黨皆沒,與落路行人之手,寧充門弟子之腹”。遂於乾符六年,捨庄 【田廬】 十二區、田五百結 【百卜爲一結 ○方俗,以周五弓爲一結,四肘爲弓,一尺八寸爲肘。王荆公詩曰“臥占寬閒五百弓”。】 隷寺焉。飯孰譏囊?【著實工夫,則可免此譏。《漢書》,禰衡曰:“時輩唯荀,則可與同言,餘人皆酒袋、飯囊。”】 粥能銘鼎。【正考父之事】 民天 【以食爲天】 是賴,佛土可期。雖曰我田,且居王土。始質疑於王孫韓粲繼宗、執事侍郞金八元、金咸熙及正法司大統釋玄亮,聲九皐應千里。【言遠聞也】 贈太傅憲康大王㤎 【佳之也】 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統僧訓弼,標別墅,畫正場。斯皆外佐君臣益地,內資父母生天。使續命者興仁,【北齊后主馮淑妃字小憐,以五月五日召入宮,號曰續命。】 賞歌者悛過,【唐裵晉公召一歌妓,作半日遊,賞絹五疋。書生有詩云:“一曲淸歌五疋絹,佳人猶自意嫌輕。不知貧女寒囱下,幾度抛梭織得成。”】 檀捨之是三焉。
有居乾慧地者曰沈忠,聞大師刃【惠刃也】 餘定慧,鑑透乾坤,志確曇蘭,【《法苑ㆍ珠林傳》云:“漢靈帝時,詳曇入洛;明帝時,法蘭入中國。是皆西竺之僧來化東上者也。”】 術精安廩。【僧道安內外群書皆遍覽。亦出《珠林傳》。廩,未詳。】 禮足已 【見禮畢】 白言:“弟子有剩地在曦陽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何尙之曰:“橫目之俗,不可與言。” 《莊子》有云“橫目之民”。】 幸構禪宮。” 徐答曰:“吾未能分身,惡用是?” 忠請膠固,加以山靈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蹊而歷 【推察也】 相【省視也】 焉。且見山屛四列,則鸑 【紫鳳】 翅掀雲;水帶百圍,則虬 【無角龍】 腰偃石。卽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 【僧也】 之居。其作黃巾 【賊也】 之窟。” 遂率先於衆,防後爲基,【先於人而作基,以防後慮。】 起瓦簷四柱以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
至中和【唐僖宗年號】 辛丑年,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肅正史裵聿文,標定疆域,仍榜爲鳳巖焉。及大師往化數年,有山甿爲野寇者始敢拒輪,【螗蜋拒轍之喩,言不自量力。】 終能食葚,【《魯頌》“飛鴞食椹”之語,言終歸于化也。】 得非深㪺定水,預沃魔山之巨力歟?使折臂者標義,掘尾者制狂,【唐含元殿前道路,轉如龍尾。安祿山欲掘之。○或云“地獸生怒,則掘尾而走”。】 開發之是四焉。
太傅大王以華風掃弊,慧海濡枯,素欽靈育之名,【或云:“靈芝照、育王璉二禪師”。】 渴聽法深之論。【東晉哀帝詔竺僧法深,講《般若經》於禁中。及辭還剡山,支遁寓書,求買沃川北嶺而歸隱。答曰:“未間巢、許買山而隱。” 及卒,帝賜錢十萬而造塔。】 乃注心鷄足,【卽賢溪山】 灑翰鵠頭以徵之曰:“外護小緣,念踰三際;【一年】 內修大慧,幸許一來。” 大師感動琅函言及“勝因通世,同塵率土”,懷玉出山。轡織迎途,至憩足于禪院寺;錫安信宿,引問心于月池宮。時屬纖蘿不風,溫樹方夜。【溫泉上樹耶?溫室前樹耶?】 適覩金波 【月也】 之影,端臨玉沼之心,大師俯而覬,仰而告曰:“是卽是,【上是水月,下是心也。】 餘無所言。” 上洗 【洒同】 然忻契曰:“金仙【唐武宗改佛號爲大覺金仙】 花目,【佛以靑蓮花目,顧視迦葉。迦葉破顏微笑。】 所傳風流,固協於此。” 遂拜爲忘言師。
及出,俾藎臣 【《大雅》“王之藎臣”。註“忠愛之篤,進進無已”。】 譬旨,幸宜小停。答曰:“謂牛戴牛,所直無幾;【梁武帝遣使召陶弘景。弘景畫二牛以進,一則戴金籠厭粟豆,一則無羈獨臥於芳草中。帝曰:“此人如此,其可致耶?” 言若留京則如戴牛價少。】 以鳥養鳥,【卽避風魯鳥也】 爲惠不貲。【言多也】 請從此辭,枉之則折。” 上聞之喟然,以韻語嘆曰:“挽旣不留,空門鄧侯。【《晉書》,鄧瑜字伯道。爲吳郡太守,除水以外,束薪斗米,不食於民。稱疾去職,民至有臥輪。人歌曰:“鄧侯挽不留,謝公推不去。”】 師是支鶴,【西晉哀帝時,支遁字道林。人有遺鶴者,乃放之曰:“沖天凌雲之物,豈耳目之所玩哉?”】 吾非趙鷗。” 【後趙石勒弟名虎,字季龍。襲兄之位,傾心事佛,圖澄朝會引見。侍御史擧轝升殿,太子諸公扶翼而前。主者唱曰“大和尙”,坐者皆起。勅司空李農,朝夕問候。支遁聞之曰:“澄公其以季龍爲鷗鳥乎?” ○《列子》曰:“昔有人無心坐江邊,鷗鳥聚游膝下。其父見之曰‘取鷗鳥來’,從其父敎,有心待之,鳥更不來。”】 乃命十戒弟子宣敎省副使馮恕行,援送歸山。使待兔者離株,【比出山】 羨魚者學網,【比入山靜修】 出處之是五焉。
在世行,無遠近夷險,未嘗代勞以蹄角。及還山,氷雪梗跋涉,乃以栟櫚 【梗楠之屬,可作床几輪轝者。】 步轝躳行。謝使者曰:“是豈非井大春所云人車耶?【後漢井丹子大春,常曰:“黃帝作車,少昊加牛,大禹加馬,已不可。況代人乎?”】爲顧英君【井大春封君也】 所不須,矧形毀者乎?然命旣至矣,受之爲濟苦具。” 及迻 【音移】 疾于汝樂練 【蘭也】 若,杖錫不能起,始乘之。使病 【憂也】 病者了空,【病空也,病空故乘之。】 賢賢者離執,【固執】 用捨之是六焉。
至冬杪 【十二月】 旣望之二日,趺坐晤言 【《蘭記》云“一室相對之言曰晤言”。】 之際,泊然 【恬靜無爲也】 無常。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風 【終日風】 吼谷,則聲咽虎溪;【惠遠入滅,虎溪若咽。】 積雪摧松,則色侔鶴樹。【佛入涅槃時,雙林變爲白鶴色。】 物感斯極,人悲可量。信 【再宿】 而假殯于賢溪,期而遷窆于曦野。
太傅王馳醫問疾,降騋 【朱子曰:“馬高七尺以上者。”】 營齋,不暇無偏無頗,能諧有始有終。特敎菩薩戒弟子建功鄕【地名】 令金立言慰勉諸孤,【弟子】 賜諡智證禪師,塔號寂照。仍許勒石,俾錄狀聞。門人性蠲、敏休、楊孚、繼徽等咸得鳳尾者,【晉謝鳳有文章,而其子超宗又有文章,謂之“得鳳毛”。】 斂陳迹以獻。
至乙巳歲,有國民媒儒道,嫁帝鄕,【先生年十二入唐,卽僖宗元啓年中也。○佛碑中儒道字,尤更生色。】 而名掛輪中,【言登科】 職攀柱下者 【侍御史着鐵冠立柱下】 曰崔致遠。捧漢后 【天子】 龍緘,【詔書也】 齎淮王【新羅王】 鵠幣,雖慚鳳擧,頗類鶴歸。【先生自謙。言己之榮貴雖不足爲鳳擧之比,其去家久而今始歸,則頗與丁氏鶴相似。】 上命信臣淸愼陶竹陽,授門人狀,錫手敎曰:“縷褐東師,始悲西化;【大師】 繡衣西使,深喜東還。【先生】 不朽之爲,有緣而至,無悋外孫之作,將酧大師之德。”
臣也雖東箭非才,而南冠多幸。【晉顧象,吳郡人;虞潭,會稽人。時人贊曰:“顧實南冠,虞惟東箭。” 註:“南冠,文人;東箭,武主。”】 方思運斧,【郢人鼻端,有堊如蠅糞,使匠人斲之。運斧成風,斲盡其堊而鼻不傷。】 遽値號弓。【言王之昇遐】 況復國重佛書,家藏僧史,法碣相望,禪碑最多。遍覽色絲,試搜錦頌,則見無去無來之說,競抱斗量;不生不滅之談,動論車載,曾無《魯史》新意,【《春秋》,乃孔子筆削魯史。則是史外傳心之要典,而今於法碣中,不見其意。】 不用周公舊章。【孔子修《禮記》,盡用周公之所撰《周禮》。】
