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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움의 기술 9 / 시험의 현장에서 확보하는 영적 균형
(참고로 ‘미세한 우세’라는 말은
지옥의 세력과 인간의 연약한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영적 무게의 미묘한 이동을 뜻한다.)
- 미세한 우세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옥과 직접 싸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간절한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영적 평형 속 그 미세한 우세의 효과를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누리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 괴리의 원인과 대처법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분석해본다.
시험이 닥치면 인간은
영적 평형 상태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은 이미 특정 악의 성향과 연결된
지옥의 영들과 공생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의 의지는 이미 악의 영향력에 오염된 채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AC 5977항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인간이 시험 속에 있을 때
그는 그 안에 있는 믿음의 진리들에 대항하여 작용하는
악한 영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며
그동안 주님은 그를 보호하고 계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그 영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며
그 싸움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뿐,
그것이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영들을 매개로 하여 싸우시는
주님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시험을 겪을 때
마치 자신이 스스로 싸우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그는 지옥의 영들과 밀착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통해 유혹하고
인간의 의지 속에 있는 것들을 통해 지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지옥의 악이 주도하는 영적 관성은
치명적인 파괴력을 지닌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과거의 악한 습관과 감정의 통로를 이미 장악하고 있으며
선의를 향한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의식을 선제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형 상태가 아니라
지옥 쪽으로 이미 크게 기울어진 경사면에서
미세한 우세를 얻으려 애쓰고 있는 셈이며
단순히 결심하는 것만으로는
그 기울기를 역전시키지 못하고 압도당하는 일이 잦다.
이런 상황에서 미세한 우세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지옥과 직접 싸우려 하기 때문이다.
지옥의 압박을 느끼는 그 자리에서 똑같이 맞서면
관성의 법칙을 이길 수 없다. 대신 투쟁의 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HH 599항은 이렇게 말한다.
‘시험 중에서 주님은
천국을 통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 않으시고
인간과 함께 있는 악한 영들을 통해 매개적으로 작용하신다.
또한 그분은 악한 영들이 인간을,
그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다루도록 허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그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심하게 그를 다룬다면 그는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시험 중에서 인간과 함께 계시며 그를 지탱하시고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저항할 힘을 주신다.’
이러한 섭리를 이해한다면,
인간은 시험의 순간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영적 전략을 재설정해야 한다.
시험의 현장에서 마치 스스로 싸우는 듯한 주체적 태도를 유지하되,
그 싸움의 동력이 오직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옴을
진심으로 시인하는 것, 이것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전술이다.
따라서 위기의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내 힘으로 이 악한 감정을 제압해야 한다’는
자아의 강박에 매몰되는 대신 즉시 주님을 호출해야 한다.
그리고는 ‘주님, 이 싸움은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이 투쟁의 주권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라는 진솔한 시인으로
대응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러한 고백이 영적 도약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는
그 속에 다음과 같은 거룩한 과정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주님을 부르는 행위인데 이것은
영적 전선에서 고립된 자아가 비로소 구원자를 호출하는 결단이고,
이어지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시인은
자아라는 허상을 무너뜨리는 해체의 과정이며,
그리하여 투쟁의 주권을 주님께 온전히 이양하는 것은
삶의 중심축을 나에게서 주님께로 옮기는 거룩한 전환이다.
이러한 단계들이야말로 지옥의 압박을 뚫고
'미세한 우세'를 확보하게 하는 결정적인 영적 관문이 된다.
영적 성장의 과정에서
주님을 부르고(주님을 의지하고),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시인하고(인정),
그리고 스스로 하듯 싸우는(투쟁) 등..
이런 일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연쇄 반응이다.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인간의 거듭남은
단순히 주님을 인정하는 수동적 마음가짐에 머물지 않으며
인간이 ‘마치 스스로 행하는 듯한(as if of himself)’
치열한 투쟁의 과정을 반드시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미세한 우세를 누리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이 세 과정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많은 경우 인간은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주시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영적 나태에 빠지거나
반대로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린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싸우지 않는다면
그 어떤 성품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스스로 싸운다는 것은 내면의 악한 생각과 감정을
'나의 생명이 아님'으로 선언하고 그로부터 물러나는 거부의 행위이다.
