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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시편(Psalms)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시편"(Psalms)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은 당연히 시편일 것이다. 시편은 목사님의 설교본문에서는 물론 크리스천들의 기도와 찬송 중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주일 예배 중에 교독하는 교독문도 반 이상이 시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시편을 모르는 크리스천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몇몇 시편들, 이를테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로 시작하는 시편 1편,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로 시작하는 18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시작하는 23편,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라고 시작하는 46편,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코...”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121편,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로 시작하는 127편 등을 암송하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시편은 크리스천들에게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시편은 동서양의 음악과 문학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나라 가곡 중에 널리 알려져 있는 가곡이다.
시편은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만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편의 “삶의 자리”(Siz im Leben) 역할을 하였던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예배와 제사에서는 물론 민족적 축제와 임금의 등극, 그리고 절기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날 때도 시편으로 야훼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찬양을 드렸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과거에 자신들의 선조들을 위해 어떻게 하셨는가를 묵상하면서,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미래에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대망하면서 시편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시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만이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대 유대교 안에서는 물론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널리 사랑을 받았고, 자주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시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에베소서 5:18절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와 골로새서 3:16절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에 나타나 있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는 시편을 지칭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초기 크리스천들이 시편을 자주 사용하였다는 것은 신약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구약 인용 중에서 시편이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지금까지 시편이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감사와 찬송 중에 자주 사용되어 왔다. 우리는 구약성경 중에 시편이 주어진 것에 참으로 감사하여야 한다. 만일 시편이 없었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이 얼마나 건조하였겠는가? 시편은 우리의 영적생활 유지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보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시편을 어떻게 설교하고 가르칠 것인가? 150편이나 되는 다양한 시로 구성되어 있는 시편, 그것을 기록한 저자들도 다양하고, 그 시편을 처음 들은 독자들도 다양하고, 시편이 나타난 시대와 상황도 서로 다른데 이 모든 시편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학적 열쇠가 있는가?
시편이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사용되어 왔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초기부터 자주 사용되어 왔다고 해서 시편에 대한 통일된 해석이나 통일된 해석학적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誤算)이다. 시편에 관한 해석과 설교는 신학자마다, 설교자마다 다를 경우들이 많다. 시편은 교부시대 부터 중세와 종교개혁시대를 걸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사실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시편의 해석은 달랐다. 예를 들면 유대교에서는 시편 2편을 이방세계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고난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기 기독교는 시편 2편이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시편이 이처럼 다양성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기독교역사를 통하여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모든 시편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 규칙을 찾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다음의 사항은 우리가 시편을 해석할 때 늘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본다.
1. 시편은 모두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각 시편의 서두에 나타나 있는 표제에 따르면 시편의 작가는 다양하다. 다윗 임금이 지은 시편이 73편(1-72), 아삽이 지은 시편이 12편(50, 73-83), 고라의 아들이 지은 시편이 11편(42, 44-49, 84, 87-88), 솔로몬 왕이 지은 시편이 2편(72, 127), 그 밖에 헤만(88), 에단(89), 그리고 모세(90)가 지은 시편이 각각 하나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내용상으로 볼 때도 동일하지 않고 다양하다. 어떤 시편은 개인이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슬픔이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어떤 시편은 야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구원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다. 어떤 시편은 왕의 출생과 등극을 축하하고 있다. 또 어떤 시편은 분노와 저주를 담고 있다. 이처럼 시편은 기록한 저자도 다양하고, 그 내용도 다양하다. 저자와 내용이 다양하다는 것은 시편이 주어진 연대도 다르고 그 시편이 나타난 시대적 상황도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모세의 시편은 출애급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편은 솔로몬 성전 이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어떤 시편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비해, 어떤 시편들은 바벨론 포로나 그 이후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예를 들면 에스라 시대에 지은 시편 88, 89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편이 이스라엘 민족의 개인이나 혹은 공동체의 산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된다. 시편이 예배와 기도와 찬양 가운데서, 시온을 향해 순례를 떠날 때 사용되었다고 해서 예배나 기도나 순례의 산물은 아니었다. 설사 우리가 어떤 시편의 경우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 내용을 납득하기가 어려울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편이 주로 동일한 저자와 동일한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는 다른 구약의 경우와 달리 다양한 저자와 다양한 독자 및 시대적 정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편이 “하나님이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다른 구약성경과 달리 철저하게 인간 편에서 야훼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탄식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적 산물로만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시편이 다른 구약성경과는 매우 다르게 인간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편은 다른 구약성경의 경우처럼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산물이 아닌 위로부터의 주어진 계시의 산물이다. 우리는 이점을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이 시편을 주저 없이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실로부터 확인할 수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말씀하신다(마 22:42-45). 초대교회 사도들 역시 시편 2편을 인용하면서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라고 하면서 시편 2편이 야훼 하나님이 성령으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행 4:25-26).
이처럼 예수님과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시편의 원 저자를 성령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편을 접근할 때마다 시편의 원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시편에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인물과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이 시편의 주인공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이 우리의 시편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중에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수많은 시편들이 메시야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즉 시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2. 각 시편은 고유의 문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시편이 때로는 내러티브와 예언적, 그리고 율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시편은 역사서처럼 내러티브나 이사야처럼 예언서나 신명기처럼 율법서처럼 접근하여서는 아니 된다. 우리가 시를 소설이나 수필이나 역사책처럼 접근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시편은 이름 그대로 시(詩)이기 때문에 시로 알고 접근하여야 한다. 시편은 시이기 때문에 운율과 음색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평행법, 반복법, 반어법, 대구법 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시의 특성을 바르게 알면 알수록 그 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시편의 문학적 구조나 특성을 잘 알면 잘 알수록 시편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피아노의 기법을 따라 피아노의 소리를 낼 수 있고, 플롯의 기법을 알아야 플롯의 소리를 낼 수 있고, 바이올린의 기법을 알아야 바이올린의 소리를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피아노를 바이올린의 기법으로 칠 수는 없으며, 바이올린을 플롯의 기법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다.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결코 시편의 문학적 특성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께서 시편과 같은 문학적 장르를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문학적 장르를 알아야 하고,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
시편은 또한 그 주제나 내용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고, 그러한 유형들은 대게 유사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시편들이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거나, 같은 유형들은 한결 같이 동일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 어떤 시편도 기계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것은 시편의 저자들이 교과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고, 그 규칙을 따라 시편을 작성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각 시편이 다음과 같이 어떤 유형에 속하여 있는가를 알 때 보다 쉽게 그 시편의 흐름과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1) 슬픔(Lament)의 시편
“슬픔의 시편”(Lament Psalms)은 주로 개인이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슬픔을 야훼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개인의 슬픔을 호소하는 시편에는 13, 5-7, 17, 25, 26, 28, 31, 35, 38, 39, 42, 43, 51, 54, 55, 57, 59, 61, 64, 69, 70, 71, 86, 88, 102, 109, 120, 130, 140, 142, 143편이 속하며, 그 형식은 대게 ① 1인칭, 혹은 2인칭으로 야훼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간청(Address to God), ② 슬픔(어떤 문제, 위기, 죄, 원수로 인한 것)에 대한 하나님께 호소(Complaint to God), ③ 신뢰에 대한 고백(Confession of Trust), ④ 청원 혹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기대(Petition, Expecting a Divine Response), 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찬송의 순으로 되어 있다(Doxology, Praise to God). 예를 들면 시편 13편의 경우 1-2a절은 ①에, 2b 절은 ②에, 3절은 ③에, 4절은 ④에, 그리고 5-6절은 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시편 3편의 경우 1절은 ①에, 2절은 ②에, 3-6절은 ③에, 7절은 ④에, 그리고 8절은 ⑤에 해당한다.