是知石不能言,益驗道之云遠。【言佛說遍滿國中,而周、魯之道則遠矣。】 惟懊師化去早,臣歸來遲。靉靆字誰告前因?【昔有一比丘誦習《法花》,常忘靉靆二字。其師曰:“汝於宿世,受持《法華》。蠹食此二字,故未克見記。”】逍遙義不聞眞訣。【恨不與大師相遇,叩其眞而質卞之。】 每憂傷手,【《相傳》云:“大匠若無,則小匠恐傷手,不能執斧。” 言以我腐儒不敢下手於大師之碑。】 莫悟伸拳。【《傳燈錄》云:“二十五祖奢耶多自生至長,恒拳左手。見獅子尊者而申之,有一粒珠,衆皆驚異。獅子叙其宿因而勸出家。” 今言無緣於佛,莫悟其理。】 嘆時則露往霜來,遽凋愁鬢;【以東方君子之國,而盡入於西天之域耶?可嘆時事之變遷。】 談道則天高地厚,僅腐頑毫。【俯仰天地,僅存我一人而已乎?】 將諧汗漫之遊,【《淮南子》云:“盧敖遊北海,見一道士,問曰:‘夫子何與我爲友?’ 士曰:‘吾將遊於汗漫之上,乃聳身直入雲中。’ 敖仰視曰:‘吾比夫子,若壤蟲之於黃鵠也。’” 此比大師於道士,而自比於敖也。】 始述崆峒之美。【崆峒山有廣成子宮,景美不可盡述也。此言述大師之景行。】
有門人英爽來趣受辛,金口是資,【依也。后稷廟前有金人三緘其口,蓋愼言之意。言自家資無言而不答也。】 石心彌固。【堅不欲作序】 忍踰刮骨,【五代,萇從簡中流矢,命醫刮骨,而言笑忍痛。言忍不作序之甚。】 求甚刻身。【求之益甚】 影伴八冬,【久也】 言資三復。【累也】 抑六異六是之屬辭無媿,賈勇有餘者,實乃大師內蕩六魔,外除六蔽,行苞六度,坐證六通故也。【其苦心勞身,旣至若是,則竟不可不爲屬辭爾。】 事譬採花,【然記事也如蜂之採花。但取其香,不擇其味。】 文難消藁。【後魏李季白上書切諫,卽消其藁。而今則登石,難於消也。】 遂同榛楛勿翦,【陸機賦“彼榛楛之勿翦兮,亦蒙榮於集翠”。言善惡同歸於美。】 有慚糠粃在前。【習鑿齒與道安法師周遊,安先去。齒曰:“簸之揚之,糠粃在前。” 安曰:“淘之汰之,沙石在後。” 言自家詩文之恥也。】 跡追蘭殿之遊,【梁武帝與達摩共遊蘭殿】 誰不仰月池佳對?【時王崇佛,人皆仰之。】 偈效《柏梁》之作。【漢武帝作柏梁臺,命盧多遜作七字詩。七言始於此,五言始於蘇武《河陽詩》。○先生於此碑,實緘口持難,八冬之久。然旣有王命,如武帝相梁之爲,則不敢不作。】 庶幾騰日域 【東方】 高譚。其詞曰:
麟聖依仁乃據德,【孔子未生時,有麒麟吐玉書闕里人家曰:“水精之子,繼衰周而素王天下。” 孔母徵在,以繡紱係其角。及後獲麟,孔子解紱而泣,絶《春秋》之筆。】鹿仙知白能守黑。【《燉煌實錄》云:“老子父姓韓名虔。夜夢日精敷野,而仙人駕鹿入室,與上洋朱氏特猪婢子合孕而生,故曰‘鹿仙’。”】
二敎徒稱天下式,螺髻眞人難确力。【佛髻如螺形】
十萬里外鏡西域,【成光子曰:“自長安至中印度境,五萬八千里,西至那拘遮國,五萬八千里。”】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鰲山側,儒仙自古多奇特。
可憐羲仲不曠職,【羲和,堯時主四時之官,賓日餞日者也。】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言路因之理溝洫。【田間水道也】
身依兔窟心難息,【兔有三穴,以避外禍。】 足躡羊歧眼還惑。【羊腸山有九曲險路。上四句言敎路多端。】
法海安流眞叵測,心傳眼訣包眞極。
得之得類罔象得,【春池失珠,覓之不得,罔象無心而得之。出《莊子》。】 黙之黙異寒蟬黙。【蟬之不鳴者,雄也。不鳴是嘿,大師則具說,故異於常嘿。】
北山義與南岳陟,垂鵠翅與展鵬翼。【鵠、鵬,皆言遠遊中原。】
海外時來道難抑,遠派禪河無擁塞。
蓬托麻中能自直,珠探衣內休傍貣。【音惕,借也。】
湛若賢溪善知識,十二因緣非虛飾。【六是、六異也】
何用攀絚兼拊杙?【攀絚,渡流沙之事;拊杙,越蔥嶺之事。言在此而得道。】 何用砥筆及含墨?【言不假文字而得道。】
彼或遠學來匍匐,【指上義與陟也】 我能靜坐降魔賊。【指大師】
莫把意樹鰲栽植,莫把情田枉稼穡。
莫把恒沙論萬億,莫把閒雲定南北。【此四句,戒辭:前二句,戒守嘿之癡禪;次二句,戒參尋之愚僧。】
德馨四遠聞薝蔔,【梔子花】慧化一方安社稷。【土穀之神有德者配食焉。共工氏之子句龍氏食於社,厲山氏之子柱食於稷,乃王者崇奉神明,以報天地之功用。是國家安危所在之所。】
面奉天花飄縷栻,【音克,衣裾也。】 心憑水月呈禪栻。【上句,入王城時事;此句,答王問心之事。】
霍副【人名,疑古之貧者。】佳錦誰入棘?【或云:“挾繞壞衣也。” 然諸解多端,未詳孰是。】 腐儒玄杖慚擿埴。【盲者以杖探路之狀也。玄杖,筆也。言以儒記佛,如盲人之不知去路。】
跡耀寶幢 【指塔也】 名可勒,才輸錦頌文難織。
囂腹欲飫禪悅食,來向山中看篆刻。
- [주-D001] 지증 화상 비명 :
- 《신라사산비명》에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曦暘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로 되어 있다.
- [주-D002] 오상(五常) :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말한다.
- [주-D003] 동방(動方) :
- 만물이 생동하는 방위라는 뜻으로, 동방(東方)과 같은 말이다.
- [주-D004] 삼교(三敎) :
-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를 말한다.
- [주-D005] 욱이(郁夷) :
- 우이(嵎夷)와 같은 말로, 해 뜨는 동방을 가리킨다.
- [주-D006] 가위(迦衛) :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이다. 석가(釋迦)가 태어난 곳으로, 불교를 뜻한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07] 돌을 …… 일이다 :
