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문을 열고 그가 성큼성큼 들어와 마른손을 내민다. 다문 입에 꾸벅 건네는 허리인사나 악수를 청하는 폼이 꼭 전경 같구나, 생각한다. 불쏘시개같이 가는 담배가 재떨이에 쌓여가고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자 이 사람, 미래 같군,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들이 똘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복수 같기도 하다. 아직 4회 분량이나 대본을 써야 하는 그는 처음에, 방송이 끝난 다음 인터뷰를 하면 좋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몇 주간 전화 끝에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만 뺏을게요” 라는 속보이는 거짓말을 믿어주었다. 그때까지는 그 두 시간이 3일간의 동행으로 이어질지 미처 알지 못했다.
“감독과 작가가 같은 박동수로 호흡하는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와 정서, 둘 다 통했으니까요.”
인정옥 작가가 박성수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3월이었다. 박성수 감독이 스티븐 호킹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불치병에 걸린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했을 때 그의 머리속엔 이미 고복수가 내려앉았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려면 처음부터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고. 몇회 분량은 아닌 척하다가 나중에 알리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 1, 2회 대본이 썩 마음에 들었던 감독은 “니 멋대로 하세요”라며 인 작가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대본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수나 미래는 알겠는데 전경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전경은 주변에 널려 있는 캐릭터예요. 맹하게 착하거나, 또순이 같은 역할이 아니라, 익숙하지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오는….” 어차피 스탠더드한 연기에 익숙한 배우라면 제대로 소화하기 힘든 대본이라는 데 동의한 두 사람은 구체적인 대본이 나온 뒤엔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캐스팅을 엎었다. 그리고 “순전히 이미지 위주로” 캐스팅에 들어갔다. 여전히 성장중인 양동근과 이나영, 공효진은 연기자로서의 불안감들이 증폭되어 오히려 불안한 세명의 캐릭터에 착착 감겨들어갔다. 초반엔 연기에 대한 주문을 하는 지문이 많았지만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 빠져들자 특별히 감정지시가 필요한 신 외에는 거의 대사로만 이루어진 대본이 오갔다. “저 역시 처음엔 복수, 경이, 미래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글을 썼는데 요즘엔 양동근, 이나영, 공효진을 생각하면서 써요. 내 머릿속에 이미 복수도, 전경도, 미래도 없어요.”
“방송은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셨나요?” “전 영화 먼저 시작했는데요….”
인정옥 작가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뎠던 곳은 여의도가 아니라 충무로였다. 87학번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 뒤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는 후배의 “3개월이면 끝난다”는 꼬임에 빠져 장길수 감독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스크립터일을 시작으로 이후 여균동 감독의 <포르노맨> 역시 연출부로 참여했다. “여균동 감독이 그때 시퀀스 써내오는 걸 보고 시나리오 써보면 잘 쓰겠다”고 했고 이런저런 연이 닿아 오기민 PD를 만났다. 그리고 오 PD로부터 ‘여고괴담’이라는 제목 하나를 건네받았다. “기획적으로는 단순 호러를 원했던 건데 그렇게 외국영화들을 모방해봐야 정말 무섭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정말 현실적이어야만 가장 현실적이고 소름끼치게 공포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시나리오는 완성되었지만 쉽게 제작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일단 귀신이라 해도 학생이 선생을 죽인다는 설정부터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고 한번 궤도를 벗어난 시나리오는 3년간 ‘우주미아’ 신세로 충무로를 떠돌았다. “돈은 빨랑 벌어야겠고 일은 없고….” 어떤 이가 일주일 뒤면 MBC에서 코미디작가 공채가 있다고 말해주었고 급하게 원서를 내어 1차에 합격했다. 하지만 2차 시험에서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내면서 떨어졌다. 하지만 당시 <환상특급>이라는 드라마타이즈 오락프로그램을 준비하던 PD들은 “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군” 하며 그를 눈여겨보았고 인정옥은 <환상특급>으로 처음 작가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테마게임>을 쓰는 동안, <여고괴담>은 박기형 감독과 오기민 대표를 중심으로 제작에 들어갔다(지금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에 의해, 엔딩크레딧에 시나리오 작가 이름이 빠졌고 오기민 PD는 여전히 그 점에 정말 미안해하고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쓰게 되었다. “의학드라마, 아마도 죽음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극단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삶의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병원은 죽음이 일상화되는 공간이고 그곳에서 의사들은 어떤 것을 느낄까가 궁금했어요.” 하지만 <해바라기> 이후 한참을 쉬었고 그러다가 “방송사에 미리 받은 돈이 있어서, 더이상 도망갈 데가 없어서” 시작한 것이 <네 멋대로 해라>였다.