이 '물러남'의 기술이 부족할 때 인간은 지옥이 불어넣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그대로 함몰되고 만다.
또한 형식적인 시인에 머무는 것 역시 큰 장애물이다.
‘모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그저 도덕적인 수식어로만 여기고 지나칠 때
정작 악과 대면하는 삶의 현장에서는
외부 환경을 탓하기에 급급해진다.
시인이 없는 투쟁은 맹목적이고 투쟁이 없는 시인은 허황될 뿐이다.
따라서 미세한 우세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영적 과정을 정교하게 통합하여 수행해야 한다.
첫째 '주님 부르기'를 최적화하여
주님과 즉각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압박이 느껴지는 그 찰나에
주님을 향해 영혼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기도는 거창한 언어가 아니라
‘주님 지금 이 압박이 나를 덮칩니다.’와 같이
상황을 주님께 즉각 보고하는 영적 정직함에서 시작된다.
둘째 '시인하기'를 통해
사실관계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나의 노력과 주님의 은혜를 명확히 구분하여
‘악을 거부하는 행위는 나의 선택이지만
그 거부할 힘은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정해야 한다.
이는 승리의 공로를 자신의 의지로 돌리려는
자기기만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셋째 지옥의 거친 파도가 밀려들 때,
'물러남(Shunning)'이라는 전략적 이탈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지옥의 세력과 정면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충동이 내 마음의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그 영향력 밖으로 몸을 피하는 전략적인 영적 동작을 의미한다.
지옥의 영들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은
악한 감정에 집중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그 감정의 논리에 함몰되어 씨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과 직접 육탄전을 벌이려 하지 않는 것은
마치 불이 났을 때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안전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흔히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 들면
그것을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곧 나'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그 감정과 뒹굴며 싸우거나
반대로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여기서 '물러남'이란
‘이 생각은 내 것이 아니다.(Not mine)’라고 선언하며
그 악한 자극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생각은 내 내면의 거실에 쳐들어온 외부 손님일 뿐,
내 주인이 아님을 명확히 하는 과정이다.
악한 생각이나 감정이 올라올 때
그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그은 뒤
주의를 주님의 진리(말씀)로 옮기는 생각의 전환이야말로
주님이 허락하신 주체적 투쟁의 핵심이다.
그 실례를 들어보면..
1단계에서는 ‘이 분노(혹은 우울 탐욕)는 나의 본질이 아니다.
이것은 지옥에서 온 자극일 뿐이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고
2단계에서는 즉시 주님의 성품이나 말씀으로 주의를 옮긴다.
‘주님 저를 지탱해주십시오.’라고 짧게 기도하거나
평소 묵상하던 주님의 진리 한 구절을 떠올린다.
그 다음 3단계에서는
내 마음의 거처를 진리의 자리로 옮긴 상태에서
내가 지금 해야 할 마땅한 일(선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물러남'의 기술이란
악한 충동이라는 '어둠의 지형'에서 내가 서 있는 발판을
주님의 '빛의 지형'으로 과감하게 옮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이처럼 민첩하게 영적 지형을 이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시험을 겪을 때 그 압박의 강도에 눌려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은 시험 중에 인간과 함께 계시며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저항할 힘을 공급하신다.
HH 599항에 따르면
악한 영들은 주님이 허용하신 범위까지만 인간을 다룬다.
즉 인간이 느끼는 거대한 지옥의 압박은
사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 내에 있다.
- ‘인식의 전환’이 미세한 우세의 효과를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시험의 압박이 거세게 느껴질 때
자신의 고통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내어놓는 것은 필요하나
그 고백이 나는 이미 패배했다는 절망의 확정으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
대신 ‘주님, 제가 압도당할 만큼 힘겹지만
이 상황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 있으며
주님은 지금도 제게 감당할 힘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라는 믿음의 시인으로 즉시 나아가야 한다.
바로 그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미세한 우세의 실제적 증거이다.
