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10 주님수난 성지주일 – 133위 115° 최용운 암브로시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133위 115° ‘하느님의 종’ 최용운 암브로시오
이름 : 최용운 암브로시오
출생 : 1836년, 충주
순교 : 1868년 4월(음력) 이후, 청주
최용운(崔龍雲) 암브로시오[1] 회장은 1836년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세속 학문을 닦던 중에 우연히 천주 교리를 접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이 교리를 배우겠다는 생각에서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보은(報恩) 멍에목 교우촌(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으로 이주하였다.[2] 그리고 이곳에서 여 요한[3]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최양업 토마스 신부[4]에게 영세 입교하였다.[5]
그에 앞서 최양업 신부는 1851년에 멍에목 교우촌을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예비 신자 조 바오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멍에목 신자들은 조 바오로 동생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끝내는 그에게서 “관아에 고발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얼마 동안 다른 곳으로 피신해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위협이 사라지자 다시 멍에목으로 모여들어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6] 최용운 암브로시오가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입교한 뒤 최용운 암브로시오는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으며, 이내 그의 굳은 신심은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1864년에 멍에목 교우촌을 방문한 한 선교사로부터 그곳 회장으로 임명되었으니[6.1], 당시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때부터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교우촌 신자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치면서 회장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멍에목에서 가까운 상주(尙州) 장재동(현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장자동)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7]
그러나 박해는 끝나지 않고 2년 뒤인 1868년에는 박해가 더욱 거세어졌다. 이때 서울에서 파견된 포교와 포졸들에 의해 멍에목 교우촌이 발각되었으며, 멍에목으로 들이닥친 포교와 포졸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있던 여 요한과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그런 다음 여 요한을 앞세우고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이 살고 있던 상주 장재동으로 몰려갔다.[8]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과 여 요한 등은 곧 보은 지역을 관할하던 청주 진영(현 충북 청주시 남문로 1가)[8.1]으로 압송되었다. 이때부터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은 청주 진영의 옥에 갇혀 있으면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곤 하였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교리 스승 여 요한이 신앙을 되찾아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열심히 권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형 판결을 받고 태연하게 형장으로 나가 순교했으니, 때는 1868년 4월 이후(음력)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9]
[註]__________
[1]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의 한자 성명은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1.1] 동치(同治) 7년 윤4월의 기록을 따랐다.
[1.1]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 : 1868년, 한문 필사본. 병인박해 때 충청도에서 체포된 천주교인들의 거주지, 성명, 기찰포교의 성명 등을 기록한 책.
[2] 『병인치명사적』, 1권, 17면, 최응칠 빈첸시오의 증언. 최응칠 빈첸시오는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의 아들(또는 조카)로, 증언 당시에는 괴산 남상도(현 충북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에 살고 있었다.
[3] 여 요한은 1868년에 체포되어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과 함께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공충도사학죄인성책』(동치 7년 윤4월)에 나오는 여도섭(呂道燮)이나 여규신(呂奎信) 가운데 한 명으로 추정된다.
[4] 최양업 토마스(1821~1861년)는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이다. 1836년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으며,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뒤 11년 6개월 동안 전국을 순방하다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걸려 선종하였다.
[5] 『병인치명사적』, 6권, 69면. 위의 내용은 최응칠 빈첸시오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암브로시오 회장의 순교 행적에 나온다.
[6] 「최양업 신부가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 청주교구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87-91면.
[6.1] 문경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 지역에 신앙이 전파한 것은 신해박해(1791) 이후 충청도 남부, 전라도 북부 신자들이 타지방으로 이주할 때부터이다. 을해박해(1815) 때 신자 71명이 체포 그중 7명이 대구에서 참수치명하였다.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입국, 샤스탕 신부가 경상도 지역 사목을 맡아 순방하였으며, 기해박해(1839)로 조선은 모든 성직자를 잃게 된다. 1846년 다블뤼 신부가 경상도 교우촌을 다니며 성사를 집행했고, 1850년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북부·남부지역 사목을 하였다. 1851년 최양업 신부가 병사한 후에는 페롱 신부가 경북 서북부 지역을 전담하였다. 1864년 칼래 신부가 경상도 서북부 지역을 맡아 1866년 병인박해까지 사목하였다. 따라서 최용운 암브로시오를 1864년에 멍에목 회장으로 임명한 선교사는 칼래 신부였을 것이다.
[7] 『병인치명사적』, 1권, 17면, 최응칠 빈첸시오의 증언. 『병인치명사적』(6권, 69면)과 『치명일기』(정리 번호 190번, 최 암브로시오)에는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이 경상도 상주 회장으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보은 멍에목이 상주 접경에 있는 데다 그가 한때 상주 장재동으로 피신해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8] 최용운 암브로시오 회장이 체포된 시기가 『치명일기』(정리 번호 190번)에는 ‘병인년’으로, 『병인치명사적』(6권, 69면)에는 ‘병인년 3월 20일’로 나오는 반면에 『병인치명사적』(1권, 17면)과 『공충도사학죄인성책』(동치 7년 윤4월)에는 모두 ‘무진년 4월’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정확한 기록으로 생각되는 후자의 시기를 택하였다.
[8.1] 청주 진영 : 청주읍성은 조선시대 군사 행정의 중심지였다. 현재는 성벽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높이 4m에 달하는 성벽이 약 1.6km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은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순교신앙을 증거한 곳이다. 福者 원시보(야고보, 합덕 응정이)·배관겸(프란치스코, 면천 양유리)·김사집(프란치스코, 덕산 비방구지[합덕읍 점원리])·오반지(바오로, 진천 반지[이월면 사곡])·장 토마스(수원 느지지[화성 양감면 요당리]),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 진천 새울)·전 야고보(청주 금봉[미원면 월용리]·최용운(암브로시오, 충주) 등은 청주 진영의 대표적 순교자이다.
[9] 『병인치명사적』, 1권, 17면, 최응칠 빈첸시오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