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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7일 토요일(금요무박) 낙동정맥 3회 (답운치~한티재)
신사 산악회
낙동정맥 3 회차: 답운치 ~6.8 (1시간 52분)~ 통고산 ~6.6(2시간 6분)~애미랑재 ~2.8 (1시간 26분)~칠보산~1.2(31분)~ 새신고개 ~3.4(1시간 10분)~ 깃재 ~10(3시간 26분) ~ 길등재 ~2.6(1시간)~한티재
산행거리 : 약 33.4 km 산행시간 : 약 11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1870324
거리 31.7 km
소요 시간 10h 34m 44s
이동 시간 10h 16m 39s
휴식 시간 18m 5s
평균 속도 3.1 km/h
최고점 1,077 m
총 획득고도 1,066 m
난이도 매우 힘듦
낙동정맥 (洛東正脈) 03 – 통고산, 칠보산
옛날 옛날 옛적에
양산박
옛날 실직국 왕이
동예의 군사에 쫒겨
달아나면서 통곡했다고 통고산
그 왕의 이름이 애밀왕
쫒겨서 넘던 고개가 애미랑재
옛날 우리땅에 살았던
조상의 흔적이 전설로나마
살아 숨쉬는 현장을 보았네.
날씨 : 흐리고 눈, 전형적인 겨울날씨, 눈은 많이 쌓이지 않음.
옷차림 : 세 겹 옷에 땀 배인다..
해돋이 : 에미랑재 도착하기 전 날이 밝았으나 구름에 가려 해돋이 광경은 없슴.
한주의 날씨: 제법 쌀쌀한 겨울날씨이나 건조하고 미세먼지가 많음.
답운치에서 통고산을 거쳐 애미랑재까지
애미랑재에서 칠보산을 넘고 새신고개를 거쳐 깃재와 길등재를 건너고 한티재에서 마무리한다.
지난 주 2차 정맥길에서는 부지런히 걸은 덕분에 마감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하산하였으나 여전히 선두조는 말할 것도 없고 후미보다도 한 시간이나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단체로 산행할 때는 어느 정도 시간을 맞춰서 가야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우선 체력을 보강해야 한다. 우선 엘리베이터 이용을 자제한다.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바이크를 탄다. 하체 강화 훈련이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서 각 구간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체크해본다. 새벽 4시에 들머리인 답운치에 도착해서 산행지도에 표시된 시간대로 계산해보니 날머리 한티재에는 저녁 8시나 되어야 하산한다. 총 16시간 걸리는 거리다.
산악회에서 그렇게 진행할 리가 없다. 다시 거꾸로 계산해본다. 오후 5시 하산시간을 상정하고 계산하니 길등재 15시 30분, 깃재 11시 30분 …. 아무래도 현실적인 답이 안나온다. 그냥 부딪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산악회의 산행 스타일은 빠름에 있다. 그리고 산행구간이 상당히 길다. 대부분 회원들은 백두대간을 함께 한 사람들인데 전체를 28구간으로 끊어서 매주 금요무박으로 7개월만에 마쳤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올해 5월 백두대간 남진을 시작하기 전 낙동정맥을 시작했다는 얘기다.
회원중에 기인(奇人) 한 명을 소개했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데 그는 슬리퍼를 신고 산행한다고 하여 쓰리빠라고 부르는데 힘들고 긴 구간만 함께 하는 사람이라 한다.
통고산(通古山 1067m)
예상보다 조금 이른 3시 30분쯤 들머리 답운재에 도착했다. 모두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어두운 산길로 접어든다.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바삐 움직이는 불빛만이 숲길을 따라 흐른다. 산길은 움푹 패어 있다. 그 패인 곳에 낙엽이 잔뜩 쌓여 걷기에 불편하다. 그래도 단련된 산꾼들은 개의치 않고 묵묵히 길을 따라 오른다.
길 가에 작은 무덤도 두 개 지난다. 어릴적에는 무덤을 지날 때 목덜미가 쭈삣쭈삣거리며 귀신이 뒤에서 쫒아오다는 공포심이 있었는데 자라면허 어느새 그런 것은 없어졌다. 지금은 고인이 잠든 무덤 곁에 누워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산불감시초소 - 평상시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산불 조심을 당부하며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놓고 가게 한다.
