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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 덕계옥계개암 강론 460주년기념 <연평답문><주자연보> 강독회
한국주자학회 / 함양 남계서원 / 일두학연구원
덕계집(德溪集) 오건(吳健)생년1521년(중종 16)몰년1574년(선조 7)자자강(子强)호덕계(德溪)본관함양(咸陽)특기사항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
명종 | 20 | 1565 | 을축 | 嘉靖 | 44 | 45 | 1월, 學錄이 되다. ○ 鄭琢이 내방하다. ○ 4월, 花潭 徐敬德의 舊居를 방문하다. ○ 9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환향하다. ○ 換鵝亭을 유람하다. ○ 南冥先生과 智谷寺에서 만나다. ○ 11월, 玉溪 盧禛과 藍溪書院에서 만나 강학하다.德. 十一月。與盧玉溪。會於咸陽灆溪書院 ○留書院。與盧玉溪,姜介庵。翼 講論延平問答,朱子年譜。 |
德溪先生年譜
四十四年乙丑 先生四十五歲 正月。除學錄管中學。聚諸生。敎授庸學章句。開示蘊奧。未嘗少懈。洛中名流。日來質問。許草堂曄時爲大司成。講論大學。稱之曰。吾儕中無與爲比。○與都著作。咏集句詩。 鄭著作 琢來訪。○四月。訪花潭徐先生舊居。有詩曰。花潭曾是會鳶魚。恨不當時近卜居。空想斷碑懷不盡。夕陽歸路獨躊躇。文定王后昇遐。○南冥先生書至。先生日記曰。南冥先生貽書見敎。其警發昏惰至矣。雖在千里。如對秋霜烈日。凜然髮豎。足以起懦云云。 訪奇正郞 大升 ○七月。子長生。○八月。贈都著作詩。詩曰。思歸遠客又逢秋。爲問家山無恙不。月白蘆花千點雪。共君何日上江樓。都公和云。雁行高送洛陽秋。天嶺江城過去不。千里遊人歸不得。尺書聊寄海雲樓。 參四館一會于昌慶宮。請誅妖僧普雨也。先生製疏。 九月。呈病還鄕。將行。鄭博士琢。與諸士友來餞。都子壽咏一絶曰。此身長伴遠遊朋。故國黃花賞未能。絡緯近床秋欲老。十分歸思夜來興。先生和曰。淸樽倒盡散遊朋。獨倚晴窓夢未能。千里路頭明夜月。共君何處待晨興。鄭博士以詩贈之曰。欲草離章贐。離章轉留心。秋懷元自苦。物色更相侵。旅館千山暮。候虫四壁吟。天長兼水遠。何處更通音。先生和曰。欲別滄波上。難堪遠客心。江淸詩更好。情密語相侵。對月前霄趣。同舟此日吟。離懷猶未破。柔櫓謾催音。又與鄭府使礥,都著作希齡以詩相贈。 至咸陽。姜上舍 翼 林正字 希茂邀見。吳俊與二弟亦出迎 見盧玉溪于縣館。○遊換鵝亭。金輔,李三宅,三正從焉。輔一作寶。號述古齋。用孤字韻詠一絶曰。德以爲隣自不孤。一言何可此霄無。料得箇中淸意味。鏡湖秋月照氷壺。 往省先墓。○觀鄭梅村 復顯 新築。梅村新築。有水石之勝。 趙上舍 宗道 來訪。○與都著作,鄭梅村。待南冥先生于智谷寺。南冥先生是日有約而未臨。用茂叔亭韻。以寓瞻企之意曰。遙待佳人歲暮時。却嫌寒雨濕荷衣。雲深石逕苔痕滑。還向桃川倚竹扉。 承拜南冥先生書。吳俊俔倬禹致績奉書來。以疾不赴期爲謝。 南冥先生來臨。與都著作,鄭梅村。陪留數日。○盧立齋 欽 來訪。○拜李孝廉齋 擎柱 崔公 有亨。 ○ 李崔二公年將九十。鄕人設慰酌於釜谷寺。先生有詩曰。白髮蒼顔對酒樽。可憐榮彩照山村。不須二老爲周相。還詑吾鄕有達尊。
十一月。與盧玉溪。會於咸陽灆溪書院。時金伊溪宇弘。乞養宰是邑。東岡宇顒兄弟。皆奉晨昏於郡衙。先生會玉溪於蘫溪。因與金公兄弟從遊。講論不絶。 曹梅庵 湜 亦來會
○留書院。與盧玉溪,姜介庵。翼 講論延平問答,朱子年譜。
○十二月。往東山寺。拜孝廉齋。講論朱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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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溪先生文集卷之六 / 延平答問質疑 / 問目
又難廢墜。指應接事而言乎。指工夫而言乎。只又但三字。語意相蒙。而未曉曲折。
退溪先生答曰。所當應接處。不可廢墜而不應接。故曰難廢墜。若謂工夫。則不當下難字也。只如舊。言無別段好事也。蓋雖無別事。遇事不可不應。故曰又難廢。然於應事處。但當愼察。足以度日。故云但靳靳度日耳。
靳靳去聲。音近。固也。又靳制其行也。蓋本馬當膺帶也。故有制其行之義。然恐字當作斤。斤斤。愼重之意。斤亦去聲。
謹守格法。專指可改之道而言乎。兼指三年無改之意乎。
所可改。則明白而改之。所不可改。則不改而已。此之謂守格法。是當兼兩意看。若云隱忍遷就。則非格法也。
使知所以自求者 爲時尼 惟深切 是沙所謂自求者。蓋指奉承遺體。求免於虧辱之意而言也。
所謂自求者。來說是也。聖人之告人如此。惟深切以求之。庶可用力。不然雖聞聖人之敎。無益也。
諸家之說。多不出此。指其說而言乎。
先儒說此者。多不出於此義。此義。卽幾微之間以下先生自說之義也。
不然。設譬引喩。所謂不然者。恐語意似不承接歸生,許止事也。通上文所謂不知幾微之間以下等語。而反其辭也。
是
歸生,許止各是發明一例。在歸生,許止。各有發明格例。不須援引爲證也。
是
須知顔子默曉聖人之言。顔子所以默曉者。便知親切道體乎。一說須知顔子默曉聖人之意。然後便知親切道體處。恐前說是也。
前說是
遽又以侯稱之 面
是
化而知裁
常人之學。雖益而不自知。是不知所裁者也。惟聖人。自十五至七十。漸進而至極。所謂化也。而能就其中。知其立。知其不惑。知其知天命。知其耳順。知其不踰矩。所謂知裁也。
立一下法
此當從近本作立下一法。言聖人爲立一法也。下字。是立法之間語。助辭耳。
引荀子大昏之未發。祭之未納尸。喪之未小斂。一也。
所謂未發者。何事也。失禮之中又有失禮。呂博士
引此比而同之乎。所謂趙氏春秋纂例之說。抑何意耶。
呂博士引荀子此語以解之。但荀子說未詳何意。趙氏纂例之說。疑卽集註所引趙伯循禘祭之說也。
纖奸打訛處纖奸打訛。疑是當時俗語。猶言小巧作誤處。
陳幾叟與羅先生門。與者參字之意乎。呂與叔有中庸解。而二公皆說了註脚乎。龜山解今之或問中辭乎。
與。猶及也。與叔有中庸解。陳,羅二公皆以此解爲說得浸灌浹洽。勝於龜山解。龜山解。却似枯燥也。龜山解見於中庸或問者耳。
便是日月至焉氣像。延平意則然矣。而論語註解。似與此不同。抑有微意乎。
延平說雖善似。非夫子本意。故朱子集註。不得用其說。
竿木隨身之說
竿木。如今優人豎立車上作戱之木也。竿木隨身。逄場作戱。禪家多用此說。場卽優戱之場。言身有其具。則隨處作用。不能自已也。
包羞
言子路未至於廓然明達。無所不可處。故未免有疑。如使聖人。有所疑礙而行之。是包羞也。龜山本語雖未見。恐不過如此也。
從聖人前後際斷。使言語不着處。
前後際斷。未詳。恐前後只如瞻之在前。忽焉在後之前後。際斷。似指言聖人地位。人所不及處。如程子所謂此地位。直是峻截。大段着力不得處耳。使言語不着。猶用言語不得也。如何如何。
發憤忘食。言其求道之切。所謂聖人自道理中流出。猶言由仁義行。非行仁義者乎。然今之論語註解。專指求道之意。似與延平之旨不同。何也。一極際氣像。抑何言也。
所引由仁義行。非行仁義之說。以明延平之意。得之。但朱子於此。以爲求道之切。論語註。以爲好學之篤。後比於前。不無些稱量點化意思。不可謂全不用延平之旨也。惟延平則渾然作一氣象看。朱子則有未得已得之分。爲少異耳。極際。恐如所謂全體至極之意。
鬼神。自家要有便有。要無便無。竊恐鬼神。非弄得物事。豈人之所要以有無哉。謂之要無便無者。尤所未瑩。所謂有其誠則有其神。無其誠則無其神。語意平穩。似不類是也。抑別有微意乎。
鬼神要有便有。要無便無。亦非謂弄得有無也。正與有其誠則有其神。無其誠則無其神之意同。恐別無他微意也。今行得一祭。因吾誠敬之至不至。而神之歆不歆。係焉。此理昭顯。甚可畏也。
六月十四日書。承諭至不能無愧悔之恨。朱子之意 自非有志於求仁。何以覺此。延平因其意美之 語錄有云至爲悔。延平引之。將救留滯之病。 來諭云至銷隕得。朱子之意 胸中若如此以下。皆是延平之言 作此看否。
看得曲折。無差誤。
就本源處。指恭順謹畏之心乎。
是
鄕曲以上底人。只道他是箇善人。延平爲上底人。而鄕曲只道延平是箇善人。一說。鄕曲論人。以上底人。只道是箇善人。延平少不與人辯詰。必待問後方與說也。恐前說近是。而他也略不與人說以下。乃別起之辭。而不與上文相連也。
愚意。恐二說皆未安。以上底人。如今人說識理之人也。謂鄕曲中識理之人。亦不知延平爲有道人。只道他是善人。延平亦不自輕其道。不肯略與人說云云耳。
蹇步方休 厓。鞭繩已掣。
驅馬者。馬步蹇鈍欲休。則掣鞭以督行。先生自言。已爲學駑鈍。纔方欲休。則延平已有誨督振勵之加。故以此比之。
自盡其道。爲面 便不相關。不相關。謂人神不雜揉之意乎。
是
始信前日諸人之誤。孟子註。諸儒所見不同。蓋指此也。
上文言亦有此病者。謂正與助長之病也。今推見實理。知此等病痛而改之。始知諸儒爲學。許多誤入處。恐非指註孟子不同而言也。
設張羅落者大
設張。猶鋪張也。羅。網羅也。落。韻會絡通。作落。又蘺落之落。本作格。音洛 通作落。虎落。以竹蔑相連。遮落之也。合此數義觀之。羅落。當爲包括之義也。
今日習春秋者。乙 皆令各習一傳。爲古 拜習註解。乎代 拜字。恐幷字而訛也。幷字之誤
却怕於匹似閑底事
匹似。恐猶恰似正似之類。言却恐於恰似無緊要之事。卒然起來纏心。則除此爲尤難。不可不着力云耳。
書不要點。看得更好。臨書不要分行數墨。只看得文義更好乎。一說寫字時。不要點墨添補。然後看得更好也。恐前說是也。
此語可疑。愚意點如今點句之點。但不知點句看。有何害而要不點看。然其大意。不過如來諭前說耳。
只爲說敬字不分明。朱子每以謂得李先生後成就所學。而猶有少此之意乎。
朱子於延平之門。得靜中有主宰存養之法。由是免入釋老去。而學之宗統在是。然說靜不若說敬程先生已言之。朱子豈得以師門之故。而遷就爲說耶。
伊川令呂進伯去了韓安道。韓安道。何許人也。
未詳韓安道爲何人。應是死而作禍福。以食於淫祀。如蔣子文之類。
文定代云干木云云。不若龜山之遜避。仕不爲貧。而有時乎爲貧。龜山猶取此義。對人說了。文定則以段干木代龜山之說。延平意以謂此則無迫斯可見之義。不若龜山遜避之意。頃與鄭斯文惟一講此段。作此看。猶未瑩其意。所謂遜避者。龜山之出。本爲道而不自居也。文定之代云干木者。亦欲龜山寧踰垣避之而不出乎。
干木字。若果爲段干木。則依稀似有來諭之說。但去段字。只說干木。已爲可疑。況劉公所問。必是龜山所以出之故。龜山答以爲貧而仕。斯其爲遜避之言也。文定代龜山而答劉公。則亦當答所以出之故如何。可也。何故却擧段干木踰垣而避之事。爲答已出之辭乎。其義全不通。愚意干卽竿字之誤作。或省作竿木隨身。逄場作戱之義。已見上。蓋文定代龜山擧此語以答。則是自謂身有其具。不能自己而出也。自任之意太過。故延平謂不如龜山之遜避云耳。如何如何。
李先生云。橫渠說。不須看。所謂先入了費力。蓋指橫渠正蒙等語而言乎。延平之不欲以此勉初學。何意乎。
程先生亦謂橫渠說道有過處。乃在正蒙云。大抵多由苦心力索而得。故往往有安排牽强處。說得不自在。正與延平融釋脫落。灑然自得處。不相似。所以延平云云。
呂與叔論民可使由之處。意思極好處。何謂乎。論儒佛雜學之弊。所引其說。何意乎。
呂氏本說。今不得見。不可臆度附會說。深爲歎惜。
來延平看親。看親。卽省親乎。
固爲省親。然不是謂父母。但省視親戚耳。
忘情乾慧。得所休歇。
古禪師語錄。有狂慧乾慧之說曰。佛相是解悟人。無正見。只是學解。謂之狂慧。亦非乾慧。乾慧者。悟得正見。爲無定水浸潤。旣非悟解。只認得生死。垢心却成邪。○右見於韻府者如此。未知何謂。
○禪家有戒定慧之說曰。戒生定。定生慧。防非止惡曰戒。六根涉境。心不隨緣曰定。心境俱空。照覽無礙曰慧。以此觀狂慧乾慧之說。旣以無正見。只學解者。謂之狂慧。而非乾慧也。則乾慧者。悟得正見。乃定而生慧。能造其極者也。所謂無定水者。謂心未定則累於外物。如水之浸潤也。若爲此水浸潤。乃沾濡之慧。非乾慧也。今此語錄。正釋乾慧之義。當曰不爲無定水浸潤。可也。止曰爲無定水浸潤。不可曉。或云爲字上。脫一不字。恐或然也。
操戈入室
鄭玄傳。任城何休好公羊學。著公羊墨守。左氏膏肓。穀梁廢疾。玄乃發墨守。鍼膏肓。起廢疾。休嘆曰。康成入吾室。操吾戈以伐我乎。○墨守。墨翟守城之法。言公羊之學無敵於天下。如墨翟守城然也。
渠初從謙開善處
嘗見後賢說。謙開善。僧名。蓋謂朱子得禪學於此僧。故延平云。然但不記語出何書。行當尋檢出耳。於此又有所疑。以三字爲一僧名。恐無是也。若作二人則一擧一字。一擧二字。亦可疑。
可惜忘錄 奴多。此子 是 近聞其爲絶世也 爲尼。遵堯,台衡二錄見上。而不知何書也。此文字亦未曉句斷文義。
可惜忘錄。謂二書忘不謄寫。而爲八一哥取去。不得再見。爲可惜耳。此子。指八一哥。其人必從仙佛之徒。絶迹遠去。故云云。但以豫章之子。而從異敎。甚可駭異。遵堯書事實。向見性理大全羅先生名下具言之。但性理書在溪舍。而滉在山齋。未得取考。記得不分明。幸取檢則可知。台衡之義。未詳。
載瞻繐綍。何物乎。
繐 音歲。細疏布。荀菲繐管屨註。繐衰。小功之服。四升半。綍。引柩車大索。但必以服之輕者。繐衰爲言則未詳。
逮玆退老。朱晦庵自謂乎。
是
探原推本。敢昧厥初。原本。指淵源所自乎。
是
덕계집 제6권 / 《연평답문》 질의(延平答問質疑) / 문목〔問目〕
문 “또 그만두기 어렵다.”라고 한 것은 일에 응접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공부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다만〔只〕’, ‘또〔又〕’, ‘단지〔但〕’라는 세 글자는 뜻이 서로 겹쳐서 그 상세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답 퇴계 선생이 답하였다. “응당 응접해야 할 곳은 그만두고서 응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두기 어렵다.’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공부를 말한 것이라면 ‘어렵다〔難〕’라는 말을 쓰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단지 예전과 같다.’라는 것은 ‘특별히 좋은 일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일은 없지만 일을 만나면 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또 그만두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에 응하는 경우는 단지 조심스럽게 살펴야 날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단지 행동을 신중히 하며 날을 보낼 따름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문 근근(靳靳)은 무슨 뜻입니까?
