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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때 농사짓는 고향친구8명과 50년대 초등학교 모교를 찾아 하루를 보낸 일기입니다.
그 시절 사진과 함께했는데 파일용량으로 사진은 생략하고 글만 옮긴니다 .
◘1950년대 6년의 초등학교추억을 모교에서 술잔에 담아보다.(카페용)
가을은 결실의 계절 서글픈 계절이라는데 가끔 내 인생도 이제 가을임을 느끼게 되니 영혼은 천 년 전의 먼 옛날로 돌아 갈 때가 있다.
인생이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고 했으니 억겁의 세월을 생각해보면 어제가 모여 이룬 먼 역사나 내일이 줄서있는 기나긴 미래의 어느 때도 오늘만큼 소중한 날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가끔 먼 옛날 사람들을 비롯해서 새와 짐승 달과 별 고향산천 등 나와 연분이 닿았던 세상 모두와 벗이 되어 함께 술을 할 때가 있는데 그보다 더 좋은 술자리가 없다. 그럴 때는 언제나 술 벚이 되는 스승이 한 분 계신다.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안록산 난에 적군 포로가 된 후 탈출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6급 관직을 얻어 나라에 봉직하던 중 대 기근이 일어나 백성을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미움을 받고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 후 곡강을 중심으로 세상을 유랑하며 자연과 술을 벗 삼아 일생을 살아가며 많은 시를 남기셨다. 계급이 나와 비슷하고 삶의 생활철학에 공감해서 더욱 존경하고 싶은 1300년 전의 그 유명한 두보(杜甫)님이시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인생 칠십 살기는 예부터 드믄 일이라네
세추물리순행락(細推物理順行樂:사물의 이치 잘 살펴 마땅히 즐겨야 하리니
주채심상행처유(酒債尋常行處有:가는 곳마다 술빚은 으레 있으나
하용부명반차신(何用浮名絆此身:헛된 명성으로 이 몸 얽어 맬 필요 있을거나…⌟
이런 저런 일들에서 술이 생각 날 때가 있는데 요즈음은 추억이 그리워질 때 술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의 나로부터 과거가 멀면 멀수록 망각에서 사라져 간지 오래된 일일수록 다시 떠오르면 더 가까이 있는 듯하며 친하게 느껴진다. 돈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술의 멋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성과 의지를 발휘하며 살아있는 모든 사람이나 사물에 영향을 끼치는 영혼의 작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보님은 술과 자연을 벗 삼아 자신만의 생활철학으로 삶의 뜻과 의미를 시로 남겼으니 13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내 삶에 스승이 되고 있지 않은가! 두보의 일생이 내게 주는 교훈은 살아가면서 끝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노력해서 무엇을 남긴다면 영원을 살아가는 진리를 터득하게 될 것이라는 묵시록이다. 두보가 술값으로 저당 잡힌 옷과 외상값은 시대를 초월한 온 세상 사람들(나도 그 중 한명)이 두보에게 갚아야 할 빚이 되고 있다. 지금은 두보의 모습이 아련하게 보일 뿐이지만 술자리에서 두보가 생각나면 나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되어 이렇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생각해보면 과거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었고 오늘의 삶을 싱그럽게 하고 내일의 삶을 계시해 주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올해는 420년 전 壬辰倭亂이 일어나고 5년 후 다시 왜군이 침략했던 정유재란의 해! 60년 전이나 420년 전이나 한 개인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는 지나고 나면 모두가 그립다. 지금의 내 삶을 뜻있고 행복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잃어버린 과거의 좋은 추억을 회상하여 다시 한 번 재생해서 연극을 해보고 있을 때다. 말(馬)을 기르고 탈 때가 그렇다. 말 등에 앉으면 옛 사람이 되니까. 해 저물어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갈 때 냇가에 앉아 소월의 시나 헷세의 시를 생각할 때도, 술잔을 들고 두보를 생각하며 세상을 원망할 때도, 잃어버린 청춘을 달래보려는 억지를 부릴 때도 술은 좋은 벗이다. 나는 가끔 전환점이 되었던 지난날 인생을 3~6년 단위로 묶어 회상해 볼 때가 있다. 그 중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시절을 꼽는다면 초등학교 시절이다.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이 그리워서 얼마 전 추석 연휴 동안에 모처럼 초등학교 모교를 찾아갔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7명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모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술과 함께 그 때 그 시절의 옛 추억을 한 결 같이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워가니 해가는 줄 몰랐다. 