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돌맞이 / 최미숙
세월 참 빠르다. 작년 추석(9. 29.)에 손자가 태어났으니 벌써 1년이 지났다. 예정일보다 한 달 먼저 세상 구경을 해 걱정했지만, 다행히 몸무게가 2.6kg(2.5kg 이하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간다)으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계절에 태어난 복덩이다.
9월 마지막 주 토요일, 손자의 돌이다. 축하도 할 겸 뷔페에서 저녁이라도 먹자며 순천으로 모이기로 했다. 가족이라 해 봤자 서울 사는 큰아들 내외와 딸, 이제 곧 결혼할 막내아들과 예비 며느리, 오빠 부부가 전부다. 친척에게 알리면 다들 가만있을 수 없으니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오빠 부부는 여지껏 아기를 못 봐 진즉부터 온다고 약속해 놓은 터였다. 금요일 장을 보고, 선물로 금반지 한 돈을 마련했다. 오후에는 아이에게 거치적거릴 물건을 치우고 손자 맞을 준비를 끝냈다. 거실이 널찍한 운동장이 됐다.
점심때 도착하는 아이들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큰아들에게 전화가 온다. 전날까지 잘 놀던 손자가 아침에 갑자기 몸이 안 좋아 병원에 들르느라 열차 시간을 옮겼다며 오후 세 시 20분에 도착한단다. 보내준 사진을 보니 아이는 힘없이 큰아들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 좋은 날인데 걱정스러웠다.
예기치 못한 일이다. 뷔페 예약금도 치르고 세종시 사는 오빠 부부는 이미 출발했을 텐데 난감했다. 손자가 계속 안 좋으면 행사를 일요일로 미루고 집에서 소고기나 구워 먹기로 했다. 잠시 후 열차에서 안고 있는 며느리 옷까지 젖을 정도로 설사를 많이 했다는 소식이다. 객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1회용 물티슈로 대강 처리했다고 하지만 좁은 곳에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다. 남편도 걱정이 됐는지 오지 말라고 할 걸 그랬다며 몇 번을 말한다. 그사이 딸은 주말 오후 여섯 시까지 진료하는 병원을 검색해 알려 줬다.
마중 나간 남편과 딸이 집 앞에 도착했다기에 목욕통에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 두었다. 잠시 후 아들 부부가 손자를 안고 다급하게 들어온다. 옷을 벗기자 온통 설사 똥으로 범벅이다. 물에만 들어가면 좋아서 물장구를 치며 방긋방긋 웃던 아이가 계속 칭얼거렸다. 지난 구정에 와서도 고열이 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또 아픈 것을 보니 녀석이 서울 남자 티를 단단히 내는 모양이다. 저녁 계획을 미루고 예비 며느리에게도 사정을 알렸다.
병원을 다녀온 손자는 장염 증세가 있다고 했다. 그래도 쌀미음과 약을 먹고 괜찮은지 거실을 돌아다니며 논다. 모두 아이가 기어다니는 곳으로 눈길을 옮기며 흐뭇해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자의 재롱에 빠져 있다 먼 길을 달려온 오빠와 올케에게 미안해 부리나케 상을 차렸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와인을 땄다. 술을 못 마시고(남편과 딸, 아들 둘), 마시면 안 되는 남자(오빠)를 빼고 나와 며느리, 올케 셋이 한 잔씩 했다. 준비한 금반지를 끼웠더니 앙증맞은 손가락이 반짝거린다. 손자의 앞날도 반지처럼 빛나기를 바랐다. 늦은 시간까지 놀다 오빠 부부는 떠났다.
밤새 아이는 한 번 깨고 잘 잤다. 아침에 조금 괜찮은가 싶더니 분유도 미음도 혀로 밀어낸다.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더니 쌀죽은 받아먹어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애를 셋이나 독박 육아하며 어렵고 힘든 고비를 경험했으면서도 처음인 것처럼 새롭다. 작은 몸으로 힘겨워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더 애가 타고 안쓰럽다. 당혹해하는 아들 며느리를 안심시켜야 할 텐데 내가 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이의 상태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오후가 되자 손자는 노래에 맞춰 엉덩이춤까지 춘다. 꼬물꼬물했던 갓난아기가 어느새 손을 잡으면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37년 전 첫아이 때처럼 다시금 놀랍고 신기하다. 다행히 계획했던 대로 오후 다섯 시 30분 예약한 뷔페로 갔다. 막내아들과 예비 며느리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돌잡이 용품(실타래, 청진기, 연필, 카드, 마이크, 의사봉)을 손자 앞에 놓았다. 다들 숨죽이며 쳐다보고 있는데 연필을 집는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막내아들과 예비 며느리가 손자 얼굴을 새기고 축하한다는 글이 적힌 봉투를 예쁜 천으로 싸서 내민다. 큰아들 부부와는 처음 만나는 자리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기애애한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며 가슴 졸였던 돌맞이 행사를 마쳤다.
월요일, 아이들이 떠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남편과 나, 둘만 있는 집 안이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정현종은 그의 시 〈방문객〉에서 “한 사람이 오는 건 어마어마한 일로, 그의 일생이 오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런 아이 하나가 며칠 동안 집안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정신없었던 2박 3일의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지 뒷날 돌아보면 지금을 가장 좋았던 시절로 기억할 것 같다. 그동안 아이 키우느라 전쟁을 치렀을 큰아들 부부와, 조그만 몸으로 1년 동안 세상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손자가 새삼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