답 거성으로 음은 ‘근(近)’이며,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 행동을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대개 본래 말〔馬〕의 뱃대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행동을 제어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자는 ‘근(斤)’으로 써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근근(斤斤)’은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이며, ‘근(斤)’ 또한 거성입니다.
문 “격법(格法)을 삼가 지킨다.”라는 것은 고쳐야 할 도를 오로지 가리키는 것입니까? 삼 년 동안 고치지 않는다는 뜻을 아울러 가리키는 것입니까?
답 고쳐야 할 것이면 분명하게 고치고, 고쳐서는 안 될 것이면 고치지 않을 따름입니다. 이것을 ‘격법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당연히 두 가지 뜻을 아울러 보아야 합니다. 만약 “억지로 참으면서 끌어 맞춘다.”라고 하면 격법이 아닙니다.
문 “스스로 추구할 바를 알게끔 하는 것이 깊고도 절실하다.”라는 조목. ‘스스로 추구할 바’라는 것은 유체(遺體)를 잘 받들어 상하게 하거나 욕되게 함을 면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까?
답 이른바 ‘스스로 추구한다.’라는 것은 보내 온 설이 옳습니다. 성인이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이 이와 같아서, 오직 깊고 절실하게 추구하면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성인의 가르침을 들었다 하더라도 도움이 안 됩니다.
문 “제가(諸家)의 설이 대체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조목. 이것은 그 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까?
답 이는 선유(先儒)가 이것을 해설한 것이 이러한 뜻에서 벗어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뜻’이라는 것은 ‘기미의 사이’ 아래에 선생(주희)이 스스로 해석한 뜻입니다.
문 “그렇지 않으면 비유를 설정하고 인용을 하는 것이 이와 같이 소략할 리가 없다.”라는 조목. 여기서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것은 귀생(歸生)과 허(許)의 태자 지(止)의 일과는 말뜻이 이어지지 않는 듯합니다. 윗글에서 말한 ‘알지 못하는 기미의 사이에 존경하는 마음이……’ 이하 등의 말과 연결되면서 그 말을 뒤집는 것인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귀생과 허의 태자 지는 각각 하나의 예를 드러내 밝힌 것이다.”라는 조목. 귀생과 허의 태자 지에 있어서는 각각 규칙과 조례를 드러내 밝혔으니 인용하여 증거를 댈 필요가 없습니다.
답 그렇습니다.
문 “안자(顔子)가 성인의 말을 말없이 깨달은 것을 모름지기 알아야 한다.”라는 조목. 안자가 말없이 깨달은 것은 곧 분명한 도체를 안 것입니까? 일설에는 안자가 성인의 뜻을 말없이 깨달은 것을 안 뒤에 분명한 도체를 안다고 합니다. 앞의 설이 맞는 듯합니다.
답 앞의 설이 옳습니다.
문 갑자기 또 후(侯)로서 그를 일컬으면.
답 옳습니다.
문 ‘화이지재(化而知裁)’ 조목
답 일반 사람의 학문은 비록 진보하지만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을 따져서 결정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성인 공자는 15세에서 70세까지 점차로 진보하여 궁극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화(化)’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자신이 확고히 선 것〔立〕을 알고, 미혹되지 않음〔不惑〕을 알고, 천명을 아는 것〔知天命〕을 알고, 소리가 귀로 들어오면 마음에 훤히 그 뜻이 밝혀짐〔耳順〕을 알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음〔從心所慾不踰矩〕을 아니, 이른바 ‘옳고 그름을 따져서 결정할 줄을 안다.〔知裁〕’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 ‘입일하법(立一下法)’이라는 대목.
답 이는 근래 판본에 따라 ‘입하일법(立下一法)’으로 해야 하는데, 성인이 하나의 모범을 세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하(下)’ 자는 ‘입(立)’ 자와 ‘법(法)’ 자 사이의 어조사일 따름입니다.
문 《순자(荀子)》의 “혼인의 의식을 갖추지 않았을 때〔大昏之未發〕와 제사에서 아직 시동을 모셔오지 않았을 때와 상례에서 아직 염습을 않았을 때는 한가지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 ‘미발(未發)’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예를 잃은 가운데 또 예를 잃는다.”라는 대목에서 여 박사(呂博士)가 이를 인용하였는데, 나열하여 같은 것으로 본 것입니까? 조씨(趙氏)의 《춘추찬례(春秋纂例)》의 설은 또한 무슨 의미입니까?
답 여 박사가 순자(荀子)의 이 말을 인용하여 뜻을 풀었는데, 다만 순자의 설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조씨의 《춘추찬례》의 설은 아마도 《주자집주》에 인용된 조백순의 체제(禘祭)에 대한 설일 것입니다.
문 ‘섬간타와처(纖奸打訛處)’
답 ‘섬간타와’는 당시의 속어 같은데, ‘잔꾀를 부리다가 잘못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문 ‘진기수여나선생문(陳幾叟與羅先生門)’이라고 한 부분. 중간의 ‘여(與)’ 자는 ‘참여한다〔參〕’는 뜻입니까? 여여숙(呂與叔)이 《중용해(中庸解)》를 지었는데, 이 두 분이 모두 자구를 해석한 것을 말한 것입니까? 구산(龜山)의 해석은 지금 《혹문》 가운데 있는 말입니까?
답 ‘여(與)’ 자는 ‘급(及)’ 자와 같은 뜻입니다. 여숙이 《중용해》를 지었는데, 진(陳)과 나(羅) 두 분은 모두 이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풀이한 것이 의미가 충실하고 흡족하여 구산(龜山)의 풀이보다 낫습니다. 구산의 풀이는 좀 단조로운 것 같습니다. 구산의 풀이는 《중용혹문》에 나오는 것일 따름입니다.
문 ‘변시일월지언기상(便是日月至焉氣象)’이라는 부분. 연평의 뜻은 그렇습니다만 《논어》의 주해는 이와 다른 듯합니다. 혹 은미한 뜻이 있습니까?
답 연평의 설이 비록 좋지만 공자의 본래 뜻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주자가 《논어집주》에서 그의 설을 쓸 수 없었습니다.
문 간목(竿木)이 늘 몸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간목이란 지금 광대가 수레 위에 세워 광대놀음 하는 나무입니다. “간목이 늘 몸에 있으니, 마당이 있으면 한바탕 노네.”라고 하는데, 선가(禪家)에서 이러한 말을 흔히 씁니다. ‘장(場)’은 곧 공연하는 마당입니다. 몸에 그 도구를 지니고 있으면 어디에서든지 사용할 수 있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 ‘포수(包羞)’
답 이는 자로(子路)가 뚜렷하게 밝은 지혜가 통달하여 안 될 것이 없는 경지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심이 있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성인이 의심나고 막히는 것이 있으면서 이를 행했다면 이것이 바로 포수입니다. 구산(龜山)의 본래 말은 비록 보지 못하였으나,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문 ‘종성인전후제단 사언어불착처(從聖人前後際斷 使言語不著處)’의 대목.
답 ‘전후제단’이라는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전후라는 것은 “얼핏 보면 앞에 있는 듯하다가 갑자기 뒤에 계시다.”라고 하는 전후이고, ‘제단’은 남들이 미치지 못하는 성인의 경지를 가리켜 말하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정자가 “이 경지는 바로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 대단하게 힘을 쓸 수 없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언어불착’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는다는 것은 도를 추구하는 간절함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이른바 “성인은 도리로부터 행위가 나온다.”라는 것은 “저절로 인의에 따라 행하는 것이지 인의를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까? 그러나 지금의 《논어》 주해는 오로지 도를 추구하는 뜻만을 가리켜, 연평의 뜻과 같지 않은 듯하니 왜 그렇습니까? ‘일극제기상(一極際氣象)’은 또 무슨 말입니까?
답 인용한 “저절로 인의에 따라 행하는 것이지 인의를 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설은 연평의 뜻을 밝히는 데 적합한 듯합니다. 그러나 주자는 여기에서 간절하게 도를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고, 《논어》의 주에서는 독실하게 학문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뒤의 견해는 앞의 견해에 비하여 정도에 따라 차츰 변화하는 의미가 없지 않으나, 연평의 뜻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연평은 혼연히 하나의 기상으로 보았고, 주자는 아직 체득하지 못한 것과 이미 체득한 것으로 구분하였으니, 조금 다를 따름입니다. 극제(極際)라는 말은 아마도 이른바 ‘전체가 지극하다.’라는 의미인 듯합니다.
문 “귀신은 개인이 있기를 원하면 곧 있고 없기를 원하면 곧 없다.”라고 하였는데, 제 생각으로는 귀신이 사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 어찌 사람이 바라는 것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없기를 바라면 없다고 한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정성이 있으면 그 신이 있게 되고, 정성이 없으면 그 신이 없게 된다.”라는 말은 뜻이 평상적이고 온건하여 이 말과 같지 않은 듯합니다. 아니면 다른 은미한 뜻이 있습니까?
답 “귀신은 있기를 바라면 있고 없기를 바라면 없다.”라는 것은 또한 귀신이 있고 없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게 되고,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게 된다.”라는 의미와 같으니 아마도 다른 은미한 뜻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제사를 한 번 올리게 되면, 나의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냐 지극하지 않느냐에 따라 신이 흠향하느냐 흠향하지 않느냐가 달려있습니다. 이 이치는 분명하니 매우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문 6월 14일 편지에 “가르침을 받고 부끄럽고 후회하는 한스러움이 없을 수 없는 데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 주자의 뜻이다. - 스스로 인(仁)을 추구함에 뜻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이것을 깨닫겠는가. - 연평이 그의 뜻으로 인하여 칭찬하였다. - 어록(語錄)에 후회하는 데 이른다고 말한 것이 있다. - 연평이 그것을 인용하여 막히는 병을 구제하였다. - 보내주신 편지에서 ‘없어지는 데 이르렀다.’라고 하였습니다. - 주자의 뜻이다. - ‘흉중약여차(胸中若如此)’ - 모두 연평의 말이다. - 이하는 이렇게 보아야 합니까?
답 상세한 내용을 간파하였으니, 착오가 없습니다.
문 본원이 되는 곳에 나아간다는 것은 공경하고 순종하며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리킵니까?
답 그렇습니다.
문 ‘향곡이상저인 지도타시개선인(鄕曲以上底人 只道他是箇善人)’의 부분. 연평은 뛰어난 사람인데 고을에서는 단지 연평을 선인(善人)으로 말하였습니다. 일설에는 “고을에서 사람을 논할 적에 뛰어난 사람이라도 단지 선인이라고 말하였으나, 연평은 남들과 논변하고 따지는 일이 드물었으며, 반드시 물음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더불어 말하였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아마도 앞의 설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또한 대체로 남들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他也略不與人說〕”라고 한 이하는 독립된 말로 위의 글과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답 제 생각으로는 두 설이 모두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이상저인(以上底人)’이란 지금 사람들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을 가운데 이치를 아는 사람까지도 연평이 도를 지닌 사람임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를 선인이라고 말하였는데, 연평도 스스로 그 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아 성급하게 남들과 가볍게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뜻일 뿐입니다.
문 “지친 걸음 막 쉬려고 함에 채찍질하며 고삐를 당기셨네.”의 대목.
답 말을 모는 사람은 말의 걸음이 굼떠서 쉬려고 하면, 고삐를 당기고 채찍질하여 가기를 독촉합니다. 선생이 스스로 “이미 학문을 하는 것이 둔하고 어리석어서 막 쉬려고 하면 연평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여 진작시키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비유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문 “자신이 그 도를 다하면 곧 서로 관련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서로 관련이 없다는 것은 사람과 신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말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문 “전날의 여러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라는 부분. 《맹자》의 주는 여러 유자들의 견해가 같지 않으니, 대개 이것을 가리킨 듯합니다.
답 윗글에서 ‘또한 이러한 병통이 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조장하는 병통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참다운 이치를 미루어 보고 이러한 병통을 알아서 고치며, 비로소 여러 유자들이 학문을 하는 것이 잘못 들어간 곳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지, 《맹자》를 주해한 것이 서로 다름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문 ‘설장라락자대(設張羅落者大)’ 부분.
답 ‘설장(設張)’은 ‘펼친다’는 뜻입니다. ‘나(羅)’는 망라하는 것입니다. ‘낙(落)’은 《운회(韻會)》에서 ‘낙(絡)’ 자는 통용하여 ‘낙(落)’으로 쓴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락(蘺落)의 ‘낙(落)’은 본래 ‘격(格)’으로 썼는데, - 음은 낙(洛)이다. - 낙(洛)과 통용하였습니다. 또 ‘호락(虎落)’은 대껍질을 서로 이어 막는 것입니다. 이런 몇 가지 뜻을 합해 보면 ‘나락(羅落)’은 마땅히 포괄한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문 “지금 《춘추》를 익히는 이들에게 모두 삼전(三傳) 가운데 각각 하나의 전(傳)을 익히게 하고, 그 주해를 배습(拜習)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배(拜)’ 자는 아마도 ‘병(幷)’ 자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답 ‘병(幷)’ 자가 잘못 쓰인 것입니다.
문 ‘각파어필사한저사(却怕於匹似閑底事)’ 부분.
답 ‘필사(匹似)’는 아마 ‘흡사(恰似)’나 ‘정사(正似)’의 유와 같은 것입니다. 흡사 긴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갑자기 일어나 마음을 얽어매면 이것을 없애기가 더욱 어려우니 힘을 쏟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문 서불요점 간득갱호(書不要點看得更好)는 글을 대하면 행을 나누어 한 자 한 자 읽을 필요 없이, 단지 글의 뜻을 보는 것이 더욱 좋은 것입니까? 일설에는 글자를 쓸 때 먹을 찍어 수정하여 보완하지 않아야 보기가 더욱 좋다고 합니다. 아마도 앞의 설이 옳은 것 같습니다.
답 이 말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점(點)’은 지금 ‘구두를 끊다.〔點句〕’ 할 때의 ‘점(點)’과 같습니다. 다만 구두를 끊어서 보는 것이 무슨 해로울 것이 있어서 점을 찍지 않고 보아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체적인 뜻은 보낸 편지에서 말한 앞의 설과 같을 따름입니다.
문 “단지 경(敬) 자를 설명한 것이 불분명하다.”라는 부분. 주자가 늘 이 선생(李先生)을 만난 뒤에 학문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점을 대수롭게 평가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까?
답 주자는 연평의 문하에서 고요한 가운데 주재하고 존양(存養)하는 법이 있음을 터득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불교나 노장의 사상에 빠지는 것을 면하였고, 유학의 종통(宗統)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정(靜)’을 말하는 것은 ‘경(敬)’을 말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은 정이천(程伊川)이 이미 말하였습니다. 주자가 어찌 스승의 문하라는 것 때문에 영합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문 이천(伊川)이 여진백(呂進伯)에게 사당에 배식된 한안도(韓安道)의 소상(塑像)을 없애버리게 하였는데, 한안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답 한안도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죽어서 화복을 일으키는 영험을 보여, 제사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제사를 받는 자로, 장자문(蔣子文)과 같은 부류의 사람일 것입니다.
문 ‘문정공(文定公)이 대신하여 간목(干木) 운운한 것은 구산(龜山)이 겸손하게 물러선 것만 못하다.’라는 부분. 벼슬하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가난 때문에 벼슬하는 일도 있습니다. 구산은 그래도 이 뜻을 취하여 남에게 말하였는데, 문정공은 단간목(段干木)으로 구산의 설을 대신하였습니다. 연평의 생각으로는 문정공처럼 말한다면 “절박하게 만나려 하면 만나 보아도 된다.”라는 뜻이 없어, 구산의 겸손하게 물러서는 뜻만 못하다고 본 것입니다. 요사이 정유일(鄭惟一)과 이 단락을 강구하면서 이렇게 보았는데, 여전히 분명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겸손하게 물러섰다.’라고 한 것은 구산이 벼슬에 나간 것이 본래는 도를 위해서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자처하지 않은 것입니다. 문정공이 그것을 대신하여 간목을 말한 것은 또한 구산이 차라리 담을 뛰어넘어 달아날지언정 벼슬에 나아가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까?
