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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도암 이재 초상
분수와 염치를 가려서 세상을 깨끗하게 살아온 뼈대 있는 선비의 지성과 그 인간상이 도암의 초상화 한 폭
속에 살아서 넘쳐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한국 사람의 얼굴 치고는 눈과 코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고도 입체적이어서 이 초상화의 필 자는 작품 효과를
올린 것인지는 모르지만 깊은 주름살에 새겨진 어질고도 굳건한 양식의 그림자와 형형하게 빛나는 맑고 큰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전신傳神의 묘를 다한 명작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검은 유건과 아백의 포의가 보여 주는 소담 간결한 색감이라든가 반백을 넘어선 눈썹과 수염의 기품있는
정세한 표현에서 우리는 절도있는 한국 선비의 아름다움과 한국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기쁘다.
털오라기 하나도 놓칠세라 정성을 기울인 얼굴의 표현에 비하면, 몸체의 의복 주름은 너그럽고도 충신해
보이고, 또 목 언저리와 얼굴 사이는 흰 바탕으로 마치 산곡간에 피어나는 안개처럼 공간을 감싸서 정기 있는
안색을 한층 또렷이 한 조형효과는 주목할 만 하다.
도암 이재 선생은 조선 숙종 6년(1680)에 나서 영조 20년(1746)에 돌아간 분으로 강화유수ㆍ함경도
관찰사ㆍ도승지ㆍ대사헌ㆍ홍문관 대제학ㆍ예문관 대제학ㆍ좌우 참찬 등 현직을 역임한 분이었지만,
언제나 거처를 분명히 했고 마지못해 관록을 받았으며 허세와 권도를 미워하며 맑고 밝게 세상을 걸어간
분이었다.
이 초상화에서 우리가 다만 그림에서 느끼는 조형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맑고 높은 인격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것이 어느 화가의 필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도암의 결곡한
인품에서 오는 형체 없는 힘이 크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말하자면 이 그림의 아름다움의 일면은 조선 초상화의 아름다움인 동시에 다른 일면은 한국인이 지닌 지조의
아름다움을 곁들여 보인 것이라고 해야겠다.
12. 연가(煙家)
‘연가’라 하면 연기나는 집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상은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굴뚝 위에 얹어 놓은 부재의
일종을 일컫는 고유한 명사이다. 이 연가는 진흙으로 빚어 구워낸 사방 30cm 내외의 조그마한 기와집 모양의
도예품으로 벽돌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네모 굴뚝 위에 한 개 또는 복수로 얹어 놓아서 굴뚝 연기가 그 네 벽에
뚫린 창모양의 구멍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굴뚝에 씌우는 지붕 구실과 연기의 솟음을 고르게 하는 바람받이도 될뿐더러 그 생김새가 잘생겨서
굴뚝치레로는 매우 성공적인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굴뚝 쌓기에 남달리 정성을 들이고 또 그 굴뚝이
후원의 조경에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전통은 한국 독자적인 양식으로,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온돌방 구조에서 발생된 한국인의 창의였다.
궁원은 물론이고 적어도 중류 이상의 조선시대 주택에는 반드시 남향받이 밝은 후원이 있게 마련이고 이
후원에는 으레 집 본채에서 썩 물러나서 세워진 벽돌 굴뚝이 훤칠하게 세워지게 마련이다.
이 벽돌은 양풍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이었고 이 벽돌을 맵시있게 쌓기 위하여 벽돌의 면과 네 측면을
모두 매끈하게 갈아서 썼으며 그 네모 굴뚝의 굵기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쾌적해서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느껴
지기도 하고 하나의 정원 조각 같이도 보이게 마련이다.
이 굴뚝은 하나 세워질 때도 있지만 주택 구조와 규모에 따라서 복수로 세워지기도 한다. 때로는 후원이 넓
으면 층단으로 된 장대석 돈대 위에 멀찌기 세워져서 저녁 연기에 때 맞추어 석양의 시정을 자아내기도 한다.
세상에 민족도 많고 나라도 많지만 우리 한국 사람처럼 굴뚝치레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또 큰 돈을 들이는
족속을 없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굴뚝 기단은 으레 아백의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받쳤으며 사람의 시선 높이의 알맞은 부위에는 백회와
회색 벽돌, 때로는 주황색 벽돌로 길상문자나 장생류의 도안을 모자이크해서 굴뚝 하나가 그대로 작품으로
보일 때가 많다.
이러한 조선의 굴뚝도 이제 양풍에 밀려서 서울 장안에서 하나하나 그 명작이 자취를 잃어가고 있다.
어쩌다가 뜯기는 집이 있어서 이전 복원을 꾀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것은 거의 성공된 예가 드물다.
말하자면 조선인들은 그만큼 굴뚝 쌓기에 정성을 들였고 구석구석 소혹한 데가 없어서 요즘의 범장凡匠으로
서는 그것을 복원하기에도 안목과 손재주가 모자라는 까닭이다.
굴뚝뿐만이 아니라 조선인들은 화초담 하나에도, 툇돌 한 토막의 죔새에도 자신의 지체를 가릴 것 없이 그 좋은
안목으로 손수 감역을 했던 것이다.
얼마 전 소전 손재형 씨 댁 후원에 쌓인 굴뚝들과 홍예문ㆍ화초담 등을 돌아보면서 오늘의 안목으로는 이분을
따를 분이 또 없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언뜻 굴뚝 이야기를 써 둔다.
13. 봄나들이
수양버들이 연두색 새순을 뿜었다는 사실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봄을 허전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삿일일
수 없다. 양지 쪽에서 겨우 진달래ㆍ산수유 꽃망울이 수수러지는 무렵인데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부푼
마음은 잔잔한 봄바람을 타고 담장을 넘어간다.
혜원은 이러한 첫 봄의 서정을 간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아마 한 그루 수양버들에 봄 풍경의 초점을 둔 모양
이고 또 한 쌍의 봄나들이 여인 앞에 나선 정한 옷차림의 젊은 승려를 등장시킨 듯 싶다.
