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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강녕전(康寧殿)
정의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국왕의 처소.
개설
강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가장 높은 위계를 갖는 전각으로 국왕의 일상적인 처소였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축되었고 1553년(명종 8) 화재로 잠시 소실된 것[『명종실록』 8년 9월 14일]을 제외하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까지 왕의 침전으로 있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복구되지 못하다가 고종대의 중건 공사로 복구되는데 이때 강녕전도 함께 복구되었다. 이후로도 화재와 복구가 반복되다가 1920년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을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교태전(交泰殿) 등과 함께 헐려 옮겨졌다. 지금의 건물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복구된 것이며, 창덕궁으로 옮겨진 강녕전의 흔적은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일부 찾을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내 사정전 북쪽, 교태전 남쪽에 위치하는 왕의 침전이다. 강녕전은 평상시에는 침소로 사용되었지만 종종 주요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항목 중에서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 ‘중궁정지회명부의(中宮正至會命婦儀)’, ‘중궁정지왕세자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朝賀儀)’, ‘(중궁정지왕세자빈조하의(中宮正至王世子嬪朝賀儀)’, ‘중궁정지백관조하의(中宮正至百官朝賀儀)’를 비롯하여 ‘납비의(納妃儀)’의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의절과 ‘책왕세자의(冊王世子儀)’의 ‘조왕비(朝王妃)’ 등은 강녕전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왕비가 백관과 내외명부, 왕세자 내외에게 조회를 받는 일이나 혼례의 일부 절차도 강녕전과 같은 침전에서 행해졌다.
후대에는 왕실의 어른을 위한 잔치가 종종 강녕전에서 행해졌다. 이렇게 행사가 있을 때에는 대청 중앙에 좌석을 설치하고 전면 월대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좌우의 방은 주요 인물의 행사 준비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강녕전이 처음 건설된 것은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이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태조대의 경복궁 창건 기록에 ‘연침(燕寢)’이라 한 것이 바로 강녕전이다. 강녕전이라는 이름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으며,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 중 세 번째인 ‘강녕(康寧)’을 따른 것이다. 최초의 강녕전은 지금의 강녕전과는 차이가 있는데 정면에서 7칸이었으며 가운데 3칸은 대청이었고 대청 좌우로 2칸씩의 방을 둔 형태였다. 1553년(명종 8)에 강녕전에 화재가 있어 소실되었다가 이내 복구되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왕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강녕전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대의 중건 공사를 통해 복구되었다. 하지만 1870년대의 연이은 화재로 재차 소실되었다가[『고종실록』13년 11월 4일], 1888년(고종 25)에 이르러 완전히 복구되었다[『고종실록』 25년 4월 12일]. 1917년에는 창덕궁 내전이 화재로 소실되는데, 이것을 복구하기 위해 경복궁 내전의 다른 건물들을 헐어 옮기면서 강녕전의 자재도 창덕궁 희정당 공사에 사용되었다. 현재 창덕궁 희정당 양 합각부에는 ‘강(康)’, ‘녕(寧)’이라는 글자가 있다. 지금 경복궁 내에 있는 강녕전은 1995년부터 시작한 경복궁 복원 사업에 의해 새로 조성된 것이다.
형태
「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 「북궐도형(北闕圖形)」,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등의 도면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종대 강녕전의 형태는 지금의 모습과 거의 같다. 현재의 강녕전은 정면 9칸에 동서 양면에 툇간을 놓아 11칸의 형태를 갖추었고, 측면도 몸채가 3칸에 앞뒤로 툇간을 놓아 5칸으로 보인다. 정면에서 보아 중앙부의 3칸은 모두 마루를 놓았고 툇간과 대청 사이에 분합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완전히 개방하거나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대청의 좌우로는 각각 9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의 주변으로는 툇마루를 돌렸다. 대청의 앞으로는 대청과 같은 폭의 월대를 두었다. 이 월대는 창덕궁 대조전(大造殿) 앞의 월대 등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평상시보다는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강녕전은 단층에 무량각 지붕으로, 강녕전의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궁궐지(宮闕志)』와 「북궐도형」에서는 이를 ‘무량각(無樑閣)’이라 명시하였다. 조선의 건축물 중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은 흔치 않으며 유독 왕실의 가장 중요한 침전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왕의 위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궁궐 침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만 조선전기에도 무량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양 측면 툇마루 아래에는 함실아궁이를 두었다. 함실아궁이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사용하던 난방 방식으로, 직접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지 않고 숯을 화기(火器)에 넣은 다음 이를 아궁에 속에 넣는 것이다. 강녕전의 굴뚝은 교태전의 문인 양의문 옆에 벽처럼 만들었으며 벽돌을 쌓아올려 문양을 만들었다. 툇마루 끝에는 창문이 아닌 문이 달렸는데, 이는 좌우의 경성전(慶成殿), 연생전(延生殿), 연길당(延吉堂), 응지당(膺祉堂)과 복도로 연결되었던 흔적이다. 고종대 강녕전에서 거행하였던 진찬 그림이 남겨진 의궤를 보면, 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임진왜란 이전 강녕전에서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은 명종조의 화재였다. 강녕전의 난방을 위해서는 화기(火器)를 넣을 때 방전(方塼)을 깔아야 했는데, 이를 잘 처리하지 못해 발생한 화재였다[『명종실록』18년 2월 5일].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궁궐지(宮闕志)』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우동선 외,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효형출판, 2009.
이강근, 『경복궁』, 대원사, 2003.
홍순민,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1999.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강무당(講武堂)
정의
국왕이 강무(講武)하는 장소에 지었던 건물.
