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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장 ‘부활 장’
2009년 4월 12일 / 대예배 / 고전 15:1-11
고린도전서 15장은 복음의 상상봉이요 부활장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십여 차례 나타나셨는데, 본문을 보면 그 중 여섯 차례 경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3번은 개인적으로 게바에게, 야고보에게,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3번은 집단적으로 12제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 그 중 태반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은 12제자 외에 좀 더 넓은 의미의 바나바와 실라 같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 주심은 각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1. 게바(베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베드로를 ‘못난 놈’이라고 욕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이 연약한 베드로를 굳건히 일어서게 하고자 먼저 그에게 나타나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베드로는 그것을 후회하여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배신의 괴로움 속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와 오히려 위로하시고 용서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받으신 배신의 아픔보다 자신을 배반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시는 것이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이신 것입니다.
2. 야고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인데, 예수님의 생존 시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막 3:21에 보면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후로는 일변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회 의장 역할을 하기도 했고, 사도 바울은 그에게 선교 활동을 보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야고보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하였고, 약 5:7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야고보에게 있어서 더 이상 정신병자나 단순한 육신의 형님이 아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이 야고보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① 기도를 많이 하여 낙타의 무릎처럼 되었다고 하며 ②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③ 비문에는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전한 참된 증인이었다.”고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믿지를 않았는데 도대체 무엇이 야고보를 이처럼 변화시킬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 때문이었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3. 바울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과 율법 편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정반대편의 인물이었던 셈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권력과, 폭력, 물리적인 힘으로 기독교 운동을 말살하려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진술에 의하면 보면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바울의 손에 죽음과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로 인해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28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선교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몇 군데 말씀을 봅니다.
행 20:23-24 /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자비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이 일을 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행 21:13 / 그러나 바울이 말하였다. “왜 이렇게 모두들 울고 있습니까? 내 결심을 꺾지 마십시오. 주님 예수를 위해서라면 나는 투옥은 물론이고 죽을 각오도 이미 서 있습니다.”
갈 2:20 / 그리스도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생명을 얻었습니다.
갈 6:14 / 그러나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십자가 때문에 나는 오래 전에 이 세상의 온갖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고 이 세상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빌 1:20-21 /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을 일체 하지 않고 오히려 시련을 당하고 있는 지금도 예전과 같이 언제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담대하게 말하고, 또 살든지 죽든지 어떤 순간에도 나의 존재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을 이러한 사람으로 변화되게 만들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 외에 다른 것으로는 사도 바울의 이 같은 극적인 대변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 매카트니 박사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훔쳐 갈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들의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축 늘어져 죽은 시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그런 시체가 그들에게 담대히 나서서 놀라운 말씀을 전파하고 영웅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죽은 몸뚱이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기꺼이 잔혹한 박해와 치욕스러운 죽음을 감수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 미국 닉슨 대통령의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Charles Colson은 그의 저서 'Born Again'에서 대단히 중요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972년 6월 워터게이트 건물 안에 있는 민주당사에 절도범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붙잡힌 절도범 중 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어 정치적인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해 11월 닉슨은 재선에서 사상 유래 없는 압승을 거두었고, 73년 2월에는 지긋지긋 하던 월남전을 종결지어 그야말로 대통령으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터게이트의 망령만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확대되어 갔습니다. 마침내 1973년 3월 21일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최초로 사건은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10여 명의 보좌관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로서 대부분 미국에서 쟁쟁한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문제의 핵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최고의 법률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닉슨의 열렬한 신봉자들이었습니다. 인간 닉슨을 위하여 미국 최고의 수입을 자랑하던 변호사직도 마다하고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닉슨을 위하여 24시간 밤낮으로 일했고, 필요하다면 닉슨을 위하여 생명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진 닉슨 대통령은, 그들에게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다음과 같은 권한과 특혜를 보장해 주었습니다. 대통령의 허가 하에 그들의 지시로 장관, 장성 그리고 군대까지도 어디로든 옮길 수 있었습니다. 공무원의 채용, 승진 및 해고에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연방 정부 예산 중 수십 억 달러에 해당되는 금액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습니다. 붉은 상의를 입은 스튜어드(Steward)들이 그들의 지시를 기다리며 24시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에서든 지시 한 마디로 10분 이내에 전용전화가 가설되었고, 언제나 비밀 경호원의 경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권력이란 직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에서 나온다는 말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세계 최고의 권력가인 미국 대통령의 최측근이 된다는 것은 야망에 불타는 사나이들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인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그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과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봉하는 닉슨 대통령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그들의 학식과 법률적인 전문지식에 비추어 그들이 꾸민 은폐기도를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불과 18일 후인 4월 8일에 무참하게 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완벽하게 말을 맞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별조사를 받는 동안 서로의 진술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누가 협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대통령을 버렸고, 그 막강한 권력의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닉슨 대통령은 그로 인하여 임기 중 사임하는 미국 최초의 불명예스런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인간의 그 어떤 지혜로도, 그 어떤 권력으로도 지켜지지 않는 법입니다.