공동체 혹은 이스라엘 민족적이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당하게 된 슬픔을 호소하는 시편에는 44, 60, 79, 80, 83, 85, 90, 126편이 해당되며, 그 형식은 대게 ① 서언, ② 슬픔 자체의 진술, ③ 신뢰와 청원, ④ 응답에 대한 기대, ⑤ 찬송의 서원 등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시편 74편의 경우 1-3절은 ①에, 4-9절은 ②에, 10-23절은 ④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2) 감사와 찬양(Thanksgiving and Praise)의 시편
감사와 찬양의 시편은 개인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거나 찬양을 독려하는 시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개인의 감사 및 찬양시편과 민족적 감사와 찬양시편이 있다. 슬픔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 감사와 찬양이 뒤따라 나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슬픔의 시편들이 “하나님께서 하실 일”(God will act)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면, 감사와 찬양의 시편은 문제와 위기가 해결되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God has acted)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개인의 감사와 찬양시편으로는 8, 18, 19, 30, 32, 34, 40, 66, 104, 106, 118, 138, 148편이 속하며, 그 구조는 대게 ①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하는 이유, ② 찬양의 내용, ③ 도움과 구원에 대한 회상, ④ 찬양의 명세, ⑤ 찬양의 서술 혹은 교훈 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34편의 경우 1-3절은 ①에, 4-6절은 ②에, 7-10절은 ③에, 그리고 11-22절은 ⑤에 해당한다.
공동체의 감사와 찬양의 시편에는 33, 65, 66, 67, 75, 100, 103, 107, 111, 113, 114, 117, 124, 136, 145-147, 149이 속하며, 그 구조도 ① (어떤 경우 “할렐루야”와 함께) 감사와 찬양에로의 부름(the Call to Thanksgiving and Praise), ② 지난 날 어려움에 대한 회상(the Cause for Thanksgiving and Praise), ③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God's Response to Distress), ④ 구원에 대한 찬양(Praise for Deliverance)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시편 138편의 경우 1-2절은 ①에, 3절은 ②에, 3-4절은 ③에, 6-8절은 ④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3) 왕의 대관식(Enthronement)의 시편
왕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시편이다. 이때 왕의 대관식은 지상의 이스라엘의 왕의 대관식을 지칭하기보다도 주로 야훼 하나님이 온 세상의 왕으로서 등극하는 것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24, 29, 47, 95-99편이 속하며, 그 구조는 대게 ① 야훼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축하, ②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③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 통치, ④ 메시야 왕국에 대한 기대 등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시편 47편의 경우 1절은 ①에, 2-4절은 ②에, 5-6절은 ③에, 7-9절은 ④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4) 메시야(Royal Messianic) 시편
메시야 시편은 다윗 왕가를 축하하고 다윗가문을 통해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따라서 메시야 시편은 특별한 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기보다도 그 내용을 통해 서 확인된다. 여기에는 시편 2, 8, 16, 20, 21, 22, 40, 45, 68, 72, 89, 96, 110 등이 속한다. 메시야 시편의 경우에는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린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의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 시편의 경우 자연스럽게 이 시편이 메시야 시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약의 저자들이 자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 시편 110편(마 22:44; 막 12:36; 눅 20:42; 행 2:34; 고전 15:25; 히 1:3, 13; 5:6) 다음과 같이 다윗의 가문에 태어날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
“여호와께서 내 주(메시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메시야) 원수들로 네(메시야)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메시야)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메시야)을 내보내시리니
주(메시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메시야)의 권능의 날에 주(메시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메시야)의 청년들이 주(메시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메시야)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메시야)께서 그의(메시야)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메시야) 머리를 드시리로다.”
(5) 순례자(Pilgrim)의 시편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온성, 곧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시편이며, 46편, 48편, 76편, 84편, 84편, 87편, 121편, 122편이 여기에 속한다.
(6) 저주(Imprecatory)의 시편
이 시편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분노를 어떤 다른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거나 하나님을 통하여 전할 수 있도록 표현한 시편이다. 저주의 시편은 큰 유형 면에서는 슬픔의 시에 속한다. 저주의 시편에 속하는 시편은 12, 35, 58, 59, 69, 70, 83, 109, 137, 140 등이다.
3. 각 시편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 읽어야 한다.
150편의 시편은 크게 다섯 권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다섯 권 중에 1권에 속하는 1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서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150편은 전체에 대한 결언으로 볼 수 있다. 즉 시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시작하여, 야훼 하나님에 대한 할렐루야 찬양으로 종결한다. 이 서론과 결언 사이에 수많은 슬픔과 감사와 찬양과 참회와 분노와 소망의 노래와 기도들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시편은 한 개인의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은 물론, 이스라엘 민족의 흥망성쇠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만일 시편이 메시야론적으로 읽어져야 한다면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을, 더 나아가서 전 인류를 대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시편을 최종적으로 편집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생활의 근간이었던 토오라가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점을 감안하여 다섯 권으로 분류한 것 같다.
1권 1-41편(대부분 다윗에게 초점. 다윗이 하나님께 원수로부터 보호를 요청)
2권 42-72(다윗에게 초점, 42-49는 고라의 아들들)
3권 73-89(깨어진 언약에 대한 슬픔, 아삽)
4권 90-106(왕이신 야훼와 그의 구원에 대한 소망)
5권 107-150(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축하)
물론 이것은 내용상의 분류는 아니지만 유대교 역사를 통하여 시편은 오래전부터 5권으로 나누어졌다. 주전 1세기 이전의 것으로 볼 수 있는 쿰란 문헌에 나타나 있는 시편이 이미 5권으로 분류되어 있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말 성경에도 시편을 5권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우리는 시편을 해석할 때 적어도 개별 시편을 하나의 문학적 단위로 생각하고 접근하여야 한다. 이것은 117편과 같은 가장 짧은 시편의 경우에서 뿐만 아니라 119편과 같은 가장 긴 시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각 시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문학적 단위를 이루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각 시편을 구절을 따라 분리시켜 접근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가진 150편의 시편들이 언제 수집되어 5권으로 분류가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시편 가운데서 연대적으로 가장 늦은 시편이 바벨론 귀환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는 88, 89편이라고 한다면 150편의 시편은 이미 에스라 시대에 전체적으로 함께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시편이 에스라 시대에 최종적으로 편집이 완료되었다고 한다면, 각 시편 서두에 종종 나타나 있는 서두(예를 들면 “다윗이 영장으로 한 노래”)는 물론 각권의 분류도 우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스라 시대는 구약의 정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대가 아니고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활발하게 움직여가고 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시편이 최종적으로 분류된 것도 영감의 산물로 보고, 각 분류와 각 시편의 최종 본문 자체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4. 신약의 저자들의 시편해석법에 주목하여야 한다.
