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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1일 [연중 제16주일]
미카 2,1-5 마태오 12,14-21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1일 [연중 제16주일]
복음: 마르 6,30-34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 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6주일 강론>
(2024. 7. 21.)(마르 6,30-34)
<피정>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0-34).”
1)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활동을 마친 제자들이 ‘기뻐하며’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0,17), 열두 사도의 경우에도 그렇게 ‘기뻐하면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박해도 받았을 것이고,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정신적으로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겠지만,
육체적으로는 체력이 모두 소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돌아와서 보니, 예수님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쁘게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사도들은 자기들만 쉴 수는 없었을 것이고, 쉬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도와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쉬면서 힘을 재충전할 수 있도록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라고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만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즉 신앙인들을 혹사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할 때에는 쉬라고 명령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과 함께 가셨기 때문에,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는, “우리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외딴곳’은 사람들이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사도들의 휴식을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일’을 잠시 멈추셨습니다.
<사람들을 ‘버리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2) 예수님께서 잠시 ‘일’을 멈추신 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당신도 쉴 수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과 지금의 상황은 모순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6-18).”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안식일이라고 해도...”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는다.
안식일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러니 나도 안식일을 ‘초월해서’ 일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지, “나는 휴식이 필요 없다.”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는 휴식이 필요 없겠지만,
사람이신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잘 때가 되면 자야 하고, 먹을 때가 되면 먹어야 하고, 일하다가 지치면 쉬어야 하고...>
3)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쉬는 일”을 우리 교회는 ‘피정’이라고 부릅니다.
피정은 잠시 ‘일’을 멈추고 쉬는 ‘휴식 시간’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새 기운을 얻는 ‘재충전 시간’입니다.
그 새 힘은 하던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력의 한계가 있고,
힘을 재충전하지 않으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다가 너무 지쳐서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까지 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잘 달리는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들러서 기름을 넣어야 합니다.
잠시 주유소에 들르는 것은 달리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 아니라, 더 잘 달리기 위해서 힘을 충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전례나 기도에는 피정의 성격도 들어 있습니다.
좋은 예가 ‘주일미사’입니다.
한 주간 동안 인간 세상에서 힘들게 살다가 주일에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하는 것은, 일을 멈추고 피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미사를 통해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 힘은 다음 한 주간을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살아갈 힘을 재충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은 그 힘을 받지 못해서, 점점 힘을 잃다가 결국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4) 예수님과 제자들이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제자들도 쉴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관점을 바꿔서 그 상황을 바라보면,
몰려든 군중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참된 안식’을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온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참된 안식’을 주실 때, 사도들도 그 가르침을 함께
들으면서 새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