개설
국왕이 군사들의 무기 훈련과 기마 연습을 사열하거나, 도성 외에서 사냥을 하며 무예를 익히는 것 등에 참여하는 것이 강무이며, 강무에서 지휘 및 진법의 강습이 이루어지는 건물이 강무당이다. 조선초기에는 개성부 문묘의 영역에 강무당이 들어 있어 군사 훈련과 강습은 물론, 장수들이 사명을 받아 나아갈 때 대장기인 둑(纛)에 제사하는 장소로도 쓰였다[『세종실록』 4년 11월 18일]. 그러나 이후 폐지되었다. 태종 이후에는 사냥을 하며 군사 훈련하는 강무를 전국 각지에서 행하였고 이 장소를 강무장이라고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강무는 주로 조선전기에 많이 시행되었으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선후기에는 정조대 강무당이 나타났다[『정조실록』 14년 5월 7일]. 정조 때, 수원화성(華城)을 건설하면서 행궁의 서북쪽에 무고(武庫)·수성고(修城庫) 등과 함께 강무당을 배치해 두었고 그 앞에는 훈련 마당을 두었다. 정조는 군사들의 대오를 점검하거나 재주를 시험할 때 이 강무당에 앉아서 사열하고 훈련하였다. 당시 강무당은 별무사(別武士)와 행궁의 대문을 지키는 군사들의 임시 숙소로 쓰이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개경은 이전 왕조인 고려의 도읍이자 조선왕조 초창의 거점으로, 새로운 도읍을 구성하는 데 전거가 되었다. 조선초에는 개성부 문묘의 영역에 군사 훈련과 관련한 태청관(太淸觀)과 그 남쪽에 강무당을 두었으나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국조보감(國朝寶鑑)』 1458년(세조 4) 1월의 기사에 따르면, 태종이 머물던 풍양궁(豐壤宮)에 강무할 관사를 지으라고 명하는 기록이 있다. 이후 강무당은 정조대 등장한다. 정조 때 화성 행궁과 함께 강무당이 건설되기도 하였다. 이때의 강무당은 행궁의 낙남헌(落南軒)에서 210여 보쯤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형태
정조대 강무당을 본다면, 화성 행궁의 전각인 낙남헌 앞마당과 강무당 앞 군사 훈련장은 서로 통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강무당 상량문에 “단이 있고 광장이 있는 높은 집을 차지하여 총을 쏘고 대포를 놓고 말 타고 달리는 그 용모가 흐뭇하다.” 하는 내용에서 군사 훈련하는 장소로 위용 있는 집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이때의 강무당은 서쪽 산기슭에 자리해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대청이 있는 14칸 집을 지었으나, 1794년(정조 18)에는 26칸으로 증축하였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뒤편에, 즉 건물 북쪽으로 7칸, 그로부터 서쪽으로 꺾어 5칸 다시 남쪽으로 꺾어 11칸, 다시 동쪽으로 꺾어 3칸의 행각을 증축하였으며 온돌·헛간·부엌·문간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물의 좌측인 북쪽에는 ‘무고(武庫)’, ‘수성고(修城庫)’ 등과 행각, 마당 등이 연이어진 군영 건물의 한 영역을 이루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현륭원(顯隆園) 국내(局內) 동쪽 언덕에도 강무당이 있었으나 정조 사후 그 자리에 정조의 능침을 조성하였다[『정조실록』 24년 7월 15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한 후 건릉(健陵)의 지대가 낮고 강무당이 있었던 곳이므로 길지가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다시 현륭원의 서쪽 언덕, 현재의 건릉 자리로 옮겨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한 산릉이 조성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계산기정(薊山紀程)』
『국조보감(國朝寶鑑)』
『목은시고(牧隱詩藁)』
『삼봉집(三峯集)』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개양문(開陽門)
정의
경희궁의 남측 궁장에 설치된 궁문.
개설
경덕궁은 1617년(광해군 9)에 인왕산 아래에 새롭게 지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다. 1617년에 궁궐을 조성할 때는 경덕궁(慶德宮)이라 궁호를 정했으나, 1760년(영조 36)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희궁을 처음 조성할 때 궁역을 둘러 궁장을 쌓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경희궁의 정문은 동남쪽 모서리에 동향으로 두었으며 흥화문(興化門)이라고 하였다. 궁장의 동쪽에는 흥화문 외에도 흥원문(興元門)을 두었고, 서쪽에는 숭의문(崇義門)을 두었다. 또한 남쪽에는 개양문(開陽門)을 내고, 북쪽에는 무덕문(武德門)을 설치하였다.
위치 및 용도
개양문은 경희궁 궁장 남쪽에 설치된 궁문(宮門)이다. 종로대로에서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으로 나가는 도로에 면하였다. 경희궁의 정문은 흥화문이지만, 대신들이 궁궐에 들어서기 위하여 주로 드나드는 문은 개양문이었다. 개양문 안쪽에서부터 흥화문과 숭정전(崇政殿)까지 이르는 대로 남쪽으로 남소(南所), 태복시(太僕寺) 등의 궐내 각사가 위치하였다. 영조는 신하들이 궁궐에 입궐하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개양문을 잠시 닫아 두기도 하였다[『영조실록』 48년 2월 7일]. 왕에게 잘못을 한 신하가 죄를 자백하고 처벌받기를 기다리기 위하여 개양문 밖에서 석고대죄(席藁待罪)하였던 사례도 있다[『영조실록』 48년 7월 23일][『영조실록』 48년 10월 8일].
변천 및 현황
19세기 말에 개양문은 경희궁의 궁장과 함께 사라졌다. 1868년(고종 5)에 경희궁은 공허지가 되어 용동궁(龍洞宮)과 수진궁(壽進宮),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과 함께 경작지로 분배되었다. 이때 경희궁의 건물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1892년(고종 29)경에 그려진 「슈션젼도[首善全圖]」에는 경희궁의 궁장과 궁문이 그대로 그려졌으나, 1911년에 제작된 「경성부시가도(京城府市街圖)」에는 경희궁의 경계가 반듯하게 정리되었다. 아마도 이즈음에 궁장이 허물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988년에 서울특별시 경희궁 복원 사업으로 숭정전과 자정전(資政殿)·태녕전(泰寧殿)이 복원되었으며,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흥화문을 다시 옮겨 와 정문의 위치를 나타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개유와(皆有窩)
정의
1777년(정조 1)에 창덕궁 후원(後苑)에 고금의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한 서고.
개설
개유와(皆有窩)는 열고관(閱古觀)과 더불어 창덕궁 후원에 있었던 규장각(奎章閣)에 부속된 서고(書庫)이다. 건립 당시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하였지만 규장각의 장서가 늘어나면서 조선본(朝鮮本) 도서와 문적(文籍)은 규장각 서북쪽에 있는 서고(西庫)로 옮기고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중국본(中國本)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1907년(융희 1)에 규장각의 기능이 바뀌고 서고가 종친부(宗親府)로 이관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제 기능을 잃은 개유와와 열고관은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다.