시편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법들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법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학자들의 시편 해석법보다도 우리가 먼저, 그리고 가장 비중 있게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편해석법도 하나님의 영감 된 권위 있는 해석법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약저자들은 구약성경 중에서 시편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다. 헬라어 성경 UBS 4판과 NA 4판에 따르면 신약에서 시편은 직접적인 구절의 인용과 부분적인 인용을 모두 합하면 400번 이상이나 된다. 그런데 신약저자들의 직접적인 시편구절의 인용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예를 들면, 시편 2편: 마 3:17; 행 13:33; 히 1:5; 5:5; 7:28; 벧후 1:17); 8편: 마 21:15-16; 히 2:6-9; 16편: 행 2:25-28; 13:35; 22편: 마 27:46; 막 15:34; 34편, 40편, 41편, 45편: 히 1:8-9; 68편, 69편: 요 2:17; 15:25; 72편, 96—-99편, 102편, 109편, 110편, 118편: 마 21:42).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저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시편을 메시야론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한다. 물론 이것이 신약의 저자들이 모든 시편을 기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9절에서 시편 18:49편을 인용하여 자신의 이방선교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로마서 8:36절에서는 시편 43:23절을 인용하여 고난 받는 크리스천의 삶과 직접 연결시킨다. 하지만 신약의 저자들이 시편을 인용할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시킨다. 이것은 신약의 저자들에게는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시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시편 중에서 소위 메시야 시편만을 그렇게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거시적 문학적 단위로서 시편 전체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브루스 왈키 교수(미국 Reformed 신대원 구약교수)는 그의 “시편의 정경적 해석법”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약 저자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시편의 정하거나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시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하고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시편을 해석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처럼 여기고 있다.”
물론 이것이 신약의 저자들이 각 시편이 고유의 역사적 배경과 삶의 자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약의 저자들이 시편의 본래 저자들이 전혀 의식하지도 않았던 의미를 본문에 가져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약의 저자들은 시편의 저자가 누구이든, 그가 다윗이든, 아삽이든, 고라이든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신약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시편의 각 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의중에는, 설사 시편의 인간 저자들이 이것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신약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 시편의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려고 했던 원래의 의미를 회복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역시 이점과 관련하여 브루스 왈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요약하자면, 신약은 이 오래된 시편들에 새로운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래 의미, 진정한 의미로 돌려놓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최종 편집자들이 어떻게 탄식시들을 해석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것들의 원래의 의미를 따라 이해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그분의 오심, 고난과 죽으심, 부활, 그리고 높아지심을 보아야한다. 시편의 기도와 찬송이 진실한 의미에서 우리를 대변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기도와 찬송임을 깨닫게 될 때 시편의 진정한 의미는 되살아날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한 브루스 왈키(Bruce K. Waltke),김정우 역(총신대학원, 구약 성문서 전공), “시편의 정경적 해석법 (A Canonical Process Approach to the Psalms)”을 보라.
시편의 정경적 해석법
(A Canonical Process Approach to the Psalms)
브루스 왈키(Bruce K. Waltke)
김정우 역(총신대학원, 구약 성문서 전공)
1. 시편에 대한 여러 해석법
파인버그(Charles Lee Feinberg) 박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주신 드물게 값진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적 신앙에 대한 깊은 헌신과 많은 영적 은사들과 자신이 물려받은 유대적 유산과, 올브라이트(Albright)와 함께 공부한 학문을 기초로 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데 있어서 독특한 기여를 하였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나보다 앞서 셈어와 구약 주석을 가르쳤던 파인버그(Feinberg) 박사에 대한 나의 사랑과 감사를 조금이라도 표시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것과 구약 주석 사이의 상관성 문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은 구원의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고 이 시대는 나사렛 예수의 강림으로 도래하였다"는 확신 속에서 구약의 의미와 의의를 발견해 왔다. 거듭난 백성들이 회복된 다윗 계통의 왕 아래에서 나라를 이루는 것을 포함하는 구원의 시대가 온다는 사실을 구약이 약속하고 있다는 확신은 신약의 가르침에 굳게 기초를 두고 있다. 예로서 베드로는 솔로몬 행각의 설교에서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행 3:24, 벧전 1:10-11)고 주장하였다.
신약의 저자들은 엄격한 의미에서(sensu stricto) 예언 문학에서 뿐 아니라 시편에서도 예수께서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본문들을 예언문학의 형식에 속한 것처럼 다루게 되었다. 예로서, 초대교회는 헤롯 왕과 빌라도의 손에 의해서 예수가 고난을 받은 것을 시편 2:1-2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사야 53장의 말씀이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는고.”
신약의 저자들은 시편 2편을 위와 같이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 4:27-28).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시편 16편과 110편을 요엘서 2장과 같은 예언 장르로 보았고 이 세 본문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부어주심을 구별 없이 증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시편의 범위와 성격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시편이 원래 쓰여진 상황 속에 있던 청중들에게 어떤 의미와 의의를 지녔는지 고려하지 않고 기독교적인 교리를 시편 속에 강요하는 풍유적 해석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시편의 구절들이 예수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서방교회의 시편 해석을 지배한 어거스틴은 시편의 모든 곳에 그리스도가 예시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우리의 시편 해석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그가 중앙에 있고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1]고 주장하였다. 예로서 어거스틴은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있는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2] 동일한 해석법에 근거해서 보나벤처(Bonaventure)는 시편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에 대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는 무덤에 누웠다. 그는 삼일 동안 잠들었다. 그는 죽은지 삼일 만에 다시 일어 나셨다"고 해석하였다.[3]
이와 반대로, 고삐 풀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해석법을 부정하고서 "모든 구절은 단 하나의 문학적,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안디옥 학파의 해석 원리를 받아들인 학자들은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적 요소를 극소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개신교인들 사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올바른 해석법으로 인정받은 이 접근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전비평적(precritical) 혹은 비비평적(noncritical) 주석가들과, 모든 실제적인 예언을 부정하는 문예적-역사적 비평가들(literary-historical critics)과 신약에 인용된 시편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예언과 간접적인 예언으로 보는 문예-역사적 비평가들(literary-historical critics)이다.