머리에 단 헤드랜턴 불빛에 작은 눈발이 비친다. 처음에는 입김에서 생기는 성애인가 싶었는데 가루가 조금씩 굵어진다. 원래 비예보가 있었으나 강원 영서지방에는 오후에 눈이 내릴거라고 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정말 귀하다.
산길은 별다른 이정표 없이 밋밋한 오름이 지속된다. 그러다가 짧은 내리막 이후에 다시 오르막 이렇게 끝없는 오르막이 이어진다. 중간에 작은 임도를 두 개 만난다. 사진 몇 장 찍는 동안 선두팀은 멀찍이 달아나고 뒤에서 오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나를 추월하여 앞장선다.
이제나 저제나 나올까 고대하던 통고산(通古山 1067m)은 정상 바로 아래 설치한 전자강우측정소를 지나자 마자 밝은 불빛으로 다가왔다. 앞서 간 산님들이 정상석을 부여잡고 인증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어둠 속에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재빨리 여러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이번 구간에서 정상석이 있는 곳은 이 통고산 뿐이다.
통고산
1998년 울산시에서 세운 정상석 후면에는 통고산 이름에 관한 유래를 적어 놓았다. 옛날 부족국가 시절 실직국(悉直國)의 왕이 다른 부족에게 쫒겨 이 산을 넘으면서 통곡하였다 하여 통곡산(痛哭山)으로 부르다가 지금은 통고산이라 부른다는 아주 간단한 전설 한 토막이다.
나도 차례를 기다려 재빨리 사진을 찍고 출발한 덕분에 중간그룹에 끼어 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희뜩희뜩하던 눈발이 조금씩 짙어진다. 정말 눈산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점점 커진다. 산길을 따라 아름드리 소나무가 즐비하다. 이 정도로 크려면 몇 년이나 살아야 할까. 멋진 소나무가 많다는 울진을 지나는 것이 실감난다. 그것도 울진군 금강송면이니 말이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에서 많이 나는 금강송은 껍질이 붉은 색을 띄어 적송(赤松)이라고 하며 봉화군 춘양역에서 열차에 실어 나르면서 춘양목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왕실에서 쓸 나무를 보호하여 남벌을 막았는데 이를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 부르고 그 산에서 나는 금강송을 황장목이라 불렀다.
금강송
애미랑재 ( 600 m)
산행을 진행할수록 스마트폰의 밧데리 잔량이 비례하여 줄어든다. 멋드러진 금강송을 지나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그저 눈에만 담아둔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현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하게 빛난다. 지난주 보름을 갓 지났던 둥근달이 일주일 지나면서 반쪽이 되었다. 이제 설날이 1주일 남았으니 저 달도 금방 기울것이다.
애미랑재로 가는 길은 길고도 멀다. 앞서 간 사람들의 불빛은 보이지 않고 나 홀로 중간에 끼어있는 느낌이다. 벌써 몸이 지쳐간다. 눈 앞에 높다란 봉우리가 길을 막아선다. 다행히 산길은 봉우리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옆으로 살짝 빗겨서 지나간다. 지쳐있을 때 이처럼 봉우리를 옆으로 지나치는 것이 여간 고마운게 아니다.
통고산에서 봉우리 두 개를 넘어 가파른 내리막에서 안부에 이르니 산죽밭이 나타난다.
산행시 길이 애매할 때마다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산꾼들의 시그널
보름과 그믐사이 홀쪽해진 날이 구름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통고산을 지난 뒤 산길을 잠시 머뭇거리다 급격히 떨어진다. 왼쪽으로 조금 돌면서 지나온 산들이 어스름빛에 푸르게 빛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급한 내리막을 달리고 눈 아래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애미랑재다. 이제 날이 훤하게 밝았다. 길 건너편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들머리를 찾아 산길로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 이름이 특이하다. 주로 한자(漢字)로 쓰는 고개 이름이 많은데 이 고개 이름은 순수 우리말이다. 산의 들머리를 찾기가 애매해서 생겨난 것인가 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이 고개는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영양군 수비면 그리고 봉화군 소천면이 맞닿아 있어 그 경계가 애매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농담처럼 얘기하기도 한다.
그럴듯한 해돋이 연출도 없이 살며시 어둠이 가시고 여명이 밝아온다.
애미랑재 - 실직국 안일왕(애밀왕)이 적에게 쫒겨 넘던 고개라고 한다.