위치 및 용도
개유와와 열고관은 1779년(정조 3)과 1784년(정조 8)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와 각종 궁궐 그림에 따르면 주합루의 남쪽 부용지(芙蓉池) 건너편 언덕에 있었다. 도서와 문적을 보관하던 서고로 건립 초기에는 모든 도서를 보관했지만 1781년(정조 5)을 전후해서는 중국본의 도서와 문적만을 보관했다.
변천 및 현황
개유와와 열고관은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1777년(정조 1) 8월에 건립되었다. 영조의 어제봉안각(御製奉安閣)이었던 규장각과 주변 권역 공사가 1776년(정조 즉위) 3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지만,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은 건립되지 않았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1일][『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1779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는 개유와가 1777년 8월에 열고관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정조는 1776년부터 시작한 영조 어제를 편찬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자신의 어제를 편찬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원래 어제는 왕이 사망한 후 남겨진 글을 수습하여 편집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정조는 영조대의 행적을 계승하여 당대에 자신의 어제집을 편찬하였다. 1777년 겨울부터 정리하여 1781년(정조 5)에 『홍재전편(弘齋全編)』을 완성하고 『영조실록』 편찬도 마무리하였다. 동시에 규장각의 어제를 분류하고 수집한 도서도 분류하여 『규장총목(奎章總目)』을 완성하였다. 이때 개유와와 열고관에 중국 도서와 문적을 분류하여 보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고로서 개유와와 열고관의 기능은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던 시점까지 유지되었다. 1907년 11월에 규장각은 관제 개정으로 역대 왕의 유물과 저술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弘文館)의 업무도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홍문관, 시강원, 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되었던 전적 도합 10여만 권을 통합·관리하고, 이를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하였다.
1910년(융희 4)에 한일합병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다. 이듬해 11월에 조선총독부취조국(取調局)에서 제실도서를 인수하여, 역대 왕의 어제·어필·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였고 도서의 명칭을 규장각도서로 바꾸었다.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1930년에 3차에 걸쳐 실행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도서가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개유와와 열고관은 훼철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형태
개유와와 열고관은 서로 이어져 ㄱ자형을 이룬다. 개유와는 온돌 2칸, 마루 1칸으로 이루어진 1층 건물이고, 열고관은 2층 건물로 상층은 루(樓), 하층은 각(閣)으로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궁궐지(宮闕志)』
『규장각지(奎章閣志)』
『내각일력(內閣日曆)』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서향각봉안총목(書香閣奉安總目)』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홍재전서(弘齋全書)』
김문식 외, 『규장각-그 역사와 문화의 재발견』,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9.
거려청(居廬廳)
정의
조선시대 국상 기간 중 후계 왕이 국장 이전까지 장례를 거행하기 위해 빈전 주변에 마련한 1칸의 여차(廬次).
개설
거려청이란 ‘거려(居廬)하는 곳’이란 의미이고, ‘거려’는 작은 초막을 뜻하는 ‘여차에 거처하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후계 왕은 선왕의 장례 이전에 관을 모시는 전각인 빈전(殯殿) 주변에 여차를 마련하고 머물렀는데, 그 장소가 바로 거려청이다. 따라서 거려청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장례를 위해 빈전 주변에 임시로 마련한 건물이 바로 여차이자 거려청이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국왕이 승하하면 국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의 제사와 호위를 담당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과 왕의 장례에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국장도감(國葬都監) 그리고 왕릉 축조를 담당하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으며, 각 책임자로는 조정 대신이 임명되었다. 국왕의 승하 후 5일째에 입관하였고, 입관 후 후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는데,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이라고 하였다.
빈이란 건물 안에 시신을 가매장한 장소를 뜻하며, 손님이란 의미의 빈(賓)과도 통하였다. 자식의 입장에서 돌아가신 부로를 빈에 모실 때는 손님처럼 모신다는 뜻으로서, 죽은 자와 생전에 맺었던 혈연의 정을 점차 정리하라는 의미였다. 이 기간 동안 후계 왕은 빈전 주변의 여차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빈전을 찾아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하였다.
『세종실록』「오례」의 흉례(凶禮)에서는 국왕의 빈전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 설치하고, 여차는 빈전의 중문(中門) 밖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세종실록』 오례 흉례 의식 여차], 이 여차가 바로 거려청이었다. 이는 조선전기에 경복궁이 정궁(正宮)이었기에 나타난 규정이었고, 실제는 근정전 이외 다른 건물에도 빈전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건물인가에 빈전이 설치되면 주변의 적당한 공간에 여차가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후계 왕은 국장 전까지 머물며 장례를 거행하였다. 국장 이후에는 여차가 철거되고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이 의례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정궁으로서 근정전에 빈전이 설치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이후에는 더 이상 근정전에 빈전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 대신 창덕궁이나 창경궁에 빈전이 설치되고 그 빈전 주변에 거려청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후기에 빈전 및 거려청이 설치된 대표적인 건물은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이었다. 문정전은 숙종의 빈전, 경종의 빈전, 인조의 빈전 등으로 이용되었는데, 문정전의 행랑에 거려청이 설치되었다[『영조실록』 34년 4월 18일].
형태
태종이 승하한 후 빈전은 창덕궁 동쪽에 자리한 수강궁(壽康宮)에 마련되었는데, 당시 세종은 광연루(廣延樓) 동쪽에 한 칸의 초막으로 된 여차를 설치하였다[『세종실록』 4년 5월 14일]. 조선시대에 비록 빈전의 장소와 여차의 장소는 무수하게 바뀌었지만 1칸의 초막으로 된 여차의 형태는 동일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재위 기간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창경궁 문정전을 빈전으로 이용하고 문정전의 행랑에 거려청을 마련했던 영조는 「효소전단양제문(孝昭殿端陽祭文)」을 지어 문정전 재사(齋舍)에 게시하게 하였는데[『영조실록』 34년 4월 18일], 효소전은 숙종 왕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혼전 이름으로서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건명문(建明門)
정의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으로 들어서는 정문.
개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에 들어서면 금천교가 놓여 있고 그 안에 건명문(建明門)이 있다. 건명문은 숭정전(崇政殿)의 전문(殿門)인 숭정문(崇政門) 밖에 위치한 정문이다.
