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삼상 6:1-21)
1-2.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사데)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사데는 지방이라는 표현보다는 들이다. 궤가 갈 곳을 잃어 블레셋 들판에 일곱달 동안 놓여있었던 것이다. 칠은 재앙을 상징한다. 궤로 인해서 블레셋에 재앙이 내려지자, 블레셋 지도자들은 어떻게 궤를 돌려보낼 것인가 고심하는 것이다.
3-5.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이스라엘의 속건제는 히브리어로『아샴』이라고 하며, 죄책, 보상, 배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 제사는 죄인이 사람들(이웃)에게 손실을 입혔을 때, 제사를 통해서 제물이 드려졌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궤를 빼앗았으므므로 여호와께 보상하는 차원에서 속건제를 드리자는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를 가라앉게 하자는 것이다.
속건제는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로 정해졌다. 블레셋 도시가 다섯이므로 다섯으로 하는 것이다. 동해보상법과 같이 손해를 입혔으면, 그와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이다. 블레셋이 독종과 페스트를 일으킨 쥐의 모양을 만들어서 속건제로 드린다는 말이다. 금으로 독종과 쥐모양으로 만든 것은 보상 차원인데,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에도 금으로 보상을 받고 나온 것을 연상시킨다.
6.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에 드디어 블레셋 사람들이 출애굽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하고 있다. 바로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므로 재앙이 계속 늘어났는데, 그런 교훈을 삼아, 더 이상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7-9.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이 재앙이 여호와에게로 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혹시 우연히 이런 재앙이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새 수레는 부정한 것이 실리지 않은 수레를 의미하며, 멍애를 메지 않은 소 두마리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소를 의미한다. 젖이 나는 암소는 새끼를 낳은지 얼마되지 않은 소다. 그래서 그 암소는 새끼가 생각나서 수레를 끌다가 다시 돌아오던가 아니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가 수레를 끌어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는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노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10-12.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젖소가 새끼가 생각이 났는지 울면서 갔지만, 어떤 힘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이다. 끌려가는 모습은 놀라운 정도로 좌우로 취우치지 않고 똑 바로 가는 모습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모든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13-15.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벧세메스는 여호수아 21장 13-16절을 보면 아론의 자손에게 준 땅이었다.『제사장 아론의 자손에게 준 것은 살인자의 도피성 헤브론과 그 목초지이요 또 립나와 그 목초지와 얏딜과 그 목초지와 에스드모아와 그 목초지와 홀론과 그 목초지와 드빌과 그 목초지와아인과 그 목초지와 윳다와 그 목초지와 벧세메스와 그 목초지이니 이 두 지파에서 아홉 성읍을 냈고.』
결국 제사장들이 있는 곳으로 법궤가 간 것이다. 레위기 1장 3절에서는 흠없는 수소로 번제로 드려야 하는데, 여기는 암소로 번제를 드린 것이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라고 표현한다. 우상을 섬기는 곳이 된 것이다.
16-18.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블레셋 족속을 대표하는 다섯 방백들은 법궤의 귀환 과정을 빠짐없이 모두 목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범궤로 인해 파생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역사였음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도시 에그론과 그들의 신 다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견고한 성읍은 높은 성벽이 둘러쳐 있고 문과 빗장이 있었던 요새화된 성읍을 가리킨다. 시골 동리는 견고한 성읍과는 반대 개념으로서, 저지대에 위치하였고 성곽을 갖추지 못한 작은 마을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돌은 특별히 기억해야 할 가치가 있는 사건들을 세월이 흐른 후에도 생생히 일깨우게 할 증표로서 종종 언급되곤 한다. 따라서 여기의 큰 돌 역시 빼앗겼던 언약궤를 다시 되찾은 기념비적 사건을 후일에 되새기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성경에서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십자가의 죽음으로 빼앗긴 영광을 부활을 하시므로 되찾은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19.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면 안되는데, 들여다보므로 오만 칠십명이 죽은 것이다. 맛소라 사본에는 오만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벧세메스는 작은 마을인데, 그렇게 많은 인구가 살았을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칠십명만 표기되어 있다. 칠십은 완전한 죽음을 나타낸다.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태양의 집이 우상의 집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드러나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는 죽게 되는 것이다.
20-21.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벧세메스는 이스라엘 땅인데,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곳이면,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궤가 전쟁에서 빼앗겨 영광이 사라졌는데, 그 궤가 이동하고 이동하면서 그 영광이 드러나므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궤가 블레셋에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심이요, 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지만, 그의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는 이전의 육적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은 이전의 영광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전의 영광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서 존재했던 그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