시험의 압박이 거세게 느껴질 때
‘나는 지금 압도당하고 있다’는 현상적 사실을 고백하는 대신,
‘주님께서 내가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나를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하라는 것은
감정의 정직함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지옥의 논리’에 동조하여 자신의 패배를 미리 확정 짓는
‘불신앙적인 고백’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이 두 내용 사이의 긴장 관계를 조화롭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주님, 이 싸움은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은 주님을 향한 ‘겸손의 고백’이자
‘도움을 요청하는 믿음의 행위’이다.
이것은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함으로써
주님의 주권을 모셔 들이는 거룩한 항복이다.
반면, 본문에서 경계하는 ‘나는 압도당하고 있다’는 고백은
주님을 향한 호소가 아니라,
지옥이 심어준 절망을 스스로 되뇜으로써
자신에게 ‘패배’를 선언하는 저주의 고백에 가깝다.
이는 상황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에 갇혀 버리는
지옥의 관성적 결합을 강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백의 순서와 본질은
'무력함의 시인'에서 '능력의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솔직한 고통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내어드려야 한다.
그러나 그 고백은 ‘나는 망했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으나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인식의 전환이 단순한 생각의 변화를 넘어
미세한 우세의 실제적 증거가 되는 이유는
이 전환이 지옥의 영들과 맺고 있는 관성적 결합을
물리적으로 끊어내고 주님의 생명을 우리 의지로 끌어오는
결정적인 영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이 인식의 전환이 가져오는 특별한 효과는
다음의 세 측면으로 정리된다.
첫 번째로 인간은 이 인식의 전환을 통해
지옥의 관성 법칙을 무력화하며 자신의 시선을 주님께로 이동시킨다.
압박을 느낄 때 나는 압도당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지옥의 세력에 동조하여 그 관성을 인정하는 행위이며
이는 지옥이 인간을 더 강하게 지배하게 만드는
영적 증폭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인간은 지옥의 관성 속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이 인식의 전환은
지옥의 논리를 내면에서 차단하는 물리적 제동이며
영적 평형을 강제로 회복시키는 강력한 조치가 된다.
인식의 전환이 단순한 생각의 변화를 넘어
'미세한 우세의 실제적 증거'가 되는 이유는
이 전환이 지옥의 영들과 맺고 있는
'관성적 결합'을 물리적으로 끊어내고 주님의 생명을
우리 의지로 끌어오는 결정적인 영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인간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고립된 자아를 탈피하여
주님의 주권 아래로 들어가는 '영적 접속'을 시도한다.
‘나는 압도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나라는 존재를 오직 '지옥의 공격을 받는
수동적 대상'으로 고립시킨다.
하지만 ‘주님이 나를 지탱하신다.’고 시인하는 것은
고립된 자아를 주님의 섭리 안으로 재 편입시키는 행위이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에 따라 시험 중에 주님을 부르는 것은
단순히 마음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나 사이의 통로를 여는 것이다.
이 인식은 주님의 능력이
내 삶의 현실에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접속 코드'이며
그 순간 주님의 저항할 힘이
내 의지를 통해 실질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미세한 우세가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원리이다.
세 번째로 인식의 전환을 통해
인간은 악의 찌꺼기를 비워냄으로써
주님의 선을 담아낼 '빈 그릇'을 형성한다.
인식의 전환은 악을 내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한 분리의 선언이다.
악의 압박을 '내 것'이 아니라
'통제된 외부의 작용'으로 재 정의하는 순간
내면에는 지옥의 영들이 점유하고 있던 공간이 비게 된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인식의 틈새를 뚫고 들어와
당신의 선을 우리 의지에 전유(Appropriation)시키신다.
즉 인식의 전환은 단순히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주권자를 악에서 주님으로 교체하는 영적 교대식이며
이 교체가 이루어지는 순간 인간은 지옥의 세력 위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는 '미세한 우세'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 인식의 전환은
지옥의 지배력을 내 안에서 해제하고 주님의 생명력을 내 의지로
이식하는 능동적인 투쟁의 시작이기 때문에
미세한 우세의 실질적인 발현이 된다.