경복궁의 경우는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들어서면 흥례문(興禮門)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서 근정문(勤政門)과 근정전(勤政殿)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창덕궁의 경우는 돈화문(敦化門)을 들어서서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進善門)을 지나야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경희궁의 건명문 역시 경복궁의 흥례문, 창덕궁의 진선문과 같이 궁궐의 정전 영역에 다가가기 전에 있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건명문은 경희궁 숭정전의 동남쪽에 있다. 정문인 흥화문 안쪽으로 금천교를 건너면 건명문이 있다. 경희궁의 정전 영역은 경희궁의 서쪽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건명문에서 숭정문까지의 거리는 다른 궁궐에 비해 꽤 먼 편이다. 건명문 밖 동북쪽에는 상의원(尙衣院)과 병조(兵曹)가 위치하였다.
영조는 건명문을 자주 활용하였다. 건명문 밖 마당에서 삭시사(朔試射)를 행하기도 하고, 죄인들을 국문하기도 하였다. 건명문에서 조참과 상참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본래 조참은 숭정전의 전문인 숭정문에서 행하는 것이지만, 영조는 건명문에서 조참을 행하였다[『영조실록』 38년 7월 21일]. 건명문 밖 마당에서 백성들을 만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쌀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한양의 5부 백성들을 불러 마음을 묻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8년 3월 9일][『영조실록』 50년 1월 6일].
변천 및 현황
1617년(광해군 9)에 경희궁이 계획되어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다. 이때 건명문도 금천교 안쪽에 세워졌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어 경희궁을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숙종과 영조 연간에는 창덕궁을 동궐로, 경희궁을 서궐로 하여 자주 사용하였다. 숙종과 영조의 국장이 경희궁에서 이루어지면서 빈전인 자정전(資政殿)에서 산릉으로 발인할 때에는 숭정전과 숭정문을 지나 건명문을 통해 흥화문 밖으로 국장 행렬이 나섰다.
고종대에 이르러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이 완공되자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지 못했으며, 경복궁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조달하기 위해 경희궁의 건물이 철거되기도 했다. 1868년에 경희궁의 공허지를 경작지로 분배할 즈음에 건명문은 이미 철거되었다.
형태
건명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건양문(建陽門)
정의
태종대에 건립된 창덕궁의 내동장문(內東墻門).
개설
건양문(建陽門)은 창덕궁을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궁의 동쪽 담장에 있는 문이었으나, 성종대에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두 궁의 경계 영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공식적으로 왕래하기 위해서는 꼭 이 문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건양문 옆에는 숙위소(宿衛所)를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었던 문으로 창경궁으로 왕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건양문은 태종대에 창덕궁 조성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문의 액호(額號)가 없었다. 건양(建陽)이라는 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에 지어졌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건양문은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이 조성되면서 두 궁궐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성종실록 』 14년 3월 3일]. 창덕궁의 동쪽 궁장문(宮牆門)으로 동궁(東宮)과 지근거리에 위치하게 되자 원자(元子)가 천연두를 앓을 때 사람의 왕래를 금한다는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16년 2월 4일][『연산군일기』 5년 1월 27일].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경계에 있었으며 왕래하는 사람들은 통행 부신(符信)을 발급받아야만 했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0일]. 건양문은 창덕궁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대에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그 위치가 임진왜란 이전과 동일한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후기의 궁궐 그림을 살펴보면, 건양문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왕래할 수 있는 지름길에 위치하였다[『인조실록』 23년 9월 19일][『경종실록』 1년 10월 17일]. 이 때문에 잡인들이 많이 드나들자, 영조와 정조는 건양문에 입직하는 군사를 늘리고 숙위소를 설치하였다[『영조실록』 5년 9월 11일][『정조실록』 1년 11월 15일].
조선후기까지 있었던 건양문이 훼철된 시점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형태
1830년(순조 30)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東闕圖)」에서 건양문의 형태를 살펴보면,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에 용마루에 용두(龍頭)가 설치된 격식 있는 문이다. 기둥과 문짝은 붉은색으로 단청하였으며 좌우로는 궁장이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
『내각일력(內閣日曆)』
『대동지지(大東地志)』
건청궁(乾淸宮)
정의
고종대 경복궁 중건 이후 향원지 북쪽의 신무문 앞에 조성한 궁궐 내의 별궁.
개설
고종대 경복궁의 중건이 일단락된 후 1873년(고종 10)에 왕실의 내탕고(內帑庫)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건청궁 일곽이 조성되었다[『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고종은 궁궐 내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자신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곳이라고 건립 목적을 내세웠으나 나중에는 어진 봉안보다는 주요 거처, 집무처, 외교사절을 맞는 장소로 사용했다.
민간의 사대부 집과 같이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65칸 규모로 장안당(長安堂)과 곤녕합(坤寧閤)이 중요 건물이다. 고종 집권 중반기 이후의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된 현장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중심축 선상의 향원지(香遠池) 북쪽에 있다. 북쪽 궁장(宮墻)에 접해 있어서 경복궁 내 가장 깊숙한 위치에 해당한다. 건청궁이라는 명칭은 중국 명·청대 황제의 침전 일곽과 이름이 같고 곤녕합은 황후의 거처인 곤녕궁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과 함께 건물의 구성이 민간의 사대부 집과 같고, 왕실의 내탕고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공사를 진행했으며, 신하들이 이를 알게 되자 창덕궁의 서향각(書香閣)을 예로 들어 어진을 둘 전각이라고 한 점[『고종실록』 10년 8월 19일] 등으로 추정하자면 건청궁의 건립 목적은 별궁으로서 고종이 자신의 어진과 어필, 서책 등을 가까이 두면서 정치활동 공간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건립 당시 신하들에게 밝힌 중요한 용도로서 건청궁에 모시기로 했던 고종의 어진은 1872년(고종 9)에 제작하였다. 이 어진은 처음에는 수정전(修政殿)에 봉안했으나[『고종실록』 12년 5월 28일] 1875년(고종 12) 이후 고종이 경복궁에 있는 동안은 건청궁 일곽에 있는 관문각(觀文閣)에 봉안하게 되었다[『고종실록』 12년 9월 3일]. 이후 화재로 인하여 내전 일곽의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창덕궁에 머물렀는데,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는 경복궁의 복구가 완료되지 않았는데도 1885년(고종 22) 그쪽으로 옮겨갔다.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자경전(慈慶殿) 등 주요 침전 전각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왕실의 웃전과 왕 내외, 세자 내외 등이 거처할 내전의 전각은 부족했다. 따라서 왕과 왕비는 건청궁에서 주로 거처하게 되었다. 건청궁은 사대부 집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장안당과 안채 성격의 곤녕합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처럼 내외의 구분이 명확하였으므로 외부 인사를 만나는 일과 일상적인 거처로써 편리한 점이 있었다.