전비평적 혹은 비비평적인 주석가들로서는 헹스텐버그( E.W. Hengstenberg)[4], 개벨라인(A.C. Gaebelein)[5], 바론(David Baron)[6], 쿠퍼(David Cooper)[7], 고(古) 페인(J.B. Payne)[8] 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신약에 인용된 시편들 중 메시야 시편의 수를 대략 15편 정도로 제한하며, 이것들을 예수와 관계된 직접적 예언이라고 본다. 페인(J.B. Payne)은 이 시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첫 그룹은 영광중의 그리스도를 나타낸 시편들(2, 8, 45, 72, 89, 110편)이며 두 번째 그룹은 고난 중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시편들(16, 22, 40, 41, 69, 109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편의 역사적 정황과 의미를 무시하는 해석법을 싫어한다. 비비평적 학자들은 "본문을 증빙자료로 사용하기"(prooftexting) 때문에 문예적이고 역사적인 비평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예수의 주장을 실제로 약화시키고 있다. 시편에 실제 예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문예적-역사 비평가들은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적 요소를 이상적인 다윗의 아들이 장차 올 것이라는 구절에 제한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 시대와 같은 정치적인 회복이 되돌아오리라고 간절히 바라던 포로 후기 유대공동체의 민족적인 갈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벨하우젠(Wellhausen)은 "신정적 혹은 메시야적 소망은 다윗의 시대가 돌아오리라는 기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에게 있어서 예언은 "예언이 아니라, 목표의 선언"일 뿐이다.[9] 최근에 클레멘츠(R. E. Clements)는 벨하우젠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메시야적' 소망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벨론 포로 이후에 다윗 왕가의 복권과 재건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희망에서 나왔다.[10] … 신약성경이 이런 희망을 지지하는 것으로 호소하고 있는 본문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엄격한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원래 그런 의도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이 본문들의 원래 의도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본문들이 '메시야적 소망의 모판'으로 형성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11]
비(非)비평적 해석법이 역사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주장을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법은 신약성경을 구약의 원 의미와 연결시키는 고리를 풀어버리거나 혹은 최소한 약화시킴으로써 신약성경의 주장을 약화시켜 버렸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다루고 있는 메시야 시편을 예수에 대한 실제적 예언과 간접적 예언을 담은 것으로 보는 문예-역사적 비평가들은 성서 기자를 성령에 감동된 수동적인 도구로 보는 몬타누스적인 영감론과, 신약성경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두 입장을 모두 부인한다. 이들은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만, 시편들이 실제 예언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들은 이 시편들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극히 부분적으로 실제 예언이었으나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삶에서 실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브릭스(C. A. Brigg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시편들은 감각의 느낌을 넘어서 실상을 포옹하였으며, 이스라엘로 더 깊은 현실감을 가지도록 이끌어주는 환상을 담고 있다."[12] 로울리(H.H. Rowley)는 왕의 왕국이 "땅 끝까지" 미치며(시 2:8),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6),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시 72:5)라는 환상은 신앙심이 깊은 낙관주의거나 과장법을 넘어간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 시들은 성전에서 제왕 의식 때에 사용된 제왕시일 수도 있지만 또한 '메시야적인 시'일 수도 있다. 이 시편들은 영감이 충만하여 현재를 인도하고 미래의 희망이 되는 이상적인 왕을 바라보고 있다."[13]
델리취(Franz Delitzsch)와[14] 그의 입장을 깊이 따르는 커크패트릭(Kirkpatrick)은[15] 메시야적 시편들을 다섯 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한다.
(1) 예표적 시편(typical psalms): 근본적으로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날 어떤 모습을 예표하고자 하셨다(시 34: 69).
(2) 예표적-예언적 시편(typico-prophetic psalms): 시편기자들이 당한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며 또한 이 기록들은 아주 상세한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는 것이 되도록 성령께서 형성하셨다(시 22; 40).
(3) 야웨 시편: 하나님의 성육신과 악에 대한 그의 승리를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시편이다(시 18; 50; 58; 93; 96-98)
4) 간접적 메시야 시편(indirect messianic psalms): 다윗의 씨는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나타낸다(시 45; 72)
(5) 순수한 예언적 시편(purely predictive psalm; 시 110). 이 마지막 범주에 대해 델리취는 "다윗이 지은 모든 시편들 중 오직 한 편 즉 시편 110편에서 만이, 다윗이 그의 후손의 미래를 바라보며 그의 마음 속에 메시야를 분명히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16]
그러나 이 접근 방법이 역사와 예언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편에 나타난 메시야적 요소들을 일관성 있고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 이 주석학자들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신약에 인용된 시편들 속에서만 예표적 요소를 찾아내는 데 그치고 만다. 그것은 이들이 예표적 해석 방법이 거리낌 없는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으로 전락하는 것을 분명히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방법론은 충분하지 않다. 예로서, 신약성경(요 2:17)이 왜 시편 69:9절(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하고, 3:1(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은 왜 인용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 신약 저자들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시편의 정하거나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시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정하고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이 시편을 해석하는 가장 적당한 방법처럼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시편을 비역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인 체계 없이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과 예표적 의의를 지니는 단 하나의 역사적 의미만을 찾아내는 안디옥 학파의 해석법은 모두 시편의 해석에 있어서 부적절하다고 결론 짓는다. 이런 방법들 대신 시편 해석에 있어서 정경적 접근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접근 방법은 시편의 역사적 중요성과 메시야적 중요성을 둘 다 중요시한다. 사실 문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편의 인간 주체는 그가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든, 3-7편의 간구자이든, 8편의 인자이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해야 한다.
2. 시편의 정경적 해석법
정경적 접근 방법이라는 것은 정경의 범위가 확대되어 갈수록 본문의 의도가 더욱 깊어지고 명료해진다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마치 구속이 점진적인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처럼, 정경 속에 있는 옛 본문은 점점 성장해가는 정경 문헌의 일부가 되어가면서 상호연관된 점진적 의미의 인식을 거쳐 가게 되었다. 나는 차일즈의 정경적 해석에 명백하게 영향을 받았다.[17] 그러나 나는 차일즈가 <정경으로서의 구약성서에 대한 서론>이란 책(1979)에서 발표한 그의 입장과 세가지 점에서 나의 입장을 구별하고자 한다.
첫째, 차일즈는 본문이 발전되어 가던 문학적 활동의 단계와 본문에 대한 필사적 활동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영감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경적 해석법"에 따르면, 성령의 영감하에서 이루어진 본문과 정경의 발전은 서기관들의 복사 활동에서 이루어진 변화와는 대조된다.
둘째, 차일즈는 역사비평을 통해서 전통의 발전을 추적하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그는 이 방법론이 인위적이며, 결론을 내리지도 못하고, 별 가치도 없는 결과를 만든다는 점도 인정한다. 역사비평에 깔린 전제 중 하나는 사건 발생의 원인으로 초자연적인 역사(활동)를 부인하는 것이다. 차일즈는 이스라엘의 실제 종교사와 그 역사에 대한 정경적 증언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정경적 해석법에서는 이런 불일치가 일어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역사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셋째, 차일즈는 유대적인 성경의 권위가 주후 100년경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하지만, 나는 신약의 맥락 안에 있었던 히브리 성경의 의미를 강조한다.
