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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여울 소리ㆍ이종구(2023.7.21)
분강에 구여울 소리 멎은지 몇해 이던가
부초같은 기려 인생 무상히도 흘러 갔네
낙강은 통소 여울목 넘어 부포로 가는데
갈곳 잃은 나그네 신세 객향살이 애닳다
농암바위 구당나무 이별한지 어언 반세기
청산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다 가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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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 구여울에 깃든 추억과 민담은 차고 넘친다. 구여울은 사계절 모두 깊은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전설처럼 만들어 냈다. 잃어버린 구여울의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얽힌 정취를 그리워하며 소회를 피력하는 이내 가슴은 실로 아리고 서글프다.
한겨울의 분강은 한 폭의 수묵화다. 그 수묵화 속에서 분강촌 사람들은 분강과 더불어 도타운 흥취를 만들어 냈다. 양수장 앞 통소 위에서 잘 익은 얼음판을 망치와 쇠창으로 네모지게 도려낸 다음 어름배 가장자리를 따라 모래를 뿌린 후 이를 밟고 아카시아 장대로 만든 긴 노를 저어 양수장 위나 아래로 몰고 가면 강태공의 풍류가 가히 농암 할배의 강호지락에 버금갈만 했다. 우리 농암 할배도 이렇게까지 어름배로 강호를 헤집고 다니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때는 물살이 세어서 어름배가 점점 구여울 쪽으로 떠내려가다가 급기야는 여울목을 들이박아 박살이 나기도 했다. 그러면 분천방구 옆으로 몰려가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나이론 윗도리와 추리닝 홑바지를 태우다시피 하며 말리곤 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봄비가 내리는 우수가 가까워지면 얼어붙은 강물이 점차 녹으면서 분강이 넘쳐나며 구여울목에서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슬픈 곡소리 같은 구여울 소리가 마을을 잔뜩 동요시키는 정월 대보름날에는 새당나무 아래 당집에 어른들이 모여서 서낭제를 올리며 한 해의 무사태평을 기복했다. 이러한 당집 제사는 동네의 평안을 앙망하는 부적 역할을 하는 한편 사나운 구여울 소리의 기를 꺾는 제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실 안의 성황당과 새당나무 그리고 앞들의 구당나무는 동네의 안녕과 풍요를 굽어 살피는 수호신이었다. 어른들은 구여울 소리가 드세지면 마을에 궂은 일이 생긴다며 수근거렸다.
1964년 갑진년 5월 하순경 분강 언덕에는 봄빛이 무성하고 구여울로는 은어가 춤을 추며 올라오던 어느 일요일 한낮이었다. 전날밤 구여울 소리가 유난히도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가 싶더니 이튼날 아니나 다를까 큰 변고가 터지고 말았다. 안동에 있던 36사단 장병들이 도산서원 주변에 대민지원을 나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분천동 고수빠(곶이바위) 바로 위 급경사진 모랭이 고바이에서 기어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20여 미터 낭떠러지 아래로 강중백이 쳐서 트럭 뒤에 타고 있던 많은 군인들과 함께 동승했던 섬마에 사는 일부 민간인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분강촌 윗마에 살았던 종친 승철이 할배(사고 당시 도산국민학교 1학년 8세, 현 68세)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본다. "구당나무 옆에 있는 밭에서 아부지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군대 트럭이 마을 사이로 난 신작로를 지나가면서 군대 노래를 크게 불러대는 왁자지껄한 군가 소리가 들려왔어. 조용한 농사철이라 동네에 큰 소리가 나면 다 들렸거든. 그런데 송티재로 올라가던 트럭이 어찌된 탓인지 고수빠 공굴 아래로 떨어지는 엄청난 큰 소리가 벼락치듯 들리는거야. 일하다가 말고 재봉이 움막집이 있던 실거랑 옆으로 정신없이 마구 뛰어 올라가는데 벌써 도랑으로 핏덩이가 섞인 핏물이 흥건히 흘러내려오는거야. 어른들이 아이라고 가지말라며 손을 저어 말렸지만 하도 궁금해서 어른들을 피해 재흠이네 집 뒤로 올라가는데 아이들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내빼다시피 뛰어 내려오고 있는거야. 올라가 보니 수몰 후 잠시 이건했던 바로 그 애일당 아래 공글 위 도로에 가마니를 짜개서 덮어 놓은 시신들이 즐비했어.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참상이었어. 트럭은 선돌 어른 논둑과 도랑 사이에 거꾸로 곤두박질해 있고 깔린 사람들은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부내 사람들은 온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마니를 찾느라 야단이고 사고 현장에 어른들이 마구 몰려와서 논두렁에 가마니를 펴놓고 그 위에 시신들을 올려놓기도 하고... 또 여러 개의 사다리에 가마니를 싸매서 그 위에 시신들을 실어 공글 오른편 산비탈로 억지로 올라가서 도로 위에 줄지어 펴놓고... 상황이 심각했어...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었지..."