우리들은 나이를 잊은 채 동심의 그 때 그 시절 國民학생으로 돌아간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의 후유증으로 뒤따른 나라 불안과 가난 등 불행의 시작에서부터 대한민국이 자라면서 겪어온 파란만장한 역사와함께 우리는 여기까지 나란히 걸어 왔다. 1950년대에 國民학교 6년을 보낸 우리는 古代, 近代, 現代를 다 구경하고 겼으면서 걸어온 인생길이다. 상투머리 댕기와 흰옷 짚신에 부싯돌 호롱불과 컴퓨터 시대를…. 나의 어린 시절은 전쟁과 전쟁 후 모든 것이 부족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다. 그러나 민족 고유의 전통을 이어받아 내려온 인정과 사랑으로 정을 나누면서 이겨 낸 시절이었다. 어린 우리들은 나라의 불행이나 부모의 고생 등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철없이 놀면서 학교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룬 듯 좋아했다. 그 시절 부모 세대들 또한 자신들의 불행을 자녀 교육으로 보상받으려고 모든 희망과 꿈을 오로지 학교에만 기대했다. 꿈과 희망은 언제나 고달픈 생활을 이겨 낼 수 있는 최선의 무기라는 것을 부모님도 아이들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같은 처지의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즐거움은 유년기 7년 동안의 단조롭고 지루한 생활에서 해방되어 좋았으며 교실과 운동장에서 새롭고 신비한 모든 것을 나날이 배워가는 호기심과 보람 또한 신나기만 했으니 학교는 정녕 꿈과 희망의 샘터였다. 나의 국민 학교 시절에는 운동장모퉁이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미군이 원조해준 우유와 옥수수로 배급받아 점심을 해결하였다. 막막하고 움 추렸던 생활은 학교에서 용기를 얻어 희망을 쌓아가며 이겨냈었다. 소풍 운동회 웅변대회 농촌 일손 돕기 무엇이든 배워야 산다면서 열과 정성을 다하며 학교생활에 열중했다. 운동회를 앞두고는 일본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온 운동종목에 전쟁에서 군인들이 부르던 군가로 응원을 하며 연습을 했다.“휘날리는 태극기는 우리들의 표상이다…. 무찌르자 오랑케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적이 로구나…. 태평양 큰물기슭 대륙 동녘에 우뚝 솟은 백두산 민족의 정기 우리들은 3천만 민족의 태양 우렁찬 종소리에 모두 일어서 영원히 이어나갈 터전을 닦자…등등”나는 그 때 산 넘고 물 건너 10리길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었다. 10리길 신작로를 등하교 할 때는 허름한 군복과 깡통 찬 거지들을 만나거나 가끔 보리밭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들짐승과 부딪힐 때 그리고 하교 할 즈음 어두워지면 늑대와 부엉이 울음소리에 무섭기도 했다. 결석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부모님 당부로 꼬박꼬박 다녀서 6년 개근상을 받았다.
봄이면 밀 보리밭길 따라 보리피리 불며 종달새와 뻐꾸기 매미의 노래 속에 학교를 다녔다. 밀보리가 익어갈 때는 보리깜부기를 여학생에 터트리는 짓궂은 장난도 가끔 하면서…. 그 시절 5학년 6학년이 되면 보리 베기 모내기와 벼 베기 등 원 농사 지원을 가기도 했다. 할당된 쥐꼬리를 못 내어 무 뿌리를 재에 묻혀 내기도 했지만 쥐는 계속 번식했고 민둥산에 묘목도 열심히 심었지만 삼천리강산은 좀체 푸르지 않고 계속 민둥산이었다. 운동장 모퉁이에서 여학생들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는 몹시 부러워 “나도 저 고무줄놀이에 끼어들어 함께 놀아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여학생이 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올 때 백천냇가에서 구경한 5월 단오 때의 우승황소 씨름대화와 긴 머리 치마옷고름을 휘날리며 그네 타던 천사의 아가씨들 모습이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었는데 까마득한 옛날이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의(衣)식(食)주(住)로 얽매이게 되는 일은 없어도 정(情)으로 얽어놓은 민속놀이는 거의 다 풀어져 세월 속에 사라져 간지 오래다. 그래서 정서적 삶은 메마르고 숭고한 인간애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여름에는 냇가에서 목욕하고 물고기도 잡으면서 자연을 벗 삼아 해가는 줄 모르며 놀았다. 뱀 개구리 꿩 새들과 장난을 치면서 자연과 함께 자라났다. 궂은비 내리던 날은 원두막이나 큰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갑자기 비 내리면 토란잎을 머리에 얹어 거닐기도 했다. 때로는 옆 친구와 고인 빗물을 튕기는 장난으로 동심의 감정을 싹틔우기도 했었다. 운동장 가에 늘어선 수양버들 그늘 아래에서 꼰 뜨기를 하는 것은 한 여름철 피서를 하는데 참 좋은 놀이였다.
가을은 어디에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계절! 드높은 하늘에는 새들의 노래와 구름 조각배… 산과들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오곡백과와 단풍의 물결! 가끔 사과밭을 지날 때는 서리도하고… 우리들은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 구슬치기를 했다.
