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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5) - 제 5장 여래선 시학 5. 청정심과 반야
5. 청정심과 반야
이런 마음은 다음과 같은 시에도 드러난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시들은 이른바 선시는 아니고 선미(禪味)나 선기(禪機)가 느껴지는 시들이고, 특히 여래선 사상, 곧 망념을 닦거나 망념에서 벗어나 자성청정심을 찾는 시다. 그런 점에서 자심-대상-진심 혹은 자아-대상 진아의 도식을 모델로 한다. <찬기파랑가>의 경우 충담은 스님이기 때문에 곧장 대상(화랑)에서 진심(청정심)을 읽고, 서정주는 초승달(대상)을 매개로 청정심을 읽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시에는 시인이 대상을 보면서 대상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고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바람이 자고 있네요. 그 곁에
낮달도 자고 있네요.
남쪽 바다의 소음을
귀 작은 나귀가 가고 있네요.
패랭이꽃이 피어 있네요.
머나먼 하늘, 도요새 우는
명아주여귀꽃도 피어 있네요.
-김춘수, <깜냥> 전문
김춘수의 <깜냥> 전문이다. 고요한 작은 읍의 풍경이다. 이 풍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인은 작은 마을의 사물들을 보고 있지만, 그 사물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은 자고 있고, '낮달'도 자고 있다. 원래 바람은 불고 낮달은 흘러간다. 그러나 이렇게 사물들이 고요한 것은 시인이 사물(대상)에서 고요한 마음, 청정심을 읽기 때문에 가능하고, 따라서 시인의 자심은 대상을 매개로 진심, 고요, 청정심을 읽는다. 한편 시인의 마음이 고요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거기 비치는 대상들도 고요하고 청정하다. 그러니까 시인의 마음은 맑은 거울이고, 이런 경지가 된 것은 시인이 거울에 묻은 티끌과 먼지를 닦는 수행의 결과이다. 한마디로 이념거정의 세계.
그러므로 남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도 작은 마을이고, 가고 있는 나귀도 귀가 작은 나귀이다. 작은 마을, 귀가 작은 나귀 역시 크게 보면 고요의 이미지다. 한편 이 소읍에는 패랭이꽃, 명아주여귀꽃도 피어 있지만 이꽃들 역시 고요할 뿐이고, 도요새가 울고 있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머나먼 하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시는 하강(사물들이 자다)과 상승(꽃이 피다)의 구조를 중심으로 그 사이를 나귀가 지나가는 구조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하강-수평-상승의 구조이다. 그러나 우리가 읽는 건 이런 역동적 구조가 아니라 이런 역동성이 소멸한 고요, 청정심이다. 표제인 '깜냥'은 일을 해내는 얼마간의 힘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보잘것없는 능력. 그러나 이렇게 보잘것없는 세계는 말처럼 보잘것없는 세계가 아니라 고요, 청정심, 무에 접근한다. 손준영은 이 시를 두두물물이 화합하고 자유롭게 춤추는 대교향악, 모든 사물들이 합도하는 공의 세게로 해석한 바 있고, 그건 수사법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나는 여래선의 정신과 방법을 중심으로 읽는다.
그의 독법은 기법, 특히 선시의 기법을 중심으로 한다. 그는 이런 시각에서 내가 펴낸 시집 <인생>(2002)을 선의 시각에서 해석한 바 있다. (송준영, <현대 선시의 새로운 기미>, <선, 언어로 읽다>, 소명출판사, 2010) 그리고 시집<비누>(2004)와 <이것은 시가 아니다>(2007)에서 선정신이 한층 농축되고 자유로운 경지에 든다고 평한다. 보잘것없는 시를 이렇게 해석해주니 고마울 뿐이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쓰는 건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선에서 찾기 위해서고, 한편 그동안 써온 나의 시에 대한 자기성찰을 동기로 한다. 그건 그렇고 그는 졸시 <비누>를 선시의 기법, 곧 반상합도, 무한실상, 초월은유의 시각에서 해석한 바 있다. (송준영, <선시와 아방가르드> 앞의 책)
김춘수가 대상의 소멸을 통해 고요한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면 오규원의 후기시, 특히 그가 병 때문에 경기도 조용한 마을에서 요양하며 마음을 비우며 쓴 시들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단순성과 투명성이고 한마디로 잡스러운 망상과 번뇌를 제거한 순수한 마음이고, 이런 마음이 여래청정심과 통한다. 따라서 그의 시도 거칠게 요약하면 자심-대상-진심의 도식을 보여주고, 그런 점에서 여래선 시학에 든다. 한마디로 이념거정(간심)의 세계, 그리고 이 마음을 지키려는 수심(守心)의 세계이다. 내가 <비누>에서 공을 읽는다면 그는 '자연'에서 청정심을 읽는다.