- 서로 의기투합해서 매우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이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터득하고 나서 군웅(群雄)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뿌리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以水投石 莫之受〕,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를 하자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모두 받아들여졌다〔以石投水 莫之逆〕는 이야기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나온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 〈육본(六本)〉에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해 주면 모래 더미 위에 물을 뿌려 주는 것처럼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런 사람이 아닐 때에는 귀머거리를 모아 놓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得其人 如聚沙而雨之 非其人 如會聾而鼓之〕”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08] 희희(煕煕)한 태평의 봄날이요 :
- 《노자》 20장에 “사람들 마냥 즐거워하며,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煕煕 如享太牢 如春登臺〕”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09] 모든 …… 가운데 :
- 대본에는 이 부분이 ‘性參釋種’으로 되어 있으나, 탑본(榻本)에 따라 ‘性’을 ‘姓’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주-D010] 존귀한 …… 하였으며 :
- 예컨대 진흥왕(眞興王)의 경우가 그러한데,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 진흥왕〉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效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라고 하였다.
- [주-D011] 다라(多羅) :
- 범어(梵語) pattra의 음역인 패다라(貝多羅)의 준말로, 불경을 서사(書寫)한 나무 잎사귀를 말한다. 패엽(貝葉)이라고도 한다.
- [주-D012] 바다가 …… 것이니 :
- 대본에는 ‘海印東流’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따라 ‘印’을 ‘引’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서토(西土) 즉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다시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결국에는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말이다.
- [주-D013] 노(魯)나라에서 …… 기록하고 :
- 부처의 탄생을 비유한 표현이다.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1에 “노나라 《춘추》에 의하면, 장공 7년 여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한밤중에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 기록을 보면 그때가 바로 여래가 왕궁에서 탄생한 때와 일치한다.〔魯春秋 莊公七年夏四月辛卯夜 恒星不見 夜中星隕如雨 案此即是如來誕生王宮時也〕”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14] 한(漢)나라에서 …… 때 :
- 후한 명제(後漢明帝)가 부처의 꿈을 꾸고 나서 불교를 받아들였던 때라는 말이다. 명제가 밤에 신장이 6장(丈)이나 되는 금인(金人)이 목덜미에 일륜을 두르고 공중을 날아오는〔項佩日輪飛空而至〕 꿈을 꾼 뒤에, 서방에 불(佛)이라는 신(神)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천축(天竺)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를 수입하고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 권4에 나온다.
- [주-D015] 낙양(洛陽) 시내를 범람하고 :
- 대본에는 ‘濫觴洛宅’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觴’을 삭제하였다. 주 소왕(周昭王) 때 궁전과 대지가 진동하고 강하(江河)와 연못과 우물의 물이 범람하자 왕이 태사(太史) 소유(蘇由)에게 물으니, 그가 “대성인이 서방에서 태어났는데,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중국에 들어올 것이다.〔有大聖人生於西方 一千年外聲敎及此〕”라고 답변했다는 기록이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4에 나온다.
- [주-D016] 진(秦)나라 궁전을 비추었던 :
- 대본에는 ‘懸鏡秦宮’으로 되어 있는데, 탑본에 의거하여 ‘懸’을 삭제하였다. 전거는 미상(未詳)이다.
- [주-D017] 삼척(三尺)의 입 :
- 언변이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의 “삼척의 입을 가지고 싶다.〔願有喙三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 [주-D018] 오색(五色)의 붓 :
- 문재(文才)가 뛰어난 것을 뜻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의 문학가 강엄(江淹)이 만년에 곽박(郭璞)에게 오색필(五色筆)을 돌려주는 꿈을 꾸고 나서는 문재가 감퇴되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59 江淹列傳》
- [주-D019] 이국관국(以國觀國) :
-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살핀다는 뜻으로, 한 나라의 종교 등 총체적인 문화 현상을 가지고 그 나라의 전반적인 수준을 가늠한다는 말인데, 《노자(老子)》 54장에 나온다.
