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말 달리자, 예수」평설 / 홍일표
말 달리자, 예수
하린(河潾)
씨팔, 나 더 이상 안해 예수가 멀미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온다 못은 이미 녹슬었고 피는 응고 되어 화석처럼 딱딱해진 지 오래다 이천년 동안 발가락만 보고 있자니 너무나 지루했다 제일 먼저 기쁨미용실에 들러 가시면류관을 벗고 락가수처럼 머리 모양을 바꾼다 찬양백화점에 가서는 오후 내내 쇼핑을 한다 보헤미안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자 아무도 그가 예수인지 모른다 복음나이트 클럽에 기도로 취직한다 너무 차카게 굴어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난다
소망주점에 들러 포도주 대신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잔뜩 취한 예수가 구원주유소에서 참사랑오토바이에 기름을 가득 채운다 오빠 달리는 거야 믿음소녀가 소리친다 그래, 골고다 언덕까지 달리자 달려! 죄 지은 자 모두 다 비켜, 빠라 바라 바라밤! ------------------------------------------------------------------------------------------------------------------ 유쾌한 상상의 전위
차이와 거리 두기를 통해 낡은 질서를 전복하는 반란자가 있다. 기존의 관념과 체제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고 지루한 일상의 틀을 벗어던지는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의 보법은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웅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불상에게 소주 부처와 안주 보살을 동원하여 만취하게 하고 드디어는 대웅전을 벗어놓고 야반도주하게 하는 기막힌 상상력과 친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시는 읽는 내내 즐겁고 통쾌하다.
일상어법의 단일한 기표에 고착되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줄 모르는 엄숙주의자에게 이 시는 신성 모독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할 작품인지 모른다. 그러나 시는 늘 반란을 꿈꾼다. 몸 무거운 밤의 엉덩이에 말뚝을 박고, 천년만년 자리를 옮길 줄 모르는 바위의 심장에 시의 불심지를 박아 폭파시키는 것이 시라는 괴물이다. 이러한 발칙한 상상력으로 좌충우돌하며 일탈과 전복을 통해 새로운 시의 영토를 여는 작품이 「말 달리자, 예수」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젊은 오빠 예수는 말한다.
“씨팔, 나 더 이상 안해”
지루한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는 21세기 신종 인간으로 변장하여 취직을 하지만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신성한 존재의 이미지 전복과 변형을 통해 기존의 의미를 역전시키고 예수를 부활시킨다. 종교적 도그마를 파괴하고 신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소통의 틈새를 열어 보여주는 도발적 사유는 시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이다.
월급도 못 받고 쫓겨난 예수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포도주 대신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골고다 언덕을 행해 폭주를 감행한다. 폭주족이 된 젊은 오빠 예수를 추종하는 “믿음소녀” 또한 빨리 달리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예수는 말한다.
“죄 지은 자 모두 다 비켜, 빠라 바라 바라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경쾌한 즐거움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유의 맥을 짚어내게 된다. “찬양백화점, 복음나이트클럽, 소망주점, 구원주유소, 참사랑오토바이” 등에 은밀히 숨어 있는 풍자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의 메시지와 관련이 깊은 상호명은 일종의 현실 비틀기로 현상에 대한 진술이 중층의 구조로 나타나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21세기의 신종 예수가 지향하는 곳 역시 “골고다 언덕”이지만 종교의 비의나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과 부활의 성소가 아니라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생의 목표점으로 제시되는 것은 비판과 풍자가 아우르는 공간이 그만큼 넓고, 광의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명제’와 ‘사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시인은 ‘명제’화 이전의 ‘사태’를 질료로 시를 쓰고, 평론가는 ‘사태’로서의 세계를 명제화한다.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일부 평론가들이 자기 입맛에 맞으면 물불 안 가리고 일급의 명시, 가편 운운할 때마다 안쓰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주관적 정서와 평가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싸잡아 저급의 문학으로 매도하는 것이 과연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인지 의아할 때가 많다. 독단으로 무장한 돈키호테식 비평은 일시적으로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충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엄정하고 객관적인 비평의 전범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평의 틀 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주어진 틀 안에서 사유하고 감상하고 판단하는 것이 상례다. 균형을 잃은 평문은 사실을 오도하고 곡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객관적 비평의 안목을 가지고 있는 눈 밝은 비평가들은 극찬의 언술이나 규정은 피하고 작품의 안팎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다. 일도양단식의 비평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비평에 대한 염오로 글의 방향이 잠시 빗나갔다. 하 린의 시는 활달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무기로 세계를 횡단한다. 그의 시는 앞으로 더욱 깊어질 것이고 새로운 정서적 충격으로 우리를 즐겁게 할 것으로 믿는다. 하린 시인이 변별화를 지향하는 원초적 힘으로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기대는 아닐 것이다.
홍일표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시로 여는 세상』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