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
언젠가부터 사무실에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처음에는 이 냄새가 바깥에서 들어온 거라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시간이 갈수록 냄새가 점점 심해져 사무실 안에서 원인을 찾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사무실을 압수 수사했다. 식물이 썩을 때 나는 냄새 같아서 사무실에서 보관 중인 네 개의 늙은 호박이 1호 의심의 대상이었다. 이 호박은 작년 추수감사절에 강단장식으로 봉헌된 거라서 따뜻한 데서 보관하려고 사무실로 옮겨온 것이다. 겉은 멀쩡하여 썩는 흔적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으나 호박을 조사해 보니 그 중에 가장 둥글고 탐스럽게 생긴 녀석이 주범이 아닌가? 보이는 부분은 멀쩡한데 바닥에 붙어있는 부분이 곪아서 썩고 있었다. 이 냄새가 온통 사무실에 진동했고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것이다. 무엇이라도 썩으면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냄새의 종류는 보통 두 가지로 나눈다. 향취(香臭)와 악취(惡臭)다. 전자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분위기를 개선한다. 만나는 사람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고 그의 품격을 고상하게 만든다. 그 영향력은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소지하고 그 입에서 쏟아내는 언사에는 긍정 신호가 가득하다.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품위 있는 인생을 형성하고 더 나가서 좋은 역사를 창출한다. 실로 이런 냄새로 가득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천국이다. 반면 악취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 냄새가 진할수록 더욱 삶은 괴롭기만 하다. 매사 부정적인 인식으로 전환되고 그런 마인드를 소지하게 된다. 그의 입의 언사와 행동에서 풍겨 나는 악취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만든다. 그 영향력이 온 누리에 번져나가면서 세상은 죄악으로 물든다. 이런 냄새로 가득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지옥이다. 싫으나 좋으나 우리 사회는 이 두 냄새가 공존한다. 사람들은 이 냄새로 인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여하튼 악취 제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사무실에 만연한 악취의 근원을 찾아냈으니 미련도, 후회도 없이 즉각 내다 버렸다. 어디에도 쓸데없는 악취를 풍기는 호박은 가차 없이 버림받은 신세로 전락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이놈을 버리고 나자 문득 남은 호박의 운명도 시간이 지나면 이와 같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놈이 또 미세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악취를 풍기며 주변을 힘들게 할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기 전에 호박으로서 가장 가치 있게 살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최상의 악취예방의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남은 세 개의 늙은 호박은 지난주일(2024.2.18.)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점심 애찬에 호박죽으로 새롭게 변신하여 나타났다. 호박죽은 단팥죽과 함께 간식용 죽(粥)의 세계에서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체내에 흡수되면 비타민 A로 변하는 카로틴이 많아서 비타민 A의 공급원으로 매우 좋은 건강식이다. 맛 또한 부드럽고 당분이 많으므로 회복기의 환자나 노인식으로 이것만 한 음식이 없을 정도다. 호박 고유의 향취는 식도락에 빠진 애호가들의 구미를 자극하여 먹는 기쁨을 주니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썩은 호박은 악취나 풍기며 무익해지나 이렇게 삭혀서 죽을 쑤면 매우 유익한 음식으로 거듭난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두 가지 냄새를 지니고 있다. 남을 위하여 자신을 죽으로 희생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결국 썩어져 악취나 풀풀 풍기며 역겹게 하는 호박이 된다. 반면 스스로 물과 불에 들어가 자신을 삭힐 때 향취를 발산하는 호박죽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는 이렇게 살다 간 분들이 많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런 향취를 발산하신 우리의 구세주시다. 예수님의 발자취에 이런 향취가 풍기는 이유는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십자가에 내던지셨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식사하실 겨를조차 없을 만큼(막 3:20) 바쁘신 주님이 흘린 땀 냄새가 그렇다. 병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소외된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친구가 되신 예수님의 흘리신 땀이다. 또한 겟세마네 산에서 내일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기도하시다가 핏방울 떨어지듯 흘린 땀이나 끝내 인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서 풍기는 향기다.
사도 바울은 이런 냄새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고 동시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풍겨야 할 냄새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 자녀를 위하여 온몸을 희생하며 사신 이 땅의 모든 부모에게서 나는 냄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헌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무명의 사람에게서도 이런 냄새가 배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 안에는 날마다 이런 향기가 담겨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사회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다가 결국 썩어가는 악취 이야기가 매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그가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서는 개인과 국가의 운명까지 불안하게 할 수 있으니 악취는 빨리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다. 오늘도 하는 일 없이 그대로 있다가 결국 스스로 썩어가는 호박 신세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작을지라도 자신을 내놓고 호박죽처럼 살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는다. “몰약과 유향과 상인의 여러 거지 양품으로 향내를 풍기며 연기 기둥처럼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가”(아가 3:6).
썩어셔 버려진 호박
사무실에 보관중인 남은 새 개의 호박
주일 점심 애찬에 올라온 호박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