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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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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경주 왕릉 (전신문왕릉-전효소왕릉-성덕왕릉)
추경(승호) 추천 0 조회 159 15.07.01 17:0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삼국통일의 군주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 통일후 안정된 정치사회를 기반으로

태평성대를 이끌어 가는 왕들 이었고 친아들과  형제사이에 왕위가 계승된 것으로 봐서 정변에 의한

정권 교체도 아닌것으로 생각되는데  사후에  조성된 능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네요........

 

전신문왕릉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

 

이 능은 신라 제31대왕 신문왕(재위 681~692)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밑둘레 약92m, 지름 약30m, 높이 약 8m 이다.

봉분 아래쪽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아 호석을 구석하였으며, 그 위로는 갑석을 얹었다.

호석 주변으로는 사다리꼴로 다듬은 44개의 받침석을 받쳐 놓았으며 봉분의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을 두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으며,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한 녹읍을 폐지하여 관료전을 지급하고 지방 통치를 위해

9주5소경 제도를 완성하는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안내판에서 -

 

 

 

이전 시기 다른 왕릉들과는 달리 벽돌처럼 잘 다듬은 치석을 사용하여 지대석 위에 수직으로 쌓은뒤

신라 왕릉에서는 처음으로 개석(蓋石)인 갑석(甲石)을 올렸습니다.

무열왕릉이 괴석 받침석을 사용한 것에 비해 처음으로 정밀하게 가공한 받침석을 사용하였네요.

이 능은 조선 전기까지 효소왕릉으로 전해지고 있었으나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에 의해서 신문왕릉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전효소왕릉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

이 능은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 서쪽에 형제봉의 동남쪽 구릉 끝자락에

있다.  능은 밑 둘레 약67m, 지름 약20m, 높이 약 4.5m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호석을 돌렸으나  지금은 몇 개만이 드러나 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동쪽 가까운 곳에는 성덕왕릉이 있다.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시장에 대한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어 경제력을 확충하고 당나라 일본과 문물을 교류하는등 국력을

키우는데 힘썼다. -안내판에서-

 

이 능은 조선 전기까지 이름없는 고분이었으나 동쪽의 성덕왕릉과 형제라는 이유로 조선영조 6년에

김씨 일족에 의해서 효소왕릉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 전대의 신문왕릉이나 후대의 성덕왕릉에 비해

규모나 장식면에서 상당히 초라하고 태종무열왕릉에 배총된 전김인문묘나 김양묘와 같은 양식인것으로

봐서 성덕왕릉에 배총된 어느 충신의 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성덕왕릉

 

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문무왕-신문왕-효소왕-성덕왕-효성왕-경덕왕

 

 

이 능은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을 모신 곳으로 토함산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 구릉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과의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능은 밑둘레가 약46m, 지름이 약 14.5m, 높이가 약4.5m이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을 받쳐 놓았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십이지신상이 입체로 배치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와 무인석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귀부가 남아 있다. -안내문에서

 

 

 

호석을 면석과 탱석으로 조성하였고 탱석은 삼각형의 받침돌이 받치고 있습니다.

갑석도 호형으로 조성하였고 신라왕릉 최초로 난간석이 등장을 합니다.

 

면석앞에 몇개 보이는 12지 신상은 후대에  환조로 조성하여 설치한듯 따로 노는 느낌이 드네요..

이 이후로 조성되는 왕릉에서는 12지 신상이 탱석에 부조되어 나타나지요

상석도 전대의 전신문왕릉에 비해서 너무도 다른 변화가 나타납니다..

 

 

 

 

 

 

 

성덕왕릉 귀부

귀부는 신라 성덕왕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 받침돌이다. 거북머리는 깨어져 없지만,발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귀부의 가운데에는 비신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거북 등무늬나 당초문은 8세기 전반의 신라 왕릉에 건립된 귀부의 제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신과 머릿돌은 없어졌지만 경덕왕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무열왕릉과 서악동 귀부와는 같은 양식을 하고 있으나 창림사지 귀부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7세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귀부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에서 -

 

 

 

 

전신문왕릉과 성덕왕릉에 비해서  전효소왕릉은 정말 너무 초라합니다.

책에서만 봐서는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실제 가서 보니 차이가 많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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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7.01 21:57

    첫댓글 설명도 잘 해주시고~~
    호기심과 의문은 동급인가요~~~???ㅎㅎㅎ

  • 15.07.15 22:41

    좋은 정보와 상세한 설명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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