최고의 지성인이요 법률전문가들이 치밀하게 꾸민 거짓이 18일을 넘기지 못하고 들통이 날 정도인데, 2천 년 전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만약 거짓으로 예수부활을 꾸며내었다면 그들의 각본이 얼마나 엉성했겠으며, 무서운 죽음의 위협과 협박 속에서 그 엉성한 거짓 각본이 어찌 2천년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까지 지켜질 수가 있었겠느냐고 챨스 콜슨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치밀하게 세웠던 자신의 워터게이트 은폐기도가 무산됨으로 인하여 감옥에서 복역하던 챨스 콜슨이 감옥 속에서 깨달은 예수 다시 사심의 확고부동한 증거였습니다. 이 증거 속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난 챨스 콜슨은 다시 사신 예수님에 의해 감옥 속에서 'born again'하였고, 그 결과 'Born Again'이란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그 무식한 제자들이 증거한 예수 다시 사심의 증언이 2천년 동안 깨어지지 아니한 것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진실 그 자체로 변함없이 존재하는 법입니다. 예수 다시 사심이 진실이었음으로, 제자들은 그 진실을 위하여 목숨을 걸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그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뵈었으므로, 그들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될지언정 진실을 외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고, 지금 살아 계신다고 말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은 2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중에 부지기수로 많이 있습니다. 여기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 간증이 있습니다.
■ <교회 학교 선생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대뜸 나에게 물어보더군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 사실이에요?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 난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야.” / “이게 도대체 무슨 병이야? 쯧쯧... 안 됐네. 이게 대체 무슨 병이야...” 난 어려서부터 혈관이 엉겨 붙는, 이름조차도 알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병을 앓았지요. 혈관이 한 데 엉켜서 혈액 순환이 제대로 안 되었고, 몸은 늘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혈관이 심하게 뭉친 부분은 몸 밖으로 흉측하게 돌출되어 옷으로 항상 가리고 다녀야 했습니다. 좋다는 병원은 다 가보았지만 그때마다 늘 고개를 설레설레 하며 혀를 차는 소리만이 메아리처럼 나에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대체 이 병을 내가 언제까지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일들이 내 몸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늘 암흑 속을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난 희망을 잃지 않았죠. 저 멀리서 보일 듯 말 듯 한 줄기 찬란한 빛을 찾아 쉼 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언젠가는 눈부신 햇살의 환영을 받으며 길고 길었던 이 암흑 속을 헤쳐 나올 것이라는 희망이 날 꿋꿋하게 버티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죽는다고요? “이대로 두다간 스무 살까지밖에 살지 못할 것 같군요." 내가 17살 되던 해, 계속해서 뭉치는 혈관을 한참 지켜보던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일그러지더군요. 그건 사형선고였습니다. 그 순간 가슴속에 담아 두고 그 무엇에도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던 희망이 바스락거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내가 죽다니. 내가 정말 죽는다고? 이건 말도 안 돼” 여러분,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그 기분을 아십니까? 소름끼치는 그 기분을 아십니까? 온 몸의 혈관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몸 밖으로 튀어 오르고,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팽팽하게 당겨지더군요. 난 이내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사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 내어 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난 그날부터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병은 나에게는 온 몸을 갉아먹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의학계에서는 흥미로운 것이었으니까요. 걸핏하면 나는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마취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나야 했습니다. 새로운 치료 방법이 나올 때마다 의사들은 나에게 치료를 해보며 그 반응을 살폈고, 그것은 곧바로 의학 보고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었지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는 희망이 아니라 죽음을 재촉하는 절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수술을 할 때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는 부모님의 붉은 눈시울이었습니다. 수술 도중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겠노라고 서명을 하는 부모님의 눈은 붉은 노을보다도 더 붉게 물들어 갔고, 나중에는 아예 빨갛게 타들어 갔습니다. 송곳처럼 후벼 파던 주사 바늘이 이제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다가올 무렵, 병원에서는 미국에서 새로운 치료 방법이 들어왔다고 또 다시 내게 수술을 권유하더군요. “싫어, 싫어! 나 그냥 죽게 해줘! 응?”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랐죠. 캄캄한 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이름을 부를 간수의 목소리에 숨을 죽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형수와 같은 이 생활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어서 빨리 내 이름을 불러주길 바랬습니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리더군요. 오늘만큼은 슬픈 아버지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난 눈을 감은 채 애써 잠을 자려고 했죠. “지영아, 지영아 자니?” “ …… ” “하나님, 우리 지영이 살려 주세요. 지영이 살려 주시면 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더러 어머니와 내가 교회를 갈 때마다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시던 분이였으니까요. 