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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본 법문은 지난 7월 14일에 오대산 정암사에서 있은 정암사 주관의 인문학강좌에 초청 받아 오신
월정사 주지스님이신 정념스님께서 하신 법문 내용으로 함께 참석했던 봉은선우회 회원들을 위하여
녹취한 것입니다. 공부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봉은선우회를 위한 정념스님 법문
2018. 9. 26 심행 정리
예, 반갑습니다. 어떻게 보면 강원도 또 월정사로서는 교구 내 입니다. 여기에 함께 호흡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자주 뵙기는 어려운 그런 입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 인연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불교의 중요한 키워드가 인연이라는 소리인데, 그 인연은,
뭔가 관계 지어 져서 서로 이제, 어떤 일이든 만남이든 또 이렇게 생명의 탄생이든, 또 생명이
소멸해 감이든 다 인연 아닌 것이 없다는 거거든요? 인연이 다 하면 헤어지는 것이고, 인연이
생겨 나면 여러 가지 만가지가 다 인연 속에서 일어 났다, 인연이 다 하면 사라져 가는 거지요.
그 우리는 항상 이 인연을 또 연연해 하면서, 어떻게 하면 좀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까? 하는
이런 마음. 그것이 안되면 인제 서운해 지기고도 하고, 미워 지기도 하고, 또 아쉬워 지기도
하고, 또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또 내지는 ‘아! 내가 이제 끝나는 구나.’ 또 죽음이라는 문제,
이런 것까지도 다 연결되어서 인연 속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바라보고 그럴 수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 인연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 봐야 될 것인가? 이게 인제 가장 중요한 관건이다.
이게 이제 우리 불교적으로는 부처님이 깨달음 속에서 또 그 인연의 법, 그것을 통해서
부처님은 쉼 없는 설법을 하고 계시거든요? 이제 그것을 저마다가 또 그런 인연을 생각하는
자기의 안경이 다 또 있는 거지요. 그 안경으로서, 그 이제 그 안경을 자기 선입견, 자기 잣대,
이걸 누구라도 다 지니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그 안경이 파란 안경이냐? 노란 안경이냐? 빨간
안경이냐? 여기에 따라서 우리가 세상이 비추어지는 것은 파랗게 보이기도 하고, 노랗게
보이기도 하고, 빨갛게 보이기도 하는데,
또 그것으로 우리는 또 인연을, '아, 이건 파랗구나.' '저건 노랗구나.' '저건
빨갛구나.'
이렇게 규정 지으면서, 그 것하고 부합이 되지 않으면 ‘이건 틀리다, 맞지 않다.’ 또, 딴 사람이
쓰고 있는 안경은 또 도수가 차이가 나더라도, 또 농도가 차이가 나더라도 다 나게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자기 안경 색깔하고 안 맞으면 이제 일치가 안 되는 거지요. 예, 그러다 보면
여기서 뭔가 시비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또 이 부정성이라는 것이 생겨 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이 어떻게 보면 다 함께 모여 살면서 평화롭고 또 화합스럽고 서로가 잘
소통되는 이런 속에서 살 수 있으면 좋은데, 이제 자기 안경 색깔 때문에 자기 선입견, 자기
고정관념, 이것 때문에 그것이 용납이 잘 안되고, 또 자기식으로 판단하고 결정 짓고 ‘옳다,
그르다.’ 이제 시비가 생기고, 예, 그래서 이 세상이 모여 살면서 때에 따라서는 왁자지끌이
세상 사는 맛도 나기도 하고, 또 그게 여러 사람이 사니까 당연히 그렇거니 하고 또 살 수
있으면 좋은데,
그게 그냥 또 시비로 떨어 지고, 또
소음으로 떨어 지고, 또 그게 세상에 아파 하는 마음으로
또 들려 오기도 하고, 그것도 또 인제 자기 업승의 환경에 따라서 또 달라 지고, 결국 이
천차만상, 만별, 똑 같은 것은 또 하나도 없는 거지요. 뭐 사람도, 생각도 만물도, 어떤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는데, 그걸 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게 우리의 고정관념이고 그런
것이요. 이제 그런 속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아! 그래도 어떻게 하면 좀 화합하고
평화롭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그걸 저마다 또 다 노력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
가고 있는 거지요.
그 동안에 우리 정암사 주지스님께서 인문학 강의의 이 장을 만들어서, 우리 지역에 있는
많은 분들이 여기 와서, 굳이 꼭 우리 불자가 아니어도, 또 불교가 아니어도, 어떤 소리도
다 이 정암사 도량에서 다 함께 조화롭게 소통하는 장을 만들자. 그리고 또 우리 지역주민들도
그런 속에 서로 또 이해도 높이고, 또 그 화합, 소통을 더 높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이런
생각으로 아마 이 인문학 강의의 장을 만들었다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에, 아마도 우리 여기 이제 불교적으로야 이 우리 앞에 모시고 있는 이 문수보살님,
이 문수보살님, 우리 불교적으로는 지혜보살이라 그러지 않아요? 아, 물론, 문수사리라 해서
범어인데, 이건 그냥 어의가 그 범어로 차용하다 시피해서, ‘문수’ 이 한문 같지마는 이것은
범어에서 온 소리지요. 에, 물론 이 중국에서 번역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이제 중국말로 표현
하기가 딱히 들어 맞지 않는 이런 술어들은 그대로 쓰게 되거든요?
이제 그런 것이 이제 ‘열반’이라든지, ‘부처님’ 이라는
이 ‘붓다’ 라든지, 부처님도
범어지요?
또 이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반야’ ‘반야’가 지혜인데 곧 문수보살하고 그 범어가 연결되는
어의이기도 합니다. 또 이제 ‘바라밀다’ 라는 이런 이야기, 뭐 여러 가지 범어로 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기도 하고 또 그게 우리 일상 속에 또 녹아 있는 그런 술어들도 많습니다. 불교가
한국 사회에서 또 그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 우리
생활, 문화까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마는,
한편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이런 것은 우리 일상에서 많이 듣는데, 문수보살은 조금
우리가 생소해 하는 분도 계시고, 이제 신앙적으로는 과거에는 문수보살 신앙이 상당 부분
높게 형성된 때도 있었지요? 특히 이제 자장율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 끝에 문수보살의
화현으로 부터 그렇게 해서 이제 이 부처님의 사리, 가사를 위촉 받아서 너희 나라, 이제 우리
조선이지요? 해동에도 이와 같은 오대산이 있다. 그러면서 이제 삼국유사에 보면 그런 이야기
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제 사리를 봉안을 하라, 그래서
이제 사리를 모시고 와서 오대산도 봉안을 하고 또
이제 여기 정암사도 사실은 자장율사께서 모시고 온 이 사리를 앞에 저 수마노탑 저기에
봉안을 했다는 겁니다. 제가 이 법당 들어 오면서 언뜻 저 수마노탑을 보니까 참 좋은 명당
이지요? 좋은 길지에 턱 웅장한 탑을 탁 저기 봉안을 해서, 자 이제 물론 이 탑의 신앙은 한편
이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만, 이 불상이 나오기 이전에는 전부 탑 신앙이에요, 탑.