연두색에 흰 끝동을 단 장옷을 쓰고 화사한 얼굴을 반쯤 드러내 보이는 앳된 여인이 시중드는 젊은 여인을
거느리고 오솔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젊은 중이 합장하고 절하면서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아마도 이 여인
들이 절나들이 길임을 암시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수행하는 여인의 차림을 보면 우선 왼팔에 큼직한 보따리를 끼고 미투리를 신었으며 장옷을 쓰지 않은 것으
로써 그 신분을 밝히고 있는 셈인데 말하자면 장옷을 입은 여인이 지체가 높은 여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는 주종간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외간 남자와 가정 부녀자 사이의 춘정을 다룬 혜원의 속화 속에서 가장 빈도가 많은 것은 부녀자들의 절나들
이에서 암시되는 승려들과의 관계, 그렇지 않으면 산곡 사이에서 젊은 표모에게 무작정 덤벼들거나 또는
들놀이하는 여인들의 교태를 숨어서 엿보는 젊은 승도들을 다룬 장면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우리 사회의 남녀군상이 보여주는 생태의 이면상을 보인 것으로 자못 주의를 끌 만한
사실이다.
즉 높은 성(性)의 담장 속에 갇혀 살아야만 했던 과거의 청춘들이 어떻게 몸부림쳤던가, 그리고 그 답답하고
높은 담장을 어떻게 넘어야만 했던가 하는 생생한 여성생활사의 한토막으로서 불교사원의 테두리가 크게
클로즈업 된다고 할 만하다.
이 그림 속에서 승려의 차림을 보면 흰 장삼에 겹겹이 깨끗한 옷을 받쳐 입고 미투리를 신었으며 잘생긴
얼굴에 오뚝한 코, 그리고 그 눈길은 이 여인들의 아랫도리 흰 속곳을 훑어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방갓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 까까머리가 흉물스러워 보였을지도 모르나 그 머리를 혜원은 잘생긴
방갓으로 감춰 주었고 또 그 능글맞은 시선도 방갓 속에 가려 주어서 모두가 너무 야비한 느낌을 받지 않도록
은근한 표현을 시도했음이 분명하다.
방금 돋아난 듯싶은 수양버들의 연초록 새순 아래 벌어진 이 일장의 그림은 어찌 보면 너울너울 춤추는 한낮의
호접몽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싱싱한 현실 같기도 해서 봄이 허전한 세대들에게는, 봄이 반가운 세대들보다
느끼는 감회가 한층 절실할는지도 모른다.
봄을 그리기란 쉽지만 생각해 보면 봄을 이렇게 마음속에 스미도록 표현하기란 예삿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해묵은 수양버들, 노묵은 가지에서 드리워진 성긴 가지의 모양이 꽃처럼 활짝 핀 젊은이들의 얼굴과 좋은
대조가 될 뿐더러 봄이면 피어 날 이 새 생명의 약동을 품고 노묵은 수양버들 등걸이 견뎌 온 과거를 보여
주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것을 볼 수 있는 듯싶기도 해서 문득 심심견춘초(心心見春草)라는 옛 문자를
기억해 낸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봄 풀 한 가지도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다는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13. 신라토우
점토를 떡 주무르듯 주물러서 빚어 만든 소박한 신라시대의 토우들을 보고 있으면 무딘 듯하면서도 재치있게
다룬 몸체의 자세라든지, 웃든지 우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얼굴들의 표정에서 우리는 같은 인간들끼리 통할
수 있는 따스한 정과 서글픔을 아울러 느끼게 된다.
언뜻 보기에는 미개인들의 원시 미술과도 같은 서투른 표현을 보인 것 같지만, 자세히 따져 보면 신라 토우
들은 표현할 것은 모두 다 이루어 놓은 듯싶을만큼 실감나는 매력을 느끼게 한다.
말하자면 훗날 신라인들이 떨친 조형미의 원동력과 그 재질은 이미 이러한 초기적 주소(彫塑) 작품에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해야겠다.
서 있은 인물은 분명히 현악기를 안고 흥겹게 연주하는 자세임을 알 수 있으나, 앉은 토우는 두 무릎을 꿇어
세우고 두 손을 마주잡은 폼이 마치 현대의 가수들이 노래부르는 자세를 연상케 해서 그 벌어진 입과 갸우뚱한
고개와 아울러 실감나는 가수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두 토우는 우연하게도 박물관 진열장 안에서 해후한 것이지만 이제까지 마치 한 쌍의 가수와 반주자 관계
처럼 인식되기 쉬었다.
이러한 신라 토우들 중에는 간혹 독립된 공예 조각적인 의의를 갖춘 작품들도 있으나 두 개의 토우와 같은
경우는 어떠한 그릇 위에 장식품의 일부로 붙여졌던 예가 많았고, 따라서 크기와 종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리
만큼 다양해서 고대 신라 토기에 나타난 하나의 신비로운 매력처럼 되어 왔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의 차이는 단지 기교로써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박한 토우들은
웅변으로 설명해 주었고, 아름다움의 본질적인 면, 말하자면 건강한 아름다움이란 이러한 가식 없는 작업
위에 순수하게 노정된다는 좋은 예를 우리는 이 작은 두 유물에서 역력히 본 것이다.
마구 빚은 흙덩이와 흙타래, 그리고 마구 뚫은 두 눈과 입의 표정에서 고졸의 아름다움과 순정의 매력이
얼마나 욕심없이 이루어졌는가를 다시금 실증했고, 한국의 아름다움에는 이러한 무심의 아름다움, 무재주의
재주가 이미 삼국시대부터 스며 있어서 한국미가 지니는 체질의 원천적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말하자면 더 부릴 수 있는 표현력이 있었다고 해도 더 부릴 욕심과 또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던 신라인들의
숨결을 이 작품들에서 역력히 보는 듯싶다.
14.선유도 船遊圖
5월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이 가장 아름다운 절기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산과 도봉산의 연봉이 신록
푸르른 앞산 뒷산 저 너머에 그림처럼 둘러 서고 푸른 한강물은 한층 맑고 溶溶해서 산철쭉ㆍ싸리꽃ㆍ병꽃ㆍ
붓꽃 따위의 들꽃이 이끼 푸른 암벽에서 그림자를 강물에 드리운다.
이 무렵이 되면 연초록의 향기를 실은 소슬바람에 강물이 일렁이고 해묵은 수양버들 실가지들이 강둑 위에
물결치는 속에 첫 꾀꼬리가 날아든다.