샌더스(J. Sanders)[18]와 클레멘츠가[19] 주장하는 정경비평에 따르면, 정경은 원래의 역사적 의의를 상실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갔다고 한다. 나는 이와 반대로, 원저자의 의도가 정경 형성 과정 중에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깊어지고 명확해졌다고 믿는다. 나는 차일즈가 본문의 통일성과 수사비평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것과 그들의 정경의 형식을 떠나서는 원래의 문학적 통일성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나는 정경이 형성되던 초기 단계와 성장 단계에 있어서도 본문은 최종적인 문학적 맥락에서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고, 권위가 있으며, 또한 영감되었다고 생각한다.
정경적 해석방법은 본문의 보다 충만하고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충만한 뜻"(sensus plenior)을 찾는 방법과도 유사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 번째로 정상적인 "충만한 뜻"(sensus plenior)의 방법론은 인간 저자가 의도한 것 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주장한다.[20] 정경적 해석법은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 저자의 의도를 분리시키지 않는다. 정경적 해석법에 따르면 원저자는 그들의 주제를 이상적인 형태로 기도와 찬양 속에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받으시도록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계시가 점점 자라가면서, 이 환상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났고 이 환상 속에 항상 잠복한 이상의 정확한 모습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충만한 뜻"(sensus plenior)은 본문의 진정한 역사적 의의가 항상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저자들이 본문의 역사적 용도와 의의를 떠나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기는 풍유적 해석으로 항상 기울어졌다. 이와는 반대로 정경적 해석법은 이후의 계시가 초기의 본문에 더 깊고 명료한 의미를 제시하였다는 입장과 함께 본문의 의미는 구원사를 통하여 연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 번째로 정경적 과정법은 고대본문의 의미가 정경 형성에 있어서 몇 개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분명해지고 깊어졌음을 주장한다. 정경의 발전 단계를 구별하며 본문의 뜻을 더 명료히 만들어 가는 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초자연적으로" 본문의 깊고 거룩한 의미를 찾았다는 것으로 보는 입장과 구별된다.
우리는 시편에 있어서 최소한 많은 구체적인 시편들의 의미와 의의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네 개의 독자적인 발전단계가 있다고 본다. 주석가들은 이것들을 해석할 때 이 네 단계를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네 곳의 전망대에서 산을 보는 것과 같다. 각 전망대에서 우리는 전망을 더욱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편에 대한 정경적 해석법은 연속적인 네 단계에서 시편 본문의 의미는 점점 더 완성되고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본문의 가장 충만한 뜻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정경을 확대해 감으로써, 본문에 대한 인식과 본문의 뜻이 점진적으로 분명해져 가는 데 있어서 네 개의 독특한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원래의 시인에게 있어서 시편의 의미,
(2) 첫 성전 시대와 관련되어 수집된 초기의 시편들의 의미,
(3) 제 2성전 시대와 관련되어 구약정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때의 의미,
(4) 예수를 그리스도로 제시하는 신약성경을 포함한 성경 전체 속에서의 의미.
나는 최근에 시편에 관한 델리취의 시편 주석을 다시 읽으면서 그가 약 100년 전에 나와 거의 유사한 입장을 발견하였음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시편의 주석가들은 시편기자의 관점으로나, 구약 교회의 관점으로나, 혹은 현 세대의 교회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주석가는 일차적으로 이 세 관점을 구별해야 하며 이와 함께 두 성경을 구분하고, 그리고 계시의 발전에 있어서 다른 단계들을 일반적으로 구별해야 하며, 구속 계획의 인식에 있어서 다른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21]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델리취는 너무 자세하게 관점들을 구분하는 데 치중하여 계시의 발달 과정 사이에 나타난 본문 사이의 유전인자적이며 유기적인 연속성을 발견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계시에 있어서 세 개의 독특한 단계를 인식함으로써 그는 계시의 발전과 많은 시편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여러 단계들을 구분해야 한다는 나의 인식을 예고하고 있었다.
시편 해석에 대한 나의 정경적 해석법은 최소한 네 가지의 확신에 근거한다.[22]
첫째로 그것은 역사 속에 존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통된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가정한다. 공동체의 지식은 정경이 형성되어 가던 동안 더 넓어졌지만, 이전의 지식과 믿음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 "주어진" 믿음을 보전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봄철에는 유월절과 초실절 축제를, 가을에는 장막절 축제를 지키면서 선조들의 유산을 낭송하고 기념하도록 교육받았다(출 12:26-27; 23:14-17, 신 16:1-17;26: 1-11;31:10-13).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오멜의 만나를 담아두거나(출 16:32), 길갈에 돌비를 세움으로써(수 4:20-24) 그들의 역사에 대한 증거들을 보전하였다.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구약시대가 종결되던 때까지 세대마다 남자 유아에게 할례를 베풀어 그들의 공통된 믿음을 전수하였다.
세대에 세대를 이어 남자 아이들에게 행해졌던 할례를 통해 그 공통된 믿음이 전수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믿음 공동체의 세대별 연속성은 변함없는 과거 역사를 통해서 형성되었고 그 공동체에 덧붙여진 지식은 선조로부터 내려온 유산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전의 본문들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함으로써 점진적인 계시가 유기적이고 유전인자적인 통일성을 이루었다는 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방법은 정경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그 궁극적인 저자라는 성경적 증거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거룩한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많은 개인들을 택하여 영감을 주시고, 그들은 개인적으로 독특한 하나님과의 체험을 통해 이미 수납된 계시를 더하여 갔다. 바로 이 공통적이며 거룩한 영감 때문에, 우리는 점진적 계시에서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그 본문의 정경성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이 성경전서의 저자이기 때문에 성경 내의 어떤 부분도 성경의 전체적 문예적 맥락의 빛으로 연구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 방법은 정경이 발전되어 감에 있어서 보다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초기에 형성된 본문은 그 구성요소들 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더 큰 단위로 결합되어 갔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초기의 본문과 약속한 본문의 더욱 충만한 의미는 성경전서의 빛 속에서 해석하지 않고는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
끝으로, 이 해석법은 정경이 신약의 마지막 책이 첨가됨으로써 종결되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수납된 정경은 어떤 본문을 해석하든지 간에 최종적인 문학적 뼈대를 제공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경적 해석법에 있어서 유기적으로 연관된 네 개의 단계들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네 가지 전제를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해석법을 시편에 적용해 보자.
3. 시편의 원저자의 의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시편의 원저자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편에 있어서 인간적인 주인공이 왕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확고한 결론에 이르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는 소위 표제라 불리는 외증이며 둘째로는 시편 본문들의 내증이다. 마소라 텍스트는 다윗 왕을 저자로, 그리고 아마 인간 주인공으로 간주하며, 73개의 시편을 그에게 돌린다. 칠십인역(the LXX)은 84개의 시편을 다윗의 작품으로 본다.
"다윗의"(ledawid)에서 전치사 le는 아랍어에서와 같이 저작권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이 구절을 "다윗이 쓴"(by David) 것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게세니우스-카우치-코울리(Gesenius-Kautsch-Cowley)의 주장은 몇 가지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129c 항).