- [주-D020] 감천궁(甘泉宮)에서 …… 같았다 :
- 한 무제(漢武帝) 때에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고 금인(金人) 즉 불상을 노획해 오자, 이를 감천궁에 안치하고 분향하며 섬겼던 일을 말한다. 《魏書 卷114 釋老志》
- [주-D021] 양(梁)나라 …… 해요 :
- 528년에 해당한다. 보살제(菩薩帝)는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불교를 숭상하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켰던 남조 양(梁)의 무제(武帝)를 가리킨다. 《양서(梁書)》 권3 〈무제본기 하(武帝本紀下)〉에 “대통 1년(527) 3월 신미일에 대가(大駕)가 동태사에 거둥하여 사신하는 의식을 행하고 갑술일에 환궁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大通元年 三月辛未 輿駕幸同泰寺捨身 甲戌還宮 赦天下〕”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22] 중귀(中貴)가 …… 하면 :
- 이차돈(異次頓)의 순교와 진흥왕(眞興王)의 삭발 출가를 가리킨다. 중귀는 궁중의 귀인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는 근신이라는 말이다. 상선(上仙)은 천상의 신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임금을 가리킨다.
- [주-D023] 표저(漂杵) :
- 격렬하게 싸우는 전쟁을 뜻하는 말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여 목야(牧野)에서 전투할 적에 “피가 흘러서 절굿공이를 떠내려가게 했다.〔血流漂杵〕”라는 글이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 [주-D024] 건고(鞬櫜) :
- 활을 활집에 넣고 화살을 화살통에 넣는다는 뜻으로, 병기(兵器)를 쓰지 않는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다.
- [주-D025] 비바사(毘婆娑)가 …… 비추었다 :
- 소승불교가 먼저 전해지고, 그다음에 대승불교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비바사는 주해서(註解書)의 이름인 범어(梵語) vibhāṣa의 음역으로, 광해(廣解) 혹은 광설(廣說) 등으로 의역되는데, 부파불교(部派佛敎) 중 소승에 속하는 상좌부(上座部)의 논서(論書)를 집대성했다고 일컬어지는 《구사론(俱舍論)》의 별칭으로 흔히 쓰인다. 사군(四君)은 한사군(漢四郡)의 준말로, 동방이라는 말과 같다. 마하연(摩訶衍)은 범어 mahāyāna의 음역인 마하연나(摩訶衍那)의 준말로, 대승의 교법(敎法)을 가리킨다. 일승(一乘)은 삼승(三乘)과 같은 방편법(方便法)이 아니고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도리를 그대로 밝힌 단 하나밖에 없는 최고(最高) 구경(究竟)의 불법이라는 말인데, 불승(佛乘), 혹은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 [주-D026] 무외(無外) :
- 《장자》 〈천하(天下)〉에 “지극히 커서 밖이 없는 것을 대일이라고 한다.〔至大無外 謂之大一〕”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27] 장경(長慶) :
-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까지이다.
- [주-D028] 대역(大易)에서 …… 아니겠는가 :
- 《주역》 〈건괘(乾卦)〉의 잠룡(潛龍)에 대해 공자(孔子)가 〈건괘 문언(文言)〉에서 설명하면서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근심이 없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근심이 없다. 즐거우면 행하고 걱정되면 떠난다. 그의 뜻이 확고해서 동요시킬 수가 없다.〔遯世無悶 不見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라고 말한 대목이 나온다. 또 《중용장구》 제11장에 “군자는 중용의 도를 따를 뿐, 세상에서 숨어 살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君子依乎中庸 遯世不見知而不悔〕”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29] 겨울 …… 빼어나듯 :
- 도잠(陶潛)의 〈사시(四時)〉에 나오는 “동령수고송(東嶺秀孤松)”이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 [주-D030] 개미가 양고기를 좋아하듯 :
-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개미는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든다. 양고기는 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순 임금의 행동에도 누린내 나는 구석이 있다. 그래서 백성들이 좋아하여 모여드는 것이다.〔蟻慕羊肉 羊肉羶也 舜有羶行 百姓悅之〕”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31] 매가 변화하듯 :
- 《예기》 〈월령(月令)〉에, 중춘(仲春)의 달에는 “매가 변화하여 비둘기가 된다.〔鷹化爲鳩〕”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32] 순풍(順風)의 요청 :
-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을 말한다. 순풍은 순하풍(順下風)을 줄인 말이다. 《장자》 〈재유(在宥)〉에, 광성자(廣成子)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누워 있을 때, 황제(黃帝)가 “발치로부터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었다.〔順下風 膝行而進 再拜稽首而問〕”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33] 개무(開霧)의 기약 :
- 안개가 걷히면 내려오는 기약이라는 뜻으로, 산중에서 세상에 내려와 교화를 펴는 것을 말한다.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안개가 짙게 끼어 있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도 자신의 아름다운 털 무늬를 보전하기 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를 변용한 것이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 [주-D034] 명검(名劍)이 …… 하고 :
- 검이 용으로 변하여 물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중국에서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종적을 감춘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장화(張華)와 뇌환(雷煥)이 용천(龍泉)과 태아(太阿)라는 암수의 두 보검을 각각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죽고 나서 두 보검이 절로 연평진(延平津)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두 마리 용으로 바뀐 채 유유히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拾遺記 卷10》
- [주-D035] 진주(珍珠)가 …… 하였는데 :
- 신라로 귀환한 것을 말한다. 합포(合浦)의 바닷속에서 진주가 많이 나오더니, 어느 태수(太守)가 탐욕을 부리자 점차 교지군(交阯郡)으로 진주가 옮겨 갔는데, 후한(後漢)의 맹상(孟嘗)이 합포에 부임하여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펼치자, 진주가 다시 예전처럼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孟嘗》
- [주-D036] 이름에서 …… 쫓아온다 :
- 후한(後漢)의 법진(法眞)이 네 차례에 걸친 황제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리자, 친구인 곽정(郭正)이 “법진의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만나 보기 어렵다. 이름에서 도망쳐도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명성에서 도피해도 명성이 나를 쫓아오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이를 만하다.〔法眞名可得聞 身難得而見 逃名而名我隨 避名而名我追 可謂百世之師矣〕”라고 찬탄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3 法眞列傳》
- [주-D037] 문을 …… 보고 :
- 지증 대사(智證大師)가 중국에 건너가지 않고도 신라에서 혼자 도를 깨쳤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47장의 “문을 나서지 않고서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천도를 볼 수 있다.〔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 [주-D038] 칠현(七賢) :
- 소승(小乘)인 구사종(俱舍宗)에서 칠성(七聖)에 상대하여 칭하는 수행의 경지를 가리키는데, 오정심위(五停心位)ㆍ별상념주위(別相念住位)ㆍ총상념주위(總相念住位)ㆍ난법위(煖法位)ㆍ정법위(頂法位)ㆍ인법위(忍法位)ㆍ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등으로 되어 있다.