서울의 풍류남아들은 이래서 한강을 꿈꾸고 4월 8일이니, 5월 단오니 하는 명절 무렵에 뱃놀이를 꾸몄을 것
이다. 웃통 벗어 제치고 막걸리에 취해서 징쟁기 울리면 야취있게 흥겨워하는 소박한 뱃놀이도 있지만 혜원의
意는 그것이 아니라 그가 능으로 삼는 도회적인 세련이 몸에 밴 젊은 한량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조촐한 기생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風雅의 참멋을 그리려고 한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속에는 詩가 있고, 음악이 있고, 인생의 旅愁마저 은은히 어리어 있어서 옛 서울 시민들이 누렸던 생생한
생활미의 한 토막이 이 한 폭 그림 속에 멋지게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뱃머리에 사뿐히 걸터 앉아 笙簧을 불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는 장난기 같은 표정은 전혀 없고 오히려 향수에
가까운 소슬한 분위기가 고요히 흐르고 있으며 遮日 아래 서서 퉁소를 불고 있는 총각의 얼굴에도 침착한
표정이 스며 있어서 지금 그들이 연주하고 있는 음률이 대강 어떠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주인공 사나이의 行色을 보면 풍신한 흰 중치막을 입고 큰 갓을 오른편으로 비껴 써서 멋을 부렸으며 검은
갑사 갓끈을 앞가슴에 가지런히 드리우고 있다. 음률에 도취한 것인지 초점을 잃은 듯싶은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보는 차분한 여인의 어깨에 한팔을 은근히 얹은 사나이가 여인에게 담배를 권하는 은근한 자세는 이
그림에서 보여 주려는 작가의 득의 만만한 솜씨가 아닌가 한다.
청치마에 자줏빛 반회장을 댄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오른손으로는 권하는 장죽을 가볍게 받아들면서 왼손
으로는 치마폭을 걷어잡은 여인의 매무새는 아마 그 시절 기생들이 즐겨 보인 美態의 하나였던 듯, 사나이에게
포근히 감싸인 행복스러움이 이 여인의 자세 속에서 사뭇 실감나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생황을 불고 있는 여인은 흰 저고리 옥색치마, 퉁소를 부는 총각의 차림은 길쭉한 단저고리 바람에 원구바지
를 입고 주머니와 매어 내린 허리띠를 길쭉이 드러워서 거기에 건들 멋을 강조하고 있다.
여인들의 머리 맵시도 언뜻 보면 모두 같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각기 개성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
트레머리의 굴곡에도 제각기 다른 가락이 있어 보이고 또 흰 가리마의 맵시와 귀밑머리의 처리도 모두 제각기
다르게 솜씨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한폭의 그림에서 한층 한국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그 담박하면서도 통일된 색감의 세계라고 하고
싶다. 흰색 아니면 옥색, 옥색 아니면 짙은 하늘색과 그 속에 검은 자줏빛의 점점이 악센트를 이루고 있어서
이러한 색깔들의 담담하면서도 농담이 조화된 갓맑은 느낌에서 나는 한국의 마음을 바라보는 느낌이 될 때가
가끔 있다.
청청한 5월의 漢水 위에서 魏魏한 북한산 연봉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들은 그때 漢陽 좋을씨고를 정을 다해
읊었을 듯도 싶고, 또 분명히 한국 사람, 서울 시민의 즐거움과 자랑을 뱃전에서 마주 바라보며 되새겼을 것이
아닌가 한다.
15. 트레머리 미인
이조시대의 여인들이 얼마나 곱고 멋졌느냐 하는 것은 蕙園 같은 뛰어난 화가가 평생을 두고 그 시대 여인들의
연연한 생활 風情과 美態를 畵幅 위에 사로잡기에 정열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서도 짐작이 간다.
그의 풍속 소품도 소품이려니와 이러한 독립된 초상화풍의 미인도 대작을 보면 풍속도 소품 위에 등장하는
그 수많은 여인들의 하나하나의 생태가 追眞하는 실감을 가지고 클로즈업되어 과연 蕙園은 멋쟁이였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게 된다.
가벼운 여름 단장을 한 한 앳된 여인이 마치 사진이나 찍으려는 듯이 포즈를 취하고 서 있는 모습, 나긋나긋한
두 손으로는 가볍게 앞가슴에 달린 三作 노리개를 매만지고 무거울 듯 머리 위에 큰 트레머리가 멋들어지게
얹혀 있으나 반듯한 맑은 이마 위에 선명한 가리마를 반쯤만 가리운 풍경이 오히려 날아갈 듯만 싶게 경쾌하다.
요사이 한국 여인들 중에는 소위 후까시 머리에 아이섀도를 그리고 뽐내는 분들이 많지만 이조의 멋쟁이 여인
들은 결코 倭女들의 시마다마게나, 北京 여인들의 흉내를 내는 일이 없이 이렇게 순수한 이조 멋을 부리고서
방긋이 자신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폭 패인 목 뒤의 솜털은 가벼운 입김에도 파시시 움직이고 쪽빛
열두 폭 모시치마의 부푼 매무새가 젊음을 구가하고 있다.
저고리의 회장과 가는 옷고름 그리고 트레머리 끝에 달린 댕기의 빛은 모두 진자주색이니 몸에 착 붙는 흰
저고리빛과의 조화를 한번 되새겨 봄직한 일이 아닌가.
칠칠한 트레머리에 한밑천을 들여야 했던 그 시대 여인들의 머리 치장은 이제 과연 과거의 멋이 되어 버린
것인가.
이 작품이 뉴욕에서 전시되었을 때 그 고장 여인들이 “금년 뉴욕의 헤어스타일은 바로 이것이 될지도 몰라요”
해서 같이 웃은 일이 있었다.
16. 석가탑 사리장치 -조형미와 최고의 목판인쇄
천년 만년을 그대로 태안泰安했으면 좋았을 불국사 석가탑의 사리장치가 뜻 아니한 사고 때문에 불가피하게
우리 세대 앞에 그 신비스러운 베일을 벗었다.
2층 탑신석 사리공舍利孔 안에 안치되었던 이 사리장치는 둘레 18.5cm 내외, 높이 16.4cm의 금동제金銅製
소전각小殿閣 모양의 외함外函 속에 찬란한 8세기 중엽 신라 문화의 꿈을 안고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 사리합舍利盒 안에는 3구의 사리함을 비롯해서 많은 보물이 가득히 담겨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미술작품
으로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사리 외함이 지니는 뛰어난 조형 의장과 그 공예 기술이었으며, 학술
자료로서 세상을 놀라게 해 준 것은 이 외함 속에 들어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권無垢淨光大陀羅尼經卷이다.