그러나 '선의 유형'에서도 말했듯이 여래선을 여래청정선으로 부르는 것은 <능가경>과 관계가 있고, 그것은 초기 달마선과 그후 도신, 홍인의 여래선을 포함한다. 한편 조사선은 <능가경>이 말하는 여래장선을 더욱 일반화하고, 노장사상을 수용하면서 중국화하고, 염불, 관심(觀心)같은 수단에서 행방된 단순하고 직절적인 선이다. <능가경>이 강조하는 것은 반야사상의 결합이다. 여래장은 본래부터 청정하여 번뇌 망상 속에 있어도 변함이 없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내가 강조하는 것은 여래선이 여래장사상(자성청정심)과 반야사상(공)의 결합이라는 점이고, 따라서 대상에서 공성을 읽는 시와 대상에서 청정심을 읽는 시는 크게 보면 같다. 반야가 청정심이고 청정심이 반야다. 다음은 오규원의 시.
어젯밤 어둠이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더 만들어
매달아 놓았네
제비꽃 밑에 제비꽃 그늘도
하나 붙여 놓았네
-오규원, <봄과 밤> 전문
오규원의 <봄과 밤> 전문이다. 시인은 제비꽃 하나를 본다. 지난 밤 어둠이 만든 제비꽃이다. 나는 원래 자연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기 때문에 제비꽃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모르지만 이름만 보면 제비처럼 생긴 꽃 같다. 그래도 불안해서 사전을 뒤져본다. 제비꽃은 제비꽃과의 다년초로 봄에 보랏빛으로 피는 꽃으로 다른 이름은 오랑캐꽃이다. 아무튼 제비꽃은 제비와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나는 제비를 연상한다. 제비는 봄에 와서 인가의 처마 끝에 집을 짓고 지내다 늦은 가을에 남방으로 떠난다. 봄소식을 알리는 새이고, 봄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이다. 오랑캐꽃 보다 제비꽃이라는 이름이 좋다.
그런 그렇고 이 시에서 오규원이 보는 제비꽃은 지난 밤 어둠이 만든 꽃이다. 그는 망상 번뇌(어둠)가 사라지면서 태어나는 맑은 마음(제비꽃)을 노래한다. 이른바 이념거정(관심)의 세계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둠이 사라지면서 울타리에 제비꽃 하나 피어 있네'가 아니라 '어둠이 울타리에 제비꽃 하나 매달아 놓았다'는 표현이다. 전자에선 망념(어둠)이 사라지고 맑은 마음(제비꽃)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제비꽃은 하늘을 열치고 나타나는 달(<찬기파랑가>)과 같다. 그러나 후자에선 망념(어둠)이 맑은 마음(제비꽃)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한 단계 발전한 여래선 시학에 든다. 또한 어둠은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놓았다. 어둠은 울타리 밑에 제비꽃 하나 매달아놓고, 다시 제비꽃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 하나 붙여놓았다.