- [주-D039] 십주(十住) :
- 《화엄경(華嚴經)》에서 보살(菩薩)의 수행 단계를 모두 52계위(階位)로 나누는데, 그중 11계위에서 20계위까지를 십주(十住)라고 한다. 그 52계위의 수행의 경지를 따질 때, 이미 큰 지혜를 발해서 범부의 성품을 떠난 십지보살(十地菩薩)을 십성(十聖)이라 하고, 어느 정도 비슷하게 알기는 하나 아직 범부의 성품을 떠나지 못한 채 십주(十住)ㆍ십행(十行)ㆍ십회향(十廻向)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수행인을 삼현(三賢)이라고 한다. 십주의 내용은 《구역 화엄경(舊譯華嚴經)》 권8 〈보살십주품(菩薩十住品)〉에 소개되어 있다.
- [주-D040] 4조(祖) :
- 중국 선종의 4조인 도신(道信)을 말한다. 3조 승찬(僧璨)의 법맥을 이어 5조 홍인(弘忍)에게 전하였다. 파두산(破頭山)에 30여 년 머물렀는데, 나중에 쌍봉산(雙峰山)이라고 개칭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쌍봉 도신(雙峰道信)이라고 불렀다. 동산(東山) 황매사(黃梅寺)에 탑을 세웠는데, 제자인 홍인이 그곳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므로, 도신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초조(初祖)로 일컫는다. 당 대종(唐代宗)이 대의 선사(大醫禪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탑명(塔銘)은 자운(慈雲)이다. 《續高僧傳 卷26》 《佛祖統紀 卷29》
- [주-D041] 중서(中書) …… 비명(碑銘) :
- 도신(道信)에 대한 비명을 말한다. 수(隋)나라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歷代法寶記)》 〈도신(道信)〉 맨 마지막에 “중서령 두정륜이 비문을 지었다.〔中書令杜正倫撰碑文〕”라는 말이 나온다. 두정륜(杜正倫)은 당 고종(唐高宗) 현경(顯慶) 2년(657)에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 [주-D042] 필만(畢萬)의 …… 증험되었다 :
- 지증 대사(智證大師) 때에 와서 4조(祖) 도신(道信)의 선풍(禪風)이 신라에서 크게 진작되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필만이 진 헌공(晉獻公)을 섬기면서 큰 공을 세워 위(魏)에 봉해지자, 진나라 장복대부(掌卜大夫) 곽언(郭偃)이 “필만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번창할 것이다.〔畢萬之後必大〕”라고 예언한 고사가 전한다. 《春秋左氏傳 閔公1年》 필만의 후손인 위씨(魏氏)는 나중에 한씨(韓氏), 조씨(趙氏)와 함께 진나라를 3분하여 제후(諸侯)가 되고 급기야는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 국세를 크게 떨쳤다.
- [주-D043] 위엄이 …… 사람 :
-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았고, 공손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44] 승견불(勝見佛) :
- 과거 칠불(過去七佛) 중의 제1불(第一佛)로, 승관불(勝觀佛)이라고도 한다. 범어(梵語) Vipaśyin을 음역한 비바시불(毘婆尸佛)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주-D045] 관불일(灌佛日) :
- 석가(釋迦)가 탄생한 4월 8일을 말한다. 석가가 탄생할 때 제석천(帝釋天)과 용왕(龍王)이 향탕(香湯)으로 목욕시켰다는 설화에서 유래하여, 불탄일(佛誕日)이 되면 불상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관불회(灌佛會)라고 하며 욕불(浴佛)이라고도 한다.
- [주-D046] 망정(蟒亭)의 일 :
- 후한(後漢) 안세고(安世高)가 전생(前生)에 함께 수도하다가 성을 잘 내어 공정(䢼亭) 묘(廟)의 거대한 이무기〔大蟒〕 신(神)이 된 자를 위해 제도(濟度)하며 동사(東寺)를 지어 사람으로 환생시켰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神僧傳 卷1 安世高傳》 지증 대사가 전생에 용이었다는 이야기와 결부시킨 것이다.
- [주-D047] 상실(象室)의 꿈 :
-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꿈에 호명보살(護明菩薩)이 상아가 여섯 개인 흰 코끼리〔六牙白象〕를 타고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석가를 잉태했다는 꿈 이야기를 말한다. 《佛本行經 卷1 降胎品》
- [주-D048] 가죽을 …… 자 :
- 화를 잘 내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동안우(董安于)는 완만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활줄을 차고 다녔고, 전국 시대 서문표(西門豹)는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허리에 무두질한 가죽을 차고 다녔다〔佩韋〕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觀行》
- [주-D049] 의려(倚閭) :
- 자식의 안부를 걱정하며 기다리는 모친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見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齊策6》
- [주-D050] 완효서(阮孝緖) :
- 남조 양 무제(梁武帝) 때의 효자이다. 종산(鍾山)에서 공부하던 중에 괜히 가슴이 뛰어서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병들어 있었는데, 모친의 병에 산삼이 특효라는 말을 듣고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사슴의 인도로 산삼을 발견하여 모친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 [주-D051] 지독(舐犢)하는 자 :
- 송아지를 핥아 주는 자라는 뜻으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어버이를 뜻하는 말이다. 양표(楊彪)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曹操)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뒤에 조조가 양표에게 왜 그토록 야위었느냐고 묻자, 양표가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애정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서 그렇다.〔猶懷老牛舐犢之愛〕”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楊彪》
- [주-D052] 음사(飮蛇)한 자 :
- 뱀 그림자가 비친 술을 마신 자라는 뜻으로, 공연히 오해하여 의심하는 사람을 말한다. 진(晉)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적에 그 친구가 술잔 속에 비친 활 그림자를 뱀으로 오인하고는 마음속으로 의심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병이 절로 나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43 樂廣列傳》
- [주-D053] 의식적으로 …… 것 :
-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無心)한 상망(象罔)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 [주-D054] 발이 …… 것 :
- 한(漢)나라 공융(孔融)의 〈논성효장서(論誠孝章書)〉에 “주옥은 발이 없어도 저절로 오니, 이는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현자는 발이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珠玉無脛而自至 以人好之也 況賢者之有足乎〕”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55] 변길보살(遍吉菩薩) :
- 불교 4대 보살의 하나로, 자비의 화신인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이칭이다.