답 ‘간목’이 만약 정말로 단간목이라면 보낸 편지의 설과 비슷할 듯합니다. 그러나 ‘단(段)’ 자는 빼 버리고 간목(干木)이라고만 하였으니 이것부터 벌써 의심스럽습니다. 하물며 유공(劉公)이 물은 것은 틀림없이 구산이 벼슬에 나아간 까닭이고, 구산이 가난 때문에 벼슬한다고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겸손하게 물러서는 말일 것입니다. 문정공이 구산을 대신하여 유공에게 답한다면 또한 마땅히 벼슬에 나아가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도리어 단간목이 담을 넘어 도망간 일을 들어서 이미 벼슬에 나아간 것에 대한 해명의 말로 답을 하겠습니까. 뜻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간(干)은 바로 간(竿)이 잘못 쓰인 것이거나 생략해 쓴 것이라 생각합니다. ‘간목이 언제나 몸에 있으니 마당만 보면 한바탕 재주를 부리네.’라는 의미는 이미 앞에서 나왔습니다. 대개 문정이 구산을 대신하여 이 말을 들어서 답하였다면, 이는 스스로 자신의 몸에 도를 펼 도구를 갖추고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벼슬길에 나아갔다고 말하는 것이니, 자임하는 뜻이 너무 지나칩니다. 그래서 연평이 구산의 겸손히 물러섬만 못하다고 한 것일 따름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 이 선생(연평)이 횡거의 설은 볼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선입료비력(先入了費力)’이라 한 것은 대개 횡거의 《정몽(正蒙)》 등의 말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연평이 이러한 것으로 학문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을 면려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정이천(程伊川) 선생 또한 “횡거가 도를 말한 것에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은 바로 《정몽》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횡거는 대개 고심하고 힘써 찾아서 체득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가끔 작위적으로 안배하고 견강부회한 것이 있어, 말한 것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이점은 바로 연평이 완전히 통달하여 작위적인 것을 떨치고, 분명하게 자득한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평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문 여여숙(呂與叔)이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왜 그런지를 알게 할 수는 없다.”라는 것을 논한 곳은 의미가 매우 뛰어난 곳이라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유교와 불교와 잡학의 폐단을 말하면서 그 설을 인용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여씨의 본래 설을 지금 볼 수가 없으니 억측하고 견강부회하여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매우 안타깝습니다.
문 ‘내연평간친(來延平看親)’의 부분. 간친(看親)은 곧 성친(省親)입니까?
답 아마 ‘성친’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미는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친척을 문안하고 만나 보는 것일 따름입니다.
문 ‘망정간혜 득소휴헐(忘情乾慧 得所休歇)’의 부분.
답 옛 선사(禪師) 어록에 ‘광혜(狂慧)’, ‘간혜(乾慧)’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佛)의 상(相)은 해오(解悟)이다. 사람이 바른 견해는 없고 단지 학문을 통한 이해만 있는 것을 광혜라 하니, 또한 간혜는 아니다. 간혜란 바른 견해를 깨달아 얻었지만 정수(定水)의 젖어듦이 없는 것인데, 이는 궁극적인 깨달음인 오해(悟解)가 아니고 단지 생사 문제에 집착하는 마음이 삿된 것을 이룸을 인식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운부(韻府)》에 나오는 것이 이와 같은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가(禪家)에 계정혜(戒定慧)에 관한 설이 있습니다. “계(戒)가 정(定)을 낳으며, 정이 혜(慧)를 낳는다. 그릇됨을 막고 악(惡)을 그치게 하는 것을 계(戒)라 하고, 여섯 감각기관이 외부의 대상과 접촉하여 마음이 그 인연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 세계가 함께 공(空)하여 비치고 살피는데 장애가 없는 것을 혜(慧)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광혜(狂慧)와 간혜(乾慧)의 설을 살펴보면, 정견(正見)이 없이 단지 학문적인 과정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을 광혜라고 하는데, 이는 간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간혜는 바른 견해를 깨달아 얻어, 마음이 정(定)을 얻고 혜(慧)를 낳아 그 궁극적인 경지에 나아간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정수’가 없다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깥 사물에 얽히니, 이것은 마치 물이 젖어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이 스며들게 되면 이는 젖은 지혜이지 간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어록(語錄)은 바로 간혜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으니 ‘정수가 젖어듦이 없지 않다.〔不爲無定水浸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정수가 젖어듦이 없다.〔爲無定水浸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혹 ‘위(爲)’ 자의 위에 하나의 ‘불(不)’ 자가 빠졌다고 하는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문 조과입실(操戈入室).
답 정현(鄭玄)의 전(傳)에 “임성(任城) 사람 하휴(何休)는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지었다. 내가 이에 《발묵수(發墨守)》, 《침고황(針膏肓)》, 《기폐질(起廢疾)》을 지어 이를 반박하니, 하휴가 탄식하며 ‘강성(康成)이 내 방에 들어와 내 창을 잡고 그것으로 나를 치는구나.’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묵수는 묵적(墨翟)이 성을 지키는 법입니다. 이는 공양(公羊)의 학문이 천하에 적이 없는 것이 마치 묵적이 성을 지키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입니다.
문 ‘그는 처음에 겸개선(謙開善)을 추종했다.’라고 한 대목.
답 전에 후현(後賢)의 설을 보니 겸개선은 승려의 이름이라 하였습니다. 대개 주자가 이 승려에게 선학(禪學)을 배웠기 때문에 연평이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 말이 어느 책에 나오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가면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또 의심되는 것이 있으니, 세 글자를 승려의 이름이라 하였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고, 두 사람이라고 하면 한 사람은 한 글자로 일컫고 한 사람은 두 글자로 일컬은 것이니 역시 의심스럽습니다.
문 ‘가석망록 차자근문기위절세야 준요태형이록견상 이부지하서야(可惜忘錄 此子近聞其爲絶世也 遵堯台衡二錄見上 而不知何書也)’ 이 문장도 구절이 어떻게 끊어지는지, 글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답 ‘가석망록(可惜忘錄)’은 두 책을 베껴 두는 것을 잊었는데 팔일가(八一哥)가 가지고 가버려서 다시 볼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此子〕’이란 팔일가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이 도교나 불교에 들어가 자취를 끊고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만 예장(豫章)의 아들로서 이단의 가르침을 따랐다는 것은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준요(遵堯)》라는 책의 사실에 대해서는 전에 《성리대전》에서 나 선생(羅先生)의 이름 아래 자세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만 《성리대전》은 계사(溪舍)에 있고, 저는 산재(山齋)에 있어 찾아서 살펴볼 수 없고, 기억도 분명치 않습니다. 다행히 찾아볼 수 있게 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태형(台衡)’의 뜻은 잘 모르겠습니다.
문 ‘재첨세발(載瞻繐綍)’은 무슨 물건입니까?
답 세(繐) - 음은 세(歲) - 는 가늘고 성긴 베입니다. 《순자》의 ‘비세(菲繐)ㆍ관구(菅屨)’의 주에 “세최(繐衰)는 소공(小功)의 상복으로 4새 반이다. 발(綍)은 영구를 실은 수레를 당기는 큰 밧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필시 상복 가운데 가벼운 것이겠지만, 세최(繐衰)의 뜻은 모르겠습니다.
문 ‘이 벼슬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냄에 이르러’라는 것은 주자가 자신을 말한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문 “근원을 탐구하면〔探原推本〕 감히 그 처음에 어두울까.”의 ‘원본(原本)’은 연원이 유래한 곳을 가리킵니까?
답 그렇습니다.
[주-C001] 연평답문(延平答問) : 주희가 그의 스승 연평(延平) 이통(李侗)에게 질문한 것과 이통이 답변한 것을 정리한 책이다.[주-D001] 세 글자 : 《연평답문》에 “일체지여구 유불가불응접처 우난폐타 단근근도일이(一切只如舊 有不可不應接處 又難廢墮 但靳靳度日爾)”라고 한 부분을 말한다.[주-D002] 근근(靳靳) : 《연평답문》에 “일체지여구 유불가불응접처 우난폐타 단근근도일이(一切只如舊 有不可不應接處 又難廢墮 但靳靳度日爾)”라고 한 부분을 말한다.[주-D003] 격법(格法)을 삼가 지킨다 : 《연평답문》의 “문자왈 부재관기지……(問子曰父在觀其志……)” 조 참조.[주-D004] 억지로 …… 맞춘다 : 《연평답문》에 “참으면서 말하지 않아 남들이 그 고치는 자취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은 없으나, 다만 마음을 이렇게 지니면 차츰 잘못되는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주-D005] 스스로 …… 절실하다 : 《연평답문》의 “문맹무백문……(問孟武伯問……)” 조 참조.[주-D006] 제가(諸家)의 …… 않는다 : 《연평답문》의 “문자유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問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조 참조.[주-D007] 기미의 사이 : 《연평답문》의 “문자유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問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조 참조.[주-D008] 그렇지 …… 없다 : 《연평답문》의 “문자유문효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問子游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조 참조.[주-D009] 귀생(歸生)과 …… 일 : 귀생이 임금을 시해한 일과 허의 태자 지가 임금을 시해한 일을 가리킨다. 태자 지는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공자이다. 귀생의 일은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4년과 소공(昭公) 19년 조에 보인다.[주-D010] 안자(顔子)가 …… 한다 : 《연평답문》의 “문자왈 오여회언종일……(問子曰 吾與回言終日……)” 조 참조.[주-D011] 갑자기 …… 일컬으면 : 여기서는 토를 ‘면(面)’으로 다는 것을 물었다.[주-D012] 화이지재(化而知裁) : 《연평답문》의 “문오십유오이지어학일장 횡거선생왈……(問吾十有五而志於學一章 橫渠先生曰……)” 조 참조.[주-D013] 성인 …… 이르렀으니 : 《논어》 〈위정(爲政)〉 제4장 참조.[주-D014] 입일하법(立一下法) : 《연평답문》의 “문오십유오이지어학일장 횡거선생왈……(問吾十有五而志於學一章 横渠先生曰……)” 조 참조.[주-D015] 혼인의 …… 한가지이다 : 《순자》 〈예론편(禮論篇)〉에 나오는 말이다.[주-D016] 예를 …… 잃는다 : 《연평답문》의 “문체자기관이왕자 오불욕관지의……(問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조 참조.[주-D017] 여 박사(呂博士) : 여대림(呂大臨)으로, 자는 여숙(與叔)이다. 장재(張載)와 이정(二程)에게 사사하였다.[주-D018] 조씨(趙氏) : 조광(趙匡)으로, 자는 백순(伯循)이다. 당(唐)나라 후기의 학자로 주로 《춘추》를 연구했다.[주-D019] 춘추찬례(春秋纂例) : 중국 당나라 때 육순(陸淳)이 지은 책이다. 이 책은 그의 스승 담조(啖助)와 그의 벗 조광(趙匡)의 설을 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춘추》 삼전(三傳)의 득실을 논하였으나, 내면으로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주로 하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폄하하였다고 한다.[주-D020] 조백순의 …… 설 : 《논어》 〈팔일(八佾)〉 제11장에 보인다.[주-D021] 진기수(陳幾叟) : 진연(陳淵)으로, 자는 기수이다. 양시(楊時)의 문인이다.[주-D022] 여여숙(呂與叔) :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인 여대림(呂大臨)으로, 자는 여숙이다.