눈 내리는 애미랑재
917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애미랑재 이름의 유래는 멀리 원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해 삼척지역을 다스리던 실직국 안일왕이 그 영역을 넓혀 지금의 포항지역에 차지하고 있던 파사국까지 진출했다가 신라의 개입으로 인해 힘에 밀려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안일왕이 쫒겨 달아나던 길이 이 낙동정맥이었던가? 달리 애미왕이라 부르던 안일왕이 쫒겨 넘던 고개라 하여 애미랑재라 불렀고 싸움에 패해 억울한 나머지 산 정상에 올라 통곡했다 하여 통곡산(통고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2천년동안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청양고추의 본 고장 영양 - 원래 청송 영양에서 재배하기에 적당한 품종으로 개량한 것인데 지금은 충남 청양에서 그 이름을 가져가버렸다.
애미랑재에서 칠보산으로 오르는 산행 들머리
애미랑재는 산 허리를 뚝 잘라 도로를 내는 바람에 정맥꾼들은 절개지 끝으로 내려서기 위해 가파른 절벽을 내려서야 한다. 길 오른쪽에는 작은 개울 얼음짱 밑으로 제법 많은 물이 흘러내린다. 이제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풍성하게 내리는 눈이 보기 좋다.
칠보산(七寶山 974.2 m)
애미랑재에서 칠보산으로 향하는 들머리는 고개 절개지 양쪽 끄트머리 둘 다이다. 나는 지도에 나와 있는 산길표시대로 영양군 선전물이 있는 곳 길 건너편으로 들머리를 잡았다. 거의 60도 가까이 될 것 같은 오르막이 이어진다. 짧은 거리지만 두어 번 숨을 가다듬으면서 오른다. 날이 완전히 밝아 길은 위험하지 않다. 능선길에 올라 다시 오르막질을 시작한다. 오른쪽 아래 어디선가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 산으로 오르면서 내려다보니 농가인지 꽤 큰 농지가 보인다.
산길에 눈이 제법 쌓였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길이 더욱 뚜렷하다. 길은 왼쪽으로 큰 반원을 그리면서 돈다. 멀리 내가 가야할 칠보산이 날카로운 산정을 머리에 이고 우뚝 솟아 있다. 해발고도 600 미터인 애미랑재에서 약 974 미터에 달하는 칠보산까지 고도를 높이려면 힘 꽤나 써야 한다.
눈발로 인해 칠보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산 중턱에 낙엽송 숲을 왼쪽에 두고 지난다.
오랜만에 눈을 밟으며 산을 걷는다.
눈이 내리는데다 미세먼지인지 안개인지 더욱 시야를 흐리게 해 건너편 통고산쪽 산줄기가 보일 듯 말 듯 침침하다. 앞 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혼자서 채촉한다. 늦으면 안되기에 물 한 모금 마실 새도 없이 걷는다. 처음 능선길은 밋밋하더니 점점 가파라지고 칠보산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급한 경사길을 바위와 나무를 잡으면서 오른다. 그리고 8시 50분 마침내 칠보산 정상에 닿았다. 역시 준.희 님이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은 정상 표말이 반갑게 맞이한다.
7가지 보물을 감춰두고 있는 칠보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낙엽이 쌓인 가파른 길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칠보산이 전국에 여러 개 있다. 충북 괴산에 있는 칠보산의 이름은 불교에서 무량수경이나 법화경에 나오는 7가지 보물(금.은.파리.마노.기거.유리.산호)을 의미한다고 한다. 산에 있는 갖가지 아름다운 형상을 한 바위에서 붙여진 이름일 듯하다. 경북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도 칠보산이 있는데 원래 이 산에는 8가지 보물( 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수닭, 범절, 장사, 금, 금닭)이 숨겨져 있었는데 매가 그중 하나를 훔쳐가는 바람에 7가지만 남아 칠보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낙동정맥에 있는 이 칠보산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모르겠다.
새신고개 ( 670 m)
칠보산에서 내려가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갓 내린 눈이 녹아 흙이 미끄럽다. 힘들게 올라갔던 칠보산에서 다시 그 만큼 가파르게 내려선다. 뒤쪽에서 멀리 두런거리던 말소리가 들리더니 여산우님 한 분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기에 길을 비켜드리니 바람처럼 휙 지나간다. 아무리 내리막길이지만 저러다가 무릎이라도 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어느새 내 발걸음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를 때는 힘이 부쳐서 늦어지지만 내리막이나 평지에서 속도를 좀 내야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는 강박감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내 발은 땅에 붙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뒤이어 그 여산우님과 함께 하는 산님이 또 빠른 걸음으로 내려온다.