- [주-D056] 먼저 …… 법인데 :
- 이윤(伊尹)이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부름을 받고 나아갈 적에 자신의 포부를 토로하면서 “하늘이 사람을 이 세상에 낼 적에 먼저 안 사람이 늦게 아는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자가 늦게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끔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들 가운데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이 도를 가지고 이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니, 내가 깨우치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하겠는가.〔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也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 [주-D057] 정교(鼎敎) :
- 유(儒)ㆍ불(佛)ㆍ도(道) 삼교(三敎)를 가리킨다.
- [주-D058] 이윤(伊尹) :
-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재상(宰相)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며 누구를 다스린들 백성이 아니랴.’ 하면서 치세에도 나아갔고 난세에도 나아갔다.〔伊尹曰 何事非君 何使非民 治亦進 亂亦進〕”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59] 송섬(宋纖) :
- 진(晉)나라의 은사(隱士)이다. 주천 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岌)이 예의를 갖추어 방문했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얼굴을 보이지 않자, 마급이 “이름은 들을 수 있어도 몸은 볼 수 없고, 덕은 우러를 수 있어도 모습은 볼 수 없으니, 내가 지금에 와서야 선생이 사람 중의 용이라는 것을 알겠다.〔名可聞而身不可見 德可仰而形不可睹 吾而今而後知先生人中之龍也〕”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宋纖》
- [주-D060] 도중(塗中) :
- 진흙탕 속이라는 뜻으로, 지금 거처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초왕(楚王)이 장자(莊子)를 재상으로 초빙하자, 장자가 “나는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아가련다.〔吾將曳尾於塗中〕”라면서 거절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莊子 秋水》
- [주-D061] 문상(汶上) :
- 문수(汶水) 물가라는 뜻으로, 장차 망명할 장소를 가리킨다. 계씨(季氏)가 공자의 제자인 민자건(閔子騫)을 비(費) 땅의 수령으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이 “다시 한번 나를 부르러 온다면, 나는 필시 노(魯)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의 문수 물가에 있게 될 것이다.〔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雍也》
- [주-D062] 읍사(邑司) :
- 당나라 때 공주(公主)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정부 기구이다. 《舊唐書 卷42 職官志 1》
- [주-D063] 바보의 골짜기 :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부로(父老)가 소를 길렀는데 소가 송아지를 낳자 그 송아지를 팔아서 망아지를 사 왔다. 그러자 젊은 사람이 소는 망아지를 낳지 못한다면서 마침내 그 망아지를 데리고 갔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그를 우공(愚公)이라고 부르고 그가 살던 골짜기를 우공의 골짜기 즉 우곡(愚谷)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 〈정리(政理)〉에 나온다.
- [주-D064] 누가 밥주머니라고 기롱하였던가 :
- 후한(後漢)의 예형(禰衡)이 “순욱 정도는 그래도 억지로 데리고 얘기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외의 사람들은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인형과 같아서 사람과 모습은 비슷해도 사람의 정기가 없으니, 모두 술독이나 밥주머니일 뿐이다.〔荀彧猶强可與語 過此以往 皆木梗泥偶 似人而無人氣 皆酒甕飯囊耳〕”라고 조롱한 고사가 있다. 《抱朴子 彈禰》
- [주-D065] 죽 …… 것이다 :
- 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이 솥에 미음을 끓이고 죽을 끓여 내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墻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 [주-D066] 민천(民天) :
-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 즉 식량이 되는 곡식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9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다스리는 자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王者以民人爲天 而民人以食爲天〕”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주-D067] 구고(九皐)의 …… 퍼지자 :
- 지증 대사가 희사하려는 일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졌다는 말이다. 《시경》 〈학명(鶴鳴)〉에 “학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 우니, 그 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들리도다.〔鶴鳴于九皐 聲聞于天〕”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68] 속명(續命)한 자 :
- 목숨을 이은 자라는 뜻으로, 은혜를 받은 백성을 가리킨다. 남조 제(齊)의 유선명(劉善明)이 청주(靑州)에 기근이 들었을 때 곳간을 열어 향리의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자 백성들의 그의 집의 밭을 속명전(續命田)이라고 불렀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南齊書 卷28 劉善明列傳》
- [주-D069] 상가(賞歌)한 자 :
- 가인(歌人)에게 지나치게 후한 상을 내린 자라는 뜻으로, 재물을 함부로 헛되게 쓰는 사람을 가리킨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 열후(烈侯)가 음악을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아끼는 가인 두 사람에게 각각 1만 묘(畝)의 전지(田地)를 내리려 하다가 상국(相國) 공중련(公仲連)에게 저지당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 [주-D070] 간혜지(乾慧地) :
- 보살(菩薩)의 53수행(修行) 계위(階位) 중 십지(十地)의 제1지에 속하는 지위로서, 초발심(初發心)한 보살을 가리키는데, 지혜는 있어도 선정(禪定)의 힘이 미약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견정지(見淨地)라고도 한다.
- [주-D071] 정혜(定慧) :
- 불가(佛家)에서는 탐진치(貪嗔癡)의 삼독(三毒)을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계는 계율, 정은 선정,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를 뜻한다.
- [주-D072] 뽕나무 …… 되었으니 :
- 대사의 감화를 받고 귀의했다는 말이다. 《시경》 〈반수(泮水)〉에 “저 부엉이 퍼덕거리며 날아와서, 반궁(泮宮) 숲 속에 모여 앉도다. 우리 뽕나무 오디를 먹고, 나에게 좋은 소리를 안겨 주도다.〔翩彼飛鴞 集于泮林 食我桑黮 懷我好音〕”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73] 팔을 끊은 자 :
- 마음속 깊이 스승에게 귀의한 제자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심충(沈忠)을 가리킨다. 중국 선종(禪宗)의 2조(祖)가 된 혜가(慧可)가 처음에 소림사(少林寺)로 달마(達磨)를 찾아가서 밤새도록 눈이 쌓인 뜰에 공손히 서서 도를 구했으나 달마는 면벽만을 한 채 한마디 말도 건네지를 않았는데, 이에 혜가가 계도(戒刀)로 자신의 왼쪽 팔을 끊어 그 팔을 바치자 달마가 비로소 입실을 허락했다는 설중단비(雪中斷臂)의 고사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卷3 菩提達磨》
- [주-D074] 용미도(龍尾道)를 …… 자 :
- 반역을 도모한 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산중의 도적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때 반란을 일으켰던 안녹산(安祿山)이 함원전(含元殿) 앞의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치려다가 그만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 [주-D075] 영육(靈育) :
- 북위(北魏)의 승려 현고(玄高)의 본명이다.