[주-D023] 구산(龜山) : 중국 북송(北宋) 때의 학자인 양시(楊時)이다. 그가 만년에 구산에 은거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주-D024] 변시일월지언기상(便是日月至焉氣象) : 《연평답문》의 “우운변시일월지언기상……(又云便是日月至焉氣象……)”의 부분 참조.[주-D025] 포수(包羞) : 《연평답문》의 “문공산불요필힐……(問公山弗擾佛肸……)”의 부분 참조.[주-D026] 구산(龜山)의 …… 같습니다 : 《연평답문》에 “구산이 이를 포수라 하였으니 참으로 의미가 있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27] 종성인전후제단 사언어불착처(從聖人前後際斷 使言語不著處) : 《연평답문》의 “문여욕무언……(問予欲無言……)”의 부분 참조.[주-D028] 저절로 …… 아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순은 사물의 도리를 알고 인륜의 보통 인정을 이해하여, 이에 인의의 길을 간 것이지, 그가 억지로 인의를 널리 시행한 것은 아니다.〔舜明於庶物 察於人倫 由仁義行 非行仁義也〕”라고 한 것을 말한다.[주-D029] 귀신은 …… 없다 : 《연평답문》의 “문희근간중용귀신일장……(問熹近看中庸鬼神一章……)”의 부분 참조.[주-D030] 향곡이상저인 지도타시개선인(鄕曲以上底人 只道他是箇善人) : 《연평답문》 후록(後錄) 참조.[주-D031] 지친 …… 당기셨네 : 주희의 〈제연평이선생문(祭延平李先生文)〉에 나오는 말이다.[주-D032] 전날의 …… 되었다 : 《퇴계문집고증(退溪文集考證)》에 이 말은 보록(補錄)에 나온다고 하였다.[주-D033] 운회(韻會) : 중국 송나라 황공소(黃公紹)가 지은 운서(韻書)이다.[주-D034] 지금 …… 한다 : 《주자어류》 권109 〈논취사(論取士)〉에 나오는 말이다. 《주자어류》 사고전서본에는 ‘병(幷)’ 자로 되어 있다.[주-D035] 여진백(呂進伯) : 여대충(呂大忠)으로, 남전(藍田) 사람이다.[주-D036] 한안도(韓安道) : 《퇴계문집고증》에 “《이정전서(二程全書)》에는 위안도(韋安道)라 하였는데, 연평은 한안도라 하였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주-D037] 이천(伊川)이 …… 하였는데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3 〈공맹주정장자(孔孟周程張子)〉에 나온다.[주-D038] 장자문(蔣子文) : 중국 후한(後漢) 광릉(廣陵) 사람이다. 말릉위(秣陵尉)가 되었다가 죽었는데, 손권(孫權)이 건업에 도읍하자, 장자문이 항상 백마를 타고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나오는 영험을 보여서 마침내 종산(鍾山)에 사당을 짓고 모셨으며, 장후(蔣侯)에 봉하였다 한다.[주-D039] 문정공(文定公) :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의 시호로, 자는 강후(康侯), 호는 무이 선생(武夷先生)ㆍ초암 거사(草菴居士)이다.[주-D040] 문정공(文定公)이 …… 못하다 : 《주자어류》 권101 〈정자문인(程子門人)〉에 나오는 말이다.[주-D041] 벼슬하는 …… 있습니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벼슬하는 것은 가난 때문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가난 때문이다.〔仕非爲貧也 有時乎爲貧〕”라고 하였다.[주-D042] 단간목(段干木)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손추(公孫丑)가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라고 물었다. 맹자가 ‘옛날에는 그의 신하가 아니면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 위(魏)나라 단간목은 위나라 문후(文侯)가 가서 그를 보자 담을 넘어서 피하였고, 노(魯)나라 설류(泄柳)는 노나라 목공(穆公)이 가서 그를 보자 문을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너무 지나치다. 만약 절박하게 만나려 하면 만나 볼 수 있다. 하였다.〔公孫丑問曰 不見諸侯 何義 孟子曰 古者 不爲臣 不見 段干木 踰垣而避之 泄柳 閉門而不納 是皆已甚 迫斯可以見矣〕’라고 하였다.[주-D043] 절박하게 …… 된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공손추(公孫丑)가 ‘선생님이 자발적으로 제후를 만나지 않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라고 물었다. 맹자가 ‘옛날에는 그의 신하가 아니면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 위(魏)나라 단간목은 위나라 문후(文侯)가 가서 그를 보자 담을 넘어서 피하였고, 노(魯)나라 설류(泄柳)는 노나라 목공(穆公)이 가서 그를 보자 문을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두 너무 지나치다. 만약 절박하게 만나려 하면 만나 볼 수 있다. 하였다.〔公孫丑問曰 不見諸侯 何義 孟子曰 古者 不爲臣 不見 段干木 踰垣而避之 泄柳 閉門而不納 是皆已甚 迫斯可以見矣〕’라고 하였다.[주-D044] 정유일(鄭惟一) : 1533~1576.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峯)이다.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저술로 《문봉집(文峯集)》이 있고, 편저 《명현록(名賢錄)》이 있다.[주-D045] 유공(劉公) : 유기지(劉器之)를 말한다.[주-D046] 백성은 …… 없다 : 《논어》 〈태백(泰伯)〉에 공자가 “백성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람이 지시한 것을 따라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끌려가는 것을 알게 할 수는 없다.〔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라고 하였다.[주-D047] 망정간혜 득소휴헐(忘情乾慧 得所休歇) : 《퇴계문집고증》에서 〈이선생초견나선생서(李先生初見羅先生書)〉에 나온다고 하였다.[주-D048] 정수(定水) : 마음에 혼란이 없음을 맑고 고요한 물에 비유한 말이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파문이 일어나는 물과 같아서 사물의 참모습을 볼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주-D049] 운부(韻府) : 중국 원(元)나라 음시부(陰時夫)가 찬한 《운부군옥(韻府群玉)》을 말한다. 이 책은 글자의 이동변천(異同變遷)을 밝히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말과 선어(禪語) 등을 기록하였다.[주-D050] 정현(鄭玄) : 127~200. 중국 후한(後漢)의 학자로, 자는 강성(康成), 고밀(高密) 사람이다. 마융(馬融)에게 수학하였으며, 당세의 거유(巨儒)였다.[주-D051] 하휴(何休) : 129~181. 중국 후한의 학자로, 특히 《춘추공양전》에 통달하였다. 저술로 《춘추공양해고(春秋公羊解考)》,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이 있다.[주-D052] 묵적(墨翟) : 묵가(墨家)의 창시자로, 묵자(墨子)라고 존칭한다. 묵자를 비롯한 묵가학파는 공격 전쟁을 철저히 배격하였으며, 공격에 대응하는 수비적인 전쟁에 뛰어난 기술과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주-D053] 팔일가(八一哥) : 《퇴계문집고증》에 이름이 돈서(敦敍)라고 하였다.[주-D054] 예장(豫章) : 중국 송나라 때 나종언(羅從彦)의 별호로, 자는 중소(仲素), 시호는 문질(文質)이다. 양시(楊時)의 문인으로 송대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주-D055] 순자의 비세(菲繐)ㆍ관구(菅屨)의 주 : 《순자》 〈예론(禮論)〉의 주석이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양기석 김익재 (공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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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三十三 / 書 / 答吳子强問目 健○延平答問
又難廢墜。指應接事而言乎。指工夫而言乎。只又但三字語意相蒙。而未曉曲折。
所當應接處。不可廢墜而不應接。故曰難廢墜。若謂工夫則不當下難字也。只如舊。言無別段好事也。蓋雖無好事。遇事不可不應。故曰又難廢墜。然於應事處。但當愼察。足以度日。故云但靳靳度日爾。
靳靳
去聲。音近。固也。又靳制其行也。蓋本馬當膺帶也。故有制其行之義。然恐字當作斤。斤斤。愼重之意。斤亦去聲
謹守格法。專指可改之道而言乎。兼指三年無改之意乎。
所可改則明白而改之。所不可改則不改而已。此之謂守格法。是當兼兩意看。若云隱忍遷就。則非格法也。
使知所以自求者惟深切。所謂自求者。蓋指奉承遺體。求免於虧辱之意而言也。
所謂自求者。來說是也。聖人之告人如此。惟深切以求之。庶可用力。不然。雖聞聖人之敎。無益也。
諸家之說。多不出此。指其說而言乎。
先儒說此者。多不出於此義。此義卽幾微之間。以下。先生自說之義也。
不然。設譬引喩。所謂不然者。恐語意似不承接歸生許止事也。通上文所謂不知幾微之間以下等語而反其辭也。
是
歸生許止。各是發明一例。在歸生許止。各有發明格例。不須援引爲證也。
是
須知顔子默曉聖人之言。顔子所以默曉者。便知親切道體乎。一說。須知顔子默曉聖人之意。然後便知親切道體處。恐前說是也。
前說是
化而知裁
常人之學。雖益而不自知。是不知所裁者也。惟聖人。自十五至七十。漸進而至極。所謂化也。而能就其中知其立。知其不惑。知其知天命。知其耳順。知其不踰矩。所謂知裁也。
立一下法
此當從近本立下一法。言聖人爲立一法也。下字是立法之間語助辭耳。
引荀子大昏之未發。祭之未納尸。喪之未小斂。一也。所謂未發者。何事也。失禮之中。又有失禮。呂博士引此。比而同之乎。所謂趙氏春秋纂例之說。抑何意耶。
呂博士引荀子此語以解之。但荀子說。未詳何意。趙氏纂例之說。疑卽集註所引趙伯循禘祭之說也。
陳幾叟與羅先生問與者。參字之意乎。呂與叔有中庸解。而二公皆說了註脚乎。龜山解。今之或問中辭乎。
與。猶及也。與叔有中庸解。陳羅二公。皆以此解。爲說得浸灌浹洽。勝於龜山解。龜山解。卻似枯燥也。龜山解。見於中庸或問者耳。
便是日月至焉氣象。延平意則然矣。而論語註解。似與此不同。抑有微意乎。
延平說雖善。似非夫子本意。故朱子集註。不得用其說。
竿木隨身之說
竿木。如今竪立車上作戲之木也。竿木隨身。逢場作戲。禪家多用此說。場卽優戲之場。言身有其具。則隨處作用。不能自已也。
包羞
言子路未至於廓然明達無所不可處。故未免有疑。如使聖人有所疑礙而得之。是包羞也。龜山本語。雖未見。恐不過如此也。
從聖人前後際斷。使言語不著處。
前後際斷。未詳。恐前後只如瞻之在前。忽焉在後之前後。際斷。似指言聖人地位人所不及處。
如程子所謂此地位直是峻絶。大段著力不得處耳。使言語不著。猶用言語不得也。如何如何。
發憤忘食。言其求道之切。所謂聖人自道理中流出。猶言由仁義行。非行仁義者乎。然今之論語註解。專指求道之意。似與延平之旨不同。何也。一極際氣象。抑何言也。
所引由仁義行。非行仁義之說。以明延平之意。得之。但朱子於此。以爲求道之切。論語註。以爲好學之篤。後比於前。不無些稱量點化意思。不可謂全不用延平之旨也。惟延平則渾然作一氣象看。朱子則有未得已得之分。爲少異耳。極際。恐如所謂全體至極之意。
鬼神。自家要有便有。要無便無。竊恐鬼神非弄得物事。豈人之所要以有無哉。謂之要無便無者。尤所未瑩。所謂有其誠則有其神。無其誠則無其神。語意平穩。似不類是耳。抑別有微意乎。
鬼神要有便有要無便無。亦非謂弄得有無也。正與有其誠則有其神。無其誠則無其神之意同。恐別無他微意也。今行得一祭。因吾誠敬之至不至。而神之歆不歆係焉。此理昭顯。甚可畏也。
鄕曲以上底人。只道他是箇善人。延平爲上底人。而鄕曲只道延平是箇善人。一說。鄕曲論人以上底人。只道是箇善人。延平少不與人辨詰。必待問後。方與說也。恐前說近是。而他也略不與人說以下。乃別起之辭。而不與上文相連也。
愚意恐二說皆未安。以上底人。如今人說識理之人也。謂鄕曲中識理之人。亦不知延平爲有道人。只道他是善人。延平亦自不輕其道。不肯略與人說云云耳。
始信前日諸人之誤。孟子註。諸儒所見不同。蓋指此也。
上文言亦有此病者。謂正與助長之病也。今推見實理。知此等病痛而改之。始知諸儒爲學許多誤入處。恐非指註孟子不同而言也。
設張羅落者大
設張。猶鋪張也。羅。網羅也。落。韻會。絡通作落。又籬落之落。本作格。音洛 通作落。虎落。以竹篾相
連遮落之也。合此數義觀之。羅落當爲包括之義也。
今日習春秋者。皆令各習一傳。拜習註解。拜字恐幷字而訛也。
幷字之誤
卻怕於匹似閑底事
匹似。恐猶恰似正似之類言卻恐於恰似無緊要之事。卒然起來纏心。則除此爲尤難。不可不著力云耳。
只爲說敬字不分明。朱子每以謂得李先生後成就所學。而猶有少此之意乎。
朱子於延平之門。得靜中有主宰存養之法。由是免入釋老去。而學之宗統在是。然說靜不若說敬。程先生已言之。朱子豈得以師門之故而遷就爲說耶。
伊川令呂進伯去了韓安道。韓安道。何許人也。
未詳韓安道爲何人。應是死而作禍福。以食於淫祀。如蔣子文之類。
文定代云干木云云。不若龜山之遜避。仕不爲貧而有時乎爲貧。龜山猶取此義。對人說了。文定則以段干木代龜山之說。延平意以謂此則無迫斯可見之義。不若龜山遜避之意。頃與鄭斯文惟一講此段。作此看。猶未瑩者。意所謂遜避者。龜山之出。本爲道而不自居也。文定之代云干木者。亦欲龜山寧踰垣避之而不出乎。
干木字。若果爲段干木。則依俙似有來諭之說。但去段字。只說干木。已爲可疑。況劉公所問。必是龜山所以出之故。龜山答以爲貧而仕。斯其爲遜避之言也。文定代龜山而答劉公。則亦當答所以出之故如何。可也。何故卻擧段干木踰垣而避之事。爲答已出之辭乎。其義全不通。愚意干木。卽竿木之誤作。或省作。竿木隨身逢場作戲之義。已見上。蓋文定代龜山擧此語以答。則是自謂身有其具。不能自已而出也。自任之意太過。故延平謂不如龜山之遜避云耳。如何如何。
李先生云。橫渠說不須看。所謂先入了費力。蓋指橫渠正蒙等語而言乎。延平之不欲以此勉初學。何意乎。
程先生亦謂橫渠說道有過處。乃在正蒙云。大抵多由苦心力索而得。故往往有安排牽强處。說得不自在。正與延平融釋脫落。洒然自得處不相似。所以延平云云。
呂與叔論民可使由之處。意思極好處。何謂乎。論儒佛雜學之弊。所引其說。何意乎。
呂氏本說。今不得見。不可臆度附會說。深爲嘆惜。
來延平看親。看親卽省親乎。
固爲省親。然不是謂父母。但省視親戚耳。
忘情乾慧。得所休歇。
古禪師語錄。有狂慧乾慧之說曰。佛相是解悟。人無正見。只是學解。謂之狂慧。亦非乾慧。乾慧者。悟得正見。爲無定水浸潤。旣非悟解。只認得生死垢心卻成邪。○右見於韻府者如此。未知何謂。○禪家有戒定慧之說曰。戒生定。定生慧。防非止惡曰戒。六根涉境。心不隨緣曰定。心境俱空。照覽無碍曰慧。以此觀狂慧乾慧之說。旣以無正見。只學解者。謂之狂慧。而非乾慧也。則乾慧者。悟得正見。乃定而生慧。能造其極者也。所謂無定水者。謂心未定則累於外物。如水之浸潤也。若爲此水浸潤。乃沾濡之慧。非乾慧也。今此語錄。正釋乾慧之義。當曰不爲無定水浸潤可也。止曰爲無定水浸潤。不可曉。或曰。爲字上脫一不字。恐或然也
操戈入室
鄭玄傳。任城何休好公羊學。著公羊墨守,左氏膏肓,穀梁廢疾。玄乃發墨守。鍼膏肓。起廢疾。休嘆曰。康成入吾室。操吾戈以伐我乎。○墨守。墨翟守城之法。言公羊之學。無敵於天下。如墨翟守城然也。
渠初從謙開善處
嘗見後賢說。謙開善。僧名。蓋謂朱子得禪學於此僧。故延平云然。但不記語出何書。行當尋檢出耳。
可惜忘錄。此子近聞其爲絶世也。遵堯台衡二錄見上。而不知何書也。此文字亦未曉句斷文義。
可惜忘錄。謂二書忘不謄寫。而爲八一哥取去。不得再見。爲可惜耳。此子。指八一哥。其人必從仙佛之徒。絶迹遠去故云云。但以豫章之子而從異敎。甚可駭異。遵堯書事實。向見性理大全名下具言之。但性理書在溪舍。而滉在山齋。未得取考。記得不分明。幸取檢則可知。台衡之義。未詳。
