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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형 융합인재의 사례를 통해 이시대에 필요한 미래 융합 리더십을
융합의 시대에 상호간의 지식과 역량을 융합하여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조하는 것이 tech+형 융합인재의 핵심이며, 이러한 tech+형 인재는 창의성 중심의 융합 자질, 태도를 가지고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통섭하는 특징을
tech+형 융합인재를 선정하여 창조적 리더의 DNA가 어떠한 것인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인물 선정 가이드라인을 활용코자 한다.
첫째,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세종대왕)와 우리시대를 대변하는 업적과 성과를 창출하고 미래지향적인 창의성 중심의 인문·과학기술 융합문화를 주도한 이상적인 역사인물(레오나르도 다빈치, 스티브 잡스)
둘째, 우리나라 현존인물 중에서 노벨상 후보 그룹(임지순, 박홍근), 글로벌IT CEO상 수상자(차래명), 젊은 공학인상 수상자(문수복), 벤처 1位 기업 CEO(강신철), 기타 인물(김범수, 이미경, 이수만, 정준양, 한경희)등
조사 인물
세종대왕 조선 제4대왕 / 창조경영 리더십 발휘 ? 과학 기술의 발전 : 발명 과정과 활용, 기술자 양성 및 보호법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탈리아 대표 예술가 / 과학의 예술가 ? 최초의 과학자,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
스티브 잡스 애플 CEO / 최초의 DENT Leader ? 새로운 시장 창조, 양보다는 질, 고객 기술을 끌어들인 창의기법, S/W와 Application 중시, 혁신의 동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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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자료는 크게 4 단원에서 '시대배경. 인물소개', '다 빈치의 업적 예술' 만을 옮겼습니다
시대배경. 인물소개 다 빈치의 업적 예술 다 빈치의 업적 과학 다빈치에 대한 전문가 재평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융합적 관점에서의 리더십 재해석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시대를 100년 이상 앞서 살았던 역사상 최고의 천재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누구인가?
시대배경
르네상스의 의미
르네상스의 특징
3대 혁명
The Medici family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를 떠올리면 늘 등장하는 메디치 가문은 14세기 초부터 직물 교역을 통해 부를 쌓기 시작했다. 조반니 메디치(1360~1429)는 은행업을 통해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급성장했고 정치적으로는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씀으로써 시민들의 폭넓은 신망을 얻었다. 조반니 메디치의 뒤를 이어 수장이 된 코시모 메디치는 곧 유럽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으며,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을 코시모의 은행을 통해 운용될 정도로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코시모는 은행업 뿐만 아니라 상품교역업에도 관여했는데, 그는 멀리 중동지역으로부터 향신료, 설탕, 견과류를 수입해 판매 함으로써 커다란 이윤을 남겼다. 은행업과 무역업을 통해 획득한 막대한 부를 통해 코시모 메디치는 점차 피렌체 지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동안 세간에는 코시모의 저택 안에서 전쟁과 평화가 결정되고, 누가 공직을 맡을 것인지 선택 된다는 말이 나돌았으며, 코시모는 그야말로 공식적인 칭호만 제외하면 사실상 피렌체의 왕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코시모 메디치가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데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수십 년 간 자신은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돈 쓰는 것은 돈 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안겨준다”고 말하면서 돈을 의미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한데 바로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 전역은 물론 멀리 오스만 제국에까지 사람을 보내 각종 도서와 문헌들을 수집하게 했다. 그 결과로 모아들인 자료들로는 고대 사본이 1만 점이 넘었고 파피루스 사본도 그는 또 많은 필경사들을 고용해서 고전 필사본을 펴내도록 했으며 스스로도 플라톤에 심취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우기도 했으며, 플라톤의 책을 번역하도록 했다. 고대 그리스의 원전들을 복원하고 다시 번역하는 바로 이러한 노력들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한 철학적, 사상적 기풍이 되었다. 그는 또 당시 수공업 장 인(匠人)에 가까운 처지였던 건축가 미켈로초 디바르톨롬메오를 비롯하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화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베노초 고촐리 등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숙식을 제공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게 했다. 그 결과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산타 마리아 델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코시모의 재력 덕분이었으며,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수학과 천문학 혁명을 향해 거인의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메디치 가문의 경제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5세기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문화예술가, 철학자, 과학자, 장인, 기술자 등 여러 다양하고 상이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으고, 이들을 후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들 이질적 집단 간의 교류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예측하지 못했던 다양한 결과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서로간의 잠재력이 발견되고 역량이 융합되면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작품이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르네상스가 더욱 번성하여 전 이탈리아로 확산되었으며 바야흐로 유럽은 르네상스라는 문예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Milan as it appeared in 1493, woodcut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 Wikipedia,
밀라노
1480년대 밀라노는 무기·모직·명주를 수출하는 무역 중심지로 막대한 부를 쌓은 도시였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북쪽 끝에 위치한 도시로 대부분의 궁전과 성당이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 양식으로 이어졌다. 밀라노 공작령은 1450년부터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메디치 가문처럼 스포르차 가문도 약삭빠르고 무자비했지만 은행가 보다는 군인이 많았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들 중 하나로 검은 머리카락과 피부 때문에 ‘일 모로’라고도 불린 루도비코는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 데스테와 더불어, 루도비코는 아름다운 궁전을 유지하며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는데 막대한 돈을 썼다. 피렌체에서와 달리, 대학들은 윤리적 철학보다 물리적 세계의 연구를 강조하였고,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어와 라틴어로 시를 짓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반면 루도비코는 저명한 교수들 간의 과학적인 토론을 권장했다. 이러한 환경에 자극을 받은 레오나르도는 피렌체의 문화를 떨쳐내고, 자연을 한층 분석적이고 이론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는 밀라노 문화에 젖어 들었다.