가을소풍과 운동회는 동경의 요람! 운동회연습은 꿈과 희망을 심어주며 씩씩하고 용기 있는 소년으로, 또래들과는 친한 어울림으로, 자신의 숨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운동회는 가장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참교육이 되었으며 그 지역민족의 잔치가 되었다. 온 면민이 운동회에 참가해서 구경도하고 동네 대항도하는 등 그야말로 전쟁 후 움 추린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며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청년들끼리의 싸움도 잊혀 지지 않는다.
소풍(원족)가서 보물찾기와 수건돌리기 닭싸움 등 즐겁게 놀다 야외서 먹는 도시락(밴또)은 소풍의 진미인데 김밥과 삶은 계란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기는 마찬가지!
겨울이오면 놀이는 더 많았다.
논이나 냇가에서 얼음지치기를 하고 양지바른 언덕에서 연날리기 팽이치기 재기차기 등… 눈이 오면 산에서 토끼도 잡고 골목에서 눈사람도 만들고 대나무 활을 쏴서 새도 잡았다. 세월 속에 묻혀버린 이런 놀이는 그 시절 고난과 역경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추억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라도 구경하기가 힘들다. 6년 동안 형설의 공을 쌓고 졸업을 하는 날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의 졸업노래와 답사 송사를 할 때 여학생들은 한없는 눈물을 옷깃이나 치마에 흘리고 머슴애들은 졸업장과 상품을 겨드랑이에 끼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학교를 힐끗 힐끗 뒤돌아보면서 교문을 나선다.
모든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학교가 좋았고 친구가 좋았고 선생님이 좋았다. 학교는 희망이 있었고 동무들은 義와 情이 있었으며 선생님은 꿈과 용기를 심어 주시었다. 지난세월이 멀면 멀수록 옛날의 모든 것이 더욱 그리워지고 세월의 품속에서 잠들었던 사연들이 다시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그 때 우리들 소년기 시절은 잡초가 되어 모질게도 살아갔다. 잡초들은 강인하게 살아남아 아름답고 고귀한 꽃과 열매가되어 가면서다. 모든 인생살이에는 괴롭고 슬프고 힘든 일들 속에서도 값지고 아름다운 사연들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먼 훗날 알게 되었으니 그래서 추억은 아름답다 하지 않은가! 이제는 어린 시절과 비슷하게 남아 있는 인생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지난 시절은 생활이 불편했고 힘들고 어려웠기에 오로지 자연에 의지하며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야 했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정과 사랑이 더욱 깊어져 참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먼 훗날 지금에 와서 더욱 또렷이 알 수가 있다. 사람들이 흔희들 이야기가 ‘人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 때 그 초등학교시절을 잊을 수 없으니 오늘을 살아가는데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있어 마음은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애처럼 싱그럽다. “어릴 때는 꿈을 먹고살고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명언은 역시 진리인가 보다.
남은 인생은 소년기 시절처럼 철없이 순진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추억을 회상하면서 마음을 비워가며 그 시절 자연처럼 아름답게 살아가자…
영원이 이어나갈 터전을 닦아보자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 알듯 모를 듯하지만…
세추물리순행락(細推物理順行樂)하용부명반차신(何用浮名絆此身)이다. 술 1잔하자!
60년이 지난 얼마 전 추석 연휴 때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7명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모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그 때 그 시절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담배와 술로 이야기꽃을 피워 책 보따리에 쌓아 둔 뒤 풀어놓은 이야기 거리들이다.
-2017.10.7. 船南國民學校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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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국 최고의 시인 杜甫가 인류의 심리, 자연의 사실을 새로운 감동으로 시로 표현하였듯이
무규 친구의 초등학교 모교 訪問記는 우리들의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는 감동적이며
살아있는 역사로 이해되어 예술작품으로 깊이 느끼고 吟味하며 잘 讀解하였습니다.!!!!!
박무규 동기를 모르는 친구의 댓글 : 글도 좋고 추억도 좋지만 지나온 과거사를 잘도 표현 하셨네.? 혹시 왕년에 국어선생님이나 문학 선생님 같은 기분이 드네요, 어렸던 국민학교 시절부터 전쟁터에서의 고난을 겪으며 아름다운 국민학교의 추억을 소심하고 자세히 생활상까지 표현하기 힘든 사연까지!. 아 정말 소설처럼 써 내려가는 글짜임세가 한번 더 읽고 싶은 충격을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제 자서전을 써내려가야 할판인데... 늘 건강하시고 계속 좋은글 부탁 드립니다,
친구 덕분에 국민학교 시절이 다시 생각납니다.
증등, 고등시절보다 더 오래된 초등시절 추억이 더 생생한 것은 왜일까요?
10리길 학교 오갈때 배가 고프면 감홍시 주워 먹고, 찔레순, 솔순 먹으며 허기를 달래며 학교길 다녔지요.
어렵고 힘들던 그 때가 더 그립습니다.
친구! 좋은 글 자주 올려주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