[주-D001] 問 : 問。延平答問。作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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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六 / 第三十三卷書 / 答吳子强問目
謹守格法 問三年無改。先生曰。事止有可與不可而已。若大段有害處。自應卽改。何疑。恐不必言隱忍遷就云云。吾輩欲求寡過。謹守格法。爲不差也。
使知所以自求云云 問父母惟其疾之憂。先生曰。當如上說爲得之。舊說不直截。聖人之告人。使知所以自求者惟深切。庶可用力也。
諸家之說多不出此 問。養其親而敬有所不至。不幾於犬馬視其親乎。敬者。尊敬而不敢忽忘之謂。非特恭謹而已也。雖至愚。孰忍以犬馬視其親者。然不知幾微之間。尊敬之心。一有不至。則是所以視其親者。實無以異於犬馬而不自知也。聖人之言。警乎人子。未有若是之切者。然諸家之說。多不出此。某謂當以春秋所書歸生許止之事觀之。則所謂犬馬之養。誠不爲過。不然。設譬引喩。不應如是之疎。而子游之賢。亦不待如此告戒之也。
歸生許止 (春秋傳)鄭公子宋與子家謀弑。子家曰。畜老猶憚殺之。而況君乎。反譖子家。子家懼而從之。春秋書曰。鄭公子歸生 子家 弑其君者。權不足也。○許悼公瘧。飮太子止之藥 止。獨進藥。不由醫也。 卒。太子奔晉。春秋書曰。弑其君。君子曰。盡心力以事君。捨藥物。可也。
荀子大昏之未發云 案荀子禮論。大昏之未發齊。註。發齊。謂昏禮也。此下三者。皆禮之初也。始質而未僞云云。疑呂博士引此。以喩禘灌之初。
趙氏 名匡。字伯循。唐河東人。
春秋纂例 (文獻通攷)春秋集傳纂例。唐給事中陸淳。以三家之傳不同故。采獲善者。參以啖助,趙匡之說。爲集傳纂例,辨疑等書。至僞唐人姜虔嗣纂春秋纂例。
呂博士 卽呂與叔。
陳幾叟 名淵。延平人。忠肅公侄孫。龜山門人。
從聖人際斷 問余欲無言。明道,龜山皆云。此語爲門人而發。某恐此句從聖人前後際斷。使言語不著處不知不覺地流出來。非爲門人發也。○(語類)今之學者。往往多歸異敎。以爲有箇悟門。一朝得入。則前後際斷。說得恁地見成𢜀快。如何不隨他去。○案前後際斷。語出大慧語錄。
發憤忘食 止 極際氣象 葉公問孔子於子路。如女奚不曰下面三句。元晦以爲發憤忘食者。言其求道之切。聖人自道理中流出。卽言求道之切。恐非所以言聖人。此三句。只好渾然作一氣象看。則見聖人渾是道理。不見身世之碍。故不知老之將至耳。大抵夫子一極際氣象。終始難形容也。
未得已得 見論語集註。
鄕曲以上底人云云 (后錄)朱子曰。李延平初間也是豪邁底人。到後來也是磨琢之功。在鄕曲不異於常人。鄕曲以上底人。只道他是箇善人。他也略不與人說。待問了方與說。
始信前日諸人之誤 (補錄)朱子曰。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某舊日理會道理。亦有此病。後見李先生。說令去聖經中求之。遂刻意經學。推見實理。始信前日諸人之誤。
呂進伯 名大忠。藍田人。大防之兄。皇祐中進士。屢遷寶文閣直學士。
去了韓安道 (二程全書)王者。父天母地。昭事之道。當極嚴恭。漢武遠祀地祇於汾睢。旣爲非禮。後建祠宇。其失已甚。因唐妖人。作韋安道傳。遂爲塑像以配食。誣瀆天地。天下之惡。有大於此者乎。公爲使者。此而不正。將正何事。願以其像投之河流。○案二程全書。作韋安道。延平答問。作韓安道。未知孰是。
蔣子文 案子文。漢末人。爲秣陵尉而死。吳大帝都建康。子文常乘白馬。執白羽扇而出。遂立廟鍾山。封蔣侯。嘗助楊大眼。走魏軍凱旋。廟中人馬跡皆泥濕。
龜山所以出 (龜山墓誌辨)宏問。龜山被召。過南京。見劉器之。劉問此行何爲。龜山曰。以貧故。劉曰。若以貧故。則更不消說。答曰。傳言如此。未知信否。若據吾則不然。劉若問此行何爲。但對曰。老年無用處。且入這保社。他若更問還有轉身一路否。但曰。料得無處分說。一任傍人點檢。不然者。若問此行何爲。只答云。竿木隨身。亦自脫灑。
延平 邑名
忘情乾慧得所休歇 (李先生初見羅先生書)聖學未有見處。有佛子中有絶嗜欲捐想念。卽無住以生心者。特相與遊。亦足以澄汰滓穢。洗滌垢坌。忘情乾慧。得所休歇云云。
六根 (龍舒心經)眼耳鼻舌身意爲根界。
謙開善 案語類。道謙言渠曾坐禪三四日。便無事。羅整庵以爲延平所謂謙開善。必此人。或曰。道謙住開善寺故名。
遵堯台衡 (性理大全)陳氏協曰。遵堯錄。其書四萬言。大要謂藝祖開基。列聖繼統。若舜禹遵堯而不變。元豐改制。皆自王安石作俑。創爲功利之圖云云。○案台衡錄。伊洛淵源錄云。羅從彦所著。而不言其義。
八一哥 (本註)名敦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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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跋 / 延平答問後語
滉讀晦菴先生四書集註,或問。見其所述師說之一二。未嘗不歎其辭義精深。旨味淵永。而恨不得見其全書。壬子。來京。幸與朴君希正相識。始得所謂答問錄者二卷。病中因竊窺其首末。如盲得視。如渴得飮。雖未易測其涯涘。而吾學與禪學。似同而實異之端。至是可知。而涵養本原。似若得其用力之地矣。手自傳寫。讎校其本錄之錯簡。誤字亦僭爲釐正。而還之希正。但以支離頓憊。精力不逮。其論語,春秋等講說之條文多而不切於行者。或只擧其條而不傳其文。其在性理等書者。只云見某書。或掇入注書。或挑出上面。書殊未爲全書。是爲愧懼耳。顧是錄也。東方士子。罕得見焉。滉懇囑希正以印行事。未知其果能否也。使幸而印行。士之能知尊敬。而探究服行者多。則何患此道之日孤。而異端之日盛也哉。嘉靖癸丑陽復日。滉。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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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三 / 跋 / 延平答問跋
명종 | 8 | 1553 | 계축 | 嘉靖 | 32 | 53 | 4월, 대사성이 되다. ○ 6월, 金浦의 屬公田을 學田으로 하사받다. ○ 7월, 병으로 사직하고 부호군이 되다. ○ 9월, 상호군이 되다. ○ 10월, 鄭之雲의 〈天命圖〉를 改訂하다. |
명종 | 9 | 1554 | 갑인 | 嘉靖 | 33 | 54 | 5월, 형조 참의가 되다. ○ 6월, 병조 참의가 되다. ○ 7월, 周世鵬을 곡하다. 盧守愼에게 편지를 보내 〈夙興夜寐箴註解〉를 논하다. ○ 景福宮에 새로 지은 건물의 편액을 쓰다. ○ 「延平答問」의 발문을 쓰다. ○ 9월, 상호군이 되다. ○ 11월, 첨지중추부사가 되다. ○ 12월, 〈景福宮重修記〉를 찬진하다. |
延平李先生。挺絶異之資。躬聖學之奧。上承伊洛之傳。下啓考亭之緖。其功盛矣。而不自著述。故其論道講學之言。後世罕得聞焉。滉頃來都下。始於天嶺朴希正處。得見是書。書凡三篇。曰師弟子答問者。晦菴夫子手編師說也。曰後錄者。後人追錄晦菴稱道師說幷遺文遺事也。曰補錄者。琴川周木所編。所以補後錄之未備者也。乃告於希正。圖所以刊行是書者。會淸州牧李君剛而。以事至京師。希正亟以是囑之。李君亦喜符宿心。旣還州數月。功已告完。乃寄書徵跋文於滉。滉自惟懵陋。何敢贅一辭於大賢傳道之書耶。然而是書所以刊行首末。則與有知焉。故不敢固辭。而於此又有所感焉。夫晦菴夫子。未見先生之前。猶出入釋老之間。及後見先生。爲學始就平實。而卒得夫千載道統之傳。是則凡晦菴之折衷羣書。大明斯道於天下者。皆自先生發之。而其授受心法之妙。備載此書。今驟讀其言。平淡質愨。若無甚異。而其旨意精深浩博。不可涯涘。推其極也。可謂明竝日月。幽參造化。而其用功親切之處。常不離於日用酬酢動靜語默之際。此先生靜坐求中之說。所以卓然不淪於禪學。而大本達道。靡不該貫者也。嗚呼。周程旣往。一再傳而大義已乖。微先生。孰得而反之正乎。發聖人之蘊。敎萬世無窮者顔子也。而先生庶幾近之。然則是書之行。其爲後學之惠。宜如何哉。高山仰止。雖未覩氷壺秋月之象。萬古一心。寧不有作興於西林感慨之詩者耶。嘉靖三十三年歲次甲寅秋九月旣望。眞城李滉。謹跋。
滉又按此書舊本。後錄在師弟子答問之前。竊意兩篇皆先生之精蘊。雖不可以賓主本末論。然一則當時言語或手札。一則出於追錄。其先後次第。決不可移易。而所編如此。非中原書本故然也。乃書肆糚帙之人。誤而倒換之耳。改置前書。雖不可易言。今旣刊行是書。則何可尙仍其誤。而莫之釐乎。滉曾以是告於希正,剛而。皆不以爲不可。旣從而正之矣。聊識于此。以俟後之君子有所考云爾。滉。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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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續集卷之四 / 書 / 答李剛而
承惠辱書。如親款晤。忻幸不已。滉目不覩兵書。誤當此職。本爲不合。加之疾病。圖欲退閒。勢所不獲已。只爲上僚所抑。不得呈狀。杜門二旬。竟不遂願。狼狽復出。此實例無之事。深以訝媿訝媿。但此番徒爲閒散計耳。歸計則尙未甚決者。以年凶由禁未解。一也。嶺外赤地。誠恐歸而餓死。二也。力病奔波。顔厚忸怩。玆得諭意。若合一契。今者林大遂罷官。難在城中。欲歸故鄕。則畏故鄕饑疫。艱窘非常。欲賣宅自活。大抵吾輩亦未免爲口腹所累。於行止之際。殊有未强人意。可懼可歎。其中滉之所處。尤未安者。以其所處要地故也。以是固欲伺便復謀退耳。延平書刊板就緖云。甚喜且幸。非公篤好。安能致此。跋文。前雖見囑。恐適爲病於前賢書。故不敢爲之。若他無許諾之人。則所不敢終辭。而今正無閒隙。當少俟得閒之後。伏惟照諒。景遊竟至不起。慟不可喩。猶子博執喪。怡未赴任前。略措喪具。而知舊之間。續而了辦。又有所經護送命。恩出非常。可致遠喪。稍以慰情。未去之恨。誠如所諭。但每念吾方此汨汨。未暇責他之未盡。益以懍懍耳。餘惟各勉。養勇以俟。不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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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別集卷之一 / 詩 / 謝淸州李剛而 楨 印寄延平答問書
壺月傳心一部書。因君東海印行初。病夫尙著絲毫力。生世終須不作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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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二十一 / 書 / 答李剛而問目 朱書
更無打不過處。漢語。凡做事。皆謂之打。如與人說話曰打話。買酒曰打酒。取草曰打草之類是也。過。猶了訖也。更無打不過處。猶言更無做不了處也。
王近思甘旨有闕之問。答云別無方法。別無意思之說。來喩大槩得之。蓋聖賢看得義理至大至重處。極明無疑。不容毫髮有所回撓遷奪。故甘旨之闕。雖人子之心所甚憂者。亦不以是而別生意思。別求方法。以要必得之也。無他。知此爲極重。則彼不得不輕故也。今人每以榮養藉口。而受無禮義之祿食。若充類而言之。與乞墦間而充甘旨。自以爲孝。殆無以異。故君子雖急於奉養。不以是變所守也。
甘旨有闕之說。有未盡者。復申之云。如毛義奉檄之喜。張奉以爲親屈美之。此別是一說。蓋毛公本有高退之志。今爲養親而屈意。故歎美之。若以非義求得而喜之。則奉將唾之而去矣。
克齋。乃石子重自號也。子重求先生作記。先生自以學未至。久而未作。後乃作此。但所謂天下歸仁之說。此段問答如此。而呂氏克己銘所云。先生深非之。見於講論者非一二。然則先生初用伊川說。中間用呂氏說。此段問答。是也。最後。又覺呂氏說太濩落無情理。乃復用伊川說明矣。故今此記見於性理羣書。而所云視天下無一物不在吾生物氣象之中數語則無之。意者。後來復用伊川說。而刪去此說耳。
鐵籠罩卻。以鐵作籠而罩物。是堅固包籠。不可解脫之喩。若看義理如此。則寧有解悟自得處耶。
祭延平文。鞭繩已掣。先生自言。吾之進學。力不足而且暫休息。則先生之敎戒。已加嚴督。譬如馬蹇之步。方纔休息。而人已以鞭繩加之。以促其進也。此言吾不善學。而賴先生誨督而成就云爾。
子餘。卽石洪慶也。與子合皆漳州人。先生稱其强毅方正。則其人美質可想。子餘來學日。以其年長。不欲痛加督責。其後覺未可如此。而方欲檢督。則子餘已行。先生追惜其不能成就美質。故寄書子合云云耳。因言與子餘同來。而尙留不去之人。以新課嚴加督責。則日有長進。乃知前日不欲痛檢於子餘者爲小仁。而不及成就其人。豈不害於育英才之大仁乎。今日督責於留者。似無面目。而有長進之益。豈不爲人情之長久乎。
答萬正淳書。絮底聖賢。絮乃綿之著衣中者。其爲物。輕耎無氣力。蘊沓不疏快。以此認取其義。調息箴。息。鼻息之出入者。調。勻和而攝養之也。此修養家導引法也。故以鼻端觀白首言之。猗移。猶言逍遙也。雲臥天行。言仙人偃息於雲霞。而飛行於天上也。千二百歲。莊子。黃帝問道於廣成子。廣成子曰。我修身千二百歲。形未嘗衰。切脈觀雞。按脈之流動相續。而見仁之憤盈融洩。生生不息意思。觀雞之稚嫩可憐。而識仁之生理藹然惻怛慈愛意思。大槩如此。晦菴論之詳矣。然此等須於性情上加工。而體驗於日用之間。至於積久純熟而後。庶幾實見其親切受用處。不然。徒以言語形似。想象思惟而得之。則終無可得之理也。狀仁以憤盈融洩。語見性理大全西銘小註。朱子問仁於延平書也。切。謂以指按物而知之也。書璿璣註云。一面加銀釘。夜候天晦。不可目察。則以手切之也。卽此切脈之切。同義也。
懷玉硯銘。點染之餘。往壽逋客。來目逋作通。而在此唐本作逋。當從唐本爲是。蓋是時。呂子約謫在筠州。高安卽筠州。今不言遷客。而云逋客。戲諱而託言之。似若自逃世而去隱也。壽。猶獻也。獻酒於所尊。謂之壽。故凡以物饋人。通謂之壽。此硯得之斯遠。以修禮書。今輟以遺子約。故云點染之餘。往壽逋客。豪。來示得之。毋俾玄白。勉之使益進其學也。揚子雲草太玄經。閉門苦思。時人譏其玄尙白。子雲作解嘲云云。末云默然復守吾太玄。玄以言道之極至處。未至於玄則白矣。
敬齋箴。折旋蟻封。蟻封。蟻垤也。北方謂之蟻樓。如小山子。乃蟻穴地。其泥墳起如丘垤。中間屈曲。如小巷道。古語云。乘馬折旋於蟻封之間。言蟻封之間。巷路屈曲狹小。而能乘馬折旋於其間。不失其馳驟之節。所以爲難也。按此云。其泥墳起。似若泥自墳起。其實非自墳起。乃蟻穿穴所銜出之土堆積以成者。今見蟻有數穴相近者。其銜土成垤。分兩邊屈曲以成。而通其間爲往來之道。○右蟻垤之訓。見語類。書或闕於几間。故傳上耳。○又按。非謂乘馬者眞折旋於蟻封之間。謂道之屈曲狹小。如蟻垤者云耳。
敬子與安卿不足。不足。卽來喩所云不相能之謂也。但其上云。氣習偏蔽。各任己私。難責一人不是。又云。江鄕人失之固執。其意似以敬子爲非也。其下卻云。安卿須移出舊齋。不與精舍諸人相干。則又若歸責於安卿。未詳其如何耳。
請直卿掛牌秉拂。按宋史黃公本傳。變此一句文曰。便可代卽講席。蓋掛牌秉拂。本僧家升座說法者之事。此戲借以爲升座講學之喩耳。
鴻羽可以爲儀。止 不如曳尾於泥中。易漸卦上九。鴻漸于逵。其羽可用爲儀。先生解此義。以爲鴻之羽毛。可用之以飾儀衛也。然先生意。又自疑以爲鴻必見殺而后。其羽可飾儀物。恐非本文之意。故問季通。不知當如何解此語耶。若如吾說。則鴻之不願殺身以飾物。得無如龜之願曳尾於泥中耶。莊子。龜寧死留骨而貴乎。寧生曳尾於泥塗乎。曰。吾將曳尾矣。此說先生雖有此疑。然易本義。仍用此說。
旣除服。而父之主。永遷於影堂耶。將與母之主同在寢耶。子從時遭父母偕喪。而將先除父喪。故所問如此。影堂。自家廟之制廢。士大夫祭先之室。謂之影堂。蓋奉安畫像於此而祭之。故稱影。影堂。卽祠堂也。祠堂之名。始於文公家禮。前此稱影堂。 古人。葬後卽返魂。設几筵於正寢。奉神主在此經三年。子從偕喪。兩神主同在寢矣。今當父大祥除父服。故問祥後禫前。父之神主。當先永入於影堂乎。抑姑且無入。而與母主仍在正寢爲可乎云云。先生謂自當先遷云者。父旣祥除。主當先入于影堂。可也。然此必子從之父是衆子。非入祖禰廟。故其禮如此。若入祖禰廟。則其入廟節次。又與此不同。詳見家禮。
看前日報行章疏。止 守吾太玄也。行。謂行遣。放逐罪人。謂之行遣。時侂冑鷹犬之人。必有上章。擊逐正人。先生見其報。故言彼之誣罔構陷如彼。我輩雖欲回變面目。自汚其行。自首身罪。投倖乞免。亦不可得。只當從吾所好。以待天命而已也。
簡卿文字。蓋簡卿因井伯求薦己文字於先生。先生意有所不滿於其人。不欲苟循人情而强與薦書。故其言如此。畏人來奪文字者。謂我不欲薦彼。而彼强來索取文字。是無異於奪取而去。故云畏人之如是爲耳。先生嘗薦學古。故云如學古之事。乃我自作薦彼文字。非因學古因人來索而應副苟爲之也。
恐不免去故步。莊子云。壽陵餘子之學步於邯鄲也。失其故步。直匍匐而歸耳。此當是。用此言。蓋欲學新步。未得其法。幷與故步而忘失也。引此以言上人之書法類此云爾。
區區鳧鴈。不足爲重輕。揚雄解嘲。乘鴈集不爲之多。雙鳧飛不爲之少。言江海之大。禽鳥之繁。乘鴈雙鳧之有無。不足爲多少。先生引以比之云耳。乘鴈。四箇鴈也。
比來。議論似稍寧息。正恐不削亦反耳。此引鼂錯削地之策。所謂不削亦反之語。以言攻僞學議論。近稍寧息。似彼七國不削反遲之時。雖若小幸。然恐終必發其大禍。則正如彼所慮不削反雖遲。而終成大禍云耳。
道學文字鉤連隅落。言攻道學章疏。委曲周密。比之兵法。正如武侯八陣營壘。四方八面。互相鉤連。略無疎闕處也。隅落。卽方面也。但華宗浪戰之語。古必有不知兵法而浪戰者。其名字爲華宗。今未考得耳。
玉界尺。五代唐趙光逢。時人稱其方直溫潤。謂之玉界尺。界尺。不知何物。必其形方且直。以玉爲之。故爲方直溫潤之比。