- [주-D076] 법심(法深) :
- 동진(東晉)의 승려 축잠(竺潛)의 자이다.
- [주-D077] 계족산(雞足山) :
- 부처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의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대사가 주석(住錫)하고 있는 희양산(曦陽山)을 가리킨다.
- [주-D078] 가슴속에 옥을 품고서 :
- 《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79] 우대우(牛戴牛) :
- 소가 소 한 마리의 값이 나가는 귀한 쇠뿔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말로, 대사에 대한 세상의 높은 평가를 비유한 말이다. 《주례》 〈고공기(考工記) 궁인(弓人)〉에 “쇠뿔의 길이가 2자 5치이고, 세 가지 색깔이 제대로 갖추어졌으면, 이를 우대우라고 한다.〔角長二尺有五寸 三色不失理 謂之牛戴牛〕”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80] 새를 …… 것입니다 :
- 산승(山僧)은 산으로 돌아가서 살게 하는 것이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라는 말이다. 원거(爰居)라는 해조(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이는 자기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 아니다. 대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깊은 숲에 살게 하고 넓은 고원에서 노닐게 해야 한다.〔此以己養養鳥也 非以鳥養養鳥也 夫以鳥養養鳥者 宜栖之深林 遊之壇陸〕”라고 비평한 내용이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 [주-D081] 등후(鄧侯) :
- 진나라 등유(鄧攸)를 가리킨다. 오군 태수(吳郡太守)로 선정을 베풀다가 떠날 즈음에 백성들이 그의 배가 출발하지 못하도록 한사코 막자 한밤중에 조각배를 타고 몰래 떠났는데,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둥둥 울리는 5경(更)의 북소리여, 닭 울음소리에 하늘이 밝아 오네. 등후는 끌어당겨도 머무르지 않고, 사령은 등을 떠밀어도 떠나지 않네.〔紞如打五鼓 鷄鳴天欲曙 鄧侯拖不留 謝令推不去〕”라고 했다 한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鄧攸》
- [주-D082] 지학(支鶴) :
- 지둔(支遁)의 학이라는 뜻으로,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승전(高僧傳)》 권4 〈지둔전(支遁傳)〉에 “학을 선물한 자가 있었다. 지둔이 학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의 귀와 눈을 위한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고는 마침내 날려 보내었다.〔有餉鶴者 遁謂鶴曰 爾冲天之物 寧爲耳目之翫乎 遂放之〕”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83] 조구(趙鷗) :
- 조나라의 갈매기라는 뜻으로, 고승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임금을 비유하는 말이다. 천축(天竺)의 명승(名僧)인 불도징(佛圖澄)이 후조(後趙)의 황제인 석호(石虎)와 어울려 노닌다는 말을 듣고는, 지도림(支道林)이 “징공이 석호를 바닷가에서 어부와 함께 노니는 갈매기로 삼았구나.〔澄以石虎爲海鷗鳥〕”라고 평한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言語》
- [주-D084] 토끼를 …… 하고 :
-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 [주-D085] 물고기를 …… 하였으니 :
-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연못을 내려다보며 물고기만 탐내기보다는, 뒤로 물러나서 그물을 짜는 것이 나을 것이다.〔臨淵羨魚 不如退而結網〕”라는 속담이 인용되어 있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 [주-D086] 정대춘(井大春)이 …… 수레 :
- 대춘은 후한(後漢) 초의 은사(隱士)인 정단(井丹)의 자이다. 신양후(信陽侯) 음취(陰就)가 연(輦)을 타고 가려 할 적에, 정단이 웃으면서 “내가 듣건대 옛날 걸왕이 사람에게 수레를 끌게 했다던데, 어쩌면 이런 경우도 해당되지 않겠는가.〔吾聞桀駕人車 豈此耶〕”라고 하니, 좌중의 얼굴색이 모두 변하였는데, 결국 음취도 그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어서 연을 타지 못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음취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황후인 음여화(陰麗華)의 동생이요, 명제(明帝)의 외삼촌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井丹》
- [주-D087] 호계(虎溪) :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慧遠)이 거처한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의 시냇물 이름이다.
- [주-D088] 곡수(鵠樹) :
- 석가(釋迦)가 입멸할 때 흰색으로 변했다는 사라쌍수(沙羅雙樹)를 가리키는데,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 [주-D089] 학(鶴)이 돌아온 것 :
-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1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搜神後記 卷1》
- [주-D090] 외손(外孫)의 글 :
- 좋은 글이라는 말이다.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라는 글자가 된다.
- [주-D091] 신이 …… 다행이었는데 :
- 고운이 우수한 인재는 못 되지만 그래도 당나라에 가서 인정을 받고 돌아오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의 겸사이다. 동전(東箭)은 동남죽전(東南竹箭)의 준말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아》 〈석지(釋地)〉의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회계의 죽전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또 춘추 시대 초(楚)나라 악관(樂官)인 종의(鍾儀)가 진(晉)나라에 잡혀가서도 고국을 잊지 못한 나머지 초나라 모자인 남관(南冠)을 쓰고서 초나라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끝내는 그곳에서 군자라는 호평을 받고 석방되어 돌아왔던 고사가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 나온다.
- [주-D092] 바야흐로 …… 말았다 :
- 그동안 쌓아 온 실력을 조정에서 마음껏 발휘해 보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알아주던 헌강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말이다. 운부(運斧)는 도끼를 휘두른다는 뜻으로, 탁월한 재질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초(楚)나라 장석(匠石)이 상대방의 코끝에다 하얀 흙을 얇게 발라 놓고는 도끼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러 그 흙만 떼어 내고 상대방은 다치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莊子 徐无鬼》 호궁(號弓)은 활을 안고 호곡한다는 뜻으로, 임금의 죽음을 가리킨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 [주-D093] 돌이 …… 알았고 :
- 비석이 말할 수 있었다면 불평을 토로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돌은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으면 말할 수도 있는 일이다.〔石不能言 或馮焉〕”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94] 애체(靉 靆)라는 …… 주겠는가 :
- 《법화경(法華經)》을 암송하는 사미(沙彌)가 애체라는 두 글자를 항상 잊어버리곤 하였는데, 이는 그가 전생에 암송하던 《법화경》의 책자 중에 애체라는 두 글자가 좀이 슬어서 안 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승려가 꿈속에 나타나 알려 주었다는 이야기가 《홍찬법화전(弘贊法華傳)》 권6 〈송지(誦持)〉의 실명(失名)한 석모(釋某)의 전에 나온다.