사리 외함은 각 면에 안상眼象 두 개씩을 투조透彫한 방형方形 기단 위에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투각透刻한
네 벽돌이 둘러 있고 그 위에 네모 지붕 형식의 뚜껑이 덮여진 전각형殿閣形의 금동함金銅函이었다.
특히 이 외함 4면 벽에 투각한 보상당초문은 매우 단정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쾌적한 각 부 비례의
아름다움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이 아니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정제된 양식과 질서 잡힌 제 1급의
조형미를 보이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목판 인쇄물로서 닥채[楮]로 된 한지에 인쇄됐으며,
너비 8cm 내외 1행 7자 또는 8자로 된 긴 권축卷軸이다.
이 인쇄물의 지질紙質이 한지韓紙라는 것과 그리고 이 경문經文 속에 측천무후신자則天武后新字가 혼입된
점 등으로 보아 경덕왕대景德王代(8세기 중엽)의 유물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인정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이 소식은 외신外信을 타고 세계에 알려졌으며,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서 세계 인쇄문화사에 새로운 기원紀元을 남기게 되었다.
석가탑의 사리장치를 노리는 인간들의 준동에 의하여 그 조속한 발견의 계기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이 세계적인 지보至寶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쌌던 비단보자기를 처음 열었을 때 우리를
놀라게 해준 것은 이 불경佛經을 쏠아먹고 태평을 누리던 살찐 좀들이 우리보다 더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꼴
이었다.
지존至尊한 불사리佛舍利 앞이라 우리는 감히 이 좀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어서 제 가는 대로 바라보는
도리밖엔 없었지만 좀치고는 엄청나게 귀하고 비싼 좀이었다.
<그림 1> 금동제사리외합과 금동방형사리합
<그림2> 은제사리합
<그림3>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7. 초립의 청년(草笠의 靑年)
혜원 신윤복은 무던히도 자신의 생활 환경과 멋을 즐긴 사람이다.
그의 풍속도에 나타나는 서민층 여인들의 애틋한 생태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여인들을 싸고 도는 뭇 한국 남성
들의 자랑스러운 풍류와 멋을 이렇게 싶은 情愛로써 바로 바라본 작가는 또 없다.
그의 붓끝에서 무수히 생동해 나오는 남성들의 군상을 바라보면 한국의 남성들이 이렇게 멋졌으니까
아마 한국의 여인들은 그렇게 행복했을 거라는 농담을 우리 여성들에게 해 주고 싶어진다.
이 작품은 어느 날 어른들의 연회에서 조심스럽게 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은근히 멋을 부리는 한 청년의
모습, 검은 망건 사이로 비치는 흰 이마와 시원하게 트인 미간에서 풍기는 너그러운 인상이 그의 싱싱한
즐거움을 말해 준다.
혜원의 풍속도에 나오는 청년으로는 드물게 보는 품위있는 차림새라고 할 수 있고 그 풍채에서 글줄이나
읽은 교양의 냄새 같은 것이 풍긴다고 할 만하다.
一見해서 너그럽고 청수淸秀한 느낌의 사나이지만 이런 것이 아마 이조적 미남의 한 타입인지도 모른다.
그저 잘생긴 이조 백자 달항아리 하나 그 옆에 안겨 주면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릴 이조적인 소담素淡한 색채와
차림새이다. 이것은 실물보다 훨씬 확대한 사진이며 이렇게 확대해놓고 봐도 혜원의 붓끝은 나무랄 데가 없다.
* 이 글은 최순우,『최순우전집 5』에서 발췌했습니다.
18.우물가의 농부(農婦)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는 혜원의 풍속도처럼 화려한 무드나 행락行樂을 그린 장면은 드물다.
따라서 기녀라든가 건달 같은 사람들이 주제로 되기보다는 서민사회의 생업을 다룬 장면이 많고 등장하는
여인들도 대개는 순박한 농부나 수수한 여염집 부녀들일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어느 여름날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던 젊은 촌부에게 앞가슴을 풀어헤친 한 나그네가 다가와서
물을 청하자 물이 담긴 두레박을 내어 주고는 외면하고 물 먹기를 기다리는 순박한 촌부의 내외하는 수수한
모습이다.
어딘가 모르게 있을 법한 시골 우물가의 담담한 정취를 잘 포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대였지만 혜원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기녀들의 멋진 트레머리에 비하면 너무나 간소한 이 여인의
머리와 소박한 옷차림에 오히려 젊은 시골 아내로서의 착한 마음씨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러한 풍속도의 제작은 그의 빛나는 작가 생활 속에서도 가장 이채로운 업적으로 남겨졌는데 그 수는
그다지 많지 않으나 회화 미술이 양반 또는 일부 지식인 사회에만 편재하던 당시의 사회상으로 미루어 본다면
매우 대담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바야흐로 성장해 나가려는 서민사회에 대한 하나의 리얼리즘의 싹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기 무던하고 착한 농가의 젊은 아내의 수수하게 고운 모습이 한국 미녀의 한 타입으로서 단원의
구수한 필치로 오늘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그림뿐만 아니라 단원 풍속도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대개 구수한 해학과 순후淳厚한 인간살이의 숨김
없는 자태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 이 글은 최순우,『최순우전집 5』에서 발췌했습니다.
19. 한송사 석조보살좌상
한국 석조 불상의 좋은 전통은 신라시대의 화강석 조각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안 도처에는 석질이 매우 좋은 화강석이 많으므로 건축이나 조각 재료로 화강석을 다루는 솜씨가 일찍
부터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의 그리스나 로마의 뛰어난 석조각들이 대개 그 지방에서 나는 대리석을 재료로 삼아 온
점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거의 화강석이 만능이던 신라시대 석조 조각도 고려시대에 이르면 대리석
재료를 개척해서 대리석 불상 중에 간혹 뛰어난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강릉 한송사 대리석 보살좌상 같은
예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 야무진 화강석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맘대로 다룰 수 있었던 한국의 조각가들이었던 만큼 연한 대리석 조각을
다루기는 매우 손쉬웠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역시 화강석 조각에서 오랫동안 쌓인 전통적인 대범한 솜씨가
그래도 드러나 있어서 서양의 대리석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교미의 폐단에 말려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고맙다.