菖蒲平安之報。北都童子寺。有竹長數丈。李衛公令每朝報竹平安。意必永卿有菖蒲。先生在南康日所賞愛者。故今戲問云云。蓋借竹故事。用之於菖蒲耳。
詩。不須空喚莫愁來。莫愁。石城女子。善歌。此詩言。停車野寺。偶發訪梅之興。但日暮天寒。無酒可飮。孤高悄寂之趣。自與梅花相適。不須呼歌者來然後。可遣淸愁也。林和靖詠梅詩。幸有微吟可相狎。不須檀板共金罇。亦此意也。
柱後惠文。秦時法冠。章甫。儒冠。言毋以文法易儒術云爾。
太玄中首中。陽氣潛萌於黃宮。無不在乎中。陽首一。藏心于淵。美厥靈根。測曰。藏心于淵。神不外也。揚子雲之學。蓋至此地位也。
太玄經。此亦無其書。嘗在京。於友人處借得。未看而還之。不能詳其說。大槩其書。倣易而作。易八八而爲六十四卦。玄九九而爲八十一首。玄之首。卽易之卦也。易每卦六爻。玄每首九贊也。所謂中首中者。上中字是首之名。玄之有中首。如易之有復卦也。下中字是中首九贊之居中者。卽第五贊也。此爲陽氣初萌處。猶復卦一陽初生也。故云云。陽首一。陽亦首之名。而一卽指陽首之第一贊而言。測曰。猶易之象曰也。所以釋逐贊之義。如易小象釋逐爻之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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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五 / 第二十一卷書
주-D001答李剛而問目
王近思 名力行。同安人。朱門人。有辛亥問答。
石子重 名𡼖。會稽新昌人。朱子作墓誌。以友稱之。
天下歸仁之說云云 (朱全)石子重問。克齋記說天下歸仁處。先本云。天下之人。亦將無不以仁歸之。後本云。視天下無一物不在吾生物氣象之中。先後意甚異。答曰。初意伊川說。後覺未穩。改之如此。乃呂博士說。恐當以後說爲正。○案復用伊川說。卽今集註是也。
呂氏克己銘 呂大臨。字與叔。藍田人。元祐中。爲正字。作克己銘。銘曰。凡厥有生。均氣同體。胡爲不仁。我則有己。亦旣克之。皇皇四達。洞然八荒。皆在我闥。孰曰天下。不歸吾仁。痒痾疾痛。擧切吾身。
先生深非之 (或問)朱子曰。呂氏專以同體而言。謂天下歸仁爲歸吾仁術之中。則不免過高而失聖賢之旨矣。
子合 王遇字。號東淵。漳州龍溪人。進士。仕至戶部郞中。先生稱其篤信嗜學。
萬正淳 名人傑。興國人。號止齋。先生稱其氣質甚美。有語錄。
調息箴 朱子所作。箴曰。鼻端有白。我其觀之。隨時隨處。容與猗移。靜極而虛。如春沼魚。動極而翕。如百蟲蟄。氤氳開闢。其妙無窮。孰其尸之。不宰之功。雲臥天行。非予敢議。守一處和。千二百歲。
鼻端觀白 (楞嚴)世尊敎我觀鼻端白。經三七日。見鼻中氣出入如烟。(紫文靈書)修行二十四。有制七鬼之法。以晦朔弦望及庚申日。存鼻端有白氣。漸大以冠身。
切脈觀雞 明道先生曰。切脈最可體仁。又曰。觀雞雛。註。此可觀仁。
憤盈 (國語)覛土陽癉憤盈。土氣震發。註。憤。積也。
融洩 (左)其樂融融洩洩也。註。和樂舒散也。
晦庵論之詳 (朱子答林擇之書)此語但因切脈而見血氣之周流。觀雞而見生意之呈露。故卽此指以示人。如引醫家手足頑痺之語。擧周子庭草不去之事。皆此意耳。
狀仁 止 延平書 (延平答朱子書)仁是心之正理。能發能用底一箇端緖。如胎育包涵。其中生氣。無不純備。而流動發生之機。又無頃刻停息。憤盈發洩。觸處貫通云云。○案融此作發。當攷。
懷玉硯銘 朱子所作銘曰。我輯墜簡。大灋以存。孰摯其寶。使與斯文。點染之餘。往壽逋客。墨爾毫端。毋俾玄白。
子約謫在筠州 (宋史)子約疏救趙汝愚。謫高安。
斯遠 徐文卿字。信州玉山人。嘉靖進士。與趙昌甫,韓仲止聲名伯仲。
豪來示 案豪。毫通用。疑剛而擧此爲問。
敬子 李燔字。(宋史)南康建昌人。擧進士。從朱子學。以弘名齋。終直秘閣。諡文定。蔡念成稱公心事如秋月。學者宗之。與黃勉齋幷稱。
安卿 案安卿。有陳,林兩人。此未知爲誰。
直卿 黃榦字。號勉齋。(宋史)仕至主管明道宮。先生稱其志堅思苦。以子妻之。臨終。授以深衣曰。吾道之托在此。公持心喪三年。諡文肅。著儀禮經傳續解。
鴻羽 止 泥中 (朱子答蔡季通書)鴻羽爲儀。恐只是可爲旌旄之屬。無進退以禮之意。誠不如曳尾泥中矣。
子從 郭叔雲字。潮陽人。
報行章疏 (刊補)按韻會。論囚曰報。謂羣小所論行遣正人之章疏也。
簡卿 楊迪字。
井伯 林成季字。莆田人。
學古 案語類有劉學古。朱子行狀。女壻又有劉學古。疑卽一人。但行狀則似當以名。語類則似當以字。又似非一人。別集又有與學古書。而不著其姓。當時又有葉學古者。疑語類劉學古。而別集葉學古也。
上人書法 (般若經)內有德智。外有勝行。在人之上者曰上人。(白)少年上人號懷素。草書天下稱獨步。
玉界尺 (世說)荀勖正雅樂。阮咸心謂不調。後有老夫得周時玉尺。便是天下正尺。試以校已所訂鍾鼓金石絲竹。皆短一黍。於是服阮神識。(李)仙人持玉尺。費君多少才。(朱全傅自得行狀)公十四。賦玉界尺。詩語警拔。○案界。如界度界量之界。隋時。又有木界尺。
菖蒲 一名菖歜。生石間。一寸九節者佳。能烏髭益壽。
李衛公 德裕
永卿 姓葉。南康人。朱門人。
檀板 案韻玉有檀拍。蓋以檀木爲板。以節歌曲。拍。卽曲也。(麗史)忠宣餉新宮。觀儺戲。宰相遞拍檀板以舞。
柱後惠文 (史)以柱後惠文治之。註。秦獄吏冠。(漢官儀)以鐵爲柱。取其不撓。○案趙惠文王造此冠。故名惠文。
[주-D001] : 庚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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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집(茅谿集) 문위(文緯)생년1554년(명종 9)몰년1631년(인조 9)자순보(順甫), 순부(純夫)호모계(茅谿)본관남평(南平)특기사항오건(吳健), 정구(鄭逑)의 문인. 오장(吳長), 윤경남(尹景男), 조응인(曺應仁) 등과 교유
茅谿先生文集卷之三 / 跋 / 延平答問質疑跋
광해군 | 13 | 1621 | 신유 | 天啓 | 1 | 68 | 오건의 〈延平答問質疑〉를 考證하다. |
광해군 | 14 | 1622 | 임술 | 天啓 | 2 | 69 | 정구의 〈延平答問切要〉를 抄錄하다. |
德溪吳先生。甞講延平答問。而以其所疑。質之於退溪李先生。李先生爲之逐件而批之。揔五十餘言。盖程夫子以後道學之大者。惟朱夫子一人。而初不免爲禪敎所染。幾誤其學。得延平李先生始就正焉。則其一時凾丈答問之書。豈不有關於後學哉。我吳先生甞讀朱子書。讀了負笈而趍陶山。納拜禮畢。以書中疑義質問焉。因留匝月。講究底蘊。李先生甚器之。自是退後。又得延平答問而讀之。是欲因朱學之大而泝其淵源。不得不求於延平也。時則在京從仕日也。與縉紳間有志於學問者。日相講論。其深旨肯綮處。直以小冊隨講隨錄。備述其意。而馳書求正焉。至於口讀之細。句斷之疑。亦皆書之而不憚煩焉。退溪先生亦爲之諄復而不置。今見其不惟手跡宛如當時。啓發憤悱。誠意懇至。若面命而提耳。嗚呼盛哉。惜其朱書之質則以面而不以書。今無所考。是豈非後學之不幸歟。然程夫子傳授宗統之旨。朱夫子靑藍寒水之得。因此答問質疑而博考全書。或泝其源或沿其流。則其亦庶幾矣。志此學者。盍相與勉之。時 天啓辛酉冬至。門人茅谿居士文緯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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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谿先生文集年譜 / 茅谿先生年譜
熹宗哲皇帝天啓元年 光海十三年 辛酉 先生六十八歲 春。答趙止齋書。止齋書。略曰先生厄窮非不知也。但此時禍患。若非道成德立超越於名臼中則有不可免。而況先生間於齊楚。親犯虺螫。則萋斐之文。擠抑之謗。何可免也。所可恨者。奴隷於永慶天健之說。耳不欲聞。口不可道。天地神祗。其可誣乎。不若付之一笑。故前日兩書。不爲言及矣。今聞含沙之毒。尙猶未已云。不勝痛慮之至也。然忠信篤敬。可行於蠻貊者。想先生有以力行之矣。外面憂患。旣不足以動於中。而窮理居敬。常有以有餘裕矣。前日所達朱書記疑。未可得見耶。○先生答書。略曰所示朱書疑義。豈可持人所疑而求正於人乎。要在自做精力。着實下工。則於人所不疑處。自有所疑。而反覆思之。思之又思。夜以繼日。終至於渙然氷釋。則自有所到矣。若待人所疑而持以求正於人。則是工夫在外而不在於內。所謂隨衆觀塲而已。大槩聖賢於上達處。不曾向人說與者。欲人眞實下工。使之身親經歷過。不欲馳騖於口耳間也。朱子四書註解。亦無上達處。僅有一二略見者。亦無分明吐露。可玩味也。 ○崔訒齋晛答書至。○送趙龍洲歸京城。先生與眉叟書曰趙日章明日大歸。京城衆楚中。又失此友。此懷如何。 ○與朴龍潭書。略曰某劒餘殘喘。雖未入土。猜嚇不已。咻謗日至。未知末梢稅駕之地也。老兄安卧衆楚之中。偃息桑梓之下。風雲變態。省遣㭠邊。無非平日德學之效。尤賀尤慰。
광해군 | 13 | 1621 | 신유 | 天啓 | 1 | 68 | 오건의 〈延平答問質疑〉를 考證하다. |
광해군 | 14 | 1622 | 임술 | 天啓 | 2 | 69 | 정구의 〈延平答問切要〉를 抄錄하다. |
○考證 延平答問質疑。先是德溪先生講延平答問。質疑于退溪李先生。別成一秩。在亂蒿中。先生釐正之。思欲刊行。會山陰守許公喬合謀梓出。以布志學之士。○有跋文。
二年壬戌 先生六十九歲 抄錄延平答問切要二秩。先生所著又有座右銘,自省篇,性理摘微,易學啓蒙大指圖識,壁上採遺錄。俱佚不傳。可勝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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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집(南冥集) 조식(曺植)생년1501년(연산군 7)몰년1572년(선조 5)자건중(楗仲)호남명(南冥), 산해(山海),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본관창녕(昌寧)시호문정(文貞)특기사항이준경(李浚慶),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이희안(李希顔), 신계성(申季誠) 등과 교유
명종 | 18 | 1563 | 계해 | 嘉靖 | 42 | 63 | 東岡 金宇顒이 와서 수업하다. ○ 2월, 龜巖 李楨이 찾아오다. ○ 河沆, 河應圖, 柳宗智 등과 함께 蘫溪書院을 배알하다. ○ 姜翼 등과 함께 葛川 林薰의 廬所를 방문하다. ○ 松岩 李魯가 와서 배우다.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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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平答问》(初为一卷)是朱熹编辑的他与老师李侗之间论学的问答,时间自绍兴丁丑(1157年)六月至隆兴元年(1163年)癸未止。自南宋至今,已经有许多版本的刻本。另从《延平答问》所录来看,可以了解李侗、朱子对于一些儒家经典的解释,特别是《四书》,当然也有《春秋》等,以及对“涵养”、“存养”、“圣贤”、“太极”、“动静”、“阴阳”等理学概念和范畴的理解。通过《延平答问》还可以了解朱熹早年和李侗的思想状况,如“理一分殊”、“体验未发”、“洒落气象”等等。最后,《延平答问》作为理学经典,在版本学和哲学史上具有一定的意义和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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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平答问》一卷、《附录》一卷,中国南宋时期理学家——朱熹撰。
书 名 延平答问
作 者 朱熹
朝 代 宋
出 自 《附录》
目录
简介
熹父松,宣和中官闽,生熹于延平(今福建南平市)。朱熹为程颐三传弟子李侗的学生,阐发儒家思想中的“仁”和《大学》、《中庸》的思想;继承和发展二程(程颢、程颐)理气关系的学说,集理学之大成,后世并称程朱。自元以来,历代王朝科举,均采用朱熹《四书集注》。熹整理文献,注释古籍,疑古文《尚书》之伪,不信《诗序》,多有新意。著作有《四书章句集注》、《诗集传》、《周易本义》、《楚辞集注》、《通鉴纲目》及后人编辑的《朱文公集》、《朱子语类》等。绍兴二十三年,熹二十四岁,将赴同安主簿任,往见侗于延平。始从受学。绍兴三十年冬,同安任满,再见侗,仅留月余。又阅四载而侗没。前后相从,不过数月,故书信往来,问答颇多,后朱子辑而录之——李侗答朱熹问儒家经义的一些信札,又载其与刘平甫二条,以成是书;熹之门人又集熹平日论李侗的语言、祭文及行状等,别为一卷,题曰《附录》,说明非朱子原本。后侗裔孙葆初,别掇拾侗之诸文,增入一卷,改题《延平文集》,殊失其行状等,别为一卷,题曰《附录》,说明非朱子原本。后侗裔孙葆初,别掇拾侗之诸文,增入一卷,改题《延平文集》,殊失其旧。故今仍录原本。
作品原文节选
丁丑六月二十六日书云:承谕涵养用力处,足见近来好学之笃也,甚慰甚慰。但常存此心,勿为他事所胜,即欲虑非僻之念自不作矣。孟子有夜气之说,更熟味之,当见涵养用力处也。于涵养处着力,正是学者之要。若不如此存养,终不为己物也。更望勉之。
戊寅七月十七日书云:某村居,一切只如旧,有不可不应接处,又难废堕。但靳靳度日尔。朝夕无事,齿髪皆已迈,筋力渐不如昔,所得于师友者往来,于心求所以脱然处,竟未得力。颇以是惧尔。
春秋且将诸家熟看,以胡文定解为准。玩味久必自有会心处,卒看不得也。伊川先生云:春秋大义数十,炳如日星,所易见也;唯征辞奥旨,时措从宜者所难知尔。更须详考其事。又玩味所书,抑扬予夺之处看如何。积道理多,庶渐见之。大率难得学者无相启发处,终愦愦不洒落尔。
问:子曰:父在观其志,父没观其行,三年无改于父之道,可谓孝矣。东坡谓:可改者不待三年。熹以为使父之道有不幸,不可不即改者,亦当隐忍迁就。于义理之中,使事体渐正,而人不见其改之之迹,则虽不待三年而谓之无改可也。此可见孝子之心,与几谏事亦相类。先生曰:三年无改,前辈论之详矣。类皆执文泥迹,有所迁就失之。须是认圣人所说,于言外求意乃通。所谓道者,是犹可以通行者也。三年之中,日月易过,若稍稍有不惬意处,即率意改之,则孝子之心何在?如说春秋者,不忍遽变左氏有官命未改之类,有孝子之心者,自有所不忍耳。非斯须不忘、极体孝道者能如是耶?东坡之语有所激而然,是亦有意也。事只有个可与不可而已。若大段有害处,自应即改何疑?恐不必言隐忍迁就,使人不见其改之之迹。此意虽未有害,第恐处心如此,即骎骎然所失处却多。吾辈欲求寡过且谨守格法为不差也。几谏事意恐不相类。更思之。
问:孟武伯问孝子曰:父母唯其疾之忧。旧说孝子不妄为非,唯疾病然后使父母忧。熹恐夫子告孟孙之意不然,盖言父母之心慈爱,其子无所不至。疾病人所不免,犹恐其有之以为忧,则余可知也。为人子者知此,而以父母之心为心,则所以奉承遗体,而求免于亏辱者,岂一端而已哉?此曾子所以战战兢兢,启手足而后知免焉者也。不远游,游必有方,不登高不临深,皆是此意。先生曰:父母唯其疾之忧,当如上所说为得之。旧说不直截圣人之告人,使知所以自求者,惟深切庶可用力也。
问:子游问孝子曰: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熹谓犬马不能自食,待人而食者也,故蓄犬马者必有以养之,但不敬尔。然则养其亲而敬,有所不至,不几于以犬马视其亲乎?敬者尊敬而不敢忽忘之谓,非特恭谨而已也。人虽至愚,孰忍以犬马视其亲者?然不知几微之间,尊敬之心一有不至,则是所以视其亲者,实无以异于犬马而不自知也。圣人之言警乎人子,未有若是之切者。然诸家之说,多不出此。熹谓当以春秋所书归生许止之事观之,则所谓犬马之养,诚不为过。不然,设譬引喻不应如是之疎,而子游之贤,亦不待如此告戒之也。先生曰:此一段,恐当时之人习矣而不察,只以能养为孝。虽孔门学者,亦恐未免如此。故夫子警切以告之,使之反诸心也。苟推测至此,孝敬之心一不存焉,即陷于犬马之养矣。孟子又有养口体养志之说,似亦说破学者之未察处,皆所以警乎人子者也。若谓以春秋所书之事观之,则所谓犬马之养,诚不为过,恐不须如此说归生许止。各是发明一例也。
问:子曰吾与回言终日不违如愚,退而省其私,亦足以发。回也不愚。熹窃谓亦足以发,是颜子闻言悟理,心契神受之时,夫子察焉,而于心有感发也。子夏礼后之问夫子,以为起予,亦是类也。但子夏所发在言语之间,而颜子所发乃其所自得处,有以黙相契合不待言而喻也。然非圣人有所未知,必待颜子而后发,如言非助我者。岂圣人待门弟子答问之助耶?先生曰:亦足以发。前说似近之,恐与起予不类。深玩之可见非助我者,岂圣人待门弟子答问之助固是如此?然亦须知颜子黙晓圣人之言,便知亲切道体处,非枝叶之助也。他人则不能见如此精微矣。妄意如此,气象未知如何。
问:子张学干禄,夫子告以多闻多见阙疑殆,而谨言行其余,盖不博无以致约,故闻见以多为贵。然不阙其所未信未安,则言行之间意不诚矣。故以阙之为善,疑殆既阙而于言行有不谨焉,则非所谓无敢慢者,故以谨之为至,有节于内。若此尤悔何自而入乎?然此皆庸言庸行之所必然,非期以干禄也。而禄固已在其中矣。孟子曰经徳不回非以干禄也,与夫子之意一也。伊川先生亦曰,子张以仕为急,故夫子告之以此,使定其心而不为利禄动,恐亦是此意。未知是否?先生曰:古人干禄之意,非后世之干禄也。盖胸中有所蕴亦欲发泄而见诸事尔,此为己之学也。然求之有道,苟未见所以求之之道,一萌意焉则外驰矣。故夫子以多闻见而阙疑殆告之,又使之慎其余,则反求诸已也切矣。故孟子有经徳不回非以干禄之语,苟能深体得此,则驰外之心不作矣。伊川所谓才有缝罅便走了之意。