예, 본래 불교는 이 형상을 절대 거부하는 거거든요? 예, 모든 것들이 다 상대적인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 될 뿐이지 딱 정해져 있는 법,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엇, 이런 것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지요. 예, 그래서 이제 이 불상이나 이런 것은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고,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거나 거기에 단순한 인격을 부여하는 것은 불교 정신에 맞지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 기시고 나서 물론 사리를, 다 이제 화장을 하고 남은 모든 것을
사리라 그러지요? 그걸 가지고 이제 여덟 등분을 해서, 그 당시에 부처님의 위대성이
있지요? 그러다 보니까 각 나라에서 서로가 사리를 가져 가려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걸
이제 조정을 해서 여덟 등분을 해서 나누어서 종족마다 가지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여덟 개 탑이 생긴 거지요. 그게 인제 인도에서 아쇼카대왕이라는
분이 인도 전국을 통일을 하고 또 통일과정에서는 굉장한 이제 살생을 많이 하게 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으로 또 불교의 이 자비정신, 여기에
귀의하고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불탑을 여덟 개 탑을 다 헐어서 곳곳에다가 부처님 사리를
조금씩 조금씩 해서 팔만 사천의 탑을 건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 사리가 이제 저 스리랑카에도 가게 되고 서역으로도 가고, 중국으로도 오고, 그래
중국 오대산까지 왔는데, 또 그 사리를 자장율사께서 분골을 받아서 이렇게 수마노탑까지
오게 된 거거든요?
그래 부처님이 돌아 가시고 그 사리탑에 의한 이 신앙이 5백년간 지속이 되요. 또 오백년
뒤에, 이제 물론 이 알랙산더대왕의 동방원정은 한 이백 몇 십년 되지만, 그 동방원정을
통해서 나온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라 그러지 않아요? 거기에 간다라 미술이라 그러는데,
이 간다라문화, 이 속에서 서역의 신상이나 이런 것이 유입되면서 그러면서 이제 불상을
조성하게 되는, 이게 인제 생겨 나기 시작하거든요?
이제 그런 속에 예, 부처님의
사리도 한계가 있지 않아요? 또 부처님 가신지는 또 오래
되었거든요. 그래서 한 오백 년이 지나면서 아! 우리 중생심 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속에, 탑도 만들기 어려운 속에, 부처님의 사리도 인제 한계가 있고 어디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이 불상을 만드는, 이제 그리스 신상에 이런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 렇게 해서 우리가 불상을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 하나 거룩하게 모셔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예경하고 또 이 성전 속에 모셔서 ‘우리가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수행하고,
또 기도 정진하자.’ 라는 이런 이제 흐름이 생기는 거지요. 그게 이제 불상의 출현이거든요.
그래 이제 불상이 여기까지 왔고 또 우리 문수보살도 이렇게 모셔져 있지요.
그러나 실지 저 남방의 불교는 부처님의 이제 법 그대로 바로 변형을 많이
거치지 않고
그대로 이제 계승해 온다고 하는 ‘해라 베다’, ‘상좌부’들이지요. 거기에는 교리적으로는
바로 보살들이 없는 것이거든요? 석가모니 부처님 물론 부처님의 전생담속에서 나오는
미륵보살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만 이런 보살 사상이 없어요.
그런 속에 우리 대승불교는 보살이라는 이 사상을 낳게 된 것이지요. 그래 대승불교의
출현이라 그럽니다. 이제 대승불교의 출현이 보살사상으로부터 비롯되지만 후에 이제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고, 또 이렇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의
이상은,
이 보살이라는 것은, 자기가 ‘나 혼자서 깨달아서 성불하겠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서
부처님처럼 되겠다.’ 하는 그 서원도, 또 그런 수행도 중요하지마는, 그러나 이 세상이
이렇게 갈등 속에 놓여 있고, 또 이제 고통 속에 놓여서 중생들은 수 많은 원을 갈구하게
되고, 세상은 시비가 이렇게 많아 지고, 이 세상이,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사바세계로서
항상 이렇게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을 조금 우리가 좋은 정토의 세상으로, 좋은
세상으로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바꾸어 줄 수 있을까?
좋은 세상 되기를, 우리가 헌신적으로
자기를 온통 거기에 던져서, 자기를 불살라서,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게 만드는 일, 이것이 가장 바로 우리 인생에 가치 있는 일이다.
예,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 부처님 되겠다 하는 이 생각도 접어 놓고 세상을 위해서
헌신, 봉사하고, 또 세상이 좋아 지면서, 정토가 되면서, 그러면서 나와 이 일체 중생이,
이 고통 받는 중생이 함께 동시 성불하는 거다. 이제 그런 원력으로서 살아 가는 이
인간상을 보살로서 제시가 되는 거지요.
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 ‘이
세상이 아, 이렇게 고통 속에 놓여 있구나.’ ‘내가
이 세상을 구제하리라.’는 이런 원력으로 부처님, 우리 탄신일 초파일이 되게 되면 연등을
달고, 얘기 부처님을 모시고 그렇게 해서 관불의식도 하고 그러지 않아요? 이제 그 부처님도
그런 뜻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에 중생구제를 위해서 이 세상이 왔다 이거요, 그 정신을
계승해 가는 것이 불자가 할 일이고 그 표상적인 모습이 바로 보살이다.
그래서 이 보살은 다양한 보살님들이 있지 않아요? 이 다양한 보살님들은 한편으로 보면
우리가 살아 가면서 크게는 자비, 지혜 이것이 불교의 양날개와 같고, 불교의 기둥과 같고,
축과 같지만, 그렇지만 우리 중생의 원은 그 속에서 또 세분화 해서 디테일한 내용들이,
우리의 바램이 워낙 많지 않아요? 거기에 부합하기 위한 이런 이상적인 보살들이 수없이
제시되고 등장되는 거지요.
또 그런 역할을 하는 뛰어난 하나의 분야에 전문가적인 이런,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전문가들이 어떻게 보면 필요도 하고, 또 그런 사람들이 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 분들이
다 이상적인 인간이다.
이게 보살로서, 보통의 중생심으로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항상 자비가 따르고 지혜롭고,
그러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원력을 탁, ‘어떻게 해야 될 건가?’ ‘이 세상을 더 맑히고 더
좋은 세상 이것 만들기 위해서 어떤 원을 세워야 될 건가?’ 여기에 따라서 다양한
보살님들이 다 이제 나타나는 것이고,
그래서 이제 불교는 보면 이런 보살 저런 보살이 이런 부처님, 저런 부처님이 수 없이
많은 것 같아서 뭔가 이게 헷갈리는 것 같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고 이러면 좋을 것인가?
저러면 좋을 것인가? 이 부처님이 좋은가? 저 부처님에게? 저 보살님에게? 이러면 영험이
있는가? 가피가 있는가? 하는 이 생각을 우리 중생심에서는 항상 가지지 않아요?