첫 번째로 포로 이전시대와 포로 후시대를 이어온 구약의 전통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찬송가를 만든 작곡자요 후원자로 소개한다. 예로서 사무엘서에는 시편 18편을 가지고 "다윗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라고 말한다(삼하 22:1). 이것은 시편 18편의 표제어 "다윗의 시"(ledawid)와 동일하다. 또한 14개의 시편 표제들은 다윗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이 그로 이 시편들을 쓰게 하였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역대기자는 다윗이 레위인들로 하여금 모세가 준 의식을 음악으로 더욱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다양한 음악 단체를 만들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찬송가를 만들었다고 한다(역상 16:1-43).[23]
또한 북이스라엘의 기록 선지자들 중 초기의 선지자 중 한 사람은 사람들이 다윗처럼 악기를 뜯으면서 소일한다고 불평하였다(암 6:4). 다윗의 저작에 대한 동일한 설득력 있는 견해는 초기 유대 전통과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벤 시락(Ben Sirach, 기원전 190년 경)은 전통을 시 속에 담았다. "다윗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거룩하신 분, 지극히 높은 분에게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였고, 마음을 다하여 찬양을 드리며, 그의 창조주를 사랑하였다"고 말한다(집회서 47:8-9). 신약은 다윗을 시편 2, 16, 32 69, 109, 110편의 저자로 인용한다. 110편의 경우 예수께서는 다윗이 이 시편을 썼다는 가정 위에 메시야가 다윗보다 더 위대한 자라고 가르친다(마 22:43-44). 정경이 완성된 후에는 이 정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수많은 입장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고대근동문헌들은 시편의 고대성을 지적함으로써 이 만장일치적인 성경적이며 고대적인 전통을 점점 더 강하게 지지해 준다. 궁켈(H.Gunkel)은 이스라엘의 찬송가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노래 형태들과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증하였다.[24] 시편들과 유사한 수메르의 찬양들도 음악적 부호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편에 포함된 음악적 기호를 히브리어 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수메르 노래에 포함된 음악적 기호 또한 수메르 학자들이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25] 모빙켈(S. Mowinckel)은 성경의 내증으로 시편들이 제 1성전의 제의 의식에서 사용되었음을 증명했다.[26] 다후드(M. Dahood)는 자신의 논증을 너무 확장시켜 그의 연구에 흠을 내긴 했어도 우가릿 문헌에서 언어학적 증거들로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 하였다.[27]
다윗이 시편의 절반 이상을 넘는 시편의 저자라는 표제의 증거와 그가 이 시들의 인간적인 주인공이라는 증거 외에도, 시편은 내증을 통해 다윗의 저작권을 지지해 준다. 시편 2, 1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을 제왕시로 분류한 궁켈의 양식비평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켈과 모빙켈과 또 다른 사람들의 연구방법을 따르면서, 소위 탄식시로 불려지는(약 50개의 시에서) 간청자는 역시 왕이라고 주장한 이튼(Eaton)의 기여도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다.[28] 이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궁켈은 다음 요소들을 제시한다. 모든 민족은 시편 기자의 감사에 참여한다(시 18:50; 57:10; 138:1,4; 119:46). 그의 구원은 막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22:28f).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계적인 심판을 구한다(7:7, 9; 56:8; 59:6; 59:9; cf 43:1).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민족들에게 승리를 얻는다고 자신을 묘사한다(118:10-12). 그는 적들에 대항한다(3:7; 27:3; 55:22; 56:2f; 59:6; 72:4; 109:3; 120:7; 140:3, 8). 그는 높이 들린 들소의 뿔처럼 승리를 거둔다(92:10).
궁켈이 제시한 이 요소들 외에도 우리가 더 추가할 수 있다. 화자는 지속적으로 주님을 찬송하겠다고 서원한다. 그는 수많은 축제 회중들 앞에 서있다(22:33, 26; 40:10f). 그의 머리는 높이 들렸다…그의 영광이 특별히 언급된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복을 받았고… 그는 자신을 도우는 자로서 하나님을 언급하며, 그의 전쟁과 연관시킨다... 대적들은 군사적이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그의 나라나 백성 보다 그 자신을 개인적으로 노리고 있다.[29]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궁켈이 너무나 힘들게 분석하고 분류한 다양한 시편의 유형들을 넘어서, 원래의 시편에서 왕이 인간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 시편들이 탄식시든, 감사시든, 찬양시든, 혹은 다른 여러 유형의 시이든지 간에 주인공은 왕이다.[30] 나아가 우리는 왕이 이상적으로 표현되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4. 초기 시편들이 수집되던 때의 의미
우리는 이제 "이 시편들이 역대하 29:30과 시편 72:20과 같은 구절에 언급된 초기의 정경적 수집품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으며, 제 1성전의 예배와 연관하여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편에 대한 정경적 접근의 두번째 논의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살아 있는 왕이 이 찬양시들과 간구시들에서 인간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시편에서 여러 번 암시되고 있는 다윗 언약(특히 89편)은 많은 시편들에 등장하고 있는 개인은 바로 다윗의 아들이라는 확신에 대한 견고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 이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들을 약속하며, 그를 통해 다윗의 집과 왕국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서며, 그의 보좌가 영원히 견고해질 것을 약속하고 있다(삼하 7:12-16). 이런 약속의 관점으로 본다면, 만약 다윗이 그가 쓴 수많은 유형의 제왕시가 주의 성전에서 다윗의 집을 위하여 사용되도록 의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제왕시들은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시편 해석에서 제왕적 해석을 방대하게 하는 학자들은 왕이 백성들을 대표한다는 점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와 그의 뜻과 연관된 모든 것은 백성들과 연관되며, 순수하게 개인적인 일로 나타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모빙켈이 잘 말하였다.[31]
이 시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의 문화에서는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민주화된 서구에서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나 적절한 것이며,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 시대의 왕국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살아있는 왕이 대부분의 시편들에서 '인간 주인공'으로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믿는다. 왜냐하면 고대근동문학에서 왕은 이방 제의의 보호자였고(정확하게 이스라엘의 경우에 그러했다), 왕은 수도 없이 많은 시편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궁켈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기도들과 탄식시들의 문헌들은 "엄청나게 많이 있다"고 한다.[32]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왜 이스라엘은 이렇게 이른 시절에 이 시편들을 다윗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일반적인 사람이나 또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것으로 재해석하였겠는가? 이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은 고대근동언어학자들과 문학자들의 공통된 인식 즉, "고대근동종교사회에서 왕은 구심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33]
네 번째로 다윗 저작으로 표시되지 않은 많은 시편들에서 인간적인 주인공은 왕이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 예로서 고라 자손과 연관된 시편 44편에서 왕이 패배한 이스라엘 군대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는가?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6절)라고 대변하는 사람으로 왕보다 더 적절한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시편과 다른 여러 시편에서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와 단수 대명사인 "나" 사이에 유동적인 상호교환이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예로서 이 시편은 "우리는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우리의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들었나이다"로 이 시편은 시작한다. 곧 이어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4절)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 주인공이라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설명이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시편이 고라의 자손에 의해 쓰여지긴 했어도 인간 주인공은 왕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볼 때, 다윗에 의해서 쓰여지지 않은 다른 시편들도 이스라엘의 왕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다섯 번째로 버크랜드(Birkland)[34] 는 많은 시편에서 원수들이 이스라엘의 국제 정치적인 적들이었음을 잘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것은 크라우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주인공은 왕을 가리킴을 보여준다.[35] 따라서 우리는 대부분의 시편들이 제 1성전 시대에서 왕을 위하여 제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다윗의 보좌를 잇는 살아 있는 후계자들이 다윗의 집안과 연관된 메시야적 환상 속에서 크고 장엄하며 자줏빛 망토로 입혀졌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왕마다 여호와의 신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왕들에 대해서 링그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은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로서, 여호와에 의해서 세움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다. 그는 그의 나라에서 의와 공의를 따라 통치해야 하고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인 비와 풍요를 전수해 주어야 한다. 왕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고 온 세계를 다스리며 그의 보좌는 영원히 서게 된다."[36] 왕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고난받으며, 하나님의 명령이신 "내게 구하라(내 아들아) 내가 열방으로 유업으로 주리라"(시 2:8)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그레스만(H. Gressmann)은[37] 이스라엘이 통치하고 있는 왕을 메시야적인 인물로 연결시킨 것은 이집트의 왕 바로를 메시야적인 기대와 연결시킨 이집트 문헌에도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포로기까지 다윗의 후계자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야웨의 왕으로서 그가 등극할 때 받았던 옷을 입을 수 있을 만큼 넓은 어깨를 가진 자가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많은 형태의 시편들은 제 1성전시대를 위해서 작성되었고, 제 1성전 시대에 쓰여졌고, 이스라엘의 정경적 문학의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다윗의 후계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주의 성전이 파괴되고 다윗의 집이 바벨론으로 유배당할 때까지 그 위치를 만족스럽게 채우지 못하였다.