戊寅冬至前二日书云:承示问,皆圣贤之至言,某何足以知之。而吾元晦好学之笃如此,又安敢黙黙也。辄以昔所闻者各笺释于所问目之下,聊以塞命尔。他日若获款曲,须面质论难,又看合否。如何?大率须见洒然处,然后为得。虽说得,行未敢以为然也。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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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寒岡集) 정구(鄭逑)생년1543년(중종 38)몰년1620년(광해군 12)자도가(道可)호한강(寒岡), 사양병수(泗陽病叟)본관청주(淸州)시호문목(文穆)특기사항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
2026년 420주년 한강선생 남계서원 배
선조 | 39 | 1606 | 병오 | 萬曆 | 34 | 64 | 5월, 朔望通讀之規를 정하다. ○ 8월, 光州 牧使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9월, 玄風의 道東書院을 배알하고 金宏弼 墓에 제사하다. ○ 11월, 三嘉의 龍巖書院을 배알하고, 晉州로 가서 德川書院을 배알하고 曺植 墓에 제사 지내고, 山陰의 吳健 墓에 제사 지내고, 咸陽의 濫溪書院을 배알하고 鄭汝昌 墓에 제사를 지내다. ○ 治亂提要를 짓다.寒 |
한강연보 제1권
34년 우리나라 선조 39년 병오(1606) 선생 64세
○ 5월에 초하루와 보름에 모여 통독(通讀)하는 모임의 규약을 정하였다. - 선생은 본 고을의 자제들이 전란으로 인해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을 걱정한 끝에 과조(科條)를 만들어 공부를 권장하고 감독하였다. 회의(會儀)와 강법(講法)은 문집에 나와 있다. -
○ 8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9월에 현풍(玄風)으로 가서 도동서원 사우를 참배하고, 10월에 김 선생(金先生 김굉필(金宏弼))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11월에는 삼가(三嘉)에 가서 용암서원(龍巖書院) 사우를 참배하고 이어 진주(晉州)로 가서 덕산서원(德山書院) 사우를 참배한 뒤에 조 선생(曺先生 조식(曺植))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산음(山陰)을 지나가다가 오덕계(吳德溪)의 무덤에 제사 지냈으며,
함양(咸陽)에 이르러 남계서원(蘫溪書院) 사우를 참배하고 정 선생(鄭先生 정여창(鄭汝昌))의 무덤에 제사 지냈다. - 제문은 모두 문집에 나와 있다. -
○ 《치란제요(治亂提要)》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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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집 제12권 / 제문(祭文) /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의 무덤에 올린 제문
기자(箕子) 홍범(洪範) 도 사라져 / 箕疇邈矣
세상 도의 흐려지고 / 世道日昏
문장만 숭상하는데 / 文詞是尙
도 연원 뉘 탐색했나 / 孰泝淵源
거룩할사 우리 선생 / 於惟先生
그리고 우리 한훤당 / 與我寒暄
주회암(朱晦庵) 장남헌(張南軒)처럼 / 志同道合
뜻이 같고 도 맞으니 / 晦菴南軒
우리 후생 도 듣는 게 / 後死有聞
과연 누구 은혜인고 / 伊誰之恩
이 나라 천년만년 / 東土百代
감히 잊지 못할레라 / 永不敢諼
못난 이 몸 소생은 / 逑也小生
선생 교훈 받았는데 / 早服格言
늙었어도 우매하여 / 老猶頑愚
경지 아직 못 보았네 / 莫窺其藩
산소 찾아 참배하니 / 瞻拜封塋
넋이 마치 계시는 듯 / 精爽如存
삼가 제물 올리어 / 用將一誠
정성을 표합니다 / 敬代蘋蘩
[주-D001] 일두(一蠹) …… 제문 : 작자가 64세 때인 1606년(선조39) 11월, 문하생 몇 사람을 대동하고 향천서원(香川書院)을 찾아가 사당을 배알하고 그 길로 회계(會稽)로 가서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무덤에 제사를 지낸 뒤에 또 진주(晉州)로 가서 남명 조식(曺植)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 덕산서원(德山書院)의 사당을 배알하였으며, 용유담(龍遊潭)을 거쳐 천령(天嶺) 쪽으로 가서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사당을 배알하고 또 일두 정여창(鄭汝昌)의 무덤을 배알하고 돌아왔다. 본 제문을 위시하여 다음 두 사람의 무덤에 올린 제문은 다 이때 지은 것이다. 《寒岡先生年譜 卷2 行狀》
ⓒ 한국고전번역원 | 송기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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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 중종 13년 무인 > 11월 22일 > 최종정보
중종 13년 무인(1518) 11월 22일(무오)
13-11-22[04] 북경에서 구해 온 《어맹혹문》ㆍ《가례의절》ㆍ《전도수언》 등을 김안국이 상진하다
공조 판서 김안국이 아뢰기를,
“신이 북경(北京)에 이르러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두시고 대부(大夫)나 선비들도 향방을 알고 있으므로 염락(濂洛) 제유(諸儒)들의 전서(全書) 및 다른 격언(格言)이나 지론(至論)을 얻어 강습에 도움이 되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경에 오래 머물지 않아서 널리 조사하여 구하지 못하고 얻은 것만 상진(上進)합니다.
《어맹혹문(語孟或問)》은 주자(朱子)가 지은 것으로, 《용학혹문(庸學或問)》과 동시에 편찬한 것인데, 《용학혹문》은 이미 우리 나라에 들어왔으나 이 책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사왔으니, 모름지기 널리 인출(印出)하여 홍문관에도 두고 사대부(士大夫)에게도 나누어 주면 사람들이 《논어(論語)》ㆍ《맹자(孟子)》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례의절(家禮儀節)》은 명나라 대유(大儒) 구준(丘濬)이 산정(刪定)한 것입니다. 문의(文義)가 빠지고 소략한 것을 보완하여 구비하였으니 곧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우익(羽翼)인데, 또한 인쇄 반포하여 사람들이 강론하여 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전도수언(傳道粹言)》은 곧 두 정 선생(程先生)이 말한 바를 편집한 책입니다. 그리고
《장자어록(張子語錄)》ㆍ
《경학이굴(經學理窟)》ㆍ
《연평문답(延平問答)》ㆍ
《호자지언(胡子知言)》 등은 다 염락(濂洛)의 제현(諸賢)들이 지은 것인데, 다 성학(聖學)에 요절(要切)하므로 감히 상진합니다.
《고표정수(古表精粹)》는 곧 고금 사람이 지은 표(表)를 유선(類選)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대국을 섬기는 나라인데, 문신 및 유사(儒士) 등이 다 표문(表文)을 익히지 않습니다. 전일 대신이 건의하여 표전(表箋)의 글을 인출하여 반포하기를 청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있는 것은 《송원파방(宋元播芳)》뿐이요 그 외에 본받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양 북경에 가는 사신 행차에 부탁하여 사서 오도록 하였으나, 통사(通事) 등이 마음을 다하여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마음을 두고 널리 구하여 이 책을 구해 왔습니다. 청컨대 많이 인출해서 널리 반포하여 문사(文士)로 하여금 고열(考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아름답게 여기고 술을 하사하게 하였다.
[주-D001] 염락(濂洛) 제유(諸儒) : 염(濂)은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惇頤), 낙(洛)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형제를 말하는 것이나,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 등 이학자(理學者)를 통틀어 염락 제유 또는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자라고 한다.[주-D002] 두 정 선생(程先生) :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정섭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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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연보 제1권 연보(年譜) 1
33년 (갑인) 54세 2월, 동궁(東宮)의 상량문을 짓다. ○ 4월,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 5월, 형조 참의에 임명되다. ○ 6월, 병조 참의로 옮기다. ○ 7월, 주신재(周愼齋 주세붕)의 죽음에 곡하다. 만사(挽詞)가 있다. 노이재(盧伊齋 노수신(盧守愼))에게 편지를 보내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주해한 것을 논하다. 이재가 이때에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으면서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다. 선생이 편지로 이것을 논하였는데, 개략을 들면, “〈숙흥야매잠〉은 옛날에 나 역시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래도 조리의 치밀함이나 공부의 과정에 엄격함이 이같이 지극한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해한 것을 보니 장(章)을 나누어 구절을 분석하였고, 정대하고 숭고한 이론으로 가장 골자가 되어 있는 곳을 마음껏 파헤쳐서 밝고 넓은 경지에 홀로 도달하였으니 탄복하여 마지않습니다. 혹 그중 몇 군데 해석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기에 삼가 집어내어 별지에 적어 보내니,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쓰다.
○跋延平答問。淸州新刻答問。牧使李公楨以書來請。故跋其後。
○ 《연평답문(延平答問)》에 발(跋)을 쓰다. 청주에서 그 답문을 새로 판에 새기고 목사 이정(李楨)이 편지를 보내어 청하므로 그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9월, 체차되어 상호군에 임명되다. ○ 10월, 사정전(思政殿)에 〈대보잠(大寶箴)〉을 써 올리다. ○ 11월, 상사(上舍) 홍인우(洪仁祐)의 죽음에 곡하다. 선생이 어느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 사람은 학문이 있고 문장이 있었는데 갑자기 죽게 되어 매양 깊이 탄식하며 아까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다. ○ 12월,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니, 상께서 말을 하사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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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문집 제7권 / 경연강의(經筵講義) / 서명(西銘) 고증(考證) 강의(講義)
○ 제목에 대한 주해 : 정완(訂頑)과 폄우(砭愚)
‘정(訂)’은 평의(平議)한다는 뜻입니다. 평(平)은 거성(去聲)으로 발음한다. 평평하지 못한 것을 평평하게 하는 것을 ‘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의논을 결정하고 상량(商量)하여 처리함이 마땅한 바를 얻은 것을 ‘평의’라고 한다. 또한 그릇되고 어긋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완(頑)’이라 하는 것은 어질지 않음을 말합니다. 어질지 않은 사람은 사욕에 덮이고 막혀서 남과 나를 통하여 측은한 마음을 미룰 줄 모르고, 마음이 완고하기가 돌과 같으므로 완이라고 한 것입니다. 대체로 장횡거(張橫渠)의 이 명(銘)은 나와 천지 만물의 이치가 본래 하나인 까닭을 반복하여 미루어 밝힌 것입니다. 인(仁)의 체(體)를 형상화해서 유아(有我)의 사심(私心)을 깨뜨리고 무아(無我)의 공심(公心)을 크게 열어 주어, 그 완고하기가 돌과 같은 마음으로 하여금 융화(融化)하고 환히 통하게 하여 남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게 해서 조그마한 사심도 그 사이에 용납함이 없게 하였으니, 천지 만물이 한 집안이 되고 온 나라가 한 사람처럼 되어서 남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과 같이 간절히 여기면 인도(仁道)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정완(訂頑)이라 이름하였으니, 그 완고함을 고쳐서 인(仁)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어리석은 병통은 오만함을 기르고 그른 것을 이룩하게 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횡거의 이 명은 터럭같이 작은 잘못도 극언하여 엄중히 고치게 함이 마치 침(針)으로 병을 다스려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폄우(砭愚)라 한 것입니다. 폄(砭)의 발음은 비(非)와 염(廉)의 반절(反切)이니, 일설에는 상성(上聲)이라고 한다. 돌침을 놓아 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완ㆍ폄우 두 말이 다 매우 은유적이고 심오하여 학자들이 어지럽게 변론하고 힐문할 폐단이 있으므로, 정자(程子)가 논쟁의 단서가 될 것을 염려하여 정완을 서명(西銘)이라 고치고, 폄우는 동명(東銘)이라 하였다 합니다.
○ 희(熹)가 이미 이 해설을 하였다.[熹旣爲此解]
정자가 양구산에게 회답한 편지와 주자(朱子)의 《연평문답(延平問答)》의 여러 설(說)은, 〈서명〉의 취지와 인의(仁義)의 도리를 드러내어 밝힌 것이 지극히 정밀하나, 글이 많아서 번거로울 듯해 감히 다 진강(進講)하지 못하니, 조용한 시간에 살펴보시고 정신을 쏟아 음미하고 탐색하신다면, 마땅히 크게 유익됨이 있을 것입니다.