그 물론 자기가 더 원으로서 ‘아! 참! 우리 집안에, 또
내지는 내가 이런 일을 잘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이렇게 살아 갔으면 좋겠다.’는 그런 원을 세우는 분은 또
이제 그런 부처님을, 그런 보살을 딱 자기 롤 모델로 이렇게 딱, 이 또 심볼로, 이렇게
내세워서 자기가 항상 부족하기 때문에 ‘아! 저런 보살님처럼 저렇게 원력을 세우고 또
그런 자비심을 가지고,
또 중생의 아픔을 소위 약왕보살은 중생의 아픔을 구제하기 위해서, 탁 인제 명의가 되어서
내가 세상의 환자들을 치료하고 도움을 주고 아픈 사람을,’ 그걸 약왕보살이라 그러거든요?
그런데 원력세운 사람들은 또 그런 역할을 하고, 그 전문성을 지니고, 그것을 세상을 위해서
헌신, 봉사, 회향하고 하는, 이제 이런 롤 모델들, 그게 이제 다양한 보살이요.
그래서 여기 이제 문수보살은 우리 불교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지혜의 상징
이거든요? 이
지혜는 단순한 우리의 머리로서 ‘하!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하는 이런 이제 지혜를,
그냥 우리는 아는 데서 나타나는 알 ‘지’자 ‘지혜’라 그러거든요.
그러나 이런 분별을 떠나서 그 ‘반야의
지’ 문수보살이라는 이 ‘문수의 지혜’는 이 상대적인
분별의 개념, 이걸 다 비워 내고, 그걸 내려 놔야 돼, 그래서 이건 한편으로는 ‘분별이 없는
직관지’라고도, 그리고 또 무심에서 나오는 다른 안경이나 이런 것을 쓴 것을 다 벗어 버리고,
있는 그대로 딱 보는 그 눈이 가장 정확한 눈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기가 딱 집착하거나 고정관념이 있거나 또 자기 안경색갈, 안경
이것을 다 벗어 버려야, 바르게 보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그 지혜를 우리는 ‘반야의 지혜’라
그러거든요. 이제 그 지혜를 가져야 만이 우리가 자기도 바로 보고, 세상도 바로 보면서 바른
판단 속에 바르게 살아 갈 수 있는 이제 그런 길이 열려 간다는 거요.
그게 안되면 우리가 분별로서 항상 생각하고 ‘아, 나다, 너다.’ 또,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 ‘선이다, 악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성인이다.’ 다 이거 분별하고 구분하게 되면,
그러면 거기서부터 이제 분별 그 것으로서 사람을 바로 못 본다는 거지.
아, 여기에는 이제 오늘 군수님이
여기 오셨던 데, 군수님도 계시고, 또 군 의장님도 계시고,
또 군 의원님도 계시고, 또 우리 지역에 많은 분들이, 지역에 나오셔서 그래도 이 인문학강의도
한번 들어야지, 또 인문학을 중심으로 해서 강의 하는 분, 거기에 조금 인연으로 연결된
분들, 또 주지스님하고 연결된 이런 분들이 오늘 이런 자리에 같이 있는데,
이제 그러다 보면 아! 상에
메이는 거지요. 아, 이분은 군수님이시고, 또 ‘높다, 낮다.’
‘천하다, 귀하다’. 저는 어떻게 보면, 요 앞에서 또 가사 장삼을 수하고 이제 또 ‘월정사
주지스님이니까 또, 뭐 어떻다.’ 하는 이, 이제 고정관념 선입견, 이런 게 떡 붙게 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 보는 이게 이름으로 봐 지는 거에요. 형상에 끄달리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바로 못 본다는 말이요. 예? 항상 차별해서 분단해서 이렇게 보는 게 우리의 중생심이라는
거요. 그런데 이 문수 보살은 그 상, 분별하는 것, 또한 상대적인 이 개념, 이걸 다-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 내려 놓은 그 지혜가 이 있고, 문수의 지혜, 반야의 지혜가 그렇듯이, 그런
눈으로 돌아 가야 된다는 거지, 그래야 세상에는 뭐요? 차별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항상 누구에게나 아, 생명의
싱그러움, 또 두루 평등한 속에서 세상을 바라 보는, 이
눈이
생기는 거요. 물론 그 평등은 잣나무하고, 앞에 전나무 하고, 소나무하고 똑 같을 수는 없지
않아요? 그러나
아, 잣나무인줄 알고, 전나무인줄 알고, 또 이제 앞에 돌배나무인줄 알고,
이러면 그냥 돌배나무는 돌배나무 대로 예,
잣나무는 잣나무인 대로, 이 소나무는 소나무
대로, 저마다의 가치가 다 있지 않아요? 그런 관점으로 바라 보면, 이 세상에 무엇 하나,
그게 이제 우리 불교적으로는 화엄이라 그러는데, 꽃밭이라는 거요. 꽃으로 장엄된 세계라는
거에요.
꽃은 제비꽃도 있고, 호박꽃도
있고, 뭐 백합도 있고, 장미꽃도 있고, 찔레꽃도 다 있는데,
어떤 한 꽃만 딱 ‘저건 아, 좋다.’ 그것도 이제 자기 취향이지, 자기 고정관념이지 않아요?
선입견이지 않아요? 예 자기 취향. 그게 업승이거든? 아이, 누구는 조그마한 제비꽃이 좋더라.
이럴 수 있는 사람도 있단 말이지요. 어릴때는 또 이 꽃을 좋아 했는데 나이가 드니까 달라
지더라. 그렇지만 이 꽃도 저 꽃도 어떤 꽃도 꽃으로 봐 줄 수 있는 이런 이제 눈이 있어야 되는
거지요.
다- 보며는 앞산도 물론 소나무 숲은 또 소나무 숲대로 좋기도 하지만, 소나무도 있고,
전나무도 있고, 잣나무도 있고, 또 뭐 굴참나무도 있고 다 주목도 있고 뭐 이렇게 어우러진
꽃밭도 얼마나 좋아요.
그래 이것은 뭐기 때문에, 또
저거는 뭐기 때문에, 분별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이제 바라
보면, 아, 세상이 이제 부조리스럽고 불합리하게 보이거든. 자기 눈으로, 자기 눈으로 절대
알려고 하는, 이 생각을 벗어 놓고, 항상 있는 그대로 그득히 바라 보면 온통 생명이 다
조화롭게 함께 너울거리는, 거기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이 소통의 세계가 생겨 나는 거에요.
아까 우리 주지스님 첫 인사 말씀 드릴 때 ‘수처작주’라고 이런 술어를 썼는데,
’수처작주’라는 소리는 ‘곳에 따라 주인이 된다’는 소리에요. 어디서든 자기가, 아 그렇다고
내 집만 내 집이 아니고, 온 세상이 주인처럼.
항상 어디 피동적인 생각보다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앉은 자리에서 어디에서나, 항상
주인의식 같이, 그러면 자기 집만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고 다듬고 포근하고 이런 것이
아니고, 어디서나 자기 집처럼 포근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우리가 피동적인 종의 마음같이
이렇게 되게 되면, 항상 이것은 내 것하고는 달라져 있어, 세상을 그득하게 아, 자기
꽃밭으로 바라 보지를 못한단 말이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수처작주’가 되어야 된다. 이 이제 소리를 많이 쓰기도 하는데, 그래
우리 특히 선불교, 참선하는 불교에서, 중국에 와서 이제 그런 종풍을 선장을 시키는데,
그게 인제 한국 불교 조계종도 그런 종풍의 계승적 입장에 있게 되는데,
이제 그러다 보니까 ‘수처작주’, 이 그러다 보니까 이게 또 과도해 지면 폐단을 낳지요?
