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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간행- 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112 08.01.23 23: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간행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머리말


   포덕 21년(1880년)경에 이르면 인제군·정선군·양양군·상주군·청송군 등지에 도인 수가 크게 늘어난다. 그리고 중간 지식층이 많이 들어왔다. 이들은 동학의 신념 체계를 알고자 경전을 찾았지만, 필사(筆寫)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필사할 때 탈자도 생기고 오자도 들어간다. 문제가 없지 않았다. 대신사 재세시에도 이런 일이 생겨서 포덕 4년(1863년) 11월경에 해월신사를 불러 경전을 인쇄해 보라고 당부하였다. 준비 작업을 시작했으나 한달 후인 12월 10일에 대신사가 체포되고 이듬해인 갑자년 3월에는 순도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자체가 위기에 빠져 버렸으므로 경전 간행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포덕 21년(1880) 4월 하순이 되었다. 해월신사는 인제군 남면 갑둔리에서 스승님의 당부를 실현시키기 위해 경전(經典)을 간행하자고 발의하였다. 몇몇 접에서 상당한 비용을 모았다. 『동경대전』만이라도 간행하게 되었다. 5월에 착수한 판각 작업 결과 6월 14일에 100여 부를 출간하였다. 이 『동경대전』을 경진판(庚辰版) 또는 갑둔리판(甲屯里版)이라고 한다. 이듬해인 포덕 22년(1881)에는 단양 천동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경진판 『동경대전』


   『해월선생문집』에는 인제 남면 갑둔리 김현수(金顯洙, 字 致雲)의 집에서 포덕 21년 5월 9일에 간행소를 설치했다고 하였다. 김치운이 살던 집터는 2000년까지 남아 있었다. 군부대에서 이 일대를 사격 연습장으로 만들면서 민가는 모두 철거시켜 지금은 흔적도 없다. 포덕 120년(1979년) 11월에 처음 답사했을 때 후손들로부터 집 구조를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조상 산소를 돌보기 위해 김씨 일가 몇 분이 모였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개울가에 미음자(?) 형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서쪽에 대문이 나 있었고 왼쪽(산 쪽)에 안채가, 바른쪽(개울 쪽)에 사랑채가 있었다 한다. 해월신사는 이곳에 오면 사랑채에 머물렀으며 판각 작업을 지도할 때에도 사랑채에 있었다 한다. 해월신사는 17세∼19세에 조지소(造紙所)에서 일을 했다. 때때로 거래처에 종이를 가져다 주는 일도 하였다. 출판하는 곳과 거래하면서 인쇄 과정을 눈여겨 보았다. 이때 본 기억을 되살려 판각 작업을 지도했던 것이다. 손자 최익환(崔益煥)은 육임첩(六任帖)에 찍혀 있는 전자체(篆字體) 해월장(海月章)은 신사 자신이 새긴 것이라 한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해월신사는 만드는 데 재주가 남달랐다. 작업은 한 달 만인 6월 14일에 마쳤다. 100여 부를 출간했다고 한다. 15일에는 봉고식(奉告式)을 올렸다.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발문 내용은 알 길이 없다. 다행히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 별공록(別功錄)이 실려 있다. 힘을 기울였던 분들이 일목요연하다. 인제접, 상주접, 정선접, 청송접 도인들이 그들이다.
   아! 스승님의 문집을 간행하려 한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제 나는 경진년(庚辰年, 1880년)을 맞아 강시원·전시황 및 여러분과 더불어 판각하고자 발론하게 되었다. 각 접 중에서 다행히 내 뜻에 찬동하여주어 판각소(版刻所)를 인제군 갑둔리에 정하고 뜻한 대로 일을 마치었다. 비로소 스승님의 도와 덕을 적은 편저(編著)를 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어찌 흠탄(欽歎)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각 접에서 비용을 성출한 이들의 별록을 특별히 만들어 그 공을 차례대로 적는다. 경진년 중하(仲夏) 도주 최시형이 삼가 기록한다. 상주 윤하성(尹夏成) 40금, 정선접중 35민, 인제접중 130금, 청송접중 6민. 각판할 때 책임을 맡았던 이는, 都廳 崔時亨. 監役 姜時元, 全時晄. 校正 沈時貞, 全時奉, 劉時憲. 直日 張道亨, 金文洙, 張炳奎, 李晉慶. 接有司 金錠浩, 辛時來, 黃孟基, 趙時哲. 收有司 韓鳳辰, 洪時來, 辛時一, 金鎭海, 李廷鳳. 治板 金館浩. 侵梓 沈遠友, 崔錫夏, 全允權. 運糧 張興吉, 金寅相, 金孝興, 李千吉. 書有司 全世仁. 供饌 李貴祿, 姜基永.