熹旣爲此解下
程子答龜山書及朱子,延平問答諸說。發明西銘之旨。仁義之理。至爲精密。文多恐煩。未敢悉以進講。幸於淸燕之暇。睿鑑垂照。沈潛玩索。當有弘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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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집 별집 제9권 / 부록(附錄) / 유사(遺事) 36조(條) [송시열(宋時烈)]
동춘당집 별집 제9권 / 부록(附錄) /또 23조 [황세정(黃世楨)]
선생은 때때로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근엄한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하였다.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앉기도 하였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단지 옷과 이불을 거두는 소리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잠시 뒤에는 다시 취침하였다. 하루는 내가 모시고 잠을 자다가 가만히 엿보니, 선생이 노복을 불러 불을 밝히게 하고는 《연평문답(延平問答)》 중에 희로애락이 드러나기 이전의 기상을 논한 것을 가져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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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4권 / 시(詩)○칠언 율시(七言律詩)
소 강절의 〈수미음〉에 차운하다 기미년(1679, 숙종5) 8월 9일〔次康節首尾吟韻 己未八月初九日〕
백스무 번째〔第百二十〕
우옹은 시 읊기를 좋아하진 않으나 / 尤翁非是愛吟詩
《연평문답》을 깊이 음미할 때 시를 읊네 / 深味延平問答時
도맥이 전해지는 건 비록 유래 있으나 / 道脈流傳雖有自
하늘이 낳은 상지를 다시 뉘 바꿀 것인가 / 天生上智更誰移
스승에게 나아가서 부지런히 물었으며 / 而趨丈席勤咨叩
더구나 경연 나아가 들은 것을 펼쳤네 / 況赴經筵聽發揮
모아서 편찬한 건 깊은 뜻이 있나니 / 收拾編摩深意在
우옹은 시 읊기를 좋아하진 않는다네 / 尤翁非是愛吟詩
연평문답(延平問答) : 주희가 스승 이동(李侗)과 문답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이동은 자가 원중(愿仲)이고 호는 연평(延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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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24권 / 서(書) / 권달선에게 답함 임진년(1832, 순조32) 10월 〔答權達善 壬辰十月〕
찾으신 《연평문답(延平問答)》을 삼가 이번에 보내드립니다. 인본(印本)은 바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수필(手筆)이니 진실로 이미 귀하게 여길 만한데, 겉의 제목은 또 화양부자(華陽夫子 송시열(宋時烈))의 심획(心畫)입니다. 이는 바로 이른바 ‘두 가지 아름다움이 반드시 합쳐진다.’라는 것으로서 세상에 드문 진귀한 보배가 됩니다. 항상 책상 위에 소중히 보관하여 감히 문밖으로 내돌리지 않았는데, 우리 성겸(聖兼)이기 때문에 아끼지 않고 빌려 주어 보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뜻을 잘 알아서 전일하고 정밀하게 완미하고 연구하여 이 어른의 ‘빙호추월(氷壺秋月)처럼 한 점의 티가 없이 맑고 깨끗한’ 흉금을 깨닫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어른의 평생의 공부는 오로지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리(天理)를 체인함’과 ‘온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의 기상(氣象)을 징험함’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큰 근본을 세우는 것이니 주자(朱子)의 문정(門庭)을 열어 놓을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후세에는 그저 말과 글을 가지고 인물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 어른이 공자(孔子)와 안자(顔子)의 심학(心學)의 정맥(正脈)을 이어받았음을 아는 자가 적습니다. 또 주 선생(朱先生)이 육경(六經)을 손질하여 만리(萬理)를 정돈한 것이 모두 이 어른에서 발단하였으니 참으로 주자의 스승입니다. 이 책이 사문(斯文)에 공을 세운 것이 어찌 쓸데없는 췌언(贅言)을 저술한 것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이러한 뜻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答權達善 壬辰十月
俯索延平問答。謹玆奉呈。印本卽退溪先生手筆。固已可貴。而題面又是華陽夫子心畫。卽所謂兩美必合。而爲希世之珍也。常尊閣丌上。不敢出戶外矣。以吾聖兼也。故不恡借示。幸諦此意。專精玩繹。認取斯翁冰壺秋月。瑩澈無瑕底襟度。如何如何。斯翁平生活計。專在於默坐澄心。體認天理。終日危坐。驗喜怒哀樂未發前氣象。是爲立大本。所以開朱子門庭也。後世徒以言語文字。軒輊人物。故知斯翁之得孔顔心學正脈者尠矣。且朱先生梳洗六經。整頓萬理。皆發端於斯翁。眞朱子之師也。其有功於斯文者。詎可比於無用贅言之著述哉。可能有會否。
[주-D001] 연평문답(延平問答) : 송(宋)나라 학자 주희(朱熹)가 스승 이동(李侗)과 유가(儒家) 경전(經典)의 내용에 관하여 문답한 것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이동의 자는 원중(愿中), 호는 연평(延平)으로, 검남(劍南) 사람이다. 정호(程顥)ㆍ정이(程頤)의 학문이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從彦)을 거쳐 이동에게 전수되었으므로 양시ㆍ나종언과 함께 ‘검남 삼선생(劍南三先生)’으로 불렸으며, 정호ㆍ정이의 학문이 주희에게 이어지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주-D002] 빙호추월(氷壺秋月)처럼 …… 깨끗한 : 송(宋)나라의 등적(鄧迪)이 이동(李侗)의 사람됨을 주송(朱松)에게 평하여 말하기를, “원중(愿中)은 마치 빙호추월과 같아서 한 점의 티가 없이 맑고 깨끗하니, 우리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愿中如氷壺秋月, 瑩徹無瑕, 非吾曹所及.]”라고 하였다. 《宋史 卷428 李侗列傳》 주송은 주희(朱熹)의 부친이고, 원중은 이동의 자이다.[주-D003] 묵묵히 …… 체인함 : 이 말은 본래 이동(李侗)이 유평(劉玶)에게 보낸 편지에 보이는 말로, 이르기를, “학문의 도는 말을 많이 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다만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리를 체인해야 한다.[學問之道, 不在於多言. 但黙坐澄心, 體認天理.]”라고 하였다. 《延平問答》[주-D004] 온종일 …… 징험함 : 이 말은 본래 주희(朱熹)가 지은 이동(李侗)의 행장에 보이는 말이다. 《晦菴集 卷97 延平先生李公行狀》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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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집(正菴集) 이현익(李顯益)생년1678년(숙종 4)몰년1717년(숙종 43)자중겸(仲謙)호천산재(天山齋), 낙오헌(樂吾軒), 정암(正菴)본관전주(全州)특기사항김창협(金昌協),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박필호(朴弼琥) 등과 교유
正菴集卷之十五 / 雜著 / 延平問答箚語
延平宗旨。上蔡要訣。欲通融作一法門。
延平之學。不必取靜中看得未發氣像一事。只取朝晝間涵養本原。日用處無所滯碍意思。
上蔡之學。不必取擺脫得開見後。須放開學者與天爲一。以天自處等語意。只取其病痛處推求根源斬斷去。擺脫名利關十年。色欲斷置二十年。好硯把與人等處。
上蔡放開。似與延平灑落同。然延平灑落。只是淸通和樂之意。只是無粘累滯礙之謂。則與上蔡只令放開者。不同。
延平灑落。自涵養中來。程子涵養。便到淸明高遠。卽此意思。
延平體用工夫。非有欠。但克治意思。上蔡說中較多。延平靜中工夫。自龜山門來。日用工夫。自上蔡門來。盖兼二門旨訣。
上蔡常提得惺惺法。以喚醒本體。日用處。以克己二字。打疊將去。其訣極簡嚴。
學上蔡遏人欲一段事。極有力。
延平之學。以涵養爲主。輔以明理養氣。
靜中。看得未發不偏不倚底氣像。常在心目之間。至日用處。亦以此意思。該攝照管去。使體用顯微。融串爲一。無所罅隙間斷。以此謂之灑落。
卽此灑落。亦有工夫在。靜則默澄體認。動則推求病痛根源。漸漸消釋。
看理。亦必求灑然處。
看理。雖以深潛縝密爲主。亦必以心慮澄然時。一綽看得之者。爲貴。
以心體虗明。爲本於夜氣。夜氣之生。爲由於朝晝涵養。此所謂心與氣合。
看理。必求理與心一。養氣。必求心與氣合。心也理也氣也。渾融爲一處。謂之灑落。
延平灑落。本於濂溪灑落。而濂溪灑落。以無欲之故。則灑落。只是無欲底氣像。
灑落在乎靜。則只是虛明氣像。在乎動。則只是通和氣像。濂溪之靜虛動直。是已。
朱子曰。持敬費力。不如無欲撇脫。盖無欲比持敬工夫更嶄嶻。非濂溪天品甚高。未易能此。若延平則較有依据在。然延平言涵養處。欠說敬字。言日用工夫。亦欠說省察審幾等語。靜中看得未發氣像。使常在心目間者。似或涉於推測應接處。直求見其灑然融釋者。亦少密察意思。所以朱子只說涵養省察。只說敬者也。
濂溪,延平氣像道理。若相似。其啓出程,朱也。亦相似。語類問延平未發時觀氣像。此與楊氏體驗異同。何如。曰。體驗字。有箇思量了。便是已發。若觀時任着意看便是已發。此是以不觀觀之。朱子盖欲輕輕看觀字。
問。行狀若與伊川說。若不相似。朱子曰。這處是舊日下得語太重。盖朱子以行狀中。終日危坐。以驗夫喜怒哀樂未發前氣像如何。而求所謂中者。爲說得太過。然則延平之觀。似與龜山之求中。有少異。
雖曰行狀下得語太重。而亦曰以伊川之語格之。其下工夫處。亦有些子偏。則於延平分上。不至生病。而學此則易生病矣。是以朱子又曰。若一向如此。又似坐禪入定。
延平窘迫窒塞處。每以古人貧甚極難堪處者自體。此恐近於排遣方法。與顔樂意思有異。
曰。灑落自得。其地位甚高。持守久漸漸融釋。不見制之於外。持敬之心。理與心一。庶幾灑落。此則以灑落爲非學者所能。而曰。學者之病。所患在於未有灑然氷解凍釋處。此則以灑落爲學者事。此當如何看。恐先生之意以爲灑落。若言其全體。則非學者所能爲。而若於日用間。隨其涵養功到。有不滯礙意思。則是亦爲灑落也云耳。
曰。仁者。只是有知覺了了之體段。則與上蔡說同。但語類曰。延平曰。孟子言仁。人心也。不是將心訓仁字如此。則與上蔡不同。但詳先生說以仁爲天理統體。心爲其發見處。則其謂不是將心訓仁字。恐只是此意。未必以仁與心。爲有道器之辨。與上蔡說不同也。如何。
曰某在建安。竟不樂彼。自念所寓而安。方是道理。今乃如此。正好就此下工夫。看病痛在甚處。又曰。在此終不樂。若以爲隨寓而安之。卽於此臲
便不是。此微處。皆學者之大病云云。以此看先生在建安說。前後不同。而後說道理。似更穩當。盖先生不往建安。終是灑然處。然則先生何不審於初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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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菴集卷之七 / 題跋 / 延平先生要語跋
先生之學。盖以靜中體認未發氣像爲本。日用處着力推究病痛根源爲要。又以灑落二字作一境界。凡存心養性。竆理講學。必要應事接物而後已。其䂓模可謂直截簡要。然其所謂體認未發氣像。未免有求覔之意。灑落之云。亦似脫略下學之功。豈如程,朱子一敬字徹上徹下之法門乎。但由是而入。專精於靜中。及日用工夫。不落一偏。循序漸進。以至灑落地位則卽此只是一敬字。而程朱子法門。不外是矣。如此用功。豈不善哉。如顯益者。平日全沒涵養一段工夫。眞先生所謂只是說者。於此實有願學之心。乃就其書。抄節其要語。以爲常目在之之資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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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집(鼓山集) 임헌회(任憲晦)생년1811년(순조 11)몰년1876년(고종 13)자명로(明老)호고산(鼓山), 전재(全齋), 희양(希陽)본관풍천(豐川)초명헌귀(憲龜)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홍직필(洪直弼)의 문인. 조병덕(趙秉悳), 김평묵(金平默) 등과 교유
鼓山先生文集卷之九 / 題跋 / 延平答問要語跋 壬子
철종 | 3 | 1852 | 임자 | 咸豐 | 2 | 42 | 7월, 홍직필을 곡하다. ○ 〈延平問答要語〉를 짓다. |
朱子曰。李先生。不著書。不作文。頹然若一田夫野老。先生亦自謂語言旣拙。又無文采發脫一出。是以不知者。或以著述少之。然而先生之學。平淡質愨。敦本務實。以默坐澄心。體認天理。爲一副當成法。眞君子儒爲己之學。其所以上接河洛。下啓考亭。初不在於言也明矣。噫。孔門三千。惟顔,曾獨得其宗。而亦曰曰唯而已。如愚而已。曷嘗䂓䂓於文字之末哉。竊病世之學者。綴緝言語。文飾道德。觀其外。非不燁然可喜。 其中則已柺如也。余亦讀書五十年。迄未聞道者。正坐於此。近日始覺此意思。參前倚衡。要於朴實頭用功。廼取先生書卒業。又錄其要語。以爲朝夕常目之計。苟於靜中。看得喜怒哀樂未發氣象。使胷中自有灑然處。一如先生當日之敎。則何獨及門親炙。然後爲先生之徒也耶。冰壺秋月。萬古常新。仰之鑽之。斃而後已云。
[주-D001] 柺 : 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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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1913년 부보록(裒寶錄)
郡守金宇弘
春秋八卷
內賜
論語七卷
孟子七卷
中庸一卷
大學一卷
典籍張範
春秋七卷
忠淸監司盧禛
儀節四卷
感興詩一卷
延平問答二卷
幼學權汝謙
8)
擊壤集四卷
院備
周易十四卷
紫陽集十卷
大學講義二件
通鑑前紀四卷
論孟或問七卷
小學日記三卷
縣監金淸
周易十四卷
郡守李長榮
小學二件
監司朴大立
大學一卷
中庸一卷
論語七卷
監司盧禛
性理字義一卷
幼學李慶
上蔡語錄一卷
9)
察訪李榮春
禮部韻一卷
內賜
朱子大全九十五卷
朱子語類七十五卷
國朝儒先錄四卷
精忠錄三卷
諺解小學四卷
院備
家禮 二卷
讀書錄一卷
樊川集四卷
唐音九卷
兩山墨談五卷
大學補遺一卷
朱子實紀五卷
朱子書節要十卷
夙興夜寐箴一卷
二程粹言二卷
翼傳三卷
10)
秋江集五卷
朱子行狀一部
童蒙須知一卷
大廣益會三卷
皇明名臣言行錄四卷
晦齋集四卷
續蒙求四卷
選詩十卷
歷代要錄一部
儀禮圖十卷
柳州集二十一卷
太白集十五卷
西山集十七卷
三蘇文五卷
東文選六十八卷
陸放翁二卷
幼學林希秀
比干祿一卷
已上千帙萬曆丁酉爲倭奴所▣
院備 萬曆三十二年甲辰孟夏
11)
通鑑十四卷 都事朴汝樑
校中移送 萬曆乙巳姜應▣林振民有司時
論語七卷
孟子七卷
中庸一卷
大學一卷 小學四卷
幼學盧脊
晦齋先生年譜
左議政奇自獻萬曆丙午
德陽遺藁一卷
院備
詩傳十卷
栗峯察訪姜繗萬曆辛亥
或問大學二卷
幼學姜渭明
心經二卷 萬曆甲寅
院備 ▣…▣造紙▣…▣ 各邑送于全羅道卽來 監司李慶▣ 有司盧佾▣
綱目七十六卷
朱子書節要十卷
大學衍義十二卷
12)
孟子四卷
唐音四卷
近思錄四卷 已上萬曆丁巳
韻會十三卷 院備紙地頼院長姜校理繗印藏
三經釋義一卷
四書釋義一卷
孟子或問二卷
禮部韻一卷
南冥集四卷 已上天啓辛酉(1621,광해군13)
광해군 | 13 | 1621 | 신유 | 天啓 | 1 | 53 | 〈白翎誌後序〉를 지어 李任重에게 보내다. |
文獻公實紀 刊行 癸亥(1623,인조1)春焚舊爲新
광해군 | 9 | 1617 | 정사 | 萬曆 | 45 | 75 | 7월, 東萊 溫泉에서 목욕을 하다. ○ 泗陽精舍를 짓고 泗陽病叟로 自號하다. ○ 五服沿革圖를 완성하다. ○ 一蠹鄭先生實記를 짓다.寒 |
高麗史七十一卷 崇禎辛巳姜有徵有司時
인조 | 19 | 1641 | 신사 | 崇禎 | 14 | 73 | 2월, 〈病中吟〉을 짓다. ○ 6월 21일, 동생 집에서 졸하다. ○ 8월, 상이 禮官을 보내어 致祭하다.桐 |
家禮二卷 小學諺解四卷 上仝
禮記二十卷 崇禎戊子梁梈有司時備上
監司李㬅 己丑
朱文酌海八卷
書傳大文二卷
院備
杜詩諺解癸卯梁世濟有司時備上
朱子大全六十五卷 甲子梁天翼(1638~1711) 李慶▣(有)司時備上
숙종 | 10 | 1684 | 갑자 | 康熙 | 23 | - | 關北 士林이 涪溪에 세운 서원에 享祀되다. |
心經二卷
13)
德溪集四卷
奉事姜渭明
場岩員畓十斗落只初納溏洲甲戌年
인조 | 12 | 1634 | 갑술 | 崇禎 | 7 | - | 灆溪書院으로 祠宇를 옮겨 제향하다. |
介庵先生移安此院後推納本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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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宇弘 1564~1568
金宇弘 1522 1590 義城 勉夫 伊溪, 知足堂
甲子(1564,명종19)授咸安郡守->咸陽郡守
최흥벽(崔興璧) 1739년(영조 15)~1812년(순조 12)
蠹窩先生文集卷之十三 / 行狀 / 中直大夫咸陽郡守濯淸軒先生郭公行錄 乙卯
郭趪 1530 1569 玄風 景靜 濯淸軒
公諱趪。字景靜。姓郭氏。濯淸軒其號也。系出玄風。
戊辰(1568,선조1)。自禮安移陞咸陽郡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