이런 표현에 의해 자성청정심은 이중 구조, 아니 중도를 보여준다. 울타리 밑에 매달린 제비꽃(밝음)과 제비꽃 밑에 붙어 있는 제비꽃 그늘(그늘)의 관계가 그렇다. 밝음이 그늘이고 그늘이 밝음이다.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다. 여래선이 추구하는 것은 대상에서 여래청정심과 반야 공을 읽는 마음이다. 김춘수시 대상에서 여래 청정심만 읽는다면 오규원은 대상에서 청정심과 반야 공을 동시에 읽는다. 제비꽃은 청정심을 상징하지만 제비꽃과 제비꽃 그늘은 공, 중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6) - 제 5장 여래선 시학 6.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6. 무상(無相)과 무상(無相)
달마는 <오성론(悟性論)>에서 유상은 무상의 상(相)이라고 말한다. 일체의 상을 여윈 것이 부처(여래청심)이고, 그러므로 유상이 무상의 상이라는 것은 육안이 아니라 오직 지혜(반야)로써만 알 수 있고, 이런 가르침은 유와 무, 색과 공의 중도를 지향한다. 그러므로 대상에서 자성청정심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유상에서 무상을 읽는 것이지만 무상은 무상이 아니라 무사의 상이고, 색과 공의 중도이고, 여래청정심은 반야사상과 결합된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중도
유상 무상
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을 가지고 법을 배우는 것은 마음과 법이 모두 미혹한 것이고, 마음을 갖지 않고 법을 배우는 것은 마음과 법이 모두 깨침이라는 것을. 무릇 미혹한 사람은 깨침에 미혹한 것이고, 깨친 사람은 미혹을 깨친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正覺)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공무(空無)하다는 것을 알아 미혹과 깨침을 초월하고 미혹과 깨침이 없어야 비로소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견해(正解正見)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색은 스스로 색이 아니라 마음을 말미암기 때문에 색이고,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라 색을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마음과 색의 두 모습에는 생겨남과 멸함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유는 무에 있어서의 유이고, 무는 유에 있어서의 무이다. 이것을 참되게 보는 것(眞見)이라 이름한다.
-달마, <오성론>, 최현각, <선어록산책> 불광출판부, 2005, 71~72쪽
마음이 문제다. 마음을 가지고 법을 배우는 것은 미혹이고 마음을 갖지 않고 배우는 것은 깨침이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깨침에 미혹하고 깨친 사람은 이 미혹을 깨친다. 마음을 갖지 않고 깨친다는 것도 깨침에 미혹한 것이므로 이런 미혹도 깨치는 것이 진정한 깨침이고 정견(正見)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공무(空無)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견은 미혹/깨침도 초월한다.
청정심은 반야와 만난다. 맑은 자성은 유/무, 미혹/깨침을 초월하는 마음이다. 색도 마음이 만들고, 마음도 마음이 아니라 색을 인식할 때 마음이다. 오늘은 초여름 날씨가 맑고 아파트 마당엔 나무들이 초록색 잎들을 달고 서 있다. 나는 나무들을 본다. 나무들이 있는 것은 내가 있고, 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다면 나무(색)는 없다. 한편 나무가 없다면 나,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맑은 초여름 날씨, 아파트 마당, 나무들과 만날 때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색은 개별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성, 실체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는 무에 의한 유이고, 무는 유에 의한 무다. 나무는 마음에 의한 나무이고, 마음은 나무에 의한 마음이다. 색은 공에 의한 색이고, 공은 색에 의한 공이다. 마음이 공무라는 말은 이런 뜻이고, 이것이 참되게 보는 진견(眞見)이다. 그러므로 유상은 무상의 상이다.
올바른 견해는 마음이 공무하다는 것을 알고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분별을 초월하고 결국 미혹과 깨달음도 없을 때 바른 이해 바른 견해가 된다. 그러니까 달마가 강조하는 것은 중생도 깨달으면 부처(여래장사상)이고, 깨달으면 미혹도 깨달음도 없다(반야사상)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무자성, 공, 청정심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마음은 분별을 초월하는 불생불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실체가 없고 이름이 마음일 뿐이다. 따라서 여래선 시학의 모델 자심-대상-진심은 무심-무상-진심이 된다.