5. 구약성경이 완성된 때의 시편의 의미
시편을 해석하는 데 세 번째 유익한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제왕시들은 구약의 정경을 현재 우리가 전수받은 형태와 내용으로 만든 편집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달리 말하자면, "이 시편들은 포로 후기, 즉 주전 400년에서 200년 사이에 편집한 구약 정경의 폭 넓은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학개 선지자는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현존하는 다윗 집안을 메시야적 소망과 끊임없이 연관시켰다. 포로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이런 시각은 주님께서 학개를 통하여 다윗의 집에 주신 말씀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약하자면 이스라엘에게 가장 뚜렷한 연속성의 개념을 제공하였던 두 기관인 다윗의 집안과 주의 성전은 포로 후기 초엽에 새롭게 소생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스룹바벨과 그의 후임자는 그들에게 부과된 메시야적 기대에 계속 미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후, 구약의 마지막 정경 선지자인 말라기는 주님께서 자신의 날개 아래에서 자기 백성을 치료하시는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바라본다. 그 때는 자신의 역사적인 지평을 넘어서 종말론적인 미래가 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구약의 정경이 완성되었을 때 다윗의 아들 중 한 명도 여호와의 보좌 앉아 있지 못했으며 다윗 자손의 후손들 중에 한명도 그 소망에 연결되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정경의 최종적인 형태 속에 담긴 제왕시들은 우리가 신약에서 해석된 것을 보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하게 예언적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안전하게 내리게 된다. 이 옛 본문들에 대한 예언적 해석은 이 시편들의 원래 의미와 저자의 의도를 떠난 재해석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실에 훨씬 부합하는 해석이었다. 벤첸(Aage Bentzen)의 다음과 같은 관찰은 아주 적절하다. 즉, "이 등극시(즉, 제왕시)에 대한 '제의적 해석'과 '종말론적 해석'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38]
만약 우리가 이 시편들이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가면서, 유전인자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클레멘츠가 한 아래의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시편들에 대한 메시야적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해석의 차원을 향해 동일한 자극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유대 왕국에 왕이 없던 시대에 이제는 더 이상 쓸모 없게 된 내용들처럼 보이는 제왕시의 본문을 시편 속에 포함시킨 이 편집자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분명히 이것들이 이스라엘에 필요하다는 진정한 희망을 가지고 이런 작업을 하였다고 결론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의 원래의 뜻을 적용시킬 수 없었던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이것들을 보전한다는 것은 바로 희망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경의 형성은 왕권을 미래와 연관된 이념과 영상으로 투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39]
그렇지만, 중간사 시대의 문헌과 신약성경은 탄식시의 제왕시적인 성격이 이 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이리하여 이스라엘은 고통 받는 메시야에 대한 인식을 잃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마 이 시편들은 모빙켈이[40] 주장한 바와 같이 이제 유대 회당에서 민주화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이 시편들의 원 의미와 의의는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시편들의 원래 의도를 바로 이해하도록 고쳐주셨다. 요약하자면, 신약은 이 오래된 시편들에 새로운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래 의미, 진정한 의미로 돌려놓고 있다. 우리는 구약의 최종 편집자들이 어떻게 탄식시들을 해석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것들의 원래의 의미를 따라 이해했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나는 세 가지 확신에 근거하여 위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정경형성의 점진적인 발전이 유전인자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갖고 있다. 둘째, 이사야 53장과 같은 후기의 예언들이 뭇 나라 위에 높아진 여호와의 종은 고난을 받으며 죽을 것을 말한다. 셋째, 원시복음은 메시야가 사단에게 고난을 받으며 승리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6. 신약의 관점에서 본 시편의 의미
따라서 우리는 정경형성의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시편들이 제왕적이며 메시야적인 의미를 지속하여 갔으나, 예언적인 의미도 또한 지니게 되었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하고 노래하기에 합당한 미래의 다윗 후손에게 희망을 가지며 기다려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이 소망은 성취되었다. 이리하여 신약성경의 문예적 맥락(literary context) 속에서 시편들은 최종적이고 충만한 의미를 찾게 되었다. 이 네 번째의 최고봉에서 우리는 시편의 완전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윗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는 이 시편들을 이루셨다. 죄를 자백하는 모습과 같이 왕을 이상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는 각 시편의 이 요소들은 시편이 이상적인 왕에 훨씬 못 미치는 이스라엘의 왕을 그린 포로후기 시대로부터 역사적인 달걀 껍질(historical eggshells)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시편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오직 그 만이 의를 위해 고난받고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승리자로 나타나는 이상적인 왕의 모습으로 기도할 수 있는 분이다. 교회의 머리로서 그는 이 기도에서 신자들을 대표하고 있다. 더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들의 머리되신 대표와 함께 이 기도들을 정당하게 할 수 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시편에서 기도하는 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편은 가장 진실한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책이다"라고 그는 말한다.[41]
* 저자 브루스 왈키는 현재 리젠트 대학(Regent College)과 리폼드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 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도 가르쳤다(M.A., Ph.D., Harvard University, Th. M. Th.D., Dallas Theological Seminary).