메디치가의 수장들은 각자의 재능과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아직 충분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자신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던 예술가, 기술자, 과학자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고, 그들에게 무료로 숙식과 작업공간과 재료들을 제공하면서 각자가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어떠한 보상이나 리워드(Reward)를 바라지 않는 아낌없는 후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바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위대한 작품들이 탄생될 수 있었고, 위대한 예술가들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물소개
? 1452. 빈치(Vinci)에서 3Km 떨어진 안치아노(Anchiano)의 유명한 농장에서 세르피에로와 카타리나 사이의 사생아로 탄생. 17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한 후, 베로키오 작업실에서 일을 함 ? 1476.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제단화가 스승인 베로키오에게 의뢰 되었는데,레오나르도는 클레디와 합작 <수태고지(受胎 告知)>를 그림 ? 1489. 4월과 5월에 그림 데상에 인체해부학을 연구한 흔적이 보임 ? 1493. 레오나르도의 생모 카테리나, 밀라노에 옴 ? 11월30일, 독일 황제 맥시밀리안과 비앙카 마리아 스포루차의 결혼식 날 레오나르도의 <스포루차 기마상>이 성내 광장에 공개됨 ? 1495. 이 해부터 <최후의 만찬> 제작에 본격적 착수 ? 1497. <최후의 만찬> 거의 완성. 파치올리의 <신성비례(神聖 比例)> 저술에 협력
Leonardo's earliest known drawing, the Arno Valley (1473), Uffizi
영웅들의 시대 난세
16세기의 서구는 종교와 문화예술 그리고 과학에서의 획기적인 변화들로 지독한 혼돈을 경험하면서 가장 역동적인 시간을 보냈다. 난세는 바로 영웅들의 시대라 하지 않던가? 이 난세를 틈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 유럽의 여러 곳에서 나고 활동하고 교류하다가 또 사라져갔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영웅이자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이 혼돈 속에서 새로움이 싹트던 시대에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며, 인류를 위해 거대하고 새롭고 또 멋진 세계를 열어주었다. 르네상스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그는 구질서와 신질서가 만나고 예술과 과학이 소통하며 과학이론과 기술적 실천이 뒤엉키던 그야말로 융합과 섞임의 시대의 중심에서 때론 소박하고 또 때론 화려하게 살아간 인물이었다.
다빈치의 신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몬탈바노 언덕 비탈에 자리잡은 마을 빈치에서 1452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아버지인 세르 피에로 다빈치는 젊은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시골여자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직업의 선택이 제한적이었다. 레오나르도다빈치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는 피렌체 부르주아 계층의 젊은 여자와 결혼했고, 어머니는 그 지역 농부에게 시집을 갔다. 따라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농사를 짓던 조부모와 삼촌 프란체스코 밑에서 성장한다. 삼촌 프란체스코는 레오나르도다빈치와 열여섯 살이 많았지만, 다빈치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됐으며, 다빈치에게 새와 도마뱀과 벌레 등 작은 동물들을 관찰했고, 꽃과 약용식물의 이름과 특징을 가르쳐주며 생명에 대한 경외심, 호기심과 이러한 자연을 관찰하는데 필요한 인내심을 가르쳐 주었다.