참으로 안타까운 사고였다. 사고 전날 밤 유난히도 곡읍哭泣을 해대던 구여울의 울음 소리가 장차 일어날 사고의 전조를 알려준 복선이었는지는 모르나 여하튼 동네 어른들 또한 여느 때와는 달랐던 구여울 소리를 변고의 징조로 여기는데는 이견을 달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고 한다. 담모 할매와 원촌 할매는 "그게 다 구여울 소리가 대성통곡하며 울려 퍼졌기 때문"이라며 마치 천탄을 원망하듯 일갈하셨다. 또 녹동 할매는 "구여울의 큰 울음 소리와 함께 양수장 강변 잔디밭에 염소를 많이 매겨서 오는 해악"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분분한 소문으로 동네가 어수선할 때면 어김없이 당제는 기본이고 서낭대를 높이 든 건립패들이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지신을 달래는 "서낭대 놀이(지신밟기)"가 벌어지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마실의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는 본체인 구여울을 밤이면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였지만 낮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 몸이 되어 하루종일 철벅거리며 어른들의 얘기를 비웃기라도 하는 양 천년지기 친구를 외면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여울이 주는 풍요는 뭐니뭐니 해도 오뉴월 한 철에 풍성하게 넘쳐났다. 구여울이 빚어내는 시원한 풍경 속에 마치 수천마리의 은어떼가 여울목에서 다리를 놓듯이 수많은 은빛깔의 물보라가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여울에서 하늘로 일제히 튀어 오르는 하얗고도 영롱한 물방울이 공중에서 송송히 사라지는 아름다운 광경은 낭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런 호시절의 구여울은 아이들을 통소 강가에 주구장창 머물게 만들었으며 감자꾸지와 함께 입가심을 하기 위해 서리해온 수박과 참외가 물가에 수북이 쌓이곤 했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도 없었다. 구여울 옆에 편평하게 누워 있는 분천방구 앞에서 동네를 주름잡는 청년들이 예주륵 모여서 솥뚜껑을 걸어놓고는 김치전과 감자전을 쳐서 먹는 모습도 수타 눈에 띄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찌짐을 해서 먹고는 이윽고 서리해온 수박을 손날로 내리쳐서 되는대로 쪼갠 다음 마구 걸신 들린 듯이 속구배기를 파먹었다. 그리고는 고요한 정적을 벼개 삼아 하루종일 분강촌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피곤해진 심신으로 겨우 잠의 길목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구여울을 또 마구 깨워 재끼며 물속으로 뛰어들어가서 행악을 부렸다. 한밤 중에 창졸간에 뒷통수를 얻어맞은 구여울은 나 죽는다고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물살을 헤저으며 마구 몸태를 출렁거렸다. 다만 뒷동산에 높이 떠 있는 보름달만 이 광경을 정겨이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분강촌의 한여름은 언제나 수박과 참외로 풍성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수박걷이에 마구 동원됐다. 수박골을 따라서 인간 줄을 만들어 수박을 한통한통 건내주면 삼륜차에 짚을 깔고 오단육단 쌓아 올리는 모습은 가히 예술작품처럼 놀라울 뿐만 아니라 아구 또한 빈틈없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은 분강촌 영천이씨들을 아예 수박이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박에 관한 한 통달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는 차고 넘쳤다.