그런 분이 하나님을 부를 것이라고는 … .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지더군요. 그 순간 베갯잇 속에서 깊은 잠에 들어 있었던 희망이 다시금 나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 가슴이 요동치더군요. ‘살고 싶다’고요. 정말 살고 싶다고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스무 살까지 살 거라고 했던 나는 여기 서서 여러분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의사들이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하라고 했던 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그 분이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그 분이 부활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렇다면 나도 그때 긴 어둠의 터널을 건너지 못하고 여러분에게 탤런트로서 기쁨을 주는 광명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기적입니다. 전원일기에서-복길이 역> / 김지영 / 1974년 9월 7일 / 2008 제7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조연상 / 제29회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여인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그 소식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그 기쁘고 엄청난 소식을 빨리 전하려고 달음질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뜨겁고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서 전하라” 이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첫 번째 명령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가 그 사실을 전파했습니다. 여인들도 전파했고, 제자들도 전파했고, 바울도 전파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의무를 동반합니다. 그 의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 4:20을 보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서서 시비를 걸게 되었을 때, 단호하게 한 말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얼마나 담대하고 강력한 선언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신뢰하고, 그분께 여러분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그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충성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곧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한 여인이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본인은 이 사실을 모르다가 우연히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암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충격과 슬픔을 느꼈지만 그런 마음으로 계속 지낼 수는 없단 생각에 여인은 계획을 세우고 움직였습니다. 평소 만나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만남을 가졌습니다. 마음 속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편지를 써야 할 사람에게는 편지를 썼습니다. 갚을 돈이 없나 살펴서 있으면 갚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 없나 살펴서 다 정리를 했습니다. 유산도 정리하고, 평소에 부담이 있었던 선교사님들에게 선교 헌금도 보내고, 유언서도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병세가 나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아지는 게 아니겠어요? 이상하다 싶어 다른 병원을 찾았는데, 오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 정리하느라 돈도 많이 쓰고 했는데, 억울하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온화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지난 몇 달처럼 인생을 진지하게 산 적이 지금껏 없었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부활을 의심하지 마십시다
2009년 4월 12일 / 부활절 오후예배 / 고전 15:12-18
■ ‘토머스 제퍼슨’(1800년에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취임)은 다른 미국 대통령들과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대통령 재직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성경 구절들을 삭제하면서 다시 신약성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삭제한 부분은 대부분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관계있는 구절들이었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기적을 삭제한다면 어떤 것이 남을까요? 아마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할 수 있습니까? 또 100세 된 노인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또 넘실거리는 홍해가 갈라졌다든지,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서 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먹였다든지, 38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을 고쳤다든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5,000명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20,000명 이상을 먹였다든지, 예수님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2,000여 년 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쯤 십자가에 못 박혀 운명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불과 3시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시신을 장례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굉장히 촉박했습니다. 유대나라도 매장이 있었기에 가난하고 보통 사람인 경우 그냥 땅을 파서 묻어버리면 끝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존경하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파 놓았던 동굴 무덤을 기증했습니다. 당시 부자들은 동굴에 무덤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선반을 달아서 시체를 안치했습니다. 마침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 무덤에 장사하기를 원하여 급히 장례 절차를 밟고 준비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찾아와 마치 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대우하듯 많은 향료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수위를 싸고 두건을 씌워 정중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장례 지냈습니다. 이 일에 여인들이 와서 함께 거들었습니다. 그리고는 10~20명 되는 장정들이 매달려야 겨우 굴릴 수 있는 큰 돌로 동굴 무덤 아귀를 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하게 장례를 끝냈습니다.