이번 구간에서는 아름다운 금강송을 원없이 볼 수 있다.
이 고개 아래 새신마을에서 이름이 유래된 새신고개
눈이 살짝 쌓인 산에 산꾼들이 지나간 길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그렇게 빨리 걸으면서 눈가에 스쳐 지나가는 풍광을 눈에 담아보려 애쓴다. 카메라 밧데리가 점점 닳아 이제는 사진찍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
9시 20분 새신고개를 지난다. 이 고개 아래 영양군 신암면 새신마을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깃재 (755 m)
내 뒤에 있던 몇 안되는 산님들이 어느새 바짝 뒤따라왔다. 지난 일주일간 부지런히 힘을 길렀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내 등력의 한계가 엿보인다. 뒤쳐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짜내본다. 그래도 간극은 더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좁혀져간다.
등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길을 비켜드리니 세 명이 지나간다. 한 명이 또 멀리 있다가 금방 내 뒤에 선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이제 한 무리가 되어 거친 숨을 헐덕거리면서 걸어간다. 그러다 앞서가던 두 명이 힘에 부쳐 잠시 길 옆으로 비껴서자 내 뒤에 있던 산님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앞장서더니 고개마루를 훌쩍 넘어서서 시야에서 사라진다.
소나무는 어떻게 자라든 그 모습이 멋지다.
백두대간 매봉산에서 부산 몰운대로 가는 낙동정맥이 칠보산(974m) 남쪽 2.2km 지점 무명봉 직전에서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 일월산 서북쪽 2.4km 지점에서 일월지맥 산줄기 하나를 떨구고 남서진 하여 동화재,덕산봉 (690m), 논골재, 정갈령, 벳티재, 금댕이재, 사부란재, 관재를 지나 변변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안동시 용상동 법흥교 앞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83km 되는 산줄기를 덕산지맥이라 칭한다
이 산줄기의 우측(북 북서)으로 흐르는 물은 안동호로 들어 낙동강 본류가 되고 좌측(남.남동)으로 흐른 물은
임하호로 흘러들어 변변천이 되어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제 뒤에 남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내가 따라갈만 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덕산지맥 분기점을 지난다. 산길 주변에 늘어선 소나무가 장관이다.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솔잎과 줄기에 하얀 눈이 붙어 있는 것이 아름답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여유는 없다. 핸드폰의 밧데리도 점점 미약해져 가는데다 시간에 쫒기니 그저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지나가는 풍광을 눈 속에 담아둬야 한다.
길 한복판에 붉은 소나무가 크게 자라나 있다. 다른 나무와 다르게 사람 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가지가 많이 쳐져 있는데 그 가지가 옆으로 벋지 않고 마치 헤어지기 싫어 꼭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 원줄기를 감싸면서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간 가지들은 다시 합쳐지기도 하고 또 다시 조금 갈리지기도 하는 모습이 참 기이하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리켜 10지춘양목(十枝春陽木)이라 부른다.
10지춘양목(十枝春陽木) 앞태를 보고
또 뒤돌아 뒷태를 본다.
오르막 산길에 늘어선 굵은 소나무가 긴 가지를 남쪽으로 벋으면서 의연하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사람 허리춤 정도 되는 높이에 거북등이 다 벗겨지고 속살이 패여 있는 모습이다. 그 주변에 있는 소나무들이 모두 그런 모습이다. 옛날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제 총독부는 전투기 연료를 만들기 위해 전국적으로 송진채집을 강제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태안에서 이런 소나무 상처를 보았을 때 그 소나무 상처가 하트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 치기어린 장난이라 여겼었다. 나중에 일제침탈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몹시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일제시대 전투기 연료용으로 쓰기위해 송진을 채취했던 아픈 상처들
전국 어디를 가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맨 뒤에서 따라오던 영우님이 어느새 바짝 따라오더니 작은 산 봉우리 위에서 잠시 물을 마시며 숨을 돌리더니 여유부릴 때가 아니라며 앞장서 걷더니 금방 거리를 넓힌다. 그리고 10시 30분 마침내 깃재에 도착했다.
산악회에서는 이 곳에서 중간탈출할 수 있도록 B 코스를 잡아 놓았으나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은 이 곳에서 약 3 km 쯤 떨어진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로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날머리인 한티재로 가면 된다.
