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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고 실내 칩거로만 시간을 보내려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무슨 좋은 얘깃거리가 없을까 싶어 지나간 자료들을 뒤져 보다가 마침 미쳐 소개해 드리지 못한 여행기가 있어 카페에 올립니다. 긴 장마로 인한 우울과 짜증, 쉬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19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잠시나마 이국풍물에 젖어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오래된 기록(2009년)이며 콤팩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좋지 않은 점 혜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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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기행-프롤로그
여행으로 문을 연 새해
▲ 이 다리를 건너면 국제공항이다.
대한민국의 명절은 먼저 교통대란으로부터 시작된다. 호왈(號曰) 귀성전쟁(歸省戰爭)으로 표현되기까지 한다.
이번 설 명절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딸애는 서울에서 부산의 집에까지 오는데 10시간이 걸렸다.
좁은 버스 안에서 옴짝 못하고 다리를 쪼그리고 버티었을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스러웠다.
문제는 우리가 연휴 끝 날인 27일(2009년1월) 상경할 일이 아득하게 여겨져서다.
이번 설은 휴가기간이 짧아 귀성과 귀경길이 교통대란을 방불케 할 원초적인 까닭을 품고 있는데다 일기조차 밉상을 보이느라 폭설이 거기에 화(禍)를 더 보탰다.
이러다간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외국여행이 펑크 날 계제라 안절부절못해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거듭한 결과 출국일 하루 전에 상경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어 설날 오후에 출발키로 하였다.
노포동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 편을 알아보니 관광버스를 투입 임시 증편하여 서울행 버스는 많았다. 오후 4시 15분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속도로에서 버스는 고속버스가 아니라 숫제 거북이 걸음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달렸고 드디어 밤 11시를 넘어 강남버스터미널에 도착했으니 7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딸애는 이틀을 연달아 버스에 시달렸으니 녹다운이 될 법도 했다.
딸애의 오피스텔에서 불편한 설날 밤을 보내고 초이튿날 우리 내외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일산에서 3300번 공항버스를 이용했다. 영종대교를 건너 40여 분만에 버스는 우리를 공항에 내려 주었다. 영종대교의 장대함과 바다 위에 다리를 놓은 기술의 힘에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세 시간여를 공항에 머물면서 출국수속을 밟고, 면세점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7시 15분발 캄보디아행 아시아나 항공에 몸을 실었다. 이렇듯 새해는 우리에게 여행으로 문을 열게 했다.
▲ 인천국제공항 앞 버스정류장. 여기에 내려 청사 안으로.
▲ 역시 국제공항이라 김해비행장과는 비교가 안 되더만.
▲ 공항 내부. 여행사와의 미팅 장소를 찾느라 끝에서 끝까지 걸었지 뭐유.
▲ 출국 수속을 밟는 동안 아내는 여행사의 안내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중.
▲ 탑승 게이트를 찾아 장소 이동중. 승무원이 앞에 섯길래 찰칵 한방.
▲ 출국 대기실에서의 방송인데, KBS 1의 저녁 9시 뉴스가 8시 30분에 나오더만요.
▲ 기내식. 해물 한식인데 먹을 만 했습니다
시간이 멈추고 역사가 침잠(沈潛)한 곳 - 캄보디아 기행 ①
(2009. 1. 28.)
비행기는 우리 시간으로 자정을 넘겨 캄보디아의 「시엠립(Siem Reap)」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간으로 우리나라와는 두 시간 늦은 11시를 넘겨서였다.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은 황량할 정도로 적막하고 옹색했다. 공항의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사위는 온통 어둠뿐으로 이 나라의 형편이 여간 낙후하지 않았음을 눈과 피부로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입국 신청을 하느라 한 시간여를 소요했다. 공항청사는 협소했으나, 비자 신청 창구는 생각만큼 혼잡하지 않았다. 중국관광객들의 소란이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였다.
차례가 되어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한 비자 신청서와 여권 속에 21달러의 지폐를 넣어 담당자에게 제출하니 옆 창구로 가라는 손짓에 자리를 옮겨 대기했다. 먼저 제출한 여행객들로 대기줄은 길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권은 5분이 채 안 되어 처리되어 나왔다. 의외로 빠르다고 여겼다.
국내에서 여행 스케줄을 검토하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던 중 캄보디아 공항 관리들의 민원처리에 어떤 관례가 있다는 글을 읽었기에 미리 나는 거기에 대처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60년대 공무원들의 민원처리 팁 문화를 떠올리고 거기에 적절히 대응한 셈이었다.