다- 너무, 주체적이고 당당하고, 물론 그래야 되지만, 그 것이 잘못되게 되면 ‘지 잘나서.’
이렇게 될 수 있다 이 말이요. 그러나 ‘수처작주’의 원래적인 뜻은 정말 아, 이제 항상
그득히 우주를 자기 집으로, 항상 그래서 이 세상을 아끼고, 생명을 사랑하고, 지극히
다 포근한 이 세상이 되겠금 만드는 데서 그게 이제 이 ‘수처작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되는 거지요.
예, 제가 이제 월정사 주지를 조금 오래하고 있는 편이에요. 여기 약력 소개에 그 동안에
오대산의 중흥조 같이 아까 주지스님이 그런 표현을 쓰시고 하는데, 그건 불사를 좀 했다.
인제 이런 거요.
뭐 무슨 불사를 하다 보니까, 또 여러 가지 부수적으로 집을 지으면 사람이 늘어나야
되고, 또 스님들도 조금 더 수용하고, 또 많은 분들이 오시게끔 만들고, 또 다양한 이벤트나
또 이제 근대처도 만들어 가면서 살아 가야 되니까, 그것이 포교하고 연결되고 하는데,
그래서 뭐 제가 지금 뭐 많은 일을 한 사람같이 사실 보이지마는, 이건 불교적으로는 그런
유의 행사적인 일들은 이거 뭐 몇 푼어치 안 된다 그래요.
그건 뭐 어떻게 보면 무 공덕이라고도 그러고, 또 아무리 재주 부리고 갖은 것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허공에 날리면 터럭에 불과하다는 거요. 이 우주 광활한 법계 속에서, 또
내지는 저 지구 밖에 나가 가지고 지구를 쳐다 보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예? 우리가
개미 집 보듯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거요.
그거를 이제 저 서산대사는 저 금강산 향로봉에 올라 가서 시를 쓴 것이, 그 향로봉 시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만국도성여의지(萬國都城如蟻지) 온갖 나라 큰 도시들 작은 개미집과 같고
천가호걸약의계(天家豪傑若醷鷄) 하늘 아래 영웅호걸 하루살이 초파리라
일창명월청허침(一窓明月靑虛枕) 달빛 밝은 창가에서 누워 맑은 하늘 보니
무한송풍운부제(無限松風韻不齊) 솔바람 맑은 소리 온갖 풍류 끝이 없네
‘만국도성이 여의지’요 ‘천가호걸이 약의계’ 라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만국 도성이, 저
산꼭대기에 올라 가서 보니까, ‘여의지’는 개미집 같다.’ 이 소리거든요. 그리고 이제 ‘천가
호걸’이 즉 ‘천만호 영웅 호걸’이 하루살이, 하루 살다 가는 하루살이 벌레와 같다. 이 말이요.
이제 호연지기가 있어서 떡-보니까
그렇지요. 이제 그럴 것 같으면 이 세상 속에서 뭐
대단한 것 한다 하지만 그것도 몇 푼어치 안 되는 거요. 그 산꼭대기에 올라 가서 딱 보니까,
만국도성이 개미집 같이, 아마 요새 우주선이 달나라 가고 하니까, 달나라 쪽에서 지구를
보면, 우리가 달 보듯이, 물론 달은 또 지구의 위성이니까 좀 더 크게 보이겠지마는,
그렇지만 그것도 결국은 개미집같이 보일 수 있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개미집을 가만히 쳐다 보고 있으면, 자기들끼리 막 이렇게 협동도 하고,
뭐도 하고, 뭐 이렇게 해서 그러듯이, 이렇게 우리가 높은 데, 멀리서 떡- 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면 이게 별 것 아니거든요.
우리가 오래 살고 대단한 영웅이 되고 뭐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하루살이 거기에 불과한
거요. 이런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 영겁의 시간 속에서 보면, 뭐 100년 살건, 뭐 조금
더 살든 못 살든, 이것도 우리 중생심으로는 간다 온다 하는 이 마음이 있어서 아까 제가
말씀을 드렸던 이 인연의 아쉬움이 있어서 항상 ‘아, 살았다.’ ‘이 만큼 살았다.’ ‘만세를
살아도?’ 그래도 그 아쉬움이 남고 다 그러는 법이고, 그것도 또 긴 시간도 아닐 수도 있는
거지요.
그렇지만 여기 와서 옹기종기 모여서 이렇게 많이 살아 봐야 100년인데 100년 살아 가면서
갖은, 스스로는 뭐 대단한 것, 많은 것, 또 오래 사는 것, 이런 것 생각하지만 이 것도 사실은
알고 보면 몇 푼어치 안 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서산스님은
‘일창명월에 청월침’하니. 요 이제 달빛 들어 오는 이 솔바람소리에, ‘무한송풍이 운부제’라
거기 팔베게 베고 누워서 딱 이렇게 있는데’ 솔바람이 지나가면 이게 최고라는 거에요.
이제 그러듯이, 우리가 아무리
행복을 구해서 갖은 일을 하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대단한 것 뭐 얼마나 있겠느냐? 물론 그러다 보면 사람이 또 무상감에 젖어 가지고
그러면 세상에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냥 살까요?
서산대사 같이 팔베개나 베고 이래 가지고 달빛이나 보면서 솔바람 쏘이면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이면, 나도 그렇게 해 볼까요? 그렇게 해 보면 좋겠지만, 요즘 세상에 경제 사정이
그렇게 살면 안되겠지?
그래서 행복을 어떻게 찾아야 될 것인가?
그래 이 행복의 문제야 물론, 인간이 세상에
출현해서 쉼 없이 ‘어떻게 하면 공포에서 벗어 날까?’ ‘어떻게 하면 먹고 사는 것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조금 더 수명을 늘리고, 또 가진 것을 조금 더 늘려서 그렇게 행복을 만들
것인가?’ 그건 뭐 유사이래 아마 다- 우리 인간이 보편적으로 다 생각했던 그런 행복론인
것 같아요.
이제 유교적으로는 복을 오복 보통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요? 오복이 오래사는 ‘수’거든,
둘째 ‘부’, 셋째 ‘강령’, 건강하고 또 넷째 ‘유호덕’이라 그러지 않아요? 이 덕성스럽게 사는 것.
또 다섯번째 ‘고종명’이라 해서, 돌아 가실 때, 살다가 돌아 갈 때 잘 천명을 다 하고 가야 된다
말이거든요. 이제 그걸 잘 갖추면 우리는 ‘아, 복 받았다.’ ‘행복하게 살았다.’ 이제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그런데 행복의 반대말은 ? 주로
인제 우리 전통적으로는 그걸 6극이라고도 하는데,
첫째가 흉단절이라 그래요. 흉단절은 50을 못 산다는 겁니다. 우리는 50 전에 가면 요사라
그러지 않아요? 요절했다. 그 50을 지나면 면요라 그러거든요? 요절을 면했다. 전통적으로
그래도 요절은 면하고 가야지. 이것이 이제 우리 전통적으로 생명이, 수명의 개념이요.