* 편집자 주: 이 글은 Bruce K.Waltke, "A Canonical Approach to the Psalms." In Tradition and Testament: Essays in Honor of Charles Lee Feinberg. Ed. By J.S. Feinberg &P.D. Feinberg. Chicago: Moody, 1981. Pp.3-18을 번역한 것입니다.
[1] J. M. Neale and R. F. Littledale, A Commentary on the Psalms: From Primitive and Mediaeval Writers (London: John Masters, 1884), p. 77.
[2] Saint Augustine, Expositions on the Book of Psalms,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Philip Schaff, ed. 8 vols.(New York: Christian Literature Co., 1888) 8:1.
[3] Neale and Littledale, p. 107.
[4] E. W. Hengstenberg, Christology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Kregel, 1928,1970).
[5] Arno C. Gaebe lein, The Jewish Question (New York: Our Hope, 1912).
[6] David Baron, Types, Psalms and Prophecies, Amer. ed.(New York: Amer. Bd. of Missions to the Jews, 1948, 1907).
[7] David Cooper, Messiah: His First Coming Scheduled (Los Angeles: Biblical Research Soc., 1939).
[8] J. B. Payne, "Psalms," in Zondervan's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Merrill C. Tenney, ed.(Grand Rapids: Zondervan, 1975), pp. 940-43.
[9] Julius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Israel (Edinburgh: A. &C. Black, 1885), p. 415. See also G. R. Berry, "Messianic Predictions," JBL (1926): 232-38.
[10] Ronald E. Clements, Old Testament Theology: A Fresh Approach (London: Marshall, Morgan and Scott, 1978), p.150.
[11] Ibid.
[12] Charles Augustus Briggs, Messianic Prophecy (New York: Scribner's, 1886), p. 63.
[13] Harold Henry Rowley, The Faith of Israel (Philadelphia, Westminster, 1957), p. 192.
[14] Franz Delitzsch, Biblical Commentary on the Psalms, trans. Francis Bolton(Grands Rapids: Eerdmans, 1952), pp. 68-71.
[15] A. F. Kirkpatrick, The Book of Psalms (Cambridge U., 1916), pp. lxxvi-lxxxv.
[16] Delitzsch, p. 66.
[17] Brevard S. Childs, Biblical Theology in Crisis (Philadelphia:Westminster, 1970).
[18] James Sanders, Torah and Canon (Philadelphia: Fortress, 1972).
[19] Clements, p.150.
[20] 브라운(Raymond E.Brown)은 'sensus plenior'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간 저자에 의해서 명백히 의도되지 않았지만 성경본문의 말씀 속에 존재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추가적이고 더 깊은 의미이다. 이것들은 추가적인 계시나 계시 이해의 발전에서 연구해 볼 때 더욱 깊은 뜻이 드러나게 된다.", 라솔(William Sanford Lasor)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The Sensus Plenior and Biblical Interpretation" in Scripture, Traditional Interpretation, eds. W.W. Gasque and W.S. LaSor(Grand Rapids: Edermans, 1978), p.270.>.
[21] Delitzsch, p.64.
[22] 나는 부분적으로 슐래더(Adolf Schlatter)의 글을 인용했다. "The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and Dogmatics," in The Nature of New Testament Theology, ed. Robert Morgan(London:SCM, 1973), pp.117-66.
[23] W.F. Albright, Archaeology and the Religion of Israel (Baltimore: Johns Hopkins, 1953, pp.125-26) and H.Ringgre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Old Testament, 3:164) 또한 다윗을 이스라엘 찬송가의 선구자로 본다.
[24]Herman Gunkel, Einleitung in die Psalmen (completed by Begrich [Gottingen:Vandenhoeck & Ruprecht, 1933]
[25] Samuel Noah Kramer, The Sumerians (Chicago: U. of Chicago, 1963), p.207.
[26] Sigmund Mowinckel, The Psalmns in Israel's Worship, 2 vols. (New York: Abingdon, 1962).
[27] Mitchell Dahood, Psalms I (New York:Doubleday, 1966).
[28] John H. Eaton, Kingship and the Psalms (London:SCM, 1976).
[29] Ibid., pp.23-24.
[30] 나는 여기에서 ledawid를 'by David'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나와 견해가 다른 해석도 원 자료가 이상적인 왕을 묘사하려고 했다는 점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다. 모빙켈(1:77f; 2:98-100)은 dawidum이 반(半) 유목민족에서 특히 더 족장이나 왕을 의미했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모빙켈은 이 구절은 "다윗의 제의적 의식(통치하는 왕)으로 예정되었다"**로 해석한다(Psalm Criticism Between 1900 and 1935" Vetus Testamentum 5 [1995]:18). 토마스(D.R. Ap-Thomas)는 dwd를 직무의 제목으로 특히 "대리인, 주권자, 통치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Saul's 'Uncle, Vetus Testamentum 11[1961]:244f). 아이스펠트(Eissfeldt)는 이 구절을 "다윗의 공적을 찬양하여"라고 해석했다(Old Testament Introduction [1965] p.451). 다글리쉬(Dalglish)는 전치사 l을 모호하게 "of David"로 해석했다(Psalm Fifty-One [Leiden: E.J.Brill, 1962], p.240). 따라서 이것은 "다윗에 속한 수집"으로 "다윗을 위한 시편"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나는 이 글의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 시편 68편의 구조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는 내 제자, 브루배춰(Gordon Brubacher)의 도움을 받았다.)
[31] Mowinkel, 1:42-61.
[32] 궁켈(Gunkel, Einleitung, p. 161)과 모빙켈 역시 같은 주장을 한다. "이 모든 사실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이스라엘, 바벨론과 이집트도 마찬가지로, 시편은 원래 모든 백성이나 온갖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왕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Mowinckel, 1:77).
[33] 여호와를 위해서 일년 마다 열렸던 즉위 축제식을 웁살라 학파의 학설을 따라 비교사적 관점으로 신화와 제의 학교로 본 모빙켈을 비판한 나의 글은 나의 앞 글 "Israel, Religious of," in The New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II를 보라.
[34] H. Birkeland, The Evildoers in the Psalms (Oslo: I. Kommisjon has J. Dybwad, 1955), pp.12 ff
[35] H.J.Kraus, Psalmen, 1(Neukirchen Verlag, 1961): 40-53(Excursus 2)
[36] Helmer Ringgrenm, The Messiah in the Old Testament (Chicago: Allenson, 1956), p.20.
[37] Hugo Gressman, Der Messias (G...ttingen: Vandenhoeck &Ruprecht, 1929), pp. 1-7, 415-23.
[38] Aage Bentzen, King and Messiah (London: Lutterworth, 1955), p.37.
[39] Clements, p.151.
[40] Mowinkel, 1:78-80.
[41] Dietrich Bonhoeffer, Life Together, trans. John W.Doberstein (New York:Harper and Brothers, 1954),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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