‘빈치 지방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이름이 말해주듯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성’도 가지지 못한 계층에서 출생했다. 이러한 신분은 그가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방향성을 갖지 못했음을 이야기해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런 만큼 그가 가야할 길이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도제살이의 시작
레오나르도는 읽기와 쓰기, 상인이 되는 데 꼭 필요한 기초적인 산술을 배울 수 있는 ‘스쿠올레 다바코(수판학교)’를 다녔다. 다른 아이들은 대학 진학을 위해 ‘스쿠올라 디레테레(인문학교)’에 진학했지만, 레오나르도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방에 들어가 도제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레오나르도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과 과학의 접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한 일화를 들 수 있다. 어느 한 농부가 조그만 나무 방패를 건네며 피렌체에 나가 그림으로 장식해 갖다 달라고 부탁하자, 피에로 다빈치는 피렌체 화가에게 넘겨주는 대신 레오나르도에게 뭔가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레오나르도는 방패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리기 위해 도마뱀·귀뚜라미·나비 등 온갖 동물들을 가지고 들어가 이런저런 부분을 보고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띤 그림을 그렸으며, 이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동물들이 죽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완성된 방패를 본 세르 피에로는 방패에 그려진 그림이란 것을 모르고 뒷걸음질을 칠 정도로 생생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같던 삼촌이 결혼하여 레오나르도는 빈치를 떠나 피렌체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수년 후 레오나르도는 유명한 화가이자 자신의 장인이 될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도제살이를 시작한다. 14세가 되던 때 그는 당시 피렌체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대스승(마스터)’ 이었던 베로키오의 공방에 도제로 들어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화학과 금속학, 수학과 해부학, 시각생리학과 원근법 등 화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아주 다양한 기술들을 배우고 습득하게 되었다. 나이 스물에 레오나르도는 대가로 인정받아 1472년에는 산타마리아누오바 병원에 본부를 둔 의사와 약사 길드의 한 조직인 화가 길드의 회원이 되어 레오나르도에게 병원과 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다 빈치의 업적 예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다빈치
The Baptism of Christ (1472?1475)?Uffizi, by Verrocchio and Leonardo ▲ 그리스도의 세례 (The Baptism of Christ) 제작연도 _ 1472-1475 .기법 _ Oil on wood 목판위에 유화
그리스도의 세례
작품의 주문자는 성 사르빅 성당이라고 전해지며 신약성서 마태복음 제 3장 13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된 그리스도 세례의 장면이지만,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가 곁에 있고, 등을 보이며 머리를 옆으로 묘사하는 수법이 레
손을 들고 있는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와 천사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몸의 움직임과 더불어 가운데 세례 장면을 강조하려는 배려가 보인다. 이들은 조형적인 의미지만 풍경도 요단강의 연장이고, 물 또한 정화(淨化)의 상징이며, 암벽의 돌은 신의 존재를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의 아름다움에 놀란 스승 베로키오는 이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Annunciazione (Leonardo) . 수태고지 (L'annunciazione)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기 작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하늘에서 사뿐 내려와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고 성령에 의해 아기를 배었음을 알려주는 천사의 모습을 나타낸 수태고지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자주 표현되는 주제이다. 천사의 모습은 오른팔에 맨 리본의 움직임으로 동적인 반면 마리아의 모습은 딱딱한 느낌이며 배경의 나무는 늘 푸른 향나무이다. 여기서 녹색이 가진 뜻은 희망과 더불어 긴 생명을 가진 나무이므로 영원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이 장면에서 성모마리아가 독서 중인 것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을 뽑는 장면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천사의 순결의 상징으로서 백합을 가지고 있고, 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이나 비둘기로 형상화된 성령이 그려지는 것이 많아, 성령에 의하여 잉태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Mona Lisa or La Gioconda (1503?1505/1507)?Louvre, Paris, France ▲ 모나리자 (MONNA LISA) 제작연도 _ 1503-1506 기법 _ 유화 크기 _ 77 x 53 cm 소장처 _ 루브르미술관
모나리자
모나리자를 다른말로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The Last Supper (1498)?Convent of Sta. Maria delle Grazie, Milan, Italy ▲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제작연도 _ 1495-1498 .기법 _ 유화. 크기 _ 421 x 910 cm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또는 마지막 만찬, 주의 만찬은 기독교의 신약성서에 기술된 장면 가운데 하나로,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직후 12제자의 놀라움과 동요와 그리스도의 슬픈 얼굴을 테마로 하고 있다. 15세기 페렌체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전의 작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나 기를란다요(Ghirlandajp)에 의해 ‘최후의 만찬’ 이라는 주제는 거듭 그려졌는데, 이들 작품의 구도에서는 유다 한 사람이 식탁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최후의 만찬’을 시도했다. 즉 유다까지 열두 제자의 무리 속에 포함시켜 그 열두 제자를 세 명씩 작은 무리를 짓도록 하였고, 이전의 작가들이 ‘최후의 만찬’과 ‘유다의 배반’ 이라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화면의 조형성에 역점을 두었다.