그러면 이제 60은 하등 수명, 70,80은 중등 수명, 90,100살 하면 상등 수명이라 그래서,
하! 그래도 상등 수명, 오래 살았다, 천수를 다 했다.
물론 인간의 요즘 이제 천수라 하면, 수명은 좀 건강관리 잘 해서, 이 케어 잘 받고 이러다
보면 120살 까지 살 수 있다고 보통 그러지요? 예, 타고 난 수명이 그 정도는 다 될 수 있다.
중병에 안 걸리고 불의에 가지 않으면. 그런데 그것 요즈음 살다 가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러나 지금 그걸 늘리기 위해서 갖은 뭐, 지금 DNA를 연구하고 이렇게 해서
앞으로 갈 수 있다, 갈 수 있다 그러지요? 그래서 이걸 흉단절.
두번째는 질병이라 그래요. 병 없이 사는 것 살아 가도 병 없이 사는 것. 이게 강령에
대칭되는 말이지요? 그 다음이 이제 살아 보니까 우리가 이제 사실 골골히 80 해 봐야
인생 재미없이 살면, 아파 가지고 계속 병원이나 다니고 하면 인생살이 오래 살아 봐야
재미없다 이거지. 그래서 질병 이걸 가지지 않는 것.
그 다음에 이제 근심,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근심하고 살아야 되지 않아요?
뭐 부부지간에는 부인에 대한 근심, 남편에 대한 근심, 집에 좀 늦게 들어 오면 왜 남편이
늦게 들어 오느냐? 어디 갔느냐? 뭐 했느냐? 앉아서 갖은 망상은 다 이제 부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이제 보통 전통적인 집에서 기다리는 부인의 모습이지 않아요?
또 부인이 밖에 막 오래 다니면 또 남편이 근심하는 일이지요. 또 자식은 어떤가? 뭐
이제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손가락, 가장 걱정이 더 생기는 거지요. 또 요즘에는
공부하느냐? 안 하느냐? 또 직장을 얻느냐? 안 얻느냐? 또 결혼은 어떻게 시키느냐? 일생
또 부모의 그 자식에 대한 걱정, 갖은 걱정이 오늘날 세상은 더 많아 진 세상이지요.
단순한 사회가 아니지 않아요? 자기 앞 가름도 하기도 쉽지 않은 이 세상 구조 속에서
쉼 없이 걱정이 생겨 나는 거지요.
이게 이제 근심 걱정이 많아 지면 하늘이 무너질 것 까지, 걱정을 하는 거요. 땅이
꺼질까? 걱정은 쉼 없이 놓치지 않고 하는 것이 거든요? 그래서 그러다 보면 뭐가 되요?
이제 우울증이 오고 또 내지는 공황증이 오고, 이제 갖은 병리현상이 오는 거요. 그러나
보니 이 신경예민이 예민해서 다 이제 병이 온다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우리 불교적으로는 ‘수행한다.’ ‘공부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민한 것을 조금
무디게 만드는 것이요. 그것 다 그냥 걱정 하나 탁! 내려 놓고, 그러면서 담담히, 오지도
않은 것 걱정하고, 또 지난 것 붙들고 걱정하고, 이거 다 내려 놓는 것이, 그게 인제 마음
비우는 일이고 마음공부 하는 일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게 근심,이 것을 6극 중에
하나로 보는 거에요.
그리고 가난한 것, 우리가 사실은
가진 것 없이 살게 되면 또 이게 어려운 일이요.
요즘 세상은 특히 자본주의 세계는, 이게 많이 가진 것으로 인간의 척도를 갖다가 규정
짓는, ‘월급을 얼마 받느냐?’ ‘얼마 짜리냐?’ ‘돈은 얼마 가지고 있느냐?’ 거기 따라서
사람이 달라지니까. 이 ‘얼마짜리 인생’으로 그렇게 되어 버리거든요?
그래 이것 오늘날 가난한 것은 이것을 큰 누구는 뭐 죄악이라고 이야기 하듯이, 이렇게
규정지어 진다는 말이에요. 얼마나 무능하느냐? 노력 안 하느냐? 뭐 안 하느냐? 인제 이런
것하고 연관되어서 가난한 것이 이것이 큰 수치같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 말이요.
물론 과거에도 보릿고개가 있고 해서 가난하면 정말 그것 지긋지긋한 일이지요. 그러나
요즘 이제 국민소득이 한 3만불 된다 하면 그래도 인제 가난하지만, 가난은 우리 중생심을
항상 상대적이니까 이 빈부차이나 이런 것, 계층의 차이 이런 것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 자본주의 우리 삶의 실상이기는 한데, 그래도 인간은 기아로부터의, 또 조금은
그래도 복지나 이런 것을 통해서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자는 겁니다. 그런, 이 그런
문제.
또 이제 악한 것, 사람이 악하게
태어나는 것. 이것도 그걸 이제 성격은 이제 굉장히
자비스럽게 쓰지 못하고, 항상 자기 이기적으로 뭔가 이게 투쟁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가는 것. 이것도 덕성을 못 만드는 일이거든. 그래서 이제 그것도 이 6극 여섯 가지의
인간이 피하고 싶은, 벗어 나야 될 이런 요인 중에 하나라는 거에요.
그래 이제 지금 인류의 노력은 5복을 만들어 내는 것, 이 6극을 없애는 것, 이게 이제
국가 사회도 그렇지요. 우리 군수님도 아마 이 우리 정선군에 그런 6극이랄까, 이게 다
사라지게 만들려고 하는 이 원력으로 군수 출마도 하셨고, 또 이렇게 당선이 되셔서,
아마 ‘더 내가 전력을 해야지.’ 이런 지금 한참 그런 열정과 또 원력을 세우고 계실 거예요.
또 결국 국가의 정책도 그렇겠지. 또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 인류가 이 발전, 또 내지는
오늘날 문명을 만들어 온 그 원동력도 그,것 만들기 위해서, 또 6극을 회피하고 5복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해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 특히 앞으로 4차 산업시대라는 거에요. 여기에는 더 풍요로워지는 세대, 편리해
지는 이 세상, 그걸 4차 산업 시대라 부르지요. 초 연결사회, 초 지능 사회가 되었다고
그러지요. 그 초 지능을 통해서, 초 연결을 통해서, 편리해 지고 풍요로워 지고, 이제
그렇게는 가지마는 그것만 가지고 다 해결될 수 있느냐?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게 그냥 물질이 풍부하고, 지금 부자는 그럼 만일에 5만불
시대가 도래한다, 10만불 시대가 도래했다 하더라도, 그럼 지금 소득이 10만불 넘어 서는
현행의 부자들은 그럼 지금 과연 행복할까? 이제 그것만도 아니다 이 말이요.