높은 감투 모양의 보관을 쓰고 양 어깨로 모발을 드리운 이 보살은 풍만한 얼굴에 반쯤 뜬 두 눈이 아래를
굽어보는 다소곳한 표정을 지녔고, 조그마한 입 언저리에서 풍기는 미소짓는 인자한 모습은 아마도 이 시대
강릉 지역의 석조 보살상들이 지닌 공통적인 감각으로 느껴진다. 강릉 신복사 자리와 오대산 월정사탑 앞에
앉아 있는 석조공양보살들의 표현이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원래 이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은 한 쌍이 그 절터에 있었던 것을 일본인 화전웅치라는 자가 그 중의 하나를
어떻게 입수해서 1912년 12월 동경 제실박물관에 기증했다.
나머지 하나는 머리를 잃은 채 지금 명주군청 안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으며 동경 제실박물관에 있던 온전한
하나는 1966년 봄 반환문화재 속에 포함되어 일본 정부에게서 50년만에 되찾아서 지금 국립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불명은 확인하기 힘드나 대강 삼십삼관음 중의 하나인 다라보살로 인정된다.
이 다라보살은 관자재보살의 눈에서 발산하는 대광명 속에서 태어난 보살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당시대
말기 또는 북송시대 촉에 일어난 신앙이라고 하니 우리 나라 고려시대 초기 불상에 있었을 법한 보살 부처
이다.
* 이 글은 최순우,『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1994) 에서 발췌했습니다.
20. 익산왕궁리 석탑 사리장치
불타에 바치는 찬양이 사무치고 맺혀서 이루어진 사리장치, 말하자면 석가모니의 분신을 모시기 위한 불도
들의 온갖 정성이 응결된 거룩한 조형이 바로 사리장치가 지닌 아름다움이며 또 눈으로 느끼는 찬가와도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섣달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리에 있는 백제식 오층석탑을 중수할 때에 탑 기단부 사리공에서 발견된
이 사리함과 사리병은 그때 함께 나온 순금제 금강경 책과 함께 세상을 놀래 준 우리 민족이 지닌 제1급 문화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방좌 위에 연결된 앙련 사리병좌 위에 놓이게 마련되어 있고, 고운 초록색 유리로
만든 사리병의 날씬한 긴 목에는 순금으로 만든 연꽃 봉오리 모양의 마개가 꽂혀 있어서 각 부 비례의 적정한
눈맛이 이만저만 세련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사리병좌는 순금제의 방합 안에 모시어졌고, 이 사리방합은 찬연한 금색을 내고 있어서 초록색ㆍ은색ㆍ
황금색 등의 색상의 조화가 주는 효과가 매우 인상적이다. 방합의 사면과 네모 지붕 모양의 뚜껑 표면에는
빈틈이 없다.
크고 작은 원권문을 찍어서 장식하고 합의 사면 중심부에는 초문과 불교적인 화염문이 혼성된 좌우 대칭적인
화문花文이 찍혀 있어서 이 무늬가 지니는 고격이 보통이 아님을 말해 준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불교의 사리장치에 나타난 공예가 매우 세련되어 왔음은 다른 여러 예를 보아
알 수 있으나 이 익산 왕궁리 석탑 사리장치처럼 조형의 기본 의장이 별격적으로 세련된 작품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기교적으로 보나 장식의장으로 보나 이렇게 간고하면서도 고도의 세련을 보인 예는 참 드물다. 초록색 유리
사리병은 불과 아기들의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이면서도 바라보고 있으면 고려청자의 큰 장경병이 지닌
맵시와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이것이 이렇게 작은 물건이라는 생각을 잊게 해 준다.
말하자면 꼭 필요한 기교와 장식만이 집약되어서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는 점으로 이 사리장치가 지니는
공예미의 본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 본성은 단순미에 장점을 둔 우리 공예 전통의 본 궤도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들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재계하고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 이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 이 글은 최순우,『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1994) 에서 발췌했습니다.
21. 고구려 금동여래입상
고구려 불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엄숙한 얼굴인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인지 잘 분간이 안 갈 때가 있다.
그러나 오래 열심히 또 보면 그 엷은 웃음의 뜻과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느껴 알게 된다.
이러한 미소를 미학적으로 '고졸(古拙)의 미소'라고도 부르지만 어쨌든 담담하고도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우리는 먼저 그 미소에서 느끼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미소의 본고장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 맨 먼저 불교를 전해준 중국의 북위시대 불교미술에 있다.
이러한 외국인의 미소를 한국인의 미소로 바꾸기란 누구 한사람의 의욕이나 솜씨만으로는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뿐더러 오랜 시간을 두고 민족적인 조형소질을 연마하지 않으면 남의 흉내에만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한 의미로 우리 삼국시대 예술가들은 외국에서 받아들인 이러한 고답적인 아름다움을 재빨리 민족
양식으로 변형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 연가(延嘉) 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금동여래입상의 경우를 보더라도 고구려에 맨 먼저 불교를 전해준
중국의 북위식 불상 양식을 짙게 짙게 간직하고는 있으면서도 비례의 아름다움이나 입체조각을 다룬 솜씨
같은 데서 이미 한국 냄새가 분명하게 풍기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따라서 벌써 생경한 남의 미소가 아니요,
우리 것으로 삭여 가는 과정을 역력하게 보여 준 신기한 우리의 미소와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고구려식 불상들이 초기의 백제 불상의 발달에 바탕이 되었으며 한 걸음 나아가서 신라 불상조각의
성립에 밑거름이 되어 준 것이다. 말하자면 현란한 신라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이 이러한 불교의 아름다움이
이러한 고구려 불상 조각가들의 손에서 움텄다는 말이 된다.
완전한 아름다움 같으면서도 어디엔가 좀더 손질이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겨놓고 있고, 또 막상 손을
대려면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우리 삼국시대의 불상들은 신비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색
이다. 그 시대 중국불상들이 지니는 도도한 자세나 엄정한 미소에 비하면 때로는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어설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미소거니 하면 함께 미소지어 보고 싶어진다.