▶ 예수님을 장례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무덤을 막은 돌을 굴리고 다시 살아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끝이 났고 예수님의 생애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흘이 되던 날 아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새벽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 천사들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이 실제로 무덤에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무덤으로 급히 와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시체는 온데 간 데 없고 비어있는 무덤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수위와 두건만이 고스란히 누웠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 몇 사람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것을 실제로 입증해주셨고, 여인들 중 몇 사람에게도 나타나셔서 부활하셨음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 그로부터 3년이 지나고 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이라는 청년을 만나주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난 후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25년이 지났을 때,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본문 15장을 기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신 것을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야고보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12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하여 일일이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한 번에 500여명이 될 때도 있었는데, 아직 그들 가운데서 반이나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이 안 믿어지면 생존해 있는 그 목격자들을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고전 15장의 내용을 가지고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 솔직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안 믿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막론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안 믿으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온 천하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삭막한 분위기에서 바울로부터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예수 믿어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소식을 바울이 듣고 너무 답답해서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것입니다.
▶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날조된 학설 내지는 종교적인 맹신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 특별히 머리가 비상한 학자들 중에는 평생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까운 인생을 다 날려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실과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평생 학자의 생활을 했다면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평생 머리를 싸매고 달려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 연구해서 박사나 교수,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것으로 증명하여 세상적으로 학자, 박사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야 말로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두 장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잉거솔이라고 하는 대령과 또 한 사람은 루 월래스라고 하는 장군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모독적인 이야기였다. 잉거솔 대령이 말했습니다. “그 예수라고 하는 친구 말입니다. 예수쟁이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이니 하고 허튼 소리를 하는데 이 예수라는 친구를 멋진 연애장이로 만들어 에로틱한 소설을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지요?” “아! 그것 참 좋겠는 걸. 참 재미있는 소설이 되겠지.” 그 후 그들이 전역을 하고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것이 없었습니다. 장군으로 전역을 했으니 아무 일이나 손댈 수는 없고. 그래서 월래스는 생각다 못해 전에 기차 안에서 잉거솔 대령이 한 말대로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에로소설을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직접 이스라엘까지 가서 자료를 수집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성경을 읽고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그의 마음은 변화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역사적으로 실존인물임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그가 목적한 소설의 원고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처음 계획한 것과는 전혀 딴판의 글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탈고를 한 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와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 소설의 이름이 바로 영화로도 잘 알려진 ‘벤허(Ben Hur)’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입증해 주는 산 증거입니다.