또 한편 요즈음 ‘유반하라’ 라는 분이 ‘사피엔스’ 라는 책을 쓰고 ‘호모데우스’ 라고
하는 이 책을 명저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분은 그 책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역사를 쭉- 생물학적 관점이나 여러 가지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
보면서, ‘미래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자기 견해를 제시하는 거지요.
그게 이제 ‘호모데우스’인데 ‘호모데우스’라는 것은 ‘인간이 신이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 인간이 어떻게?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그 동안에 종교가 추구해 왔던 영생의 문제,
우리가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것. 금생에서는 이게, 이 육신을 가지고 한계가 있으니까,
내생에 천국에 가든, 극락에 가든. 또 뭔가 영원의 세계에 가고 싶어 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어떤 몸을 성취하는 것, 도교적으로는 금생에 하나의 영단을 내어서 수명을 갖다가
800년을 산다, 천년을 산다. 오래 살 수 있는 신선이 되어서 불사신을 갖다가, 불계신을
증득한다.
또 금생은 이렇게 힘들지만 죽어서 좋은 세상으로, 그렇게 해서 영원히 죽음과 삶이
다하는 이런 좋은 지복의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는가? ‘그것이 있다.’ 그것이 종교가
이야기하는 하늘나라가 되었던, 극락이 되었건, 저 천당이 되었건, 어딘가 다 거기서 이제
하고 있는데, 그런 문제들이 과학의 힘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거요.
또 이제 초인의 문제, 우리는
지금 이 인간의 한계성, 이런 것을 뛰어 넘어서 더 이제
신통방통한 우리 인간이 되었으면 하는 이런 희구심이 다 있지 않아? 그래서 우리가 심지어
도를 닦는다고 하는 대단한 신통력을 구비를 해 가지고 신통 방통한 이런 것 잘 하면
하! 도가 높다, 우리는 기존적으로 그렇게 보아 왔지 않아요? 이제 그런 것 우리가 인간이
희구하는 바거든요?
그 초인, 보통사람보다 뛰어 넘는, 앞으로 초지능의 사회, 초 연결의 사회도 그와 같은
비슷한 개념이 있는 거지요? 우리 지금의 인간보다도 훨씬 뛰어난 로봇이라든지 또
사이보그라든지 또 우리 인간도, 훨씬 이 유전자 변형이나 이런 걸 통해 가지고 머리로 좋게
만들고, 집중력도 아주 좋게 만들고, 기억력도 아주 뛰어난 기억력도 만들고, 그것도 안되면
나중에 이런 칩 하나 가지고 우리 생각하고 연결해서, 떡-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컴퓨터를
연결해서 보듯이, 마음을 쓰듯이, 이게 가능한 시절이 올 것이라고 보는 거지요.
그건 왜냐 하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생화학물질의 발생 속에서 일어 나고
그것이 전기로서
이렇게 환원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전기, 컴퓨터도 전기를 쓰니까, 이게 연결되면 우리
마음을 읽어 보기고 하고, 마음이 또 그런 정보를 끌어다 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거라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되게 되면 인간이 초인이 되는 거지요, 초인이. 또 행복의 문제도 우리는
‘불행하다’ ‘행복하다’ 하는 이 마음, 이것도 결국은 이 화학물질의 발생에 따라서
‘엔도르핀이 도느냐?’ 또 내지는 ‘아드레날린이 발생하느냐?’ 또 ‘도파민이 많이 발생하느냐?
적게 발생하느냐?’ 이런 생화학물질의 발생에 따라서 우리의 행복감이라든지 중오심이라든지
또 우울증, 분열증, 또 갖은 공황증 이것도, 그런 생화학물질, 약물에 의해서 우리 마음을
조정해서…, 지금도 치료를 좀 하지요.
이런 것이 다 이루어 질 수 있는, 이 행복의 문제도 그렇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런 세상이
앞으로 도래할 것이다. 이게 이제 이 미래를 내다 보는 관점인데, 그러면 초인이 되고 가장
행복해 지고 또 영생을 살 수 있으면 이것은 신이 되는 거지 않아요? 그러니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바라 보는 이런 학자들이 나타난 거에요.
이제 그러면 우리 불교적인 관점은 어떻게 바라 봐야 될 것인가? 불교적으로는 우리가
그 천안통을 지닌다, 그 다음에 몸을 마음대로 하는 신족통을 가진다. 또 과거를 꿰뚫어
보는 숙명통을 가진다, 마음을 읽어 보는 타심통을 가진다 이런 것들이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가능하다고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그런 일들, 그걸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술(術)’이라고 그래요. ‘술’은
인간의 생각으로서 이루어 지는 것. 이게 ‘술’이라 그러거든요? 기술 ‘술(術)’자 ‘’술. 그런
기술로서 그런 인간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게 인제 미래를 바라 보는 학자들의
관점이에요.
심지어 요즘 우리 불교계에도 이제 ‘자유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한
이 워크샵, 토론을 하는 학자들도 보기는 했습니다. 이분들 이야기, 그 동안에 자연과학자
들은 지금 자유의지가 없다고 그런답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은 자유의지가 있다.
이제 그런데 자연과학자들은 아직 그런 실증적인, 이런 연구나 이런 소위 이론적 하나
이런 실험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해 보지 않은 이 인문학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몰라서
하는 소리다. 실제 하나 이게 뇌구조나 뇌공학을 했거나, 생명공학, 생물학자들 이런
관점에서는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거의 뭐 흐름이라 그래요.
그러면 우리 인간이 내가 이렇게 살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다 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마는, 전통적으로는 뭐 운명론자, 사주팔자대로 살아
간다. 이거 있지 않아요? 사주팔자라는 것이 정해진 대로, 타고 나서. 그러나 이게 정해져
있는 대로, 타고 난대로만 살아 가 지고 있는가? 없는가?
모르면 내 인생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개척해서 성공적인 삶으로 왔어. 또 사주팔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렇게 해서 성공적으로 이렇게 되겠금 되어 있어.
그러면 이게 숙명적인지 이런 삶을 타고난 거지 않아요? 그런데 과연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 그것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 된 거에요.
지금 우리가 DNA, 타고날
때 딱 DNA 속에, 또 이렇게 형상이나 거의 마음 씀이나
이런
것도 거의 뭐 그렇게 결정되어서 타고 나는 거지요? 그 업승이 부모로부터 온 우주와
연결된 이런 망 속에서 한 생명의 출현이고 ,그 속에서 일어 나는 자기의 주체적인
삶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거의 결정되다시피 하거든? 이런 이제 삶이다, 아니다. 하는 이
논쟁이 지금 이제 시작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이제 불교적인 관점은 어떻게 바라 보느냐? 불교는 아까 제가 처음 이야기
했듯이 ‘인연법’이라 했지요? 그걸 학술적인 용어로는 주로 ‘연기법’ 이렇게도 이야기하는데,
조건에 의한 발생이라는 것, 어떤 것도 조건이 되면 다 일어 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이 생명의 인간이 지금 생명도 새로운
생명도
만들지 않아요? 이것도 충분히 불교적 관점에서는 그런 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일어 난다.