캄보디아의 관광비자발급 공식 수수료는 20달러이다. 거기에 나는 1달러를 팁으로 생각하고 미리 계산하여 지불하였었다. 이를 굳이 캄보디아 공무원들의 부패로 인식하여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6*25 전란을 겪은 60년대의 우리나라 형편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나 국가나 성장통이 따르며 통과의례란 것이 있게 마련일 터였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우리의 이름을 적은 팻말을 들고서 마중 나온 현지 가이드와 「하나투어」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대기한 차량에 승차했다.
무더운 밤공기가 후끈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여 입고 간 겨울 점퍼를 벗어들게 했다.
이윽고 우리는 벤츠 승합차에 실려 야심한 시각에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 호텔정원
▲ 힌두문화가 호텔의 정원에까지도 스며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 호텔의 연못
※ 「소피텔 로얄 앙코르 리조트(Sofitel Angkor Phokeethra Golf and Spa Resort)」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호텔 체인인 소피텔에서 운영하는 리조트로 일본계 자본이 투입되어 정원의 모양새며 운영방식이 일본풍을 풍기는 듯 보였다. 골프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급 호텔이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드디어 캄보디아(앙코르) 유적지 관광에 나섰다.
호텔을 빠져나오니 제일 먼저 도롯가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밟힌다.
「웬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 있대요?」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친절한 설명이 뒤따랐다.
말인즉슨 가난한 환자들이 병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 자야바르만 7세 병원
자선병원이다.
스위스인 의사가 캄보디아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보고 72세에 조국을 떠나 이처럼 빈민을 위한 자선병원을 이 「씨엠립」에 열었다고 한다.물론 전액 무료 이용이다. 현재 그의 나이는 77세의 고령임에도 가난한 외국동포를 위한 진료는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다 한다.
포스터를 보아서 느끼겠지만 그는 첼리스트라고 한다. 자선병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는 이따금 콘서트를 열어 후원금을 모으며 뜻있는 이들의 기부와 헌혈을 받아 병원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인술(仁術)과 음악예술의 결합.
참으로 아름다운 성자의 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 자야바르만 7세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 제국의 왕(1181~1215경 재위)으로서 크메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켰으며 이 기간에 크메르 제국은 그 영역 판도나 왕실 건축분야, 이를테면 앙코르 톰을 비롯해 사원, 도로, 휴양소, 병원 등의 건설사업에 힘을 쏟아 그의 30년에 걸친 황금의 치세는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한반도의 광개토대왕에 비견되었다. 그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이름을 딴 자선병원이 바로 「자야바르만 7세 병원」이다.
롤루오스(Roluos) 유적지를 향해
▲ 앙코르 유적지 입장권 매표소다. 앙코르 유적지에 입장하려면 당연하게 입장권을 구매하여야 한다. 1인 1일 20弗, 3일 40弗. 일주일 짜리는 60弗이다. 우리는 3일 40弗짜리로 구매했다.
사진을 찍고
입장권을 비닐케이스에 넣어 목에 걸도록 끈을 달아 교부해준다. 이걸 목에 걸고 「씨엠립」주(州)에 산재한 유적지에 입장할 때마다 검표원에게 확인을 시켜준다. 검표원은 사진의 본인이 맞는가를 대조하고 혹 기간이 경과한 입장권을 부정 사용하는지의 여부도 확인한다.
▲ 롤레이
▲ 링가
우리의 가이드 「박영경」님이 「링가」를 매만지며 열변을 쏟아낸다.
「시엠립(Siem Reap)」
「시엠립(Siem Reap)」의 지명에는 “태국에 의하여 점령된 곳" 이라는 뜻이 있다 하며. 캄보디아어로 “패배한 타이“ “시암족을 물리친 곳”을 뜻한다고도 한다.
「시암(Siam)」은 태국의 시암족을 일컫는 말이니 곧 태국이라는 뜻으로 대칭된다.
「샴쌍둥이(결합(結合)쌍둥이)」이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의 수정란이 완벽히 분리되지 않아 몸의 일부가 붙은 채로 태어난 쌍둥이를 말한다. 1811년 이런 결합쌍둥이가 태국의 시암(Siam)에서 처음 출생하였기로 이 지명을 따 「샴(Siam)쌍둥이」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