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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부정공파 판서공계 - 충북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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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종파별 자료 ★ 스크랩 합천 안동권씨 삼산재(安東權氏 三山齋)
권용현 추천 0 조회 175 14.02.11 13: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동권씨 삼산재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죽전마을

 

 

안동권씨 삼산재 전경

 

 

삼산재는 안동권씨 문중에서 이곳에 처음 정착한 안동권씨 감정공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중앙에 세웠으며, 2010년 유허비와 세거비를 세웠다.

 

 

안동권씨 감정공 세거비

 

 

통훈대부 군자감정 안동권공 유허비

 

유허비문에는 "역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명성을 이룩하지 못하며

 종신토록 쓰이지 못해도 괴로워 하지 않으면서 확고하게 도를 지킨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후손에 이르기까지 경사가 있게 된다" 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안동권씨 삼산재 솟을 대문

 

 

안동권씨 삼산재 표시석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삼산재가 자리하고 있다.

 

 

삼산재(三山齋)

 

감정공(監正公) 권집덕(權執德)은 시조 태사공의 15세 손이고 복야공파조(僕射公派祖)

 상서좌복야 상장군(尙書左僕射 上將軍) 휘 수홍(守洪)의 6세손이며, 고조 휘 척은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하였고, 증조 문탄공(文坦公)은 고려 도첨의우정승(高麗 都僉議右政丞)을 지냈다.

조부 휘 중달(仲達)은 시호가 충헌(忠憲)으로 삼중대광 지밀직사사(三重大匡 知密直司事)에

 이르렀으며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고 부는 고려 정순대부(高麗 正順大夫)로서 판종정시사(判宗正寺事)를 지냈다.

 

 

삼산재 마당에서 바라다 보이는 악견산성

 

 

감정공 유허비 및 세거비 추진위원을 새긴 비

 

 

안동권씨 감정공 묘소 입구

 

(출처:문화재청)

 

감정공 권집덕의 묘(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2호)

 

본분둘레 19.1m, 높이 1.7m로 평면 장방형계의 무덤으로,

여말선초 사대부가 무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묘비는 1693년에

 제작된 것으로 전체높이 1.15m로 행감정안동권지묘(行監正安東權之墓)라 새겨져 있다.

매년 이곳에서 10월 초8일 후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삼산재 옆에는 성리1구 노인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죽전마을 연혁을 새긴 비

 

 

죽전마을은 약견산성 밑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에는 가수현(嘉樹縣)

 대평리(大坪里)로 안동권씨(安東權氏) 집성촌이었다.

약 600년 전 조선 태종(1400년경) 때 16세손 휘(諱) 집덕(執德)

 군자감정(軍資監正)공이 낙향하여 처가인 합천이씨 고향지역으로 와서 처음 정착한 곳이다.

그후 21세손 휘 일(逸), 호 일신정(日新亭)공이 을사사화(1545) 직후 호조정랑(戶曺正郞)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죽전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다시 만들었다.

 

 

일신정(日新亭)

 

21세손 권일(權逸)은 중종(中宗)조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합격하고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뜻을 버리고 마을좌측 바위에 수필(手筆)로 일신정이라

석각(石刻)을 하고 근처에 일신정을 지어 후학에 힘썼다.

일신정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912년 황석탄(黃石灘) 부근에

복원하였다가 1944년 삼산제 근처로 이건하였다.

그후 건물이 낡아 1989년 그 자리에 옛모습으로 중건하였다.

 

 

합천군 대병면 성리 죽전마을 삼산재 앞 도로

 

 

마을 앞 버스정류장

 

 

그 옆에 쉴어갈 수 있는 쉼터가 있다.

 

 

마을 뒷산 악견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모습

 

악견산(634m)은 합천읍에서 남서쪽으로 15km지점에 위치하며 기암괴석이 아름다우며

 인근의 금성산 . 허굴산과 더불어 삼산이 합천호 맑은물에 잠겨 한폭의 상수화를 연상케 한다.

이곳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함께 장렬히 산화한 의병들의 민족혼이 살아 숨쉬는 악견산성이 있다.

 왜적이 장기전을 기하자 금성산 바위에 구멍을 뚫어 악견산과 줄을 매어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띄워 달밤에 줄을 당기니 흡사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니는것 같아

 이곳을 본 왜적은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전멸시킬것이라며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유래와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길가에는 구기자 열매가 추위에도 빨갛게 달려 있었다.

 

 

마을앞으로  금성산과 멀리 허굴산이 바라다 보인다.

 

 

 

 

악견산 중턱에 자리잡은 죽전마을은 산간마을로,

 대부분의  지대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죽전마을에 100여 가구 정도의  대부분이 합천이씨와

 안동권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의성김씨도 살고 있는 다성(多姓) 마을로 변했다고 전한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정겨움을 한껏 느끼다가 죽전마을을 아듀하면서..........

 

죽전마을 입구에 있는 무학탄은 개목정에서 황강에 이르기까지 약2km에 걸쳐 큰 돌이 깔려

너덜겅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은 홍수가 져 물이 불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무학이  구리방에 살고 있을 때 동녘 건너편 개목정에서 대평 개울물에

길게 뻗어 흐르고 있는 모양이 밤에 바라보면 마치 사람이 뛰어오는 형상으로 보였다.

무학이 출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가 문밖을 내다보다가 마치 아들이 달려오는

 것처럼 보여  여러차례 속았다 하니 악견산과 금성산의 돌을 모아 작두로 썰어 개울바닥에 넣어

너덜겅을 만들어서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드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무리 홍수가 져도 너덜겅 밑으로만 물이 흘러내려 밖에서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너덜겅을 '무학탄' 또는 '황석탄'이라고 하며

 방언으로는 '잠냄이너들겅'이라고도 부른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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