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교수님께서 발문을 써주셨습니다.


<발문>
마침내 이른 문학의 길에서 나를 만나다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여기 한 여성이 있습니다. 참으로 궁핍한 집안이라 중학교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농아가 되었고 아버지는 술이 벗이라 농사도 말을 못하는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친구들이 다니는 중학교의 사환으로 들어가는 운명의 덫에 치이게 됩니다. 첫날부터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죽여 울던 소녀는 훗날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치고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합니다. 남편을 여의고 나서야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서 우러난 박수를 보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동창 카페를 만들어놓고 글을 올려보라고 채근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41년 만의 글쓰기. 처음에는 시를 썼는데 친구들의 칭송이 쏟아졌습니다. 선생님들이 문학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해준 것을 기억하는 최선자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부동산공인중개사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으니 학업도 창작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수필은 나 자신의 고백록이자 명상록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수필이 하나의 문학 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붓 가는 대로 쓴다느니,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바로 이 수필집을 권합니다. 짤막짤막한 수필 모음집이지만 기막힌 인생 스토리이며 입지전적인 한 인물의 내면일기 같은 것입니다.
최선자 씨는 수필을 쓰면서 성장기 때의 에피소드들을 하나하나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기 이야기였지만 그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그 세대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나와 학문을 닦게 되었고, 많은 사연과 넓은 세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글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한 구조를 언어로 정리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천신인문학상,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부문 수상, 동서문학상 금상 등을 받으면서 수필문학의 매력에 흠씬 빠지게 됩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소설반 등록을 했습니다. 수필에서 소설로 가는 것이 자연스런 문학적 행보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문학의 서사성에 대해 꿈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소설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간혹 이야기하는 대목도 보입니다. 그런데 시 쓰기 실기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제 수업을 들은 이후 시 습작에도 혼신의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소설은 노동의 산물이고 시는 감성의 산물이라고. 수필은 바로 그 중간지점에 있습니다. 최선자 씨는 시를 썼다가 수필을 썼고 이제 막 소설 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건대 소설보다는 시가 더 맞을 것 같다고 봅니다.
이 수필집에 실려 있는 작품은 크게 다섯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정확한 문장력입니다. 아무리 소재와 주제가 좋을지라도 문장이 엉성하면 그 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데 비문 하나 발견할 수 없는 정확한 문장력으로 편편의 글을 썼습니다.
둘째,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연민의 정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아버지와 남편에 대해 원망을 토로하면서 신세한탄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수필집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사상은 인간애, 즉 휴머니즘입니다.
셋째, 정신의 성장 기록입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 승리의 기록입니다. 50대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공부를 시작했고, 펜을 잡았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학도와 늦깎이 문인은 이 수필집을 읽고 용기를 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시작이 결코 늦은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 자신을 맨얼굴로 만난다는 것이고, 내 인생을 내가 산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최선자 씨는 바로 그것을 실행한 것입니다.
넷째, 유머 센스입니다. 대체로 내용이 조금 슬플지라도 결코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넘깁니다.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인생을 헤쳐 나왔기에 터득한 지혜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객관화할 줄 아는 넉넉함이 이 수필집의 미덕입니다.
다섯째, 가족에 대한 사랑이 큰 주제입니다. 세 자녀를 두었고 세 명의 외손녀를 두었습니다. 세 자녀는 엄마가 방황할 때도, 작은 성취를 보여주었을 때도, 친구 노릇을 해주었습니다. 외손녀가 일일찻집을 열고서 차를 파는 내용들 담은 「선물」을 읽고 미소 짓지 않을 사람이 누구일까요. 「제삿날」을 보면 온 가족이 산소 앞에 가서 노래자랑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막내며느리가 노래 부르는 장면에 이르러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누구일까요. 가족 간의 사랑만큼 더 보배로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독자는 이 수필집을 읽으며 십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연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프랑스의 시인 랭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기구한 사연을 구구절절 밤을 새우며 말해도 그것은 허공에 흩어질 따름입니다. 글로 써야지 남게 됩니다. 타인의 뇌리에 남고 후세에 길이 전해집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41년 만에 처음 시를 써본 최선자 씨의 첫 수필집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책이 길고긴 문학적 여정의 작은 징검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선생님, 이 카페에 처음 들어온 날이 생각납니다.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 덕분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