▶ 성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은 절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쓴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야기가 제각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입을 맞추어 거짓을 진실처럼 꾸미려고 하면 그런 식으로 기록해서는 안 됩니다. 어설프기 끝이 없는 기록들을 복음서에 남기고 있습니다.
① 예를 들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이름을 보면 사복음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에는 28: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에는 16:1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누가에는 24:1, 10 “그 여자들(예수님을 딸가온 여인들) -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복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밖의 몇몇 여자들”, 요한에는 20:1 “막달라 마리아”라고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한 눈에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신학자들이 주석하여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입니다.
② 게다가 여인들이 무덤에 찾아간 시간도 틀립니다. 마 28:1에는 “동이 틀 무렵”, 막 16:2 “동틀 무렵”, 눅 24:1에는 “새벽”, 요 20:1에는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이라고 했습니다.
③ 여인들이 무덤에 가서 만났다는 천사의 숫자도 틀립니다. 마 28:2, 3에는 “예수님의 천사”, 막 20:5 “흰 옷을 입은 한 청년”, 눅 24:4에는 “두 천사”, 요 20:12 “흰 옷을 입은 천사 두 명”라고 했습니다. 어떤 기록은 천사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하고, 어떤 기록에는 천사가 굴러낸 돌 위에 앉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을 날조하려고 조작했다면 이렇게 복잡하게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④ 더욱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 천하에 증명하려고 하는데, 여자를 앞세워서 되겠습니까? 요즘 같이 큰 소리를 치는 때는 여자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여자는 사람이면서도 인권차별이 많았습니다. 법정에서도 여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여자 말은 안 듣기로 작심을 한 시대입니다. 그런 마당에 여자들을 내세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날조됐거나 조작됐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은 대로 적었습니다. 이렇듯 서로의 말들은 좀 틀려도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소문이 난 것은 예수님이 처형당한 지 사흘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현장이 예루살렘에서 수백 리 떨어진 갈릴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곳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예수님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너무나 그리워서 만들어낸 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사흘 만에, 그것도 예수님이 처형당한 예루살렘 현장에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 말을 겁 없이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형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합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있습니다. 빌라도와 대제사장이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무덤가에는 병정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함부로 떠들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방안에 틀어 앉아 자기들도 잘못하면 예수님처럼 끌려가지 않을까 하여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판국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리를 함부로 합니까? 그런데 그런 현장에서 예수님이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그런 소문을 듣고도 조용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군인들도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습니다. 아무도 여인들과 제자들의 주장을 반박해서 뒤집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변명을 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형당한 그 도시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생명 걸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이 뭉쳐서 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관한 신앙은 교회가 세월과 함께 만들어낸 신앙이 아닙니다.
■ 부활을 믿었던 12사도의 죽음을 통해 복음은 온 땅에 전파되었습니다. / ① 베드로는 죽을 줄 알고도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힘 당했다. ② 안드레 역시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었다. 안드레가 달린 십자가는 X자형이었다. ③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다. ④ 요한만이,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부탁하신 대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살다가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로마군에게 멸망된 후 에베소에 가서 전도하던 중 그를 박해하는 무리에게 밧모섬으로 쫓겨난 후 계시록을 받아쓰고 수명을 다 했다. ⑤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몰매를 맞고 기둥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⑥ 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몸의 살갗을 벗기는 고통을 당하고 베드로처럼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다. ⑦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다. ⑧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이 달아났다. ⑨ 알패오의 아들 야곱은 돌에 맞고 톱에 몸이 베이는 죽임을 당했다. ⑩ 예얼이라고 하는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국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⑪ 야곱의 동생 유다 또한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⑫ 맛디아는 가롯 유다 대신 천거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부활을 안 믿는다는 말을 듣고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도 예수님을 못 만나야 됩니다. 그런데 엄연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본 바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 유명한 논증을 인용하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다 쓸 데 없는 것이 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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