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기차를 타고 서울 갈 때는 전라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이리를 거쳐야만 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 항구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신도시 이리보다는, 마한 54개국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강했던 목지국이었다가, 백제 온조왕에 의해 통합되면서 금마저로, 그후에는 금마군, 익주 등으로 불렸고, 조선 태종때부터는 익산이라고 불리던 지명이 훨씬 좋다. 1995년 행정구역 대통합으로 옛지명을 되찾은 익산에서 이제는 이리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1977년 11월 11일 있었던 이리역 폭발사고를 기억하는 사람은 익산의 토박이들뿐이다.
유신 치하에서 있었던 이리역 화물열차 폭발사고는 40톤 분량의 다이나마이트를 싣고 광주로 향하던 기관사의 실수에서 빚어진 인재였다. 당시 TV에서는 한국 대 이란의 월드컵 예선전이 중계되고 있었고 근처 극장에서는 하춘화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폭발사고로 이리역 반경 1Km 이내의 가옥과 건물이 초토화되고 59명이 사망했으며 1,3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극장에서 하춘화를 업고 빠져나온 이주일씨의 일화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리역 폭발사고 30년 후 익산에서 촬영된 장률 감독의 [이리]는 폭발사고 그 자체를 다룬 영화는 아니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부모를 잃고 미숙아로 태어난 진서(윤진서 분)와 오빠인 태웅(윤태웅 분)은 익산역 주변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택시 기사로 일하는 태웅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생 진서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걸핏하면 자신의 여동생을 성욕의 제물로 삼는 동네 남자들과 다투어야만 한다. 진서는 동네 양로원에서 일하고 있고 중국어 학원에도 다닌다. 밤에는 태웅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진서는, 성숙한 몸을 갖고 있지만 미숙한 정신 때문에 많은 남자들의 욕정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 오면 폭발하고 난 다음의 황폐함, 그래서 폭발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는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진정성은,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를 통해 느껴진다. 익산역 주변으로 끝없이 이어진 기차의 선로는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지만, 태웅은 떠날 수가 없다. 택시를 운전하며 항상 길 위에 서있는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동생 진서와 함께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두운 늪과 같아서, 진서는 양노원에서, 찻집 심부름을 간 해병대 사무실에서, 끝없이 남자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태웅은 절망감 속에서 분노하다가 드디어 결심하고, 진서를 데리고 바다로 간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진서가, 타락한 도시에서 어떻게 부대끼는가를 바라보는 장률 감독의 시선은 [이리]에 나타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냉정하다. 사름들은 대부분 홀로 앉아 있거나 서 있다. 옛사랑을 찾아 양로원을 방문한 노신사(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집행위원장 분)는, 놀이터 의자에 할머니와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다. 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느냐는 질문에, 노신사는 지금 말없는 대화를 수없이 나누고 있다고 말한다. 이리역 폭발사고의 여파로 미숙아로 태어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진서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폭발은 끝나고 한 바탕의 소란이 지나갔지만 그 고통은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지속된다.
[중경]과 쌍동이 작품인 [이리]에도 소통 부재의 현장이 등장한다. 태웅은 집에 오면 정성스럽게 하얀 종이로 건물을 만들어 모형도시를 세운다. 그것이 그의 꿈이다.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동생,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삶은 그를 절망속으로 내몬다. 그가 만드는 하얀 도시는 그의 현실과는 반대되는 밝은 세계이지만,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텅 빈 모형일뿐이다. 익산에서 일하는 이라크 불법 노동자는 진서를 추행한 범인으로 몰려 경찰서에 끌려가고, 진서에게 더러운 욕망을 품었던 노인은 스스로의 욕망이 부끄러워 나체로 목매달고 자살을 한다. 자신의 삶에 분노하며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진서는 이 거대한 세계의 변방으로 밀려난 비주류 인생이지만,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영화 [중경]의 주인공인 쑤이(궈커이 분)가 익산에 도착하는 것은, 소통을 향한 첫 걸음이다. 진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배운 서툰 중국어로 말을 건넨다. 인구 3천만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고의 거대도시 중경에서 타인들과의 진정한 소통부재로 고통 받던 [중경]의 여주인공 쑤이는, 자신이 가르치던 북경어 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김씨의 고향 이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희망일까? 장률 감독은 서툴게 희망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어쩌면 쑤이는 중경에서보다 더 심각한 소통장애에 빠질지도 모른다. 중경에서보다 더 타락한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쌓여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
김치 행상을 하며 어린 아들과 힘겹게 살아가는 연변의 조선족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망종]으로부터 장률 감독의 [이리]는 조금 벗어나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절제되면서도 씨줄 날줄로 얽혀 있고, 그 응축된 힘이 무섭게 표현되었던 [망종]의 미덕과는 다르게 [이리]는 파편적으로 흩어진 각 에피소드들이 긴밀한 내적 상관관계를 갖고 대비극으로 확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외면적으로 드러난 삶의 형상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응시하는 장률 감독의 시선은 더욱 깊어졌다. 진서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까지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