우리는 수박을 차에 싣다가 깨어지면 마치 맛사지를 하듯이 시원한 수박 세수를 하기도 했다. 정말 수박 하나만큼은 흥건한 동네였다. 얼굴에 온통 수박씨가 엉겨 붙어도 희희낙락하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버드나무에 앉아서 놀고 있는 물새들도 강가를 날아다니는 황새들도 희한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함께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또 구여울로 풍덩 뛰어 들어가서 이리저리 헤살질하면 천탄에서 놀고 있는 피래미와 수루메기들도 덩달아 좋아서 함께 설치고 날뛰는 흥에 겨운 장면들이 수두룩하게 일어났다. 오뉴월 한때 구여울의 밤은 휘영청한 달밤에 철벅거리는 동네 사람들로 인해 언제나 몸살을 앓을 지경이었다. 물레방간에서는 하얀 베적삼과 모시 저고리가 강가에 희멀겋게 나딩굴어진 가운데 떼 지어 멱을 감는 아낙네들의 왁자지껄하고도 자지러지는 소리가 양수장 아래 구여울과 신작로 안쪽에 있는 마실까지 파다하게 들려왔다.
한여름밤에 낙강에 부서지는 달빛도 한정없이 고왔다. 고요한 강물에 황금빛으로 나부끼는 보름달의 운치는 실로 가경佳景이었다. "농암의 어부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곡절을 유추할 수 있는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분강에 달빛이 황금빛으로 부서지니 낙강이 금방 취해 출렁이자 통소에서 놀던 구여울이 마구 넘쳐나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부포와 다래로 춤을 추며 흘러 갔다. 물새와 황새들은 철벅거리는 강물 소리에 놀라 천방둑과 실거랑 언저리에 있는 갈대 숲으로 황급히 날아갔다. 영지산 뒷동산에 훤히 떠 있는 보름달만 빙그레 웃으며 하늘 높이서 이 황홀한 광경을 지켜보며 아름다운 전원일기를 썼다. 강호에서나 볼 수 있는 서정적이고도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곡식과 열매가 익어가는 가을이 오면 구여울도 점점 여물어가며 작고도 긴 신음소리를 심심찮게 토해내곤 했다. 가늘고도 길게 이어지는 야심한 가을밤의 구여울 소리는 흡사 귀신들이 곡을 하는 소리 같아서 한껏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끊어질듯하면서도 긴 여운을 내며 한동안 울어대는 구여울 소리는 마치 풍요를 빼앗긴 뒤 떠나는 한에 맺힌 여자의 비탄처럼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오뉴월 성하 때 내는 소리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모양새였다.
겨울의 구여울 소리는 얼어붙은 통소 밑을 간신히 빠져나온 강물이 발악하는 앙칼지고도 매몰찬 소리였다. 숨이 가뻐서인지 마디마디 내지르는 단말마 같은 숨소리가 이어졌다 끊어졌다가 반복하기를 달과 별이 빛을 잃어가는 새벽 인시까지 들리기도 했다. 이럴 때면 마실 사람들이 고수빠(곶이바위)에 있는 곳집을 찾아가는 발길이 잦아지면서 윗대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초상이 일어나곤 했다.
구여울 소리는 이렇듯 입향조 이래로 마을과 애환을 함께 하며 장구한 세월을 동고동락해 왔다. 선대와 후대들이 분강에서 느끼는 감회는 달랐으리라. 하지만 목가적이고 강호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그 운치와 정취는 마냥 같았으리라. 이는 뒷동산에 천년지기 훤한 보름달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그대로 있었을 테고 묵화 같은 돛단배 형상을 한 분강이 태초부터 끊임없이 흘렀을 테고 농암바위와 자리바위와 감퇴바위와 분천바위가 천 년 동안 매냥 그 자리에 있었을 테고 애일당과 강각과 병암이 시대를 넘나들며 시가를 읊는 사람들의 요람이 되었을 테고 태곳적부터 분강에서 멀어져 가는 구여울 소리가 마치 대동강에서 이별하는 "송인送人"처럼 사시사철 분강촌 사람들에게 구슬프게 울려 퍼졌을 테니까...
그렇다면 수몰 전 한 시대를 분강촌에서 살다가 흩어진 마실 족친들이 기억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만경창파 속으로 사라진 구여울에 깃든 추억담을 찾아서 떠나 보기로 한다.
