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우(任希雨)
[문과] 영조(英祖) 38년(1762) 임오(壬午)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12/17)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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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숙여(肅與)
생년 신해(辛亥) 1731년 (영조 7)
합격연령 32세
본인본관 풍천(豊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중앙관] 조선후기 중앙관 홍문관(弘文館)
[이력사항]
선발인원 17명 [甲1‧乙2‧丙14]
전력 유학(幼學)
문과시제 어제(御題) 표(表):한곽광사배대사마대장군(漢霍光謝拜大司馬大將軍)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임용(任瑢)[生]
[조부(祖父)]
성명 : 임수적(任守迪)[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임윤원(任胤元)[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이국보(李國寶)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임수적(任守迪)
[문과] 영조(英祖) 1년(172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1위(21/4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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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길보(吉甫)
생년 신해(辛亥) 1671년 (현종 12)
졸년 갑자(甲子)【補】(주1) 1744년 (영조 20)
향년 74세
합격연령 55세
본인본관 풍천(豊川)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후기 대사간,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길보(吉甫). 임숙영(任叔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양(任量)이고, 아버지는 참판 임윤원(任胤元)이며, 어머니는 권완(權俒)의 딸이다.
1696년(숙종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음(門蔭)으로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이 되었다.
1725년(영조 1) 삼가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곧 문한관(文翰官:문필에 관한 직무를 맡은 관직)이 되었고, 1727년(영조 3) 조현명(趙顯命) 등 20인과 함께 홍문록(弘文錄):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에 올랐다.
그 뒤 부수찬·수찬·헌납·부교리·사간·응교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고, 1734년(영조10) 대사간이 되어 훈련도감 및 전라도지방의 바르지못한 정책을 바로잡을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승지에 임명되어 그 뒤 8년간이나 계속 이 직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대사간·형조참판을 잠시 역임하기도 하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고금의 필법의 장점을 취하여 독특한 서체를 구사하여 당대에 명필로 이름났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수적(任守迪))]
[진사]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9위(39/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44명 [甲3‧乙7‧丙34]
전력 현감(縣監)
관직 참판(參判)
관직 옥당(玉堂)
문과시제 어제(御題) 表(표):의송호안국진춘추전(擬宋胡安國進春秋傳)
타과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9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임윤원(任胤元)[文]
[조부(祖父)]
성명 : 임량(任量)
[증조부(曾祖父)]
성명 : 임숙영(任叔英)[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흔(權俒)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유이정(柳以井)[生]
본관 : 전주(全州)【補】
[처부(妻父)2]
성명 : 남오성(南五星)
본관 : 의령(宜寧)【補】
[가족과거]
자(子) : 임정(任珽)[文]
자(子) : 임집(任)[文]
자(子) : 임업(任𤩶)[文]
자(子) : 임준(任㻐)[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을사성상즉위증광별시문무과방목(乙巳聖上卽位增廣別試文武科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3])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임숙영(任叔英)
[문과] 광해(光海) 3년(1611) 신해(辛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7위(13/1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84C219C601B1576X0
자(字) 무숙(茂叔)
호(號) 소암(疎菴)
생년 병자(丙子) 1576년 (선조 9)
졸년 계해(癸亥) 1623년 (인조 1)
향년 48세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풍천(豊川)
거주지 한성([京])【補】(주1)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박사, 부수찬,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상(湘). 자는 무숙(茂淑), 호는 소암(疎庵) 또는 동해산인(東海散人).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임열(任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락찰방 임숭로(任崇老)이고, 아버지는 감역 임기(任奇)이며, 어머니는 승지 정유일(鄭惟一)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10년 동안 수학, 논의가 과감하였으며 전후 유소(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이를 시관 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취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는데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 곧 파직되어 집에서 지내다가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짓고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統軍亭序)」는 명나라 학자들로부터 크게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숙영(任叔英))]
[진사]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위(6/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3명 [甲1‧乙5‧丙7]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당(湖堂)
관직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문과시제 책문(策問):시조(時措)
타과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임기(任奇)
[조부(祖父)]
성명 : 임숭로(任崇老)
[증조부(曾祖父)]
성명 : 임열(任說)[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정유일(鄭惟一)[文]
본관 : 동래(東萊)【補】
[처부(妻父)]
성명 : 이상홍(李尙弘)[文]
본관 : 여주(驪州)【補】
[처부(妻父)2]
성명 : 윤정(尹梃)
본관 : 미상(未詳)
[주 1] 거주지 : 『만력29년신축사마방목(萬曆二十九年辛丑司馬榜目)』(한국국학진흥원[안동 풍산김씨 허백당(虛白堂[金楊震]) 종택])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임열(任說)
출생일 1510년(중종 5)
사망일 1591년(선조 24)
조선전기 대사헌, 한성판윤,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군우(君遇), 호는 죽애(竹崖). 임장손(任長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제(任濟)이고, 아버지는 참봉 임명필(任明弼)이며, 어머니는 윤훤(尹萱)의 딸이다.
1531년(중종 26)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3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1536년 수찬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해 사가독서(賜暇讀書)주 01)를 하였다.그 뒤 부교리·집의·전한을 거쳐, 1543년 직제학이 되었고, 이듬해 병조참의가 되었다가 승지로 전보되었다. 명종 때 대사간·이조참의·대사헌·병조참의를 역임하였고, 그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예조참의가 되었다.이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시 한성부좌윤·우윤을 거쳐,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 않았다. 1560년(명종 15) 예문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동지춘추관사·도총부도총관이 되었다.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1567년 한성부판윤에 이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세 번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고, 60년을 조정에 있으면서도 시종 권세를 지닌 간신이나 사화(士禍)에 굴복하거나 따라붙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임열(任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