단양서 『용담유사』 간행


   1881년(辛巳) 6월에는 단양 남면 천동 여규덕의 집에서 국문가사(歌詞) 모음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역시 인제접에서 비용을 전담하였다. 이곳 샘골[南泉洞]은 경상도와 충청도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소백산 줄기의 하나인 도솔봉(兜率峰, 1342m) 북쪽 산자락에 있다. 해월신사가 살고 있었던 송두둑(松皐)에서 2킬로미터 정도 들어간 골짜기 안 왼쪽 언덕 위에 천동(샘골)이 있었다. 『해월선생문집』에는 “신사년(1881) 6월에 본읍 천동(泉洞)에 사는 여규덕의 집에 가서 가사 수백 권을 간행하여 각처에 반포했다.”고 하였다. 간행 작업에 참여했던 구암(龜菴, 金演局)은 『별기시천교역사』에서 “인제접에서 (비용을) 마련하여 수백 부를 인쇄했다.”고 하였다. 『시천교종역사』에도 “인제접에서 인쇄 비용을 모았으며 김연호, 장춘보, 김치운, 이은보, 김현경, 장세원 등 여러 사람이 일을 맡아 보았다.”고 했다. 이때 간행한 『용담유사』는 판본도 전해지지 않아 규격이나 지질 그리고 각자(刻字) 상태를 알아 볼 길이 없다. 여규덕의 집은 높은 산자락 언덕 위 마을 오른쪽에 있었다. 당시 30여 호가 넘었던 이 마을은 지금 10여 호밖에 남아 있지 않다. 1979년 12월 27일에 필자는 이곳을 찾아갔다. 하얀 눈이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이 날 조중관(趙重寬, 1917)씨는 환갑을 맞아 잔치를 벌였다. 여러 고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규덕은 여운형(夢陽, 呂運亨)의 백부였다고 하며 조부의 묘소가 마을 뒷산에 있다고 했다. 조대희(趙大熙, 1917년) 등 몇 사람은 여규덕의 집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마을 오른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터는 증언자 4명이 제각각이다. 한 분은 길 위 무덤 옆이라 하고, 한 분은 무덤 앞 바로 길 아랫집이라 하고, 또 한 분은 10m 가량 더 가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분은 길 아래 두 번째 집이라고 한다. 그 뒤에도 두 차례 찾아갔으나 여전히 제각각이다.
   각판·인쇄·제본을 하려면 사랑채가 있어야 한다. 이 중 세 집은 사랑채가 없었다. 길 아래 두 번째 집에 사랑채가 있다. 규모도 커 보였다. 이곳이 여규덕이 살던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앙총부는 1998년 3월에 『용담유사』 간행을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여규덕의 집 자리를 확인할 수 없어 천동 마을 입구에다 세웠다.