22. 은입사 동제정병
'맵자'하다는 말이 에누리 없이 그대로 쓰여서 조금도 과장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 이러한 고려 청동 정병이
지니는 날씬하고 세련된 매무새 같은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정병은 원래 불교를 따라 중국에 들어온 '군듸카'라는 불기(佛器)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온
후 고려시대에 그 세련의 절정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동제 정병뿐만 아니라 청자정병도 유행해서 그 형태의 아름다움이 중국 정병이나 인도 정병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었으며 청동제 정병에는 은입사, 청자 정병에는 청자상감 같은 특이한 장식기법을
써서 그 형체의 아름다움에 곁들인 무늬의 효과가 한층 아취를 더해주었다.
이 정병은 바로 청동 바탕에 은실로 호수 언저리의 한가로운 자연 정취를 새겨 넣은 보기 드문 가작으로
지금은 녹이 나서 연두색으로 변색한 바탕에 수놓은 은색의 산뜻한 색채 조화가 우선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한다.
수양버들 긴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늪가에는 갈대숲이 듬성듬성 우거지고, 물위에는 한가로이 떠
있는 산오리들, 하늘에는 늪으로 날아들고 날아가는 기러기떼와 오리들이 동양화다운 포치로 아취있게
새겨져 있다. 수양버들 밑으로는 노를 젓는 삿갓 쓴 인물이 두어사람, 하늘 저쪽에는 마치 구름처럼 보이는
먼 산이 있고, 손잡이가 되는 병목에는 구름무늬를 듬성듬성 장식했다.
곧바로 세워진 긴 부리는 물을 따르는 귀대이고 병 어깨에 붙은 마개 달린 병 입은 물을 넣게 마련된 것이다.
이 병 입에 달린 마개는 역시 은으로 투각한 유려한 당초문을 은으로 투각해서 씌우고 있다. 은입사라는 것은
청동제의 그릇 표면에 무늬나 그림을 새기고 새겨진 홈 속에 은실을 두드려 메워서 은색 무늬를 이루도록
고안한 기법이다. 이것은 마치 나전칠기에 자개를 오려서 박는다든가 또는 청자상감에 백토나 자토로 무늬를
넣는 기법과 함께 상감기법이라고 불리는 공예장식의 일종이다.
이러한 은입사 기법은 이미 먼 옛날 중국 전국시대에 시작된 기교이지만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의 불기 등속에
그러한 작품이 적지 않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은입사 기술은 고려시대에 최고로 세련되어서 청자상감의 발생
에 자극을 준 것으로 보인다.
23. 노리개
이별을 서러워 하는 여인이 ‘한양 낭군님 날 다려가오 나는 죽네 나는 죽네 임자로 하여 나는 죽네’ 하고,
눈물겨워 하면 사내는 ‘네 무엇을 달라느냐, 네 소원을 다 일러라 노리개치레를 하여 주랴 은조로통 금조로통
산호가지 밀화불수 밀화장도 곁칼이며 삼천주 바둑실을 남산더미만큼 하여나 주랴’ 하면 여인은 ‘나는 싫소
나는 싫소 아무 것도 나는 싫소 금의옥식도 나는 싫소’ 하고 애절해 하는 정경이 경기가요 <방물가>가사에
나와 있다.
자기가 짓밟은 여인의 순정을 하찮은 돈 따위의 힘으로 덮어 버리려는 사내들의 노리개치레가 집치레․
세간치레․의복치레와 함께 예부터 한국 여인들에게 이만저만 매혹적인 재물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기도 하다.
원래 여인들의 상의에 단추 종류를 비롯한 금은보옥의 패물들을 장식하는 유습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유행되고
있었던 모양으로, 매우 세련된 이러한 고려 패물 종류들이 지금도 고려의 옛 무덤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한국 노리개의 근원은 이보다 더 먼 옛날에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삼작 노리개를 비롯한 격식 차린 조선시대 노리개 양식에 해당하는 고려시대의 유물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지만, 아마 다른 문물이 그러했듯이 당,송,원,명의 중국 장신구 양식이 오랜 동안에 걸쳐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쳐 오는 동안 이 외래양식, 특히 원나라 몽고족의 혼례 조도품과 기타 장신구에서 온 큰 영향이 우리
민족정서 속에 점진적으로 정리 순화되어, 한국 삼작 노리개 양식이 자리잡혀 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면 부녀들의 한복 양식이 외래풍의 혼탁으로부터 점차로 국풍화되어서 현행 복제의
자리가 잡히고 따라서 여기에 조화되는 대․중․소의 삼작 노리개를 비롯한 조선시대 노리개 양식이 확립되었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쨌든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귀족이건 시민이건 기녀이건 숙녀이건 그 집안지체에 따라 그리고 처소와 예법에
따라 훈장보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노리개를 가슴에 달고 다소곳이 기품을 가누곤 했던 것이다.
제각기의 가슴에 달린 노리개들은 경우와 처소에 따라 하나의 예장 구실을 했지만 그 노리개들의 격조나
취미를 살펴보면 그 집안의 가도나 그 여인의 교양이 드러나 보였던 것은 마치 요새 저고리 적삼에 다는
브로치의 선택이 그 여인의 인품을 드러내는 경우와 다를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상류면 상류대로 밀화불수나 산호가지, 청강석이나 비취삼작 또는 황금투호 같은 화사한 노리개를 자랑삼기도
했고 서민은 서민대로 수수한 은삼작에 아롱지는 칠보무늬의 조촐한 아취를 아껴서 이것이 오히려 소담한
서민사회의 여인 풍정을 돋보이게 해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조선시대 노리개의 매력은 무슨 권위나 호사에 있는 것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다양하고 복잡한 듯하면서도 주제가 통일되어있고 화사하고 뽐내는 듯해도 따지고 보면 한국의 어진 젊은
어머니들의 마음처럼 착하고 담담하고 복된 표현이 그 아름다움의 생명이라고 해야 겠다.
중국의 장신구처럼 거의 절대라고 할 만큼 정세하게 다룬 표현, 그리고 권위와 완성의 지겨움이 우리 노리개
에는 없다고 해야 겠다. 육간 대청이라도 좋고 삼간 두옥이라도 스스러움이 없는,
말하자면 각기 분수에 맞는 화사와 절도있는 영광이 시새움도 오만도 없는 부푼 가슴 위에 편하게 자리잡아
온 것이다.