- [주-D095] 소요(逍遙)에서 …… 없었다 :
- 지증 대사가 헌강왕 앞에서 설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소요는 장안(長安)의 소요원(逍遙園)을 가리킨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5 〈석승민전(釋僧旻傳)〉에 “축도생이 장안에 들어오자 후진(後秦)의 임금인 요흥이 소요원에서 접견하고는 도융의 의리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게 하였는데, 왕복하며 반복해서 말한 것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대중 모두가 그의 풍신을 보고는 그의 영걸스러움에 심복하였다.〔竺道生入長安 姚興於逍遙園見之 使難道融義 往復百翻言無不切 衆皆覩其風神 服其英秀〕”라는 말이 나온다.
- [주-D096] 매양 …… 못하였다 :
- 고운이 지증 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솜씨가 서툴러서 멋진 글을 짓지 못할까 망설이기만 했다는 말이다. 《노자(老子)》 74장에 “뛰어난 목수 대신 나무를 깎는다면, 손을 다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夫代大匠斲者 希有不傷其手矣〕”라는 말이 나온다. 또 어떤 장자(長者)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주먹을 펴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천축(天竺)의 24조(祖)인 사자 존자(師子尊者)를 찾아와서 하소연하자, 존자가 찬찬히 살펴보다가 “내 구슬을 돌려다오.”라고 말하니, 그 아들이 주먹을 펴고 구슬을 돌려주었는데, 이는 존자가 전생에 승려의 신분으로 서해(西海) 용왕재(龍王齋)에 참석했을 때 동자에게 맡겨 둔 구슬이었다는 이야기가 《연등회요(聯燈會要)》 권2 〈이십사조사자존자(二十四祖師子尊者)〉에 나온다.
- [주-D097] 한만(汗漫)의 유람 :
- 속세를 초월한 신선의 유람을 말한다. 옛날 진(秦)나라 노오(盧敖)가 북해(北海)에서 노닐다가 선인(仙人)인 약사(若士)를 만나 함께 벗으로 노닐자고 청하자, 약사가 “나는 구해(九垓) 밖에서 한만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니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구름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해는 구천(九天)을 말한다. 《淮南子 道應訓》
- [주-D098] 공동(崆峒) :
- 황제(黃帝)가 스승으로 섬겼다는 공동산(崆峒山)의 광성자(廣成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지증 대사를 의미한다.
- [주-D099] 수신(受辛) :
- 사(辭)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 [주-D100] 금구(金口) :
- 금인(金人)의 입이라는 말로, 신중하게 발언하는 것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태묘(太廟)에 갔을 적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三緘其口〕 금인을 보았는데, 그 등 뒤에 새긴 명문(銘文)을 보니 “옛날에 말조심을 하던 사람이다. 경계하여 많은 말을 하지 말지어다. 말이 많으면 실패가 또한 많으니라.〔古之愼言人也 戒之哉 無多言 多言多敗〕”라고 써 있더라는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觀周》
- [주-D101] 남은 …… 있다 :
-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 [주-D102] 육마(六魔) :
- 육경(六境)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가리킨다.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육근(六根)을 오염시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데, 육적(六賊) 혹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 [주-D103] 육폐(六蔽) :
- 청정심(淸淨心)을 은폐하며 육도(六度)를 방해하는 6종의 악심(惡心)으로, 간탐심(慳貪心), 파계심(破戒心), 진에심(瞋恚心), 해태심(懈怠心), 산란심(散亂心), 우치심(愚癡心)을 가리킨다.
- [주-D104] 육도(六度) :
- 생사의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로 되어 있다.
- [주-D105] 육통(六通) :
- 부처와 보살이 정혜(定慧)의 힘에 의해 시현하는 6종의 무애자재(無礙自在)한 묘용(妙用)으로, 육신통(六神通)이라고도 하는데, 신족통(神足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천안통(天眼通), 누진통(漏盡通)으로 되어 있다.
- [주-D106] 겨와 …… 하다 :
- 진(晉)나라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가 서로 앞을 양보하면서 걸어가다가 뒤에 처지게 된 왕탄지가 “곡식을 까불며 바람에 날리면 겨와 쭉정이가 앞에 있게 마련이다.〔簸之颺之 糠秕在前〕”라고 한마디 하자, 범계가 “조리질하며 물에 흔들면 모래와 자갈이 뒤에 있게 마련이다.〔淘之汰之 沙礫在後〕”라고 응수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世說新語 排調》
- [주-D107] 자취가 …… 않겠는가 :
- 역대의 제왕이 고승들과 궁전에서 만나 불법(佛法)에 대해서 문답을 나눈 것처럼 헌강왕이 지증 대사를 월지궁(月池宮)으로 인도하여 마음에 대해서 질의하고 답변을 들은 것 또한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다. 난전(蘭殿)은 제왕의 화려한 궁전을 뜻하는 말이다.
- [주-D108] 백량(柏梁)의 …… 지으면서 :
- 이른바 백량체(柏梁體)로 명(銘)을 지었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장안(長安)에 백량대(柏梁臺)를 세우고 그 위에서 신하들과 연음(宴飮)을 하며 구(句)마다 압운(押韻)을 하는 칠언시(七言詩)를 읊었다. 그래서 각 구에 압운을 한 칠언시를 후대에 백량체라고 부르게 되었다. 《三輔黃圖 卷5 臺榭》
- [주-D109] 공자(孔子)는 …… 의거하였으며 :
- 《논어》 〈술이(述而)〉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어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 [주-D110] 노자(老子)는 …… 지켰다네 :
- 《노자》 28장에 “수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라는 말이 나온다.
- [주-D111] 오산(鼇山) :
- 자라가 등 위에 받치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해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
- [주-D112] 희중(羲仲) :
- 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서 봄 농사를 관장한 요(堯)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라의 임금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 [주-D113] 토굴(兎窟) :
- 토끼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세 개의 굴을 뚫어 놓는다는 교토 삼굴(狡兎三窟)의 준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 [주-D114] 양기(羊岐) :
- 양을 찾으러 나갔다가 만난 갈림길이라는 말이다.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說符》
- [주-D115] 상망(象罔) :
- 무심(無心)을 뜻한다.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한 상망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 [주-D116] 한선(寒蟬) :
- 추운 가을날 울지 못하는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 [주-D117] 삼대 …… 법 :
- 《순자》 〈권학(勸學)〉에 “꾸불꾸불 자라는 쑥도 삼대 밭 속에서 크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