변천 및 현황
건청궁 공사가 표면화된 것은 1873년(고종 10) 5월 부호군(副護軍) 강진규(姜晉奎)가 상소를 올리고 좌의정 강로(姜㳣)가 국왕과 소대하는 자리에서 건청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부터이다[『고종실록』 10년 5월 10일]. 신하들이 반대하자 고종은 건청궁의 준공 의사를 분명히 하고 같은 해 12월 이전에 완공되었다.
건청궁 건립 당시의 기록을 보면, 장안당의 정문인 초양문(初陽門)과 장춘실(長春室), 관문당(觀文堂)이라는 당호의 건물이 나타난다. 이후 건청궁 일곽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다만 관문당에 어진을 봉안하면서 관문당을 관문각으로 당호를 바꾸고, 한식 건물이던 것을 1888년(고종 25) 양식 건물로 고쳐지었다. 관문각에 있었던 어진과 장서는 양식 건물로 다시 지은 후 집옥재(集玉齋)로 옮겼다.
1896년(고종 33) 경복궁에 무단 침입한 일본인들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난 후 건청궁은 주인을 잃었다. 건청궁이 헐린 경위와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1908년(융희 2)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건청궁이 ‘현존’으로 기록되어 있고, 1909년(융희 3) 6월 25일자 『대한민보(大韓民報)』 기사에는 이미 건청궁이 헐렸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으므로, 1908년에서 1909년 6월 사이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건청궁이 헐린 후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다가 193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어 개관했다. 해방 후에도 이 미술관은 민속 박물관, 한국 전통 공예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미술관 건물은 1998년 경복궁 복원 정비 계획에 의하여 철거되었고 2006년 다시 그 자리에 건청궁 일곽을 복원했다.
형태
건청궁 일곽은 담장과 행각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곳은 다시 다섯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고종이 신하와 외국 공사들을 만나던 장안당,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고종의 어진과 서책을 보관했던 관문각, 건청궁 (외)행각, 복수당(福綏堂)이다. 정문은 외행각에 있는 솟을대문이며 별도의 문 이름은 없고 ‘건청궁’이라고만 되어 있다. 문 안쪽에는 장안당의 정문인 초양문과 내행각이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건청궁에 거처하던 시기에 신하들과 외국 공사들을 만났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대청 3칸과 동·서 온돌방이 있으며 서온돌의 정면에는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라는 2칸 규모의 누마루가 있었다. 서온돌은 북쪽으로 침방(寢房)을 두고 있으며 침방은 정화당(正化堂)이다.
곤녕합은 대청 2칸과 동온돌 2칸, 누마루, 침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마루는 옥호루(玉壺樓)와 사시향루(四時香樓)이고 침방은 정시합(正始閤)이다. 곤녕합의 동·서·남·북쪽에는 행각이 있는데 남행각의 출입문은 함광문(含光門), 동행각의 출입문은 청휘문(淸輝門)이다. 서행각은 남쪽 끝에서 장안당의 복도각과 연결되어 있어서 장안당에서 곤녕합으로 통행이 가능하다. 곤녕합 북행각의 북쪽에는 복수당, 서쪽에는 녹금당(錄琴堂)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장안당 뒤뜰에는 원래 한식 건물이었던 관문각이 있었는데 이곳에 고종의 어진을 비롯하여 책보와 보인(寶印), 서책을 보관했다. 1888년 기존의 관문각을 헐고 양식 건물로 다시 지었다. 장안당 서쪽에는 행각이 없고 담장으로 되어 있으며 밖에서 장안당으로 들어오는 문은 필성문(畢星門)으로 벽돌로 된 홍예문이고, 관문각으로 들어오는 문은 관명문(觀明門), 그 북쪽에 있는 문은 취규문(聚奎門)이다.
건청궁은 북쪽이 내궁장에 접해 있고 내궁장 바깥쪽으로 순라길과 외궁장이 있는데 각각의 동쪽과 서쪽에 문이 있다. 외궁장에는 건청궁의 동쪽에 계무문(癸武門), 서쪽에 1876년 새로 지은 광무문(廣武門)이 있고, 내궁장에는 동쪽에 무청문(武淸門) 서쪽에 무녕문(武寧門)이 있다. 외궁장문은 홍예문이고, 내궁장문은 사주문이다.
건청궁의 남쪽에는 향원지가 있는데 이 연못은 전체적으로 네모난 형태를 띠고 있으며 모서리는 둥글다. 연못 중앙에는 둥근 섬이 있고 그 섬에는 향원정(香遠亭)이라는 2층짜리 육각형 정자가 있다. 건청궁 쪽에서 향원지까지는 목조 다리인 취향교가 있다. 조선전기부터 이곳에는 연못이 있었으나 향원정과 취향교는 건청궁을 지을 때 같이 새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원지 영역으로 출입하는 서쪽 문은 건선문(建善門)이고 그 남쪽에는 평락문(平樂門)이라는 일각문이 있다. 동쪽에는 녹산(鹿山)으로 통하는 인유문(麟遊門)과 봉집문(鳳集門)이 있고, 내전 일곽으로 통하는 청향문(淸香門)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이 신하들도 모르게 왕의 내탕고로 건청궁을 지었으며 신하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공사가 거의 끝나가던 때라서 크게 반대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건청궁이 완공되는 시점과 고종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영향을 벗어나서 친정(親政)을 선언하는 시기가 일치하여 그 건립 과정을 고종의 정치적인 성장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건청궁은 1885년 이후부터는 왕의 주요 거처가 되었다. 개항 이후 신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은 1887년(고종 24) 조선에서 처음으로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 전등은 16촉광의 백열등이었으며, 750개를 점등하였고 연료로는 석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전등을 밝히기 위한 발전소는 처음에는 향원지 남쪽에 있었으나 나중에는 관문각 북쪽 행각으로 옮겼다. 궁궐 내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러시아인 사바틴([沙婆眞, 薩巴丁], Sabatine, A.S.)이 설계와 시공에 관여했다. 고종은 사바틴을 신임하여 외국인 다이([茶伊], Dye, W.McE.), 닌스테드([仁時德], Neinstead, F.H.)와 함께 궁궐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사바틴은 을미사변 당시 현장을 목격한 외국인 목격자가 되었다.