1970년대초 부내 윗마(신작로 윗쪽에 있는 마을)에 살았던 덕개 할매 자제인 강후 할배(73)가 기억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은 이렇다. 강후 할배는 수몰 전 부내에 살 때 "4H 활동"을 무던히 했던 계몽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실제 양수장 아래 쑤(수풀 수ㆍ소나무 숲)에서 우리들에게 노래와 글을 가르쳐 주던 추억도 고스란히 생각난다. 그리고 부내 실거랑 다리 아래에 만든 배구장에서 청고개 마을 청년들과 부내 동네 청년들 간에 배구 시합을 주도하던 모습도 가물거리긴 하지만 또렷한 모습으로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뉴월이면 구여울에서 은어낚시를 하던 희옥 선생(우릉골 할배)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네. 하얀 물보라 위로 반짝이는 은어를 낚아올리던 전경이 참 잘 어울렸던 어른이셨지. 그리고 구여울 옆에 있는 감퇴바위 아래에서 한여름 밤에 동네 친구들과 지짐을 붙여 먹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네."
조각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랫마(신작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 비밑 옆에 살았던 새벽 할매 손자인 재필(74)이 아재가 추억하는 구여울의 기억은 더욱 생생하다. 아마 아랫마 사람들이 위치상으로 구여울과 더욱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구여울과 밀양대(민왕대)에 가서 참 많이도 놀았지. 동네에 사는 또래 친구들과 한여름이면 홀딱 벗고 구여울에 들어가서 나올 줄 모르고 마구 놀았어. 그러다가 벗은 채로 섬마로 건너가서 남의 땅콩을 서리해서 후다닥 건너오면 땅콩밭 주인이 어이 알고 구여울 건너까지 쫓아와서 옷을 가지고 섬마로 가버리는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도로 건너가서 울고불고 빌며 난리를 치면서 옷을 겨우 찾아왔지 뭐야... 구여울 밑으로 내려가면 강폭이 좁아지며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에서 헤엄치고 섬마로 건너가서 우와기 소매 부분과 그리고 쓰봉 아래를 묶어서 만든 옷 자루에 되는대로 땅콩과 감자를 마구 캐 담아서 다시 구여울 쪽으로 줄행랑 치듯이 건너왔지... 그 짓을 숱하게 했어... 그 시절은 어느 세대나 다 그렇게 해... 그게 놀이이자 큰 재미야... 한여름 밤에 막대기에 천을 여러 번 감아서 석유를 뿌린 후 환하게 불을 밝히면 구여울 물가에 나와 있던 고기들이 불빛을 보고 마구 달려드는 거야. 그러면 그냥 바게스로 막 퍼담다시피 잡았지 뭐야... 이런 것을 불치기 혹은 천렵이라고 해... 잡은 고기들을 감퇴방구나 분천방구 옆으로 가져가서 매운탕도 해먹고 구워도 먹고... 또 집에서 가져온 밀가루로 전도 붙여 먹고 감자꾸지도 해먹고... 그러다가 더우면 또 구여울로 몰려 가서 멱감고 와서는 분천방구 주변에서 홑이불을 덮고 자기도 하고~"
아랫마 실거랑 옆에 살던 중수 아재(62)는 구여울 하면 우리가 보통 가늠할 수 있는 기존 관념과는 다른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구여울은 늘 우리들의 놀이터였지. 큰 물이 줄어들고 강물이 좁아지면 구여울 아래 중간쯤에서 출발하여 섬마쪽으로 세찬 물결을 헤치며 왔다갔다 왕복을 하면 힘이 쭉 빠지곤 했지. 그런데 나는 이런 것도 봤다네. 엄마가 구여울 물을 떠와서 정안수(정화수)로 떠놓고 소원을 비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것 같기도 해... 당시의 계절적인 시기는 확실히 기억이 안나지만... 어쨌든 구여울이 크게 우는 소리에 새벽무렵 잠이 깼는데 물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던지 그때에는 신기하다는 느낌도 들었어..."
여울목에서는 고기들이 떼지어 몰려 있기 마련이다. 개구장이 시절의 재미나는 구여울에 대한 추억을 승철이 할배(68)가 전해주었다.