진심
무심 무상
자아와 대상, 자심과 대상, 마음과 색의 관계는 반야가 강조하는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의 관계에 있다. 마음이 있으므로 색이 있고, 색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다. 둘은 자성이 있는 게 아니라 연기의 관계이고, 그러므로 무자성이고 공이다. 무가 있으므로 유가 있고, 유가 있으므로 무가 있다. 자아와 대상, 마음과 색, 무와 유는 개별적으로 태어나고 멸하지만 무자성, 연기, 공, 청정심의 입장, 그러니까 반야의 입장에선 불생불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참되게 보는 것. 그러므로 사물을 보되 봄이 없이 보아야 하고 생각하되 생각 없이 생각해야 한다.
요컨대 여래선 시학은 간심간정이고 증심이고 수심이지만 달마가 강조한 것도 무심이고 혜능이 강조한 것도 무심이다. 그러나 말마에서 5조 홍인까지 강조한 것은 점수이고 조사선이 강조한 것은 돈오이다. 홍인은 <최상승론>에서 말한다. 중생의 마음속에는 금강과 같은 불성이 있지만 망념 번뇌로 온갖 분별망상에 휩싸여 있다. 따라서 고요하게 청정한 마음(불성)을 지키면 망념이 생기지 않아 열반법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최현각, 앞의 책,87쪽) 이른바 수심이다. 홍인은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없고, 다만 중생은 번뇌 망상때문에 부처가 될 수 없으므로 자성청정심을 먼지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수심 역시 수행에 속한다.
그러나 달마도 홍인도 무심(청정심)을 강조하고 혜능도 무심을 강조한다. 다만 전자의 무심은 여래청정심과 반야 공이 결합된 무심이고 후자의 무심은 반야 공이 더욱 강조된다. 내가 강조한 여래선 시학의 도식 자심-대상-진심은 결국 무심-무상-진심이고, 이런 무심이 증심이고, 자아-대상- 진아 역시 무아-무상-진아가 된다. 간단히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진아
무아 무상
그렇다면 시쓰기를 구성하는 네 요소 자아-대상-언어-쓰기의 관계는? 자아-대상의 관계는 무아-무상의 관계이고, 선종에서는 무아가 무상이고 무상이 무아다. 남은 것은 쓰기, 쓰는 행위이고, 이때 언어가 문제된다. 물론 결론부터 말하면 쓰는 행위도 무아이고 무상이다. 그러나 선의 시각에서 언어와 쓰는 행위만 별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의는 여래선을 발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니까 조사선 시학이 아니다. 여래선 시학에서 처음 시쓰기는 수행으로 간주되고, 자심-대상-진심의 구도에서 시쓰기는 대상의 자리에 있다. 여래선은 대상을 매개로 번뇌 망상(자심)을 제거하고 진심을 본다. 그러나 이런 여래청정심이 반야사상과 결합되면서 시쓰기는 수행의 수단이 아니라 공사상과 관계되고, 따라서 무아-무상-진아와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게 된다. 이 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너무 이론적이고 분석적인가?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27) - 제 5장 여래선 시학 7. 무위의 시쓰기
7. 무위의 시쓰기
달마에 의하면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해탈이다. 마음도 거짓 이름이고 실체가 없다. 그런가 하면 3조 승찬은 <신심명(信心銘)에서 말한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에 상응치 못하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으면 통하지 않을 곳이 없다.(多言多慮 轉不相應 絶言絶慮 無處不通). 여래선이나 조사선이나 언어문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언어가 사유이고 분별이기 때문이다. 말을 끊고 생각을 끊을 때 깨닫는다. 그러므로 의상 대사도 <법성게>에서 말한다.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일체가 끊어져 깨달아 알 뿐 다른 경계는 없다(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한마디로 여래선도 그렇고 조사선도 그렇고 무위, 함이 없이 함이 있는 시쓰기, 중도의 시쓰기가 요구된다. 무위는 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되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하는 행위다. 물론 이런 행위는 6조 혜능이 말하는 무아-무상-무주를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조사선 시학에 대해 말하는지 모른다.