건청궁에서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새벽 일본인들이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다. 이 사건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계획한 것으로, 일본이 조선의 정국을 주도하려고 하면서 그에 가장 방해가 되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경성 주재 일등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는 사건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다음 보고서를 작성하여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보고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에 침입한 경로가 상세히 나타나 있다. 이들은 한국인 동조자들의 안내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하여 경회루 왼쪽을 지나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진거문(辰居門)→유형문(維亨門)→광림문(廣臨門)→건선문(建善門)을 통해 건청궁으로 들어갔는데, 이 경로는 평상시 건청궁의 출입 동선과 일치한다. 이후 이들은 곤녕합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여 시신을 녹산에서 불태웠다. 을미사변을 계기로 고종은 친일 정권에 둘러싸여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고종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했고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경운궁으로 이어하면서 경복궁으로 환어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김태중, 「開化期 宮廷建築家 사바찐에 관한 硏究」, 『대한건축학회논문집』12권 7호, 1996.
명성황후 추모사업회,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시아 비밀문서』, 서림재, 2005.
문화재청, 『경복궁 건청궁 중건보고서』, 문화재청, 2006.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이민원,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한국전력공사, 『한국전기100년사』(上), 한국전력공사, 1989.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 -「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조선일보』, 2005년 1월 13일
건춘문(建春門)
정의
경복궁 동문(東門)의 이름.
내용
조선시대의 정궁인 경복궁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궁문이 있는데, 동문은 건춘문(建春門), 서문은 영추문(迎秋門), 남문은 광화문(光化門), 북문은 신무문(神武門)이라 하였다. 이 네 개의 궁문과 도성의 여러 문은 함부로 지나다닐 수 없었고, 표신(標信)을 대조한 후에야 출입이 허가되었다. 다만 어가(御駕)가 문을 나설 때는 표신을 대조하지 않았다.
용례
宮城門 則建春門光化門西夾 朝開夕閉 神武門迎秋門 則常閉之[『중종실록』 29년 8월 23일].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건충대위(建忠隊尉)
정의
토관(土官) 무반직의 정5품 관계(官階).
내용
토관계는 함경도·평안도·제주도 등 변경 지역에 사는 토착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제정한 특수 관계로, 문반은 지방 행정의 실무를 맡고 무반은 군사를 담당하였다. 토관계는 정5품부터 종9품까지 있었으므로, 정5품 건충대위는 토관계의 최고 품계였다.
용례
元職土官正五品建忠隊尉 準京職正六品敦勇校尉[『세종실록』 26년 7월 22일].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경덕궁(敬德宮)
정의
태종이 즉위하기 전에 살던 개경의 잠저(潛邸).
개설
개경에 있는 태종의 잠저로, 태종 즉위 후 왕실의 별궁(別宮)으로 삼으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잠저를 별궁으로 삼는 것은 조선시대 왕실의 전례가 되었다. 경덕궁은 중종대 이후부터는 퇴락하기 시작해서 터만 남게 되었고 숙종과 고종 연간에 중수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진행되지는 않았다.
위치 및 용도
경덕궁의 위치는 1693년(숙종 19) 기사에 의하면, 개성의 남문 밖 추동(楸洞)에 있었다[『숙종실록』 19년 8월 30일].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잠저였으며, 개경으로 환도(還都)할 때에는 사신 접대 장소로 사용하였다. 태조의 진전인 목청전(穆淸殿)과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인 제릉(齊陵),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능인 후릉(厚陵)을 참배 할 때 경덕궁을 이어소(移御所)로 활용하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경덕궁의 창건은 언제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태종의 잠저였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이 건국된 이후일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정했다. 그러나 태종이 주도한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이 왕위를 물려받자 다음 해인 1399년(정종 1)에 개경으로 환도해 버렸다. 이때 개경에서 정궁(正宮)의 역할을 한 궁궐이 수창궁(壽昌宮)이다. 그런데 수창궁은 태종이 즉위하던 해인 1400년(정종 2) 12월 22일 화재로 소실되고 만다[『정종실록』 2년 12월 22일]. 이후 태종은 시좌소(時座所)에 머물며 정사를 돌봤고, 사신 등을 접대하는 연회는 경덕궁을 활용하곤 했다.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다시 환도한 태종은 1418년(태종 18) 개경에 있는 경덕궁을 왕실의 별궁으로 삼고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새롭게 정비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2월 6일]. 정사를 보는 건물을 짓고, 새로운 누각 북량정(北涼亭)을 세워 규모를 키웠다.
개경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목청전과 태조의 첫 왕비였던 신의왕후의 무덤인 제릉이 있었다. 태종 사후에 경덕궁은 당대 왕들이 이 두 곳을 살피러 갈 때 머무는 이어소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점점 왕실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퇴락하게 되었고 1693년과 1891년(고종 28)에 개성부의 유생들임 목청전과 더불어 중수할 것을 청하였지만 실행되지 않았다[『숙종실록』 19년 10월 8일].
경덕궁(慶德宮)
정의
조선후기 창덕궁과 함께 국왕의 치소(治所)로 운영된 왕궁.
개설
경덕궁은 1617년(광해군 9)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3년 5개월 만인 1620년(광해군 12) 11월에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서별궁(西別宮)으로 부르다가 공사 도중인 1617년 7월에 궁호(宮號)를 경덕궁(慶德宮)으로 정하였으며, 1760년(영조 36)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숙종과 영조가 장기간 머물면서 창덕궁에 버금가는 왕궁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조 이후에는 크게 활용하지 않았다. 1829년(순조 29)에 발생한 화재로 침전과 편전 일곽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고종 초기에는 상당수의 건물과 시설을 헐어 경복궁 중건에 활용하는 바람에 공궐(空闕)로 바뀌어 개화 정책을 실험하는 장소로 변모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세워지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서울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발굴 조사가 시행되면서 정전 일곽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속칭 서궐(西闕), 새문안 대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치 및 용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다. 조선후기 사용된 궁궐 가운데 하나이다.