"구여울에 고기들을 잡으려고 이따금씩 타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 와서 바게스에 청산가리를 타서 여울목에 뿌리면 큰 고기들이 마구 장가졌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서는 안되지만 60년대 그 시절은 그랬어. 그래서 죽은 큰 고기들을 수거해가면 나머지 작은 고기들은 동네 아이들이 마구 주워 담았지... 또 날이 가물어서 여울에 물이 줄어들면 뱀장어들이 여울가 동그란 돌 아래로 들어가 숨어 있으면 우리는 강가에 널려져 있는 여꾸풀을 뜯어와서 돌로 진이겨 물에 풀면 뱀장어도 나오고 다른 고기들도 기절해서 떠오르면 마구 건져 담았지... 구여울에서 자전거 밧데리에 전기줄을 길다랗게 이어서 전기로 고기를 잡기도 했어. 누군가가 계속해서 페탈을 밟아주어야만 전기가 생겨서 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한번은 큰 고기가 전기에 혼이 나가서 얼이 빠진 거야. 그래서 누군가가 너무 좋아서 '큰 고기 봐라!' 하고 고함을 질렀더니 페달을 밟던 놈이 글쎄 너무 좋았던지 페달을 멈추고는 '어디!' 하며 구경을 하는 바람에 큰 고기가 제 정신을 차리고 도망을 가 버리는 거야. 큰 고기가 전기에 감전되어 혼절할 때마다 모두가 너무 좋아서 '큰 고기 봐라!' 하고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치면 페달을 밟던 놈들 가운데 열에 열이면 죄다 페달을 멈추고 '어디?' 하며 구경하는 바람에 큰 고기들이 그 사이에 제 정신을 차리고 다 도망을 가는 일이 수타였제... 자전거 페달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밟아야만 전기가 일어나거든..."
구여울 물을 정화수로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대목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난하게 대했던 구여울 물을 신성시 했다는 얘기가 된다. 알다시피 정화수는 이른 새벽에 길러오는 물로 가족의 안녕과 평안를 기원하는데 쓰이거나 혹은 정성을 담아 약을 달이는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우리 선대들은 구여울 물을 조왕신에게 바치는 정안수로 사용할 만큼 신성시 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농암 할배 이전부터 존재하며 장구한 세월 동안 부내 동네와 함께 해 온 구여울에 대한 마실 사람들의 일종의 숭배가 담긴 기복 신앙이 투영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수목들도 100여 년이 지나면 "고시레~"를 받으며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향민들의 정서인데 하물며 천년지기 구여울에 어찌 정령이 깃들어 있지 아니 할까.
족친 어른들이 구여울과 관련하여 간직하는 애환과 추억은 시시각각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특히 구여울 물을 정안수로 조왕신에게 바치며 가족의 평안과 안녕을 빌었다는 것은 분강촌 사람들이 구여울을 결코 단순히 흘러가는 평이한 강물로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하나의 단서가 되는 증표이다. 이렇듯 구여울 소리는 분강촌에서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이 제각기 안고 있는 곡절과 사연에 따라 느끼는 감흥과 정취는 각색으로 다가왔으리라. 자연의 이치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인간들에 의해 천차만별로 흩어져 들리는 연유는 마치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일야구도하기一夜 九 渡河記'에 담긴 '존재의 본체는 변하지 아니 한데 오직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즉, 낮에는 눈으로만 보고 밤에는 귀로만 들어야 하는 인식기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상이한 감정과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즉, 선인들은 초탈한 심신으로 강호를 천연지기처럼 여겼기에 구여울 소리는 언제나 낙랑하게 들렸겠지만 우리 후대들은 속세에 맞닿고 있는 삶의 무게로 인하여 희노애락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드렸으리라. 유년시절 함께 했던 구여울 소리는 크게 외경(畏敬ㆍ두려움과 공경)과 지락(至樂ㆍ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양분되는 소리였다. 이를테면 동네에 우환이 있거나 초상이 났을 때 들려오는 시름 섞인 애절한 구여울의 울음 소리와 한여름 신나게 멱을 감을 때 쏟아내는 철벅대는 천탄의 소리는 현상을 바라보는 생각의 차이가 가슴 속에 이미 달리 존재하고 있는 만큼 그 소리 또한 확연히 다른 빛깔로 채색이 되는 그러한 이치와 같은 맥락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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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 실향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구여울을 망실한지 어느덧 50여 년이 되어간다. 유년시절 양수장 아래 쑤(소나무 숲)에서 잔디씨를 훑거나 혹은 통소 위 강가에서 고적히 낚시질을 하며 구여울을 바라보았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득하게 흘러가는 구여울 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로 흘러가는 구여울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저 구여울 강물이 보이지 않는 산너머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저 구여울은 언제까지 소리를 낼까. 그리고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 소년의 끝없는 생각이 어느 날은 반나절을 훌쩍 넘기며 이어지는 가운데 상념도 함께 깊어져 가던 모습이 적이 떠오른다. 그럴때면 구여울은 언제나 자애롭고도 관대한 목소리로 다가오며 아무 걱정 말라는 듯이 소년의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곤 했었다. 잃어버린 분강촌 천년지기 구여울의 재갈거리는 노래 소리가 유난히도 그립게 다가오는 섣달그믐날의 동창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다♧.
