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서생포 왜성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간절곶'에 들렸다. 간절곶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이에 관해서는 포항의 '호미곶'의 일출이 더 빠르다는
주장도 있으나 아마 울산의 간절곶이 맞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거는 나의 홈페이지ㅡ다음 카페 '삼덕동집'의[글방(2)]에 실려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맑게 개인 날 간절곶의 푸른 하늘과 바다는 여행객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하루 종일 안내역을 맡아 수고해준 삼성석유화학의 이장근 팀장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양산 통도사(通度寺)로 향했다.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 중 불보사찰로 불리는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
(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선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면 먼저 적멸보궁을 대하고
금강계단을 접하게 된다.
본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은 금강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기 때문인데
주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진신사리를 안치한 부도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온 이후 나는 통도사를 5차례도 더 온 것 같은 데, 그때 마다
이 본당 주변만 들러보고 돌아갔다. 그런데 안내를 맡은 이 팀장의 배려로 13개 암자중에도
유명한 극락암(極樂庵)을 방문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이 부장은 미리 주선하여
극각암의 반산(盤山) 스님을 만나 차 한잔까지 대접 받을 수 있게 해 놓았던 것이다.
극락암은 선원으로 사용되는 곳으로 일찌기 근세 한국의 고승이자 선지식인 경봉(鏡峰)선사가
기거하셨던 삼소굴(三笑窟)이 곁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먼저 극락암의 사진부터 찍었다. 극락암의 현판 아래의 무량수각(無量壽閣)이란 글자는
추사(秋史)의 글씨다.
극락암의 오른 편에 있는 삼소굴의 모습이다.
반산 스님의 안내로 들어가본 삼소굴의 전경(前景)
방장(方丈)이란 글씨는 경봉 스님의 친필이고 내리닫이 글씨는 경봉 스님의 오도송
건물의 내부에도 들어가보았으나 사진은 찍지 않았다.
여기서 잠시 경봉 스님에 관해 언급해야겠다.
경봉(鏡峰) 스님(1892~1982)의 속성은 광주 김씨. 속명은 용국(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諡號)는 원광(圓光). 경상남도 밀양출신. 아버지는 영규(榮奎)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이다. 7세 대 밀양의 한학자 강달수(姜達壽)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난 뒤 1907년 6월에 출가하여 통도사 성해(聖海)의 제자가 되었다.
1908년 3월 통도사에서 설립한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9월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청호(淸湖)를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1912년 4월 해담(海曇)으로부터 비국와 보살계를 받은 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불경연구에 몰두하였다.
하루는 불경을 보다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어치의 이익이 없다
(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라는 구절에서 큰 충격을 받고, 참선공부를 하기 위하여
내원사(內院寺)의 혜월(慧月)을 찾아 법을 물었으나 마음 속의 의문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해인사 퇴설당(堆雪堂)으로 가서 정진한 뒤,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석왕사(釋王寺) 등 이름난 선원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이때 김천 직지사에서 만난 만봉(萬峰)과의 선담(禪談)에 힘입어 '자기를 운전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주인'을 찾을 것을 결심하고,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화엄산림법회(華嚴山林法會)에서 법주(法主) 겸 설주(說主)를 맡아 철야로
불사하고 정진하던 중, 4일 만에 천지간에 오롯한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물(一物)에 얽힌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스스로 점검하고
다시 화두(話頭)를 들어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스님의 36세 때 일이다.
1930년 2월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의 원장으로 취임한 뒤부터 50여년 동안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하였다.
1935년 9월에는 통도사주지, 1941년 3월에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국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이사장, 1949년 4월에는 다시
통도사주지를 역임하면서, 전국의 선승들을 지도하여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호국선원(極樂護國禪院_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법을 구하러 찾아오는 불자들을 지도하였고,
동화사(桐華寺)·내원사(內院寺) 등 여러 선원의 조실도 겸임하여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언제나 온화함과 자상함을 잃지 않았고,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꾸밈없는 활달한 경지에서 소요자재(逍遙自在)하였으므로 항상 열려진 문호에는 구도자들이
가득하였다. 82세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다.
90세의 노령에도 시자(侍者)의 부축을 받으며 법좌에 올라 설법하였는데,
매회마다 1, 000여명 이상의 대중들이 참여하였다.
이상은 경봉 스님의 약력 소개에서 퍼온 글인데, 스님은 한마디로 현대의 고승이자,
수십년간 통도사를 대표해오신 선사임에 틀림없다. 오늘 어떻게 시절 인연이 닿아
스님 살아 계실 때 시자(侍子)로 모셨다는 반산 스님의 안내로 극락암과 삼소굴에서
대선사의 자취를 살피고 또한 반산 스님과 대면하여 차 대접을 받으며 몇 마디 대화도
나누는 기회를 가졌으니 대단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몇 마디 대화가 오고간 뒤 한 말씀 여쭈어봐야겠다싶어 불교의 '깨달음'에 관해 평소의
의문을 털어 놓았다.
'불교, 특히 선종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하여 참선을 통한 견성성불을 강조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깨달아 성불하는 경우는 극소수의 상근기의 사람에 한정되는 것이고
대다수의 중생들은 도저히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텐데 이 점에
관한 스님의 견해는 어떠하시냐'라는 우문(愚問)을 던졌다.
이에 대해 반산 스님의 답변 요지는
'도를 깨치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길은 꼭 힘들고 어려운 참선을 통해서만 달성가능한 것은
아니다. 참선 이외에도 염불이라든지, 각자 나름대로 성불을 위한 지극정성의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성불이나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 이 극락암은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누구나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이나 '나무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고난에서 벗어나고
극락에도 왕생할 수가 있다는 것은 이미 경전에서 보듯 석가여래 말씀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봉 스님도 선종에 국한하지 않고 통불교(通佛敎)의 입장을 취하셨다.'라고 하였다.
사실 나는 이런 답변이 나올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찌기 통일신라 시대의
원효대선사도 큰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중생 교화에 진력하였고 말년에는 아미타불을
신봉하는 정토종에 경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중국 불교인 선종(禪宗)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이후에는 조계종을 비롯한 교계의 흐름이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표어로 하여 정진하는 것이 현실이긴 하나,
중생의 생로병사 해결을 위해서는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또는 지장보살에 의지하려는
중생의 소망에 응답해야 하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확인한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해졌다.
암자를 물러나오면서 반산 스님과 기념촬영을 했다.
영축산을 다시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들어
잠시 경봉스님이 평소 사형사제의 관계가 남달리 가깝고도 깍듯했다고 전해오는 송광사의
구하(九河·1872~1965)스님과 함께 지은 것으로 알려진 ‘통도사’라는 선시(禪詩)를 떠올렸다.
영축산 천연의 성지
쉬어 간 이 그 몇인가
구름은 산 너머로 흘러가고
달은 솟아 동구에 떴네
맑은 눈빛은 바다처럼 푸른데
티끌세상 한갓 헛된 꿈일세
고금의 참 면목이여
벼랑 아래 물 언제나 맑게 흐르네
경내를 나오면서 옛날 50년전 수학여행 왔을 때 학우들과 같이 사진 찍고 놀았던 돌다리를
바라보았다. 그 때 그 친구들, 지금 다 어디로 갔나? 내 가슴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어느듯 저물어 가는 석양을 뒤로 하고 서둘러 울산공항으로 달려가 트랩에 올랐다.
첫댓글 중학교 3년대 수학여행을 다녀 왓던 기억외에 사춘기 시절 가끔 들리던 곳이라 반갑게 추억 해 보았습니다. 오랫만에 잊었던 통도사 경봉스님의 글이랑 모든것 마음에 담고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