잘못된 구송설


   『천도교서』 1865년 조와 1880년 조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해월이 구송(口誦)하여 간행하였다고 하였다. “선시(先時)에 동경(東經)과 유사(遺詞)가 대신사의 피해(被害)되심을 경(經)하여 이미 화신(火燼)에 속하고 무여(無餘)한지라 신사 염구영회(念久靈會)하시다가 곧 『동경』과 『유사』를 구호(口呼)하사 인(人)으로 하여금 서(書)케 하시다.”고 했다. 해월신사가 구송했다는 이 기록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해월신사가 구송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복원했다면 문제는 이상하게 되어 버린다. 즉 해월신사의 글이 되어 버린다. 천도교인들은 원본대로 구송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학계에서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원본대로 구송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보장하느냐고 따질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근거도 없이 구송설을 주장하는 것은 금물이다. 사실상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구송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본에 의해 간행되었다.
   1880년에 집필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나 1906년에 필사된 『해월선생문집』에서는 구송설을 찾아볼 수 없다. 『해월선생문집』의 경우 “6월 어느 날에 강시원·전시봉(全時鳳)·김시명과 함께 인제 김현수의 집에 가서 『동경대전』 100여 권을 간행하여 각처에 반포했는데,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 본읍의 접(接) 중에서 부담하였다. 신사년(1881) 6월에는 본읍 천동(泉洞)에 사는 여규덕의 집에서 가사(歌詞) 수백 권을 간행하여 각처에 반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목천판(木川版) 『동경대전』의 발문에 보면 원본에 의해 간행된 것임을 밝혀 주고 있다. “아, 선생께서 포덕하실 그 때 성덕에 잘못 전함이 있을까 염려하여 계해년에 이르러 친히 시형에게 늘 출판하라고 말씀하였다.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로 넘어와 갑자년의 불행을 당하게 되자 그 이후 세운은 침체되고 도세는 쇠퇴하여 (미루게 되어) 2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났다.”고 하였다. ‘친히 시형에게 출판하라고 늘 말씀하였다’면 원본을 주면서 인쇄하도록 부탁했을 것이다. 특히 ‘성덕에 잘못 전함이 있을까 염려하여’ 인쇄하도록 부탁했다면 잘 정리된 원본을 주었을 것이다. 1880년에 『동경대전』을 간행할 당시 김연국은 갑둔리에 사는 종형(從兄)인 김연호의 집에서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심부름을 하였다. 그는 1907년 10월에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간행한 『동경대전』과 1908년에 시천교에서 간행한 『동경대전』에 발문을 썼다. 천도교 중앙총부 간행 『동경대전』 발문 중에는 “여러 원본들을 모두 거두어 비교하여 살피고 나니 십중 팔구는 잘못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시천교가 간행한 『동경대전』 발문에는 “해월 성사는 … 혹시 성덕에 잘못됨이 있을까 염려스러워 흩어져 있는 편저들을 거두어 하나로 모아 대성기궐(大成奇厥)하는 데 힘을 썼다.”고 하였다. 낱권으로 된 ‘여러 원본들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원본들을 모아 검토했다는 말이다. “흩어져 있는 편저들을 거두어 하나로 모아 대성기궐하는 데 힘을 썼다.”고 한 것은 낱권으로 만들어진 글들을 모아 『동경대전』이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원본을 가지고 출판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용담유사』의 사투리


   『용담유사』에는 충청도식 표기가 몇 군데 보인다. 이를 근거로 대신사의 글이라고 믿기 어렵다는 이도 있다. 대신사는 경상도 사투리로 『용담유사』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충청도식 표기가 섞였다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컨대 경상도식으로 「룡담가」라고 해야 할 곳에 충청도 표기로 「용담가」라 한 곳이 있다. 경상도 사투리 표기가 충청도식 표기로 바뀐 것은 어찌하여 그리 되었을까. 이 점이 해명되지 않으면 『용담유사』는 대신사의 글이라고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당시의 작업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된 글이라 글자를 옮겨 한 자 한 자 확인하고 쓰게 된다. 그러나 『용담유사』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국문은 음을 정확히 불러 주면 받아쓰는 데 문제가 없다. 직접 보고 쓰는 것보다 훨씬 능률이 오른다. 불러 주면 문장을 빠트리는 일도 적어진다. 필사할 때 한 사람은 불러 주고 한 사람은 받아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불러 주는 사람도 충청도 사람이고 받아쓰는 사람도 충청도 사람인 데 있었다. 경상도 사람이 불러 주었다면 충청도식 표기로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러 주는 사람도, 받아쓰는 사람도 충청도 사람이어서 부지불식간에 충청도 표기가 된 것이다.

결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출판하자 경전을 대하는 도인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필사본 경전을 대할 때의 자세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인쇄물이 주는 성스러움과 권위가 도인들에게 달리 느끼지게 되었다. 같은 글이라도 필사본과 인쇄본은 천양지차다. 인쇄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대하는 느낌은 필사본을 대하는 느낌과는 비교가 안 된다. 다른 종교의 경전은 성경(聖經)이라 한다. ‘신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이다. 불교 경전은 제자들에 의해 여시아문(如是我聞)한 것을 추려 모아 만들었다. 예수교의 성경도 제자들의 구전을 모아 만들었다. 현재의 『신약성서』가 정전(正典)으로 공식화된 것은 서기 397년에 이르러서다. 그 권위는 대단하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대신사가 직접 쓴 글이다. 살아 있는 대신사의 목소리가 담긴 글이다. 우리가 추구하려는 신념 체계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떠나서 찾을 길이 없다. 바른 신념 체계를 세우려면 직접 경전을 통해서 대신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신인간 145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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