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호텔
개항의 물결을 타고 외국에서 많은 이들이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 시대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 공무 여행자들의 숙박시설인 원, 상인들의 숙박시설 객주와 여각, 그리고 주막은 서민들의 대중적인 숙박시설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인천이 개항하자 수많은 서양의 외교관과 여행가, 선교사, 상인들이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교통편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인천항에 도착하자마자 한양으로 바로 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몰려오니 숙박시설이 필요했고 주막이나 객주가 아닌 맞춤형으로 호텔을 지어야 했을 것이다. 인천 개항누리길에 있는 대불大佛호텔은 서양식으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나가사키 출신 무역상인 호리 히사타로는 인천항을 드나드는 서양인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1887년께 서양식 건축물을 짓기 시작해 1888년부터 본격적인 호텔 영업을 시작했다. 초창기 대불호텔은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었으나 곧 서양식 3층벽돌 건물로 신축하고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춰 서양인들을 고객으로 맞아들였다. 인천에는 3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기와집 아사히야 여관, 4층 규모의 일본식 목조 가옥 아사오카 여관, 2층의 목조 건물 스이쯔 여관 그리고 대불호텔 길 건너편 하나야 여관 등 서양식 대불호텔과 달리 일본식 여관도 많았다.
대불호텔은 일본식 여관과 달리 서양의 음료와 음식이 제공됐고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통용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 인천의 저잣거리에서는 '양탕국洋湯국' 다시 말해 커피가 서울의 왕실보다도 먼저 음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박시설에 비해 두 배 이상 비쌌지만 외교관, 선교사, 조선 정부의 고위 관리, 외국군 장교 등이 주요 고객으로 방문해 주변 숙박업소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개항장의 숙박업을 주도하던 대불호텔은 경인 철도 개통으로 쇠퇴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경인 철도가 개통되고 노선이 경성까지 연장되면서 우마차를 타고 12시간이나 소요되던 거리가 1시간 40분 내외로 단축됐기 때문이다. 인천항으로 들어온 외국 여행자들은 기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이동하면 되니까 인천에서 숙박할 이유가 없었다.
대불호텔이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은 후 1918년께 뢰씨 일가를 비롯한 중국인들이 호텔을 인수했다. 일본인과 중국 상인들을 대상으로 '중화루'라는 북경요리 전문점을 창업한 것이다. 당시 인천에는 이미 몇 개의 중국 요릿집이 성업 중이었지만 중국풍 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한 웅장한 3층 벽돌 건물의 중화루는 개점과 동시에 인천은 물론 경성에까지 크게 알려졌다.
대불호텔은 1960년대 이후 청관거리가 쇠퇴하면서 중화루도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월셋집으로 이용되다가 결국 1978년 철거됐다.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라면, 반도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용(민간) 호텔이다. 서울 을지로1가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은 일본인 노구찌가 1937년 개관했다. 지하 1층, 지상 8층 건물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이다. 이 시기 호텔 사업은 당연한 일이지만 일본인들이 독점했다.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인천 개항 초기부터 해운과 물류 수송을 담당하던 일본의 상선회사 사옥이다. 1883년 미쯔비시우편회사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로 시작해 1885년 공동운송회사와 합병된 후 1886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됐다. 1888년 건립된 이 건물은 초기에는 붉은 벽돌 건물의 사옥과 사택, 창고 등이 같이 세워졌다. 건물의 건립 연도는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목에 기재돼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나라 해운 및 유통 산업의 역사를 보여 준다. 일본과 러시아의 제물포해전이 있었던 1904년 당시 일본병참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광복 후에는 항만 관련 회사의 업무용 건물로 사용됐다. 현재는 인천 아트플랫폼 공간의 일부로 활용 중이다. 日本郵船株式會社 仁川支店. 인천 중구 제물량로218번길 3. 국가등록문화문재 제248호.
국내 최초의 철도와 기관차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 3월 22일 인천에서 착공해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인천역 33.8km 구간에 개통된 경인 철도다. 걸어서 12시간 걸리던 서울과 인천 간의 거리를 1시간 30분으로 줄여 서울과 인천이 일일생활권으로 변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관차는 모갈 1호다. 모갈 1호는 경인 철도 개통 때 사용된 첫 열차를 견인한 증기기관차로 미국 브룩스 회사에서 총 4대가 제작된 뒤 반제품으로 운송해 1899년 인천에서 조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