단순한 것 같아도 이러한 한국 노리개들을 분류해 보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순금 또는 도금으로 만든 금삼작, 순은 또는 여기에 칠보장식을 수놓은 은삼작, 백옥을 비롯해서 옥 종류로
만든 깔끔한 옥삼작, 주먹만한 밀화덩이나 산호가지 그리고 청강석이나 옥나비 중 세 가지를 곁들인 호사
스러운 대삼작, 청강석,산호,밀화로 만든 불수촌이나 산호가지,밀화덩이,옥나비의 콤비로 된 중삼작, 비취,
자만옥,백옥,산호,청강석,밀화를 재료로 나비,호도,동자,가지,호로병,박쥐,투호 등을 주로 만든 말하자면
약식의 소삼작등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노리개들을 꼬아달기 위한 비단끈과 비단술은 연초록,자주,노란색,진홍색,남색 중에서 몇 가지 색채
또는 단색을 가려서 쓰여진다.
이것을 꼬아 매는 매듭도 도래매듭,납짝이매듭,나비매듭,잠자리매듭,생쪽매듭 등이 있다.
술에도 딸기술,낙지발술,방울술,방망이술 등이 있어서 그 표현애와 전통이 이만저만 깊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삼작 노리개란 말은 세 가지의 노리개를 한 단위로 모아 만든 노리개란 뜻이 된다. 말하자면 그 만든
재료에 따라서 금삼작,은삼작,옥삼작이라고 구별하기도 하고 그 크기나 격식을 따져 대삼작,중삼작,소삼작
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한편 노리개의 주제를 따라서는 박쥐삼작,불수삼작,동자삼작,장도삼작으로 부르고 또는 삼작 노리개가 세 가지
종류의 주제를 콤비로 해서 표현했을 때는 가령 동자,바늘집-방아다리,은삼작이라고 구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작 노리개 중에 소삼작은 예장이 아닌 경우에도 달 수 있고 평상복에 쉽게 장식할 수 있는 단식 노리
개들, 예를 들면 옥장도,은장도 또는 향낭 같은 것도 있어서 마치 요사이의 브로치나 양장의 액세서리 같은
가벼운 단자에 애용되기도 했던 것은 기녀나 소첩으로 보여지는 혜원의 미인도에 나타난 패용 예로써도 짐작이
간다고 해야 겠다.
24. 연당의 여인
혜원의 풍속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확대해 놓고 보면 그대로 보는 것보다 또 다른 매력을 느낄 때가 많다.
그 작고 섬세한 그림 속에서도 그의 정확한 붓끝이 어떻게 움직여 나갔는가를 분명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이
우선 신기롭고, 또 그의 연연한 여체 묘사법의 비밀도 알고 보면 단지 헛붓질이나 뇌까림이 없는 싱싱한
붓자국 속에 예삿일처럼 평범하게 감싸여서 이루어졌다는 실감도 느끼게 된다.
이 그림에서는 체구에 비해서 여인의 얼굴이 크게 묘사되었다든가 유난스럽게 큰 트레머리가 좁은 어깨폭에
견주어 과중한 비례를 나타내고 있다든가 하는 표현이 있지만 이것은 확대해 놓고 본 까닭에 그렇게 눈여겨
보이는 것이며, 원촌 그림 그대로 작게 보면 그렇게 과장해서 표현해야만 어여쁜 얼굴이나 나긋나긋한 여체의
아름다음이 자연스럽게 강조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비례의 불균형도 눈에 거슬리지 않게 된다.
대개 혜원의 일반 풍속화 소품에 나타나는 인물묘사를 보면 가늘고 긴 기교적인 묘선이나 또는 일부에 점선을
써서 간결하고 매끈한 혜원 풍속화 특유의 분위기를 보인 것이 많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배경과 아울러 인체묘사에 매우 활달하고 흥겨운 필력을 구사해서 그의 일반 풍속화
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회화적인 효과를 멋지게 거두고 있음이 주목된다.
어느 후원 연당의 정자 뒷마루에 걸터앉아서 그 한손에는 생황, 한 손에는 긴 연죽을 들고 잠시 가벼운 시름에
잠신 듯싶은 맵시의 이 여인은 필시 기생임이 분명하다. 그 앉음새 때문에 치마폭이 거들떠 올라가서 흰 속곳
가래가 깊숙이 드러나 보이는 표현은 아마도 그러한 사회의 여인들만이 지니는 생태를 너무나 잘 아는 혜원이
아니고는 좀처럼 그리기 어려운 여인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
치마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백석같이 흰 청정스러운 속곳가래는 그 시대 여인들의 몸단장에서 가장 마음을
써야 할 만큼 남성들의 눈을 그는 매력의 하나였던 것 같고, 혜원도 그러한 것을 즐겨서 표현했으며, 춘향전
에서도 광한루 그네터에서 방자가 춘향에게 하는 사설에 이러한 속곳가래를 다룬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외씨 같은 부 발길로 백운 간에 노닐 적에 홍상자락이 펄펄 배방사 속곳가래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속 같은
네 살결이 백운 간에 희뜩희뜩 도령님이 보시고 너를 부르시지 내가 무슨 말을 한단 말가 잔말 말고 건너가자.”
어쨌든 흰 속곳가래를 이 그림 속에서 작가가 강조하려고 한 것은 그 앉음새로 보나 거기서 풍겨지는 선정적인
분위기를 보아서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왼 다리 속곳가래 옆으로 드리워진 치맛자락도 속곳 주름의 표현과 함께 이 그림에 하나의 미묘한 율동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으며 여인의 눈은 아마도 초점을 잃고 있는 듯 시선이 먼 곳에 가 있는 듯싶어 보인다.
바로 눈 앞에 무성하게 자라난 연잎 사이에 단 한줄기 탐스럽게 피어 오르는 입 다문 분홍색 연꽃 봉오리의
존재는 이 젊고 아리따운 여인의 인상과 상대하는 것으로 작가가 노린 또 하나의 초점일 것이다.
칠흙처럼 검고 윤나는 큰트레머리의 펑퍼짐하고 탐스러운 맵시 속에 이 여인의 젊고 건강한 자랑이 쏠려
있다고 할까.