Last Supper perspective by Leonardo da Vinci
화면의 구도
화면의 구도는 대단히 수학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3개의 창문, 4개의 무리를 이룬 12제자 등은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 네 복음서,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등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화면 전체의 손상이 심해서 레오나르도 자신의 필치 는 20%내지 30%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구도, 공간 처리, 각 인물의 배치, 색채 같은 것에서 레오나르도의 흔적이 역력하다.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뛰어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독창성, 그리고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형식미, 숭고한 주제를 다루는 뛰어난 방식 등 ‘최후의 만찬’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가장 뛰어난 성과로 평가되며 1980년 유네스코가 이 작품이 소장된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The Last Supper, ca. 1520, by Giovanni Pietro Rizzoli, called Giampietrino (active 1508-1549), after Leonardo da Vinci, oil on canvas, currently in the collection of The Royal Academy of Arts, London; an accurate, full-scale copy that was the main source for the twenty-year restoration of the original (1978-1998). It includes several lost details such as Christ's feet and the salt cellar spilled by Judas. Giampietrino is thought to have worked closely with Leonardo when he was in Milan.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다시 복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이 77년 복원작업에 들어간 지 22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고 99년 5월28일 공개되었다.
'최후의 만찬' 작품 내용
그리스도의 오른편 첫 번째는 요한이 앉아 있고,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요한의 귀에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으며, 몸을 뒤로 젖힌 유다는 당황하여 그릇을 엎는다. 그 옆에 놀란 듯 열 손가락을 펴고 있는 안드레 아에 이어 야고보와 바르톨로메오가 또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앉아 있다.
그리스도의 왼편에는 양 팔을 벌린 야고보가 있고, 그 뒤에는 의심 많은 토마가 필립보와 함께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예수를 바라보고 있으며, 네 번째 그룹 의마태오와 다데오, 맨 마지막에 앉은 시몬은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불안과 소란 속에서도 자신의 숙명을 받아 들인 듯 침착한 예수는 전체 화면의 중심이 된다.
다 빈치가 자신의 작품인 ‘최후의 만찬’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이론이 나와 이목을 끌고 있다. 영국 데일리메일 보도에 따르면 한 미술사학자가 12사도 중 ‘의심하는’ 도마와 ‘작은’야고보의 모델을 다빈치 자신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Leonardo da Vinci, Ginevra de' Benci, 1474-78 ▲ 지네브라 데 빈치 (Ginevra de' Benci). 제작연도 _ 1474-1476. 기법 _ 유화 .크기 _ 37 x 42 cm
화면의 주인공 지네브라 데 빈치
지네브라 데 빈치의 초상화는 레오나르도의 첫 번째 초상화로, 양면으로 되어있으며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 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다. 당시에는 뒷면에 꽃무늬 장식 안에 잠언이나 좌우명같은 것을 새겨 넣었는데, 뒷면의 내용을 정확히 알기 위해 내셔널 갤러리에서 X-Ray 분석을 한 결과 라틴어로 “VIRTUTEM FORMA DECORAT:Be auty adorns Virtue = 아름다움이 덕성을 장식해준다” 라는 뜻으로 밝혀졌다.
John the Baptist. Salai is thought to have been the model (c. 1514)?Louvre ▲ 세례 요한 (Saint Jean Baptiste). 제작연도 _ 1513-1516. 기법 _ 유화. 크기 _ 69 x 57 cm
‘세례 요한’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지막 걸작이다. 이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의 일을 포기하고 해부학이나 지질학 등 과학적인 일에 몰두하였을 때이다. 어두운 검정을 배경으로 사용 하였는데 무엇인지 모를 어두운 풍경을 그려 넣으려고 했던 것 인지도 모른다. 세례 요한이 마치 예수가 오실 것을 예견하는 듯 오른 손 검지는 위를 향하고, 왼손은 가슴에 댄 채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c. 1510)-Louvre Museum ▲ 성안나와 성모자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제작연도 _ 1510년경.기법 _ 유화. 크기 _ 168 x 130 cm
‘성 안나와 성 모자’의 등장인물은 성 안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이며,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리아의 모친 성 안나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있는 성모마리아의 눈길에는 애처로움과 시름이 가득한데, 이것은 양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아기예수가 어린 양을 끌어안는 것은 수난과 희생을 제몫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올곧은 의지의 표현이다. 할머니 성안나는 이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처음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림의 구도는 피라미드형이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도 덕분에 성안나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딸을 무릎에 앉혔지만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앉아있는 곳은 결코 순탄치 못할 아기의 운명을 예고
기술인문융합 창의형 인재 / Creative Leadership 르네상스 과학 예술가/ 레/ 오/ 나/ 르/ 도/ 다/ 빈/ 치/ 73
Future Discovery Research 2020 기술인문융합창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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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