변천 및 현황
경덕궁 창건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1617년 6월의 일이다. 이보다 2년 앞서 1615년(광해군 7)에는 창경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에서 쓰고 남은 자재를 인왕산 아래로 옮겨 놓았다. 사직단 동쪽에 새로운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의 창건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광해군은 창경궁 수리를 맡았던 선수청(繕修廳)을 선수도감(繕修都監)으로 확대·개편하여 새로운 궁궐 창건을 준비하였다. 1617년 공사 시작을 앞두고 선수도감을 다시 영건도감(營建都監)으로 바꾸어 본격적인 궁궐 창건에 대비하였다. 바로 이 영건도감의 지휘 아래 인경궁과 경덕궁의 창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두 궁궐이 동시에 건립되는 것을 막으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1620년 11월에 경덕궁이 먼저 완공되었다. 인경궁 공사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중단되었다.
인경궁이 처음부터 큰 규모의 궁궐로서 창덕궁의 제도를 전범으로 삼았던 것과는 달리, 경덕궁은 인경궁에 견주어 작은 궁궐인 소궐(小闕)로 불리면서 창경궁의 제도를 모방하여 계획되었다. 정문을 단층으로 지었고, 정전(正殿)인 조하전(朝賀殿)과 편전(便殿)인 시사전(視事殿)을 모두 창경궁의 제도에 따라 정하게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7월 29일]. 그러나 1618년(광해군 10) 4월에 영건도감에서 올린 계를 보면, 경덕궁 아문의 칸수만 203칸에 이르렀다. 당초에는 잠시 피해 있을 곳으로 지으라던 경덕궁이 법궁(法宮)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많은 아문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4일]. 또 같은 달 영건도감에서 올린 계를 보면, 경덕궁 내 당실(堂室)의 조영에 쓴 재목의 치수는 인경궁의 경우와 대개 같았다[『광해군일기』 10년 4월 24일].
1619년 9월에는 다음과 같이 공사가 진척되었다. 첫째, 대내(大內) 정전·동궁·침전·나인입접처(內人入接處) 등 1,500칸이 완공되었다. 둘째, 동이별전(東二別殿)과 서별전(西別殿), 초수별당(椒水別堂) 등은 토맥이 단단하고 지세 또한 좋은 곳에 지어졌다.
한편 궁성(宮城)은 1617년 7월에 동서남북의 경계를 정하였으며, 이때의 궁성 영역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궐도안(西闕圖案)」과 일치하는 듯하다. 이는 현재의 행정 구역상 신문로 일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618년 10월에는 경덕궁과 인경궁의 돌난간 공사와 함께 이듬해부터 인왕산에 성첩(城堞)을 쌓도록 하달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 두 궁궐을 함께 지으면서 서로 연결하기 위하여 인왕산 성첩을 신축하거나 보수할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광해군일기』 10년 10월 7일].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추대된 인조는 경운궁에서 즉위한 뒤에도 새로운 궁인 경덕궁이나 인경궁으로는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반정 당시인 1623년(광해군 15)에 창덕궁이 불타 버렸고,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 버렸다. 난이 평정된 뒤인 1624년 2월에 인조는 처음으로 경덕궁에 들게 되었으며, 경덕궁은 이때부터 궁궐로써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후 역대 왕이 번갈아 경덕궁에서 집무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656년(효종 7)에 경화당(景和堂)과 만상루(萬祥樓)를 헐어 창덕궁 춘휘전(春暉殿)과 만수전(萬壽殿)을 세웠다. 1667년(현종 8년)에는 융복전(隆福殿) 남쪽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 창덕궁 집상전(集祥殿)을 세웠고, 숙종 때는 대대적으로 수리를 벌였다. 영조 때는 태녕전(泰寧殿)과 경봉각(敬奉閣)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공사는 창건 70여 년 만인 1693년(숙종 19)에 벌어진 수리 공사였다. 이때 융복전, 회상전(會祥殿), 광명전(光明殿), 단명전(端明殿), 승휘전(承輝殿), 영소전(永昭殿), 사물헌(四勿軒), 경헌당(鏡憲堂), 무일합(無逸閤), 예연당(蘂淵堂), 용비루(龍飛樓), 영취정(暎翠亭) 등 대부분의 건물이 보수되었다. 숙종은 오랜 기간 경덕궁에 머물러 있으면서 궁궐 내 여러 곳을 수리하거나, 건물의 이름을 변경하였다.
영조 또한 오랜 기간 경덕궁에 거처하였는데, 1730년(영조 6)에 자정전(資政殿) 서행랑 5칸을 중수하고 우문각(右文閣)이라 이름 지어 경연 장소로 사용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흥정당(興政堂) 동쪽과 숭양문(崇陽門) 북쪽에 있는 오래된 행각 3칸을 개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숙종 때 만들어 보관해 오던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하고 규정각(揆政閣)이라 이름 지었다. 1733년(영조 8)에는 태녕전(泰寧殿)을 새로 지어 역대 국왕의 영정을 모셨다. 1764년(영조 40)에는 궁궐의 이름을 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바꾸었으며, 경봉각(敬奉閣)을 창건하여 청국에서 온 조서와 칙서를 보관하게 하였다. 흥정당 남쪽의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도 이때 지어진 것이다. 정조는 경덕궁 동궁에 거처하던 세손(世孫) 시절인 1774년(영조 50)에 『정묘어제경희궁지(正廟御製慶熙宮誌)』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는 1620년(광해군 12) 창건 이후 그때까지 변화·발전되어 온 경덕궁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그런데 1829년(순조 29) 10월 3일에 일어난 화재로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합(政始閤)·집경당(集慶堂)·사현합(思賢閤) 등 내전과 편전 일곽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화재 이후 중건 공사는 1830년(순조 30) 3월에 시작되어 1831년(순조 31) 4월 27일에 낙성되었다. 이때 편찬된 기록인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를 통하여 당시의 영건 상황을 여러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오늘날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경덕궁은 이후 헌종·철종대에는 큰 변화 없이 관례에 따라 수시로 보수되었다.