어쨌든 오른귀 귓전에 달린 자주빛 댕기의 아기자기한 태와 함께 작가 혜원은 젊은 즐거움의 상징을 함초롬히
연분황색 연꽃 봉오리 속에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중에서
25. 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
한국 사람들은 웬만큼 친한 사이에 서로 만나면 우선 첫마디로 익살스러운 농을 걸어서 서로의 오가는 정을
돋운다. 물론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익살이나 농이 적다는 말은 아니지만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네의
농은 그 감정의 차원이 다르고 또 그 빈도가 높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그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해학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달래고 그 익살과 농담 속에는 풍자와 체관의
멋이 스며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도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곡절 많은 역사 속에 몸에 밴 미덕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울다가도 웃을 일이라는 말은 물론 어처구니가 없을 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애수가 아름다울 수 있고 또
익살이 세련되어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사회의 서정과 조형미에 나타나는 표현애도 의당 이러한 것이 반영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요의 아름다움과 슬픔의 아름다움이 조형작품 위에 옮겨질 수 있다면 이것은 바로 예술에서 말하는
적조미의 세계이며 익살의 아름다움이 조형 위에 구현된다면 물론 이것은 해학미의 세계일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에 나오는 인물들의 구수한 얼굴들과 익살스러운 표정과 동작 속에서 느껴지는 해학의
아름다움 속에는 오히려 지체할 수 없는 일말의 엷은 애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고 석굴암 십일면 관음보살의
맑고 깔끔한 얼굴에서는 간절한 비원과 그 슬픔이 지닌 아름다움이 지극히 담담한 미소로서 나타나고 있다
만약에 이러한 아름다움들을 '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 불러 본다면 우리의 미술작품에는 여기에
예를 들 만한 것이 적지 않다.
남리 김두량 작 '가려운 데를 긁는 개'의 익살스러운 표현과 고려 청자들이 지닌 가늘고 긴 곡선 그리고 담담한
푸른빛이 보여주는 조용한 아름다움도 좋은 대조의 하나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요한 익살의 아름다움'은 한국 미술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다만, 우리네의
조형작품의 일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마음이 조용해지거나 또는 홀로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는 내재적인
아름다움에 자주 부딪치게 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 미술에 나타난 이러한 '익살과 고요의 아름다움'을 정리해 보면 이것은 '한국미'가 지니는
두르러진 특색의 일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26. 신라 보상문화전
경주 임해전이라 하면 신라 문화가 한창 꽃피고 열매 맺던 시절, 신라 왕궁의 궁원으로서 한국 고대의
조원사(造園史)에서도 드물게 보는 아름다운 유적이다.
왕궁인 월성의 동북쪽 지척에 자리잡고 첨성대를 서족으로 바라보면서, 불과 수백 미터 동쪽에는 신라 최대의
불교 가람인 황룡사의 우람한 기와 지붕들과 2백여 척의 높은 목조 9층탑을 그림처럼 우러르던 터전이었다.
황룡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노을 비낀 황혼의 안압지 기슭을 거닐었을 신라 궁녀들의 비단 신발
맵시를 지금 연상해 보면 언뜻 아름답고 섬세하고 또 신비로운 신라인의 발소리가 이 보상화문전에 스며 있는
듯, 여기에서도 신라인들의 참멋을 알아 느낄 듯만 싶다.
지금도 그 안압지 서쪽 기슭 잔디밭을 터전으로 했던 임해전 건물 자리가 천년 풍우에 씻기면서 남아 있고,
이 보상화문전은 바로 이 임해전 옛터의 밭 가운데에서 해방 후 어느 농부의 손으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명작 중의 하나였다
흙으로 구워 만든 이러한 전돌로 궁전이나 법당의 바닥을 깔아서 장식하는 격식은 이미 중국의 고대에 시작
되었고, 당나라 때에는 매우 훌륭한 보상화무늬의 문양전이 만들어져서 지금도 당나라 옛터에는 그러한
유물이 발견되는 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당나라의 보상화문전들은 그 굽는 기술과 더불어 거기에 새겨진 무늬가 고작 세련미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나라 것에서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작품들이 오히려 신라 것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자랑스러움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특히 신라 것에 새겨진 보상화 무늬가 그 본고장인 당나라 형태에서 재빨리 벗어나서 상념적인 이 보상화의
신비로운 꿈을 그렇게까지 현실화해서 예술 작품의 경지에까지 승화시켜 놓은 신라인의 그윽한 불교적
신앙과 사색,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준 솜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된다.
사진1) 안압지출토 보상화문전과 명문
사진2) 통일신라 보상화문전
사진3) 통일신라 누각문전 세부와 전체
27. 삼척 비석머리
강원도 삼척에 있는 동해 척주비 옆에 또 하나의 돌비석이 서 있다.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어느 곳에나 돌비석은 있지만 이 비석머리에 새겨진 무늬가 보여주는 야릇한 추상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며 석공은 무슨 기쁨을 품고서 이것을 새긴 것인지 그 천진
스러운 선의 율동과 원의 점철을 보고 있으면 마치 현대 추상미의 본바탕을 이런 데서 보는구나 싶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일렁이는 파도무늬를 새긴 것인가 하고 보면 크고 작은 동그라미가 불규칙하게 군데군데에 새겨져
있어서 산과 하늘 사이인 듯싶은 환상도 가져 보게 된다.
현대 추상미술이 난해하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주 듣게 되고 또 현대시의 난해성을 말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추상의 아름다움이란 알고 보면 그다지 난해한 것이 아니라는 본보기를 나는 여기에서도 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 비석머리의 작자는 물론 무명의 석공에 불과하고 또 유식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짐작이 된다. 그러나 그 흔한 용을 새기고 싶었다면 하다못해 못생긴 지네만치라도 표현할 수가 있음직하고 산이나 물을 그리고 싶었다면 유치원 아이들 그림만치라도 못 그릴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비석머리의 작자는 소박하고도 단순한 선과 원을 새겨 넣으면서 그 나름으로 추상조형의 흥겨움을 감추지 못할 만큼 즐거웠던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현대 지성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감흥의 발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도 그는 이로써 일종의 추상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 한국 사람들 특히 조선시대의 이름없는 목공, 석공,도공,화공들에게는 이러한 추상의욕이 스스로 마음 본바탕 속에 도사리고 있어서 작품에 그렇게 주저없이 표현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작품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면 한국인들의 천성 속에는 추상미의 본바탕을 이루는 일종의 이상시각 감흥이 맥맥히 흘러 내려오고 있다는 말이 될는지도 모른다.
(사진 1) 삼척 비석머리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학고재, 1994) 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