이는 그러한 행위가 단순히 상황을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장의 주도권을 주님께로 완전히 이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의 한복판에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시선을 돌릴 때
주님은 그 작은 믿음의 몸짓을 거대한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인식은 그저 정신적인 작용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우리 영혼을 당신의 것으로
새롭게 빚으시는 거룩한 접점인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 단순히 일반적인 승리를 넘어
어떻게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옥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과
주님의 섭리가 우리 안에 작용하는 세밀한 원리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지옥의 영들은 인간의 의지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주 미세하고 집요한 관성의 힘을 사용하여
인간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악의 궤도 안으로 끌어당긴다.
이 관성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일상적인 통로를 따라 흐르기에
우리는 그 압박이 외부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서서히 침식당한다.
바로 이러한 지옥의 미세한 침투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거창하고 화려한 영적 승리가 아니라,
그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섬세한 차원의 영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가 시험의 압박 속에서
나는 압도당하고 있다는 현상적 판단을 멈추고
주님께서 나를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 아주 짧은 찰나의 멈춤이 발생한다.
이 멈춤은 지옥이 짜놓은 악한 관성의 궤도를
물리적으로 이탈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옥의 세력은 우리가 자신들의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낙심하고 불안해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시인하는 그 미세한 결단을 내릴 때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의 의지를
자신들이 설계한 방향으로 굴절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 작은 인식의 전환이 바로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지옥의 거대한 폭풍을 당장 멈추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아니라,
폭풍의 중심에서 중심축을 주님께 고정함으로써
지옥이 우리를 마음대로 흔들 수 없도록 만드는
유일한 균형추가 되기 때문이다.
미세한 우세라는 말은
지옥의 세력과 인간의 연약한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영적 무게의 미묘한 이동을 뜻한다.
지옥은 인간의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어 교만하게 하거나,
혹은 인간의 무능함을 극대화하여 절망하게 함으로써
투쟁의 주도권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그 미세한 틈새를 확보할 때,
지옥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우리를 무너뜨릴 힘을 잃어버린다.
인식의 전환은 바로 그 틈새를 창조하는 일이며,
이 틈새야말로 지옥의 거대한 파도가 우리라는 존재를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아서는 견고한 방벽이 된다.
따라서 이 전환은 승리를 향한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지옥의 영향력이 우리 의지의 지배권을 온전히 탈취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섬세하고도 치열한 저항의 현장인 것이다.
결국 인식의 전환이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의 의지로 유입되는
실질적인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지옥이 허용한 한계를 넘지 않도록
우리를 지탱하고 계시며,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시인할 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악에 저항할 힘은
우리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은 너무나 미세하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감각적으로도 즉각적인 평온을 주지 않을지 모르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지옥의 관성을 끊어내고
주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거대한 전선의 이동과도 같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 미세한 우세는
지옥의 결박이 풀리고 천국의 생명이 우리를 다시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영적 신호이며,
그 작은 고백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지옥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주님의 승리 안으로 거듭나게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옥을 단번에 멸절시키는 능력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우리를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주님의 손을 붙잡는 그 미세한 결단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고
주님의 지탱하심을 인정하는 그 작은 인식의 순간,
주님께서는 그 틈을 통해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우리 영혼에 흘려보내신다.
그것은 지옥의 거대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가냘프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의 빛이며,
우리가 그 빛을 인식하고 시인하는 한
지옥은 결코 우리라는 영혼의 정원을 완전히 점령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미세한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고귀하고도 강력한 실체인 것이다.
- ‘인식의 전환’은 지옥의 영향력을 이겨내는
섬세하고도 치열한 영적 저항이다.
그리고 인식의 전환이 왜 단순히 일반적인 승리를 넘어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옥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과 주님의 섭리가
우리 안에 작용하는 세밀한 원리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지옥의 영들은 인간의 의지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주 미세하고 집요한 관성의 힘을 사용하여
인간이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악의 궤도 안으로 끌어당긴다.
이 관성은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일상적인 통로를 따라 흐르기에,
우리는 그 압박이 외부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서서히 침식당한다.
바로 이러한 지옥의 미세한 침투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거창하고 화려한 영적 승리가 아니라
그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더 섬세한 차원의 영적 대응이 필요하다.
AC 5990:3
‘균형이 악으로 기울 때
주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을 통해 그것을 회복시키시며,
선으로 기울 때 그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해 유지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시험 중에 느끼는 압박이
'기울어진 평형 상태'임을 명시한다.