“다 문제 있는 가정이네요.” “화목한 중산층의 이야기를 내가 왜 해야 하죠?”
“이혼한 친구가 있는데, TV를 보던 아이가, 엄마 우리는 결손가정이야?, 라고 묻더래요. 그전까지 아무런 이상도 못 느끼던 아이였는데 말이죠. TV를 통해 보여지는 중산층의 화목함은 때론 부풀려져 있고 과장되어 있죠. 그런 건 죄악이라고 봐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복수네 집은 어머니가 없는 ‘결손가정’이지만 부자간의 정이 돈독하고, 자매 둘이 살아가는 미래의 집에는 훈풍이 도는 데 비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전경의 가정은 결손과정보다 훨씬 불행한 공기를 안고 산다. 또한 <네 멋대로 해라> 속 가정은 그 역할이 상당 부분 전복되어 있다. “복수아버지는 오히려 보통의 드라마에서 어머니에, 복수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가까워요,” 또한 모든 아이들은 어른을 가르치고 품고 달랜다. “살아온 연륜이 있으면 그 연륜에 의해 누구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하지만 전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세월 동안 얻은 게 과연 전수해야 할 진리들인가요? 그저 살아가면서 잠정적으로 얻은 결론일 뿐이죠. 그걸 정답이라 할 순 없다고 봐요.”
“연애를 많이 해본 분 같아요….” “많이 해봤죠.” (웃음)
“사랑은 유치하잖아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닭살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연애하다보면 누구나 초등학생 같은 행동을 하지 않나요. 말도 안 되는데 삐치고 화내고 달래고 풀리고….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해야 하니까 뭔가 사랑을 늘 고귀하고 어렵고 심각한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경이와 복수가 노는 장면은 가장 초등학생답게 그렸죠.” 복수와 경이 버스정류장 유리에 붙여놓은 편지에 대해 “복수씨가 썼죠?” “아닌데요” “썼죠?” “아닌데요”… 하며 점점 멀어지는 장면은 초등학생이 아니라 유치원 수준에 가깝지만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뿌듯한 웃음을 짓게 된다. 게다가 라이벌 관계인 미래와 경의 관계도 마치 맘에 드는 짝을 뺏기 위한 초등학생의 질투어린 싸움 같다.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 사이에는 교감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봤어요. 다른 운명으로 만났으면 미래가, 너 참 귀여워해줬을 텐데, 하는 대사도 있고….” 양다리를 걸치는 데 꼭 악의만이 있겠냐고,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이전의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은 아닐 거라면서. “미래의 사랑은 규범적이고 안정적이에요. 사람들은 그런 사랑만이 영원하다고 믿죠. 복수에게는 그런 사랑이 맞다고 미래에게 돌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경의 사랑은 불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사랑은 시작되었어요. 사랑이 영원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한때 마음을 울린 것들은 그 시기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니아도 벌써 생긴 것 같아요.” “…신경 안 써요.”
<네 멋대로 해라>의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드라마의 명장면, 명대사를 꼽아낸 글들이 빽빽이 올라와 있고 벌써부터 ‘이 작가가 궁금하다’ 식의 기사도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다. 인정옥 작가의 팬 카페도 있다. 하나하나 떨어뜨려 놓고보면 제법 싱거워지는, 배우들의 입을 통하지 않고는 맛이 없는 인정옥의 대사는 문학적인 강박에서 벗어나 대본은 결국 배우의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글임을 인지시킨다. 때론 비문과 상소리가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때론 해체된 문장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귀에 들어오는 순간엔 그 어떤 시적인 대사보다 큰 감동을 선사한다. “누군가 내 드라마에 교감을 느끼고 즐거워한다는건 분명 신나는 일이지만 작가가 그것에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팬들은 작가가 자신들의 기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사정없이 매서워지거든요. 신경을 쓰다보면 어쩔 수 없이 매이고 그런 것에 얽매이긴 싫어요. 전 언제라도 배신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걸요.”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닌데 배신이 기다려지는 이상한 심리, 갑자기 미래를 향한 고복수의 마음이 온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