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주영 연구
우리가 아는 현대자동차나 백화점 중공헙 보험 그리고 HDC등등 이 현대그룹을 만든 창업자이자 명예회장이다. 정주영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다. 서울에서 경리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도로 끌려간 적도 있다. 이때 아버지는 "대학을 나온 놈도 실업자가 되는 판국에 너 같은 조선놈이 올라간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건 아니다. 게다가 넌 장남이고 농사를 지어야지." 라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이후 가출하여,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쉴새없이 살아가며, 23살에 자신의 살가게를 차렸었다. 그러다 돈을 빌려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된다. 하지만 인수한지 20일 만에 공장에 불이 나게 되고, 수리중인 자동차와 재산들이 모두 타버리게되었다. 일반적인사람이었으면 좌절하고 막막했겠지만, 정주영회장을 달랐다. 오히려 처음 돈 빌려줬던 사람을 찾아가서 한번더 돈을 빌리게된다. 이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정비공장을 세우고 이듬해 현대토건, 지금의 현대 건설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한강에서 제일 오래된 인도교인 한강대교 복구공사를 맡아서 성공시키게된다. 특히 현대는 미군정 시기에 미군 관련 공사를 거의 도맡아 하였다.
정주영은 남들이 말리고 전례없는 일이라고 하지말라고해도 계속 도전하였다. 건설현장에 중장비가 필요하니깐 중기 공장을 세우고, 시멘트가 모자라니깐 아예 시멘트 공장을 세워버리고, 1968년에는 현대건설이 아무도 해본적 없었던 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시키게 된다.
그리고 1967년에 정저영 회장의 넷째 동생이 맡아서 미국의 포드사랑 합작을 해서 회사를 세우게 된다. 하지만 불량품이 너무 많아 1974년에 국산화로 방향을 틀어서 한국 최초의 국산화 모델 포니를 생산하게 된다.
1998년 IMF 외환위기때는 부도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현대자동차는 as부문을 이끌었고 90년대 초반에는 갤로퍼 등 suv의 성공을 이끌어서 능력을 입증한 2남 정몽구 회장이 물러받았다.
그리고 정주영의 가장 유명한 일화인 지금의 울산을 만들었다는 허허벌판에 조선소를 세웠다는 얘기이다. 조선소를 지으려면 돈이 굉장히많이 필요하였다. 정주영은 조선소를 짓기위해 일본, 미국을 방문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했고 포기하려했었다. 그리고 대통령을 찾아가 거절당했다고 얘기를 하자 대통령은 유럽으로 가보라 얘기를 하였고, 영국에 도착해서 어찌어찌해서 기술협약은 맺게되었다. 하지만 기술협약을 맺는다고 돈이 나오는것은 아니기때문에 은행을 소개시켜달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은행을 소개시켜주는것까지는 무리라는 말을 듣고 당시 지갑에서 5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서 뒷면에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것을 보여주곤, 정주영회장은 " 우리가 1500년대부터 철갑선을 만든 민족입니다. " 라고 하였고, 은행추천서를 써주었다고한다. 정주영회장은 은행으로 가서 돈을 빌리려고 하였지만 은행은 먼저 배를 계약할 사람이 있게된다면 돈을 빌려준다고 얘기를 하게된다. 정주영회장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울산지도 그리고 배 설계도 이것들만 가져가서 배를 계약하겠다는 사람과 만나게되고, 조선조를 짓게된다. 이때 조선소를 지을때 유조선과 함께 짓게되고, 조선소가 다만들어지는 동시에 배도 나오게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현대중공업이 현재 최고의 조선사이다.
정주영의 5백원 지폐 일화는 유명하여 알고있었지만 그전에 정주영회장이 일꿔냈던 많은 분야의 사업의 탄생과 그의 명언인 " 더하려고 해도 더 할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에 대한말에 정주영의 스토리에 대입하여, 그가 얼마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