이제 날머리 한티재까지 약 13 km 남았다.
마음은 바쁘지만 이정표 앞에서 잠깐 인증사진을 남긴다.
아직 10 % 정도 남아 있는 밧데리로 인증사진을 찍었다. 뒤따라온 산님들을 만나 넷이서 간단하게 과일을 나눠먹었다. 그 중 전에 낙동정맥을 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산님이 이제 앞으로 약 13 km 쯤 남았다 한다. 전체 여정이 약 33 km 이니 삼분지 이쯤 지나온 것이다. 그 분은 내려가서 라면먹을 여유가 있으니 걱정 안해도 된다지만 내 계산으로는 그리 한가한 것이 아니다.
길등재 (530 m)
한 발이라도 앞서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르막에는 다리에 더욱 힘을 실어본다. 산마루에 올라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뒤따라오는 일행속에 벌써 앞서간 줄 알았던 산님 한 분이 섞여 있어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중간에 한적한 곳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는 중이라 한다. 정말 여유있고 등력이 좋으신 분이다. 올 해 65세라는데 왠만한 장정보다 산을 잘 걷는다.
눈발이 잠시 그치니 제법 멀리 조망이 트인다.
이름없는 봉우리에 준.희 님이 이정표를 매달아 주면 그대로 이름이 된다. 884.7 봉이다.
이제 뒤에 두 명이 따라오고 나와 65세 되신 분 그리고 전에 낙동정맥을 탄 경험이 있다는 분 이렇게 셋이 앞장서는 모양세가 되었다. 힘은 들지만 따라갈 만하다. 산줄기는 잠시 바위가 섞여있는 칼등능선을 지나고 다시 펑퍼짐한 흙산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무덤들이 몇 개 보이는데 오랫동안 방치된 탓에 봉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만큼 나무가 우거져 있다.
산등성이 펑퍼짐해 군데군데 물이 고여있는 늪지대를 지난다. 길에 굴러다니는 돌이 마치 강가에 있는 것처럼 표면이 맨질맨질하게 닳아있다. 색깔도 자주색과 푸른색이 섞인 모습인데 어찌하여 이런 산중에 그런 돌들이 있는건지 의아스럽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무덤에는 나무가 자라난다. 잊혀진 고인의 몸은 이제 완전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능선길에 만난 늪지대
멀리 오른편에 작은 저수지가 보이고 그 아래에 논이 보인다. 저수지물이 얼어 있는지 그 위에 하얀 눈이 덮여 있다. 저기가 바로 우리가 내려서야할 날머리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정맥길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니 저런 마을은 아닐 것이라고 내 생각을 수정한다. 간간이 터지는 조망에 눈을 들어보면 그 마을 뒤로 높은 산줄기가 푸른 빛에 감돌아 있다.
정맥길은 그 산골마을을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돌면서 능선을 이어간다. 고도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느낌이다. 길이 꺽어지는 안부에서 잠시 쉬었다가 출발할 즈음 뒤에 쳐져있던 두 산님이 도착한다. 겨우 5분 정도 간격이 있나보다.
길등재
이 곳을 다녀간 산꾼들의 출석표
낙동정맥의 산줄기는 이렇게 뚝뚝 마디마디 끊어져 있다.
산길 오른쪽에서 포장도로가 올라온다. 그리고 그 도로는 끝에서 정맥산줄기를 뚝 끊어놓고 왼편으로 달려 내려간다. 정맥산줄기가 끊어진 곳이 길등재이다. 도로에 내려서기 전 나무에는 그 동안 다녀간 산악회에서 걸어놓은 시그널이 바람에 나부낀다. 이곳에도 준.희 님이 달아놓은 길등재 푯말이 돋보인다. 이 곳이 산악회에서 인정한 인증장소라면서 함께 걷던 산님은 아웃도어 업체에서 마케팅용으로 나눠준 배너를 들고 인증사진을 남긴다. 나도 한 장 찍어서 나중에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길등재의 유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것이 없다. 다만, 고개가 높아서 오를까 말까 갈등이 생겨 갈등재라 부르던 것이 길등재가 되었다는 우스갯소리만이 산꾼들사이에 회자된다.
날머리 한티재
길등재만 지나면 남은 구간이 아주 짧다. 약 3 km 정도만 가면 오늘 산행이 끝난다. 오후 2시니까 산행마감시간인 4시까지 도착하는 것은 문제없어 보인다. 65세 되셨다는 산님이 앞장서고 내가 중간에 서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이미 낙동정맥을 한 번 걸었다는 산님은 내 뒤에서 쫒아온다.