오늘은 두 번이나 병원을 다녀왔다. 날씨가 너무 맑은 초여름이다. 오전엔 며칠 전부터 귀가 아파 우성아파트 단골 이비인후과에 들려 귀를 치료하고, 오후엔 치아가 아파 내가 사는 진흥아파트 상가 2층 단골 치과에 들려 한 시간 동안 긴 의자에 누어 치료를 받고 돌아왔다. 이 좋은 날씨에 병원 다니는 내가 우습고 불쌍하다. 우울했던 봄날이 가고 쾌청한 여름이다.
지난 밤 꿈이 생각난다. 나이 든 시인과 젊은 여자가 싸운다. 그녀는 방바닥에 엎드려 그의 바지 자락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나이 든 시인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그녀 얼굴에 상처를 내고, 그녀 얼굴에선 피가 흐른다. 또 하나는 내가 작은 모텔에 누워 있는 꿈이다. 교외 작은 모텔 방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다. 방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방문을 안으로 당겨도 다시 열린다. 종업원을 부른다. 남자 종업원 두명이 온다. 그들이 방문을 고치고 돌아간다. 침대로 가 눕는다. 그러나 이번엔 옆방과 통하는 문이 있다. 문을 안으로 당긴다. 그러나 역시 다시 열린다. 복도로 나가 종업원을 부른다. 그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런 꿈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는 게 꿈이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시학은 일종의 과도기 시학이고, 선학도 아니고 시학도 아니다. 지금 나는 여래선이 암시하는 여래청정사상과 반야사상 가운데 반야사상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여래선과 조사선의 중간 단계라고 할까? 이론은 분석이고 해석이다. 여래선 시학에선 시쓰기가 수행이다.
그러나 반야사상을 강조하면 시를 쓰는 행위는 이른바 무위가 되고, 무위는 시를 쓰되 시를 쓰지 않는 것. 시라는 이름, 형상에서 자유로운 시쓰기다. 언어 역시 그렇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무아의 시쓰기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의도나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무언(無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거느린다. 언어를 쓰되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따라서 시쓰기를 구성하는 네 요소, 자아-대상-언어-쓰기는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난다.
무언
무아 무상
무위
이 도식에서 무언은 말 그대로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 떠나기, 혹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공)이다. 무위 역시 시를 쓰되 쓴다는 마음을 버리는 것.
언어에 대한 집착은 의미에 대한 집착이고, 여래선이 자성청정심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래선 시학은 언어(기호)를 구성하는 기표(말소리)와 기의(의미)의 관계에서 기표의 투명성, 기표의 청정성, 곧 잡다한 의미를 제거한 기표 자체를 지향해야 한다. 선(禪)은 한자를 강조하면 단순한 마음과 대상을 보여준다는 뜻도 있다. 따라서 관념, 의미, 설명 등을 제거한 1차적 말하기를 강조한다. 새를 보면 '저건 새댜'라고 말할 뿐 새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다. 왜냐하면 설명은 관념이고 조작이고 분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쓰기는 공안에 나오는 선사들의 어법과 비슷하다. 이런 어법은 여래선이 아니라 조사선에 해당하지만 참고로 조주 선사의 공안을 보기로 든다.
물음: 외부에서 사람이 와서 조주는 어떤 설법을 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조주: 소금은 귀하고 쌀은 천하다.
당신은 어떤 설법을 하느냐, 법을 어떻게 설하느냐는 학승의 물음에 조주는 '소금은 귀하고 쌀은 천하다'고 말한다. 옛날 중국에선 소금값이 쌀값보다 비쌌고, 그래서 소금은 귀하고 쌀은 천하다고 조주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다. 조주의 설법은 꾸밈이 없고, 조작이 없고,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것.