♤ 사진 및 그림 종합 설명(caption)
<사진1>은 필자가 부내 구여울을 닮은 천탄을 담은 전경이다. 통소에서 넘쳐나서 부포로 너울너울 흘러가는 듯한 여울빛에 춘기가 가득하다.
<그림1>은 1950년대 분강촌(부내ㆍ분천동) 물레방간 언덕에 존재했던 그리운 "물레방앗간 정미소" 전경이다. 족친 이택(79ㆍ장학관 및 화랑교육원 원장 역임) 화가가 낙강 속에 안치된 전설의 물레방간 풍경(부내 물레방간ㆍ2024)을 처연하게도 살려 냈다. 철철철~ 하면서 물이 떨어지는 가운데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물레가 마구 돌아가는 것만 같다. 물레방간 언덕에도 봄기운이 완연하다. 곤재와 송곳배알 농암종택 분강서원에도 봄빛이 짙다. <사진2>는 1965년 실제 물레방간 주변 전경이다. 우물 아래 빨레터 옆에 웅장하게 서 있던 왕버들나무가 지나간 반세기 세월의 미로를 헤치며 그립게 다가온다. 사진 왼편 아래 강가에 검은 점석 같은 것은 물레방간 빨래터 광경이다. 분강 건너편 섬마에 있던 포플러 군락들도 눈에 들어온다. 강가에서 멱을 감고 노는 천진한 아이들의 나이도 어느덧 고희를 넘었으리라. 본 사진도 이택 화가가 소장하고 있다.[당시 부내 물레방앗간의 정확한 명칭은 '물레방앗간 정미소' 혹은 '물레정미소'라고 불렀다. 실제 존재했던 물레방앗간은 1950년대 말경에 일어난 대형 안전사고와 사라호 태풍으로 작동이 멈추고 그나마 남아있던 형체까지도 1960년대 초반에 사라지자 동네 사람들은 물레방앗간이 있던 주변 일대를 그냥 발음하기 쉬운 "물레방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림2>는 분강촌을 실물처럼 옮겨 놓은 산수화로 2014년 유산 김영환의 "분천마을도"이다. 우리가 도산국민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분강촌을 그대로 재현한 아름다운 산수화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에 나룻배처럼 가득히 강물을 담고 있는 분강의 모습이 섬세하게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왼편 상단에 분강 아래로 여울져서 흘러가는 구여울의 전경이 선명하게 보인다.
분강촌의 한여름은 언제나 수박과 참외로 풍성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수박걷이에 마구 동원됐다. 수박에 관한 한 통달한 사람들이 이 동네에는 차고 넘쳤다. 그래서 여느 사람들은 분강촌 영천이씨들을 아예 수박이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수박을 삼륜차에 싣다가 깨어지면 마치 맛사지를 하듯이 시원한 수박 세수를 하기도 했다. 정말 수박 하나만큼은 풍성한 동네였다.(<사진3>은 '옛도산향우회' 카페에 있는 것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첫댓글 부내는 그시절 어르신들이 선구적으로 수박농사를 접목하여 부촌 농가들이 되었지,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난후에 토계 원촌 내살미등으로 수박농사 기술이 전파되어 농촌 소득증대에 많은 기여를 한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