우리가 주님을 호출하여
'주님의 지탱하심'을 시인하는 인식의 전환을 행할 때,
주님은 우리 내면의 '진리'를 통해 기울어진 균형을 다시 맞추신다.
여기서 '미세한 우세'란 평형 상태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개입하여 악으로 기우는 관성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그 미세한 평형의 복원을 의미한다.
스베덴보리의 저 가르침에서처럼
우리가 시험의 압박 속에서
나는 압도당하고 있다는 현상적 판단을 멈추고
주님께서 나를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 아주 짧은 찰나의 멈춤이 발생한다.
이 멈춤은 지옥이 짜놓은 악한 관성의 궤도를
물리적으로 이탈하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옥의 세력은 우리가 자신들의 속도에 맞춰
끊임없이 낙심하고 불안해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주권을 시인하는 그 미세한 결단을 내릴 때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의 의지를
자신들이 설계한 방향으로 굴절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 작은 인식의 전환이 바로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지옥의 거대한 폭풍을 당장 멈추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아니라,
폭풍의 중심에서 중심축을 주님께 고정함으로써
지옥이 우리를 마음대로 흔들 수 없도록 만드는
유일한 균형추가 되기 때문이다.
‘미세한 우세’라는 말은
지옥의 세력과 인간의 연약한 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영적 무게의 미묘한 이동을 뜻한다.
지옥은 인간의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어 교만하게 하거나,
혹은 인간의 무능함을 극대화하여 절망하게 함으로써
투쟁의 주도권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고 흔든다.
이때 기억해야 할 사실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가르친다.
AC 760:2
‘주님은 악한 영들이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는데,
만일 그들이 더 강하게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인간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주님이 정하신 한계 내에서만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압박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 내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시인하는 '주님이 지탱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지옥이 가진 거대한 폭력성보다
주님의 제어권이 아주 미세하게라도 앞서 있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 '미세한 앞섬'이 곧 우리에게 확보되는 미세한 우세의 실체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그 미세한 틈새를 확보할 때,
지옥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우리를 무너뜨릴 힘을 잃어버린다.
인식의 전환은 바로 그 틈새를 창조하는 일이며
이 틈새야말로 지옥의 거대한 파도가 우리라는 존재를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아서는 견고한 방벽이 된다.
그러므로 이 전환은 승리를 향한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지옥의 영향력이 우리 의지의 지배권을 온전히 탈취하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섬세하고도 치열한 저항의 현장인 것이다.
결국 인식의 전환이 미세한 우세의 증거가 되는 것은,
그것이 주님의 생명이 우리 영혼의 의지로 유입되는
실질적인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AC 4299:3
‘주님은 내적 자아를 통해 흘러 들어오시며, 이 유입을 통해
그가 개혁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자유의 상태로 유지하신다.’
주님의 유입은 인간의 의지를 강제로 조종하는 거대한 파도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자유의 상태'를 유지해 주는
아주 정교하고 미세한 흐름이다.
지옥이 과거의 습관을 통해 의지를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때,
주님은 내적 자아를 통해 아주 미세하게 당신의 생명을 흘려보내신다.
인식의 전환을 통해 그 유입을 시인하는 행위는
지옥의 강압보다 주님의 이 부드럽고 미세한 흐름을 선택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주님의 섭리가 지옥의 관성을 이기는
결정적인 '미세한 우세'가 된다.
주님께서는 지옥이 허용한 한계를 넘지 않도록
우리를 지탱하고 계시며,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시인할 때
주님의 저항할 힘은 우리의 의지를 통해
비로소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이 과정은 너무나 미세하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고
감각적으로도 즉각적인 평온을 주지 않을지 모르나,
영적인 차원에서는 지옥의 관성을 끊어내고
주님의 주권을 확립하는 거대한 전선의 이동과도 같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 미세한 우세는
지옥의 결박이 풀리고 천국의 생명이 우리를 다시 다스리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영적 신호이며, 그 작은 고백을 통해
우리는 매 순간 지옥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주님의 승리 안으로 거듭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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