'소금이 귀하고 쌀이 천하다'는 말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할 뿐 '그래서 사람들이 소금 구하기가 어렵다' '나라가 말이 아니다' '소금을 싸게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한다'는 식의 설명이 없다. '사원은 무엇인가?' 물으면 '사원은 사원이다'라고 대답하고 '사원엔 어떤 사람이 사는가?' 물으면 '사원엔 중들이 산다'고 대답한다. 앞에서 이런 말하기는 1차적 말하기라고 했지만, 그건 사물에 대한 복잡한 사유가 없는 가장 단순한 말하기, 분별, 사유가 개입하지 않은 말하기를 뜻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이런 어법을 '선의 시쓰기'에서 곧장 말하기(直言)의 방법, 혹은 보여주기(示)의 방법이라고 부른 바 있다. '곧장 말하기'는 설명, 비유, 상징, 반어, 역설 같은 일체의 시적 기법을 배격한 상태에서 무심, 무아, 선적 깨달음, 혹은 자성청정심을 그대로 말하고,'보여주기'는 설명하거나 진술하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나 선적 인식을 사물이나 상황으로 보여주는 방법이다. 전자의 경우 자아(무아)가 개입한다면 후자의 경우엔 개입하지 않는다. 모두 있는 그대로 말한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에선 기표와 기의가 1:1의 관계로 있다. '나무'(기표)는 '나무'(기의)다.
이런 어법, 시쓰기도 결국은 청정심을 찾아가는 방법이고, 기표와 기의가 1:1로 있고, 언어 기호가 이렇게 투명하다는 것 역시 무심, 나아가 청정심을 반영한다. 잡것이 없지 않은가? 무위는 어법과 관련시키면 기호의 투명성을 지향하고, 기호의 투명성이 청정심과 통한다, 반야사상은 다시 여래청정사상과 만난다.
요컨대 여래선 시학은 자성청정심을 찾아가는 시학이고, 그런 점에서 나(자심)는 부처(여래청정심)를 찾아가고, 이렇게 또 하나의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수행이고 시쓰기다. 달마가 강조하는 것은 무심이다. 대상을 보는 것도 무심(관심)을 매개로 무심(증심)으로 나가야 한다. 이념거정(관심)을 통해 여래청정심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무심이 중요하고, 무심의 훈련, 무심의 수행이 중요하다. 달마는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에서 도들 닦는 방법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물음: 도를 닦아 미혹을 끊는 데는 어떤 마음가짐(心智)이 필요합니까?
대답: 방편이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물음: 어떤 것이 방편이란 마음가짐입니까?
대답: 미혹을 살펴보고 미혹이 본디 일어날 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런 방편에 의해서만 미혹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을 마음가짐이라고 한다.
물음: 법대로 있는 마음이 어떤 미혹을 끊는단 말입니까?
대답: 범부 외도 성문 연각 보살 등 단계적 깨달음에 관한 미혹(解惑)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달마어록>, 柳田聖産 주해, 양기봉 옮김. 김영사, 2005, 101쪽
이 책에서 헤맴이라고 번역된 미혹(원문엔 惑)을 원문 그대로 옮기고, 문장을 나대로 다듬었다. 여기서 달마는 도 닦기(修道)의 방법에 대해 말한다. 도를 닦아 미혹을 끊기 위해서는 마음가짐(心智)이 필요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방편이다. 마음가짐은 본래 미혹도 없다는 것을 아는 마음가짐이다. 본래 미혹도 없는 것이 마음, 법대로 있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끊어야 할 미혹도 없지 않은가? 어떤 미혹을 끊는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달마는 '단계적으로 깨달음에 관한 미혹'을 끊는다고 말한다.
단계적 깨달음은 수행을 매개로 하고, 수행은 범부도 외도 성문 연각 보살의 단계가 있다. 수행은 도를 보는 위치에서 모든 지적인 미혹을 벗어나고, 다음 정(情)과 의(意)에 따르는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실천이다.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에 지니고 닦아 실천한다. 그러나 달마가 강조하는 것이런 단계적 깨달음도 미혹이므로 이런 미혹도 끊어야 한다. 왜냐하면 본래 청정심은 깨달음/미혹의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혹을 끊는다는 마음(심지)도 방편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도를 닦는 마음(심지)도 방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