또 최초의 생명의 염기서열이라는 것이 이게 인제 서열을 아미노산이 단백질화 되고 하면서,
이제 서열을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이제 쭉- 유선형의 이런 DNA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이 염기 서열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이것 참 불가사의한 일이라 그러지요.
물론 한편으로는 그것 자체도 지적 설계 같이, 무언가 이제 설계에 의해서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요. 또 그것 자체를 갖다가 뭐 하느님의 뜻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고, 또 내지는 이것 그냥 하나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불교적인 관점은 그건 뭐 조건에 의한 발생이니까 인연에
의해서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DNA 학자들은 이건 엄청난 확률이라는 거지요. 최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은 그 염기서열이 어떻게 그렇게 해서 느슨한 염기서열, 단세포로 최초생명이
이루어 졌지만 어떻게 그렇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건 우연 치고서는 굉장한 엄청난 확률의 우연이었다. 이렇게 인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나 그것 또 조건이, 그것도 온통 지구의 환경이라든지, 물의 온도라든지, 아미노산이
단백질화 되는 데는 온도가 되고 뭐 바람이 불고, 움직이고 뭐 하고 하면서, 그게 인연 화합이
아 이렇게 이루어 져서 최초에 이 생명이 탄생될 수 있었지요. 그리고 난 이후에 그러면 그게
이후부터 자유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그러나 인간은 또 그런 환경이나 뭐나 주어진 역사의 변천, 흐름 이런 것이 저 신의
눈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또 부처님같이 온 우주의 중중 무진한 인연의 이법을 다 잘
통찰하는 데는, 그게 하느님의 뜻이 되고, 부처님의 뜻이 되고, 그게 또 결정론이 또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제 자기 주체적 자유의지에 의해서 또 생명의 진화를 가동시키는 거지요.
환경이 달라 지고 조건이 달라 지면서, 또 이제 생명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또
진화로서 이렇게 이루어져 와서, 오늘날의 우리 인류, 그게 한편으로 보면 저 유인원부터
시작을 한다. 그게 사피엔스라는 이 종이 출현해서 온 세계를 제패하는 이런 과정까지는
온 거잔아요?
유원인부터 그렇게 해서 오스트랄피테쿠스,
뭐 호모 일렉투스. 호모 시빌리우스,
호모 일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이렇게 해서 이 사피언스가 지구상에 앞에 것으로부터,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아직은 정설이 아니기 때문에, 뭐 정설화 된 거죠.
에, 한 7만년 전에 아프리카 탈출이다. 뭐 10만년전이다 이렇게도 하는데, 그렇게
탈출해서, 그 동안에 있던 그 유원인적 이런, 저 과거에 구석기 시대 이런 인류를 전멸
시키고, 그리고 이제 사피엔스가 이 세상을 다 단일종으로서 인류에 이렇게 재패를 했다.
이게 보통의 학자들의 관점이지 않아요.
그렇게 그렇게 해서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고 종교룰 탄생시키고 그건 다 우리가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일들이지요. 그렇게 해서 오늘날 이 문명까지 건설해
왔는데, 이제는 인간이 다 신과 같은 이런 창조성, 또 영생, 또 내지는 소위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런 시대가 왔다고 지금 이야기 하는 거요.
그러나 불교적 관점은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그런 일들은 ‘술’이다. 기술로서 다
이루어 지는 것은 결국 완전한 행복은 이룰 수가 없다. 완전한 행복은 결국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지 않으면, 또 세상에 대한 명료한 자각지심을 가지지 않으면, 올바른
문수보살의 지혜를 가지지 않으면, 자기를 보는 것도 왜곡되어 있고, 세상을 보는 것도
왜곡되어 있다 말이지.
항상 상대적 분별 개념, 이런
것으로 세상을 바라 보면, 아무리 물질이 풍부하고
초 연결 사회가 되고, 초 지능의 사회가 되고, 영생적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행복이 이루어 질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이제 불교적인 관점인 것이지요.
그건 결국 우리가 상대적인 이 분별의 개념, 예, ‘나다, 너다.’ 분별되어 있고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 하는 이 분별심을 버리지 않으면 이 완연한 행복은,
또 세상의 완연한 평화를 만들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지심은, 결국 세상은 이 인연으로, 또 연기로서, 이
관계성에 의해서, 또 갖은 조건에 의한, 이 모든 만물의 일어나고 생성, 소멸하는, 이걸
여실히 바라 봐야 된다. 왜 생성 소멸하는가? 그 인연에 의해서, 그 인연은 결국은 다
관계성이기 때문에, 관계성은 해체되면 뭐요? 공이여 공. 다 비었다는 거에요.
나라는 것도 아무리 ‘나’ ‘나’ ‘나’ 하지만
인연이 떠나면, 곁에서 사실은 따지고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에요.
‘나는 영혼이 있어서’ 라고 하지만, 이 영혼의 발생은 아까도 이야기 했는데 생물학적
관점, 미래의 학자들, 영혼을 따로 인정할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다는 거에요. 절대는.
이 영혼이 일어 나는 것도 전부 인연, 조건, 이 조건에 의한 발생일 뿐이지, 그걸 떠나서
‘절대 나’라고 하는, ‘변하지 않는 나?’ 이거 없다는 거에요.
이걸 명료히 체달하면 도리어 자기로부터의 해방.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해탈의
자유인이 된다는 거에요. 그러지 않고 ‘내가’ ‘절대’ 이걸 갖다가 하나의 ‘얻어야 된다.’
‘찾아야 된다.’ ‘구해야 된다.’ ‘그걸 증득 해야 된다.’ 이런 관점으로 자기의 문제, 자기
영혼의 문제, 이런 것을 바라 보는 것을 이걸 인제 중생심이라 그러지요,
우리는 불교적으로는 이 중생의 마음은 항상 분별해서, ‘너다, 나다.’ 하고, 또 무언가
영혼을 따로 설정하고 구하려고 하는 것, 그래서 우리 불교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라
그러거든요? ‘정해진 법은 없다.’는 거요. ‘결정되어 있고 영원한 것’ ‘절대’, ‘절대’는
없다는 거요.
‘내 생명’도 ‘절대’라는 것, 그걸 국집하게
되면 자기, 영원한 자유, 해탈, 열반? 이걸
증득하지 못한다는 거요. 자기가 항상 비었다. 공하다. ‘나’라는 놈은 다- 인연일 뿐이지,
내가 따로 내세울 것, ‘이것’ 없다고 생각하고, 또 세상은 모든 것이 흘러 변하는 속에 있지,
권력도, 명예도, 재물도, 또 내 앞에 보여 지는 이 객관 세계, 절대 영원한 것은 없다.
그래서 이걸 집착하거나 국집하거나 붙들고 영원히 내 것, 영원한 그것을. 그것을 딱
‘방하착’, 내려 놓고, 비워 버리고, 이럴 때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재물로 부터 자유롭고,
명예로 부터 자유롭고, 이래야 이제 좋은 권력으로, 좋은 재물로, 좋은 명예로서 세상을
위하는 이런 회향으로 돌아 간다는 거에요.