사실 산행을 시작할 때 3 km 는 그리 힘든 것이 아니지만 막바지에 놓인 3 km는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굉장히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짧은 오르막 이후에 평지성 산길이 잠시 어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 숨이 가빠진다. 주머니에 넣어둔 물병을 꺼내 남은 물을 마셔버렸다. 이제 날머리가 가까워오니 물을 다 소진해도 된다.
집에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나서 사과 몇 조각 먹은게 전부다. 배낭에 빵이 있지만 꺼내기도 번거롭고 편히 앉아서 먹을 틈도 없다. 뱃속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늘 먹을 것이 곁에 있으니 배가 주린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여유없이 걷다보니 꼬르륵 소리도 듣게 되었다. 어느 건강 전문가의 글에서 읽은적이 있는데 꼬르륵 거리는 소리는 창자가 비어서 나는 소리인데 하루에 한 번쯤 이렇게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속을 비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니 몸에 그리고 머리에 땀이 배인다. 제법 높직한 봉우리를 두 개쯤 넘었다. 이제 남은 구간은 길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잠시 꾀가 난다. 앞이 탁 트여 모처럼 먼 산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고 아직 남아 있는 햇볕이 좋은 양지에 앉아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배낭에서 사이다 캔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입 속에 탄산가스가 만들어 낸 작은 공기방울이 터지면서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느낌이 그대로 가슴까지 전달된다. 빵 두 조각을 꺼내 베어 문다. 꼭꼭 씹히는 곡물이 혀와 입안에 달라붙는 느낌이 좋다.
오래 앉아서 노닥거릴 여유는 없다. 빵 두 조각에 사이다 한 캔으로 늦은 아침 겸 점심까지 대신한다. 다시 홀로 걷는 산길이 호젓하다. 멀리서 쇠 두드리는 소음이 들린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도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사람사는 세상 돌아가는 소리다.
조금 걸어 내려가니 눈 앞이 밝아진다. 백두대간 건의령 부근처럼 상당히 넓은 지역에 있는 나무를 베어 내었다. 건의령은 산불로 인해 소실된 지역을 정리한 것인데 이 곳은 조림을 위해 일부러 벌목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 심은 소나무는 아직 무릎 높이로 자랐고 간혹 말라서 죽은 것도 보인다.
이 벌목지대와 기존 숲 사이로 낙동정맥길이 지난다. 나무가 베어진 벌목지대 뒷편으로 높은 산 줄기가 푸른 색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아마 저 산줄기가 우리가 다음 회차에 걷게 될 구간인지 모르겠다. 작은 봉우리를 두 개 넘어 다시 산길은 왼편으로 꺽여 숲속으로 들어간다. 여전히 쇠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그리고 나무 숲 사이로 빨간색 버스가 눈에 들어오고 산길은 88번 지방도로 절개지에서 끝난다. 호후 3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다.
길 건너 공터에 산악회 버스가 서 있고 일찍 하산한 산우님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준비해온 음식을 끓이고 있다. 생각보다 일직 하산한 나를 반기며 떡국과 삼겹살 등 음식을 권한다. 난 우선 핸드폰 밧데리 충전이 시급하다. 차에 올라가 충전을 하려고 하니 버스 시동이 걸려있지 않았다. 카페지기님에게 말씀드리니 시동을 걸지 않아도 봇데리에 연결해서 충전할 수 있다며 방법을 가르쳐준다.
날머리 한티재 - 큰 고개라는 뜻이겠다.
산행중 주린 배를 채운다.
그렇게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나보다 뒤에 있던 두 분 산우님들도 정해진 시간 안에 무사히 내려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 다른 두 명의 산우님들은 깃재에서 신암리로 하산하여 택시로 한티재까지 이동해왔다고 한다. 버스 안에서 1회차 산행에서 늦게 하산한 원죄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자격이 안되면 참여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등 비록 면전에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큰 소리로 하는 말이라 듣는 당사자로서 마음이 편치 않다. 첫 회에서 초반 여유를 부리는 바람에 늦게 하산한 것이 오랫동안 회원들 사이에 앙금처럼 남아있을 것 같다.
함께 한 산님들
오후 4시에 출발한 버스는 막힘없이 부지런히 달려 3시간 30분만인 7시 30분 신사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