「서궐도안」을 통해서나마 19세기 전반에 건설된 경희궁 건축의 장관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고종 초기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덕궁의 위상은 격하되었고, 숭정전(崇政殿)·회상전·정심합·사현합·흥정당 등 중심 건물만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 경복궁 건물을 중건하는 데 활용하였다. 고종과 순종 연간에 경덕궁은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으며 궁내 공터를 용동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 등 4개 궁방에 분배하여 개간·경작하도록 하였다.
1875년(고종 12)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접견하는 외교적인 행사가 숭정전과 흥정당에서 거행되었고, 이후에도 중심부는 정부에 의하여 유지·보수되었다. 그러나 1883년(고종 20) 양잠소를 설치하고 뽕나무를 심어 궁역 대부분은 양잠 정책의 실험장으로 활용되었다. 대한제국기인 1897년(광무 1)에는 정문인 흥화문(興化門) 안쪽에서 수천 명이 열병식을 할 수 있도록 지대를 평탄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고종황제의 위용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관병식을, 경운궁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경덕궁에서 거행하기 위해서였다. 1902년(광무 6)에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稱慶禮式)을 경덕궁에서 거행하기 위하여 경덕궁 내 전각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1905년(광무 9)의 을사늑약으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 경덕궁은 사교 장소로 전락하였다. 통감부가 주최하는 다양한 용도의 대규모 행사, 예컨대 각종 학교 운동회, 친목회, 동창회 등을 경덕궁에서 열었다. 1910년(융희 4) 8월 28일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경덕궁도 조선총독부 소유로 넘어갔다. 합방 2년 전부터 일본인 거류민이 다닐 학교를 세운다는 구실로 궁터의 서쪽을 정지(整地)하더니 1909년(융희 3)에는 통감부중학교(統監府中學校)를 세웠다. 그 결과 경덕궁은 숭정전·회상전·흥정당·흥화문·무덕문·황학정 등 건물 몇 채와 이에 딸린 부속 행각만을 남긴 채 파괴되었다. 정전·편전·대문 등 기본 골격만 남기고 모조리 헐어 없앴던 것이다. 이때 자연환경도 완전히 변형되었다. 낮은 데는 돋우어지고 높은 데는 깎여 나갔다. 궁궐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문화적 이기(利器)와 조경용(造景用) 시설 및 수목들도 모두 헐값에 방매·처분되었다. 1922년 6월에는 궁역 동쪽 땅 21,500평을 전매국 관사 부지로 팔아 넘겼다.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 궁역 남쪽 일부를 떼어 팔고, 그 앞에 이른바 신문로(新門路)를 내었다. 그 결과 1934년에 이르러 궁역은 41,319평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합방 당시까지는 남아 있었던 건물마저 모두 팔아넘겼다. 정전인 숭정전은 1926년에 조계사로, 왕의 침전인 회상전은 1911년 4월부터 1921년 3월까지 경성중학교 부설 임시 소학교원(小學敎員) 양성소로 사용되다가 1928년 조계사로 팔려 이건되었다.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임시 소학교원 양성소 부속 단급(單級)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8년 3월 광운사에 팔려 이건되었다. 정문인 흥화문도 1915년 8월 도로를 수리한다는 미명 아래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사직단 동쪽으로 이건되었는데, 오늘날까지 활 쏘는 장소의 휴식공간으로 그 자리에 있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를 저지하기 위하여 경희궁 터 북쪽, 즉 원래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 바로 뒤쪽에 거대한 방공호(防空壕)를 건설하고 이를 위장하려고 뒷산을 허물어 방공호를 덮었다. 이로 인하여 궁터는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당하고 말았으며, 오늘날까지 방공호는 철거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흉물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기간에 경희궁은 미군이 진주하여 병영으로 쓰는 바람에 한 번 더 크게 파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 이후 궁역 서편 정문 가까이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어 다시 한 번 궁역을 훼손하였지만, 정전 일곽이나마 복원되었다.
형태
「서궐도안」을 토대로 경덕궁의 배치 형식을 보면 첫째, 궁궐은 서쪽과 북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은 지형에 조성되었는데, 건물의 좌향은 남향이었다. 둘째, 기슭 중간 지점에 정전과 편전 일곽을 넓고 반듯하게 앉혔다. 셋째, 정전의 서쪽 산기슭 가까이에 진전과 별당을, 멀리에 봉안각 등을 배치하였다. 넷째, 정전의 동쪽 지세가 낮은 곳에 편전과 침전을 앞뒤로 배치하고 그 동쪽으로 동궁을 넓게 배치하였다. 다섯째, 침전 뒤 북쪽은 지세가 훨씬 높은데 여기에 대비전(大妃殿)을 비롯하여 12채의 별당과 정자를 배치하여 금원(禁苑)을 조성하였다. 여섯째, 대문을 정전 남쪽에 두지 않고 궁역 맨 동쪽에 세움으로써 동쪽에서 서쪽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이는 창덕궁에서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서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입하도록 한 것과 대비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해군은 인왕산의 지맥에 자리 잡은 새문동 일대,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定遠君)의 집터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설을 내세워 그곳에 있던 조관(朝官)·종실(宗室)·사대부·서인(庶人) 등의 집을 모두 매수하여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이 궁궐은 처음에 서별궁(西別宮)으로 불리다가 경덕궁으로 명명되었는데, 1760년(영조 36)에는 경희궁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영조는 경덕궁의 궐호(闕號)가 장릉(章陵)의 시호와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치도록 했다
경덕궁 창건 두 해 전에 정원군의 3남 능창군(綾昌君)은 광해군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으며, 훗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정원군의 장남이다. 광해군은 9년 동안 장기간의 토목 공사를 강행하였다. 1615년의 창경궁 중건을 시작으로 1617년부터 1620년 사이에 경덕궁 창건, 1616년(광해군 8)부터 1623년 사이에 인경궁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느 궁궐에도 이어(移御)하지 못한 채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궁궐지(宮闕志)』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
『한경지략(漢京識略)』
『홍재전서(弘齋全書)』「서궐도안(西闕圖案)」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윤정, 「영조의 경희궁 개호와 이어의 정치사적 의미: 사도세자 사사와의 상관성에 대한 분석」,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은정태, 「고종시대의 경희궁: 훼철과 활용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이강근, 「정조의 경희궁 운영과 건축」, 『서울학연구』제34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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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주, 「광해군대의 경덕궁(경희궁) 창건」, 『서울학연구』제34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