그 속에서 지극히 자비심이 나오는 것이지요. 다 빈 마음으로 돌아 가면 온통 세상이
거기서 절대가 아니라 동체심이 나오는 거거든. 동체심. 구분 지어서는 동체심이 안 생기지
않아요?
다- 인연에, 내가 이 세상을 갖다가 형성시키는 인연의 관계, 또 저 사람이 나를
형성시키고, 내가 저 사람을 형성시키는, 인연의 관계 속에서 내 존재와 대상과 모든 것이
중중무진한 이 인연으로서 일어 나는 일이다. 이건 단순한 구조 속에서는 ‘너’,’나’ 하지만,
먼 – 이 우주 전체로 보면 이 세상에 관계 없는 것도 또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래서 불교적으로는 티끌 하나에도 ‘일미진중
함시방’이라 하듯이 티끌 하나에도
이 우주가 그대로 함께 형섭되어 있다는 거에요. 또 한 생각 속에 과거와 미래가 모든 것이
함께 연결되어 있고, 또 형섭되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 옛 대에도 우리는 중생심으로서는
‘옛’ 또는 ‘미래’ 하지만 그러나 ‘현재’일 뿐이라고 하는 거에요.
지금 막 빈 마음으로 돌아 가면, 항상
앞에 있는 지금이지, 과거에 탐닉하고 미래에,
오지 않는 미래에 그 막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이 마음 다-이거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럴 때 오로지 지금의 삶에 최선을 다 하고 또 지극히 열심히 살아 갈 수 있는 이 마음이
발로된다는 거지요.
우리는 아, 과거가 있고, 미래도 있고, 남기는 사람은 뭔가 이름을 남기고, 뭐도 남기고,
재물도 남기고, 뭘 남겨야만 거기서 아, 그래도 금생에 왔다 가는 영원하지 못한 삶 속에서
뭐 남기고 가는 것 같지만, 그것 조차도 다 인연의 무상한 도리 속에 있는 거지요. ‘무상성’
속에. 그래서 이 무상한 것을 바라 보면 그걸 연연할 게 없어 ,온통 세상을 위해서 자기
것으로 남긴다? 이건 다 이제 망상심이지요. 그거 대단한 것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뭐 벼슬을 높이 해서, 재물을 많이 가져서, 그래서 어디
이세상에 지금, 아, 예수님, 부처님 그러겠어요? 에, 다 가진 것 없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고 부처님일 수 있는 거요. 아니 그렇게 살아야 가장 영원을 산다.
오래 산다.
옛 말씀은 ‘사이불망자수’ 라 즉, 죽어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사실은 즉 오래 산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33살에 돌아가셨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도 살고 있어요. 우리들 마음 속에.
물론 부처님은 좀 오래 살다 80에 돌아 가셨지만 그러나 지금 2500년이 되어도 지금 여기
문수보살로 나타나고, 또 때에 따라서 우리들 마음 속에 다 부처님으로 또 나타나고, 또 ‘세상
모두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눈을 열어 내자.’ ‘그래서 항상 부처님처럼 존중하고 또 스스로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다 그렇게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듯이,
또 세상에는 모든 만물이 다 자비로운 기운으로 이렇게 서로 소통될 수 있는 이런 세상이
다 부처님의 그런 설법. 우리의 눈을 튀어 주기 때문에 일어 나는 현상이거든요.
세상이 다 인연으로 이렇게 관계되어 져 있다는 것을 그것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항상 분절되어 있는 거죠. 나와 너가 분절되고, 나와 객관계가, 또 모든 것이 다 자기
중심 속에서 다 분절된 이런 눈으로 보면, 세상은 소통이 안 되는 것이고 화합이 안 되는
거지요. 평화가 없는 거요. 행복도, 진정한 행복도 그 속에서는 일어 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은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 지기 때문에 세상은 무상하다.’ 부처님 돌아
가시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세상은, ‘그대들이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그냥
‘게으르게 살지 말아라.’ 이거요 왜? ‘내가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고,
또 나의 한량 없는 이 공덕도 좋은 올바른 일들도 그것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연유하였느니라.’ 그러면서 일체 모든 존재는 쉼 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라는 거지요.
모든 것이 무상이다. 이 말이요.
그대들이여 이 언제나 이것을 소위 무상하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서 그걸 버리면 안돼.
우리는 그 무상성을 모르면 권력에도 그냥 집착, 재물에도 집착, 눈이 어두워 지는 거요.
그렇게 해서 사람을 못 보고, 세상을 못 보고, 그냥 돈만 보이고, 권력만 보이고, 이러다
보면 세상이 어려워 지고 불행을 만들어 내는 일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 마지막 당부가 나의 이것이 마지막 당부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게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이요. 유훈, 우리 불교의 유훈은 ‘무상하다.’ ‘어디에도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하지 마라.’ ‘쉼 없이 변화하는데, 거기서 게으르거나 이래서는 무상의 물결에 다 이게
휩쓸려 가 버린다.’ ‘그래서 열심히 방일하지 말고 살아 가게 되면, 거기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고, 거기서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고, 스스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은 게으르지 않는, 열심히
살아 가고, 집착심을, 무상한데 무얼 집착할 것이 있겠어요?
그것만 놓아 버리면 세상은 온통 평화로운 행복의 물결이 그득한 그런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제가 주제라고 정했지만, 주제도
없이 그냥 뭐 이렇게 저렇게 해서 시간만
흘러
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정암사는 그대로 맑을 ‘정’자에 바위 ‘암’자, 맑은 기운이 이
정암의 바위 속에서 쉼 없이 솟아 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 와도 정암사는 맑은 도량이다.
청정한 도량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우리의 마음이 항상 탐, 진 치라 그러는데 그 세 가지의 독이다. 가슴에 탐욕의
불길이 치솟고, 또 분노지심의 불길이 치솟고, 어리석음의 불길이 치솟아서, 항상 내가 하는
것도 이익을 위해서 하는 조명심, 내 중심의 욕심의 마음으로서 세상을 불 태우고, 나도
불태우고, 항상 또 성취되지 않으면 일어나는 이 분노의 마음이 나도 불태우고, 세상을
불태우는, 이 세가지 독을 어떻게 하든가 없애야 되는데,
이건 자기라는 이 존재를 잘 못 알면서 일어 나는 거거든요? 내 중심의 내 이기적
내 Ego가 일으키는 내 허상이 일으키는 겁니다. 진짜 자기의 모습, 본연의 모습은 정말 나라고
내 세울 것 없는 이 나의 모습이다.
그 불길을 끄는 데는 존재를 바로 알아야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이 문수보살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결국 그것을 가르치는 지혜, 인연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이 지혜를 아는 것,
그래야 온통 이 우주가 소통으로 나아 가거든요. 그래야 세상이 평화로워 진다. 소통하지
않으면 어딘가 항상 막혀서 분노가 치솟아 일어 나게 되고, 또 과도한 욕망의 불길이 불을
태우고, 또 어리석음이 온 세상을 뒤덮고 할 뿐이라는 거요.
오늘 우리 정암에 맑은 기운의 바람이, 앞으로 이 정선군 또 인연 있는 여러분들을 다
함께 삶도 여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또 청정한 맑은 기운이 진작 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