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가(長恨夢歌) 이수일(李守一)과 심순애(沈順愛)
노래 / 고복수, 황금심
달빛 푸른 대동간변에 두청춘 남여의 그림자가 있었으니 이는
곧 이수일과 심순애였던 것이였다.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あたみの かいかん さんぼする/ かんいち おみやの ふたりつれ
악수논정 하는것도 오날뿐이요/ 도보행진 산보함도 오늘뿐이다
ともに あゆむも きょうかぎり/ ともに かたるも きょうかぎり
수일이가 학교를 마칠때까지/ 어이하여 심순애야 못 참았느냐/
ぼくが かっこうを おわるまで/ なぜに みやさん またなんだ
남편의 부족함이 있는 연고냐/ 불연이면 금전이 탐이 나더냐
おっとに ふそくが できたのか/ さもなきゃ おかねが ほしいのか
[대사]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야몬드가 그렀게도 탐이 나더냐 에이! 악마! 매춘부!
만일에 내년 이밤 내명년 이밤 만일에 저달이 오늘같이 흐리거던 이수일이가
어디에선가 심순애 너를 원망하고 오늘같이 우는줄이나 알아라
낭군의 부족함은 없지요 만은/ 당신을 외국유학 보내기 위해
おっとに ふそくは ないけれと/ あなたを ようこう さすがため
숙부님의 말씀대로 순종 하여서/ 김중배의 가정으로 시집을 가요
おやの おしえに したがいて/ とみやま いっけに かしずかん
순애야 반병신된 이수일이도/ 이세상에 당당한 의리 남아라/
いかに みやさん かんいちは / これでも いっこの たんしなり
이상적인 나의 처를 돈과 바꾸어/ 외국유학 하려하는 내가 아니다.
りそうの つまを かねにして/ ようこう するよな ぼくじゃない
오! 수일씨!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놓아라 잡으면 찢어진다!
너의 치마는 값 비싼 윷동치마요 나의 즈봉은 단돈 일전에 지나지 않는 골프 즈봉이다.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한발작 씩 뛰어놓는 수일의 모습은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일본 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하여 조중환
(필명 조일재)이 1913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연애소설 《장한몽(長恨夢)》이
1926년에 무성영화로 제작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던 작품을 다시 리메이크하였다.
1931년 대경영화양행이 제작하여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한 흑백 무성영화이다.
이구영(李龜永)이 감독을 하였고 시마다[島田]가 제작을 하고 이명우(李明雨)가 촬영을
하였는데 이 영화에서 처음 이동촬영을 시도하였으며 손용진(孫勇進)이 현상을 맡았다.
이경선. 김연실. 심영. 윤봉춘 등이 출연한 통속영화이다.
1897년 1월 1일부터 5년간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된 미기홍엽의 "금색야우"를
조중환이 번안한 소설. "金色夜叉(금색야차)"는 일본에서 연재가 끝난 후 단행본이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13년 조중환은 이 "금색야차"를 "장한몽"(이수일과 심순애)이란 제목으로 번안하여 매일신보에
연재하였는데 원작을 조금 코믹하게 바꾸어 세태를 풍자함으로써 재미를 더하였다.
이 "장한몽"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신파극의 대표작이 되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무대에 올려졌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김산월과 도월색은 당시 유명한 기생으로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 노래를
취입하였다고 한다.
우리 가요는 1930년 전후로 나온 "황성옛터" "강남달" 등을 그 효시로 하는데 이 번안곡은
그보다 훨씬 먼저 나왔던 것이다.
1897년에 처음 선을 보인 일본 소설『곤지키야샤(金色夜叉)』가 16년 뒤 한국 소설『장한몽(長恨夢)』
으로 다시 태어난다.
『장한몽』은 첫 출발부터가 번안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형태와 내용을 조금씩 달리하면서 변해 온
『장한몽』의 역정 주인공 이수일과 심순애가 걸어온 길은 그대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와 연결이 된다.
일간지『매일신보(每日申報)』에 조중환(趙重桓)이 연재한『장한몽』은 1913년 5월 13일에 제1회를
시작해 흐느끼는 심순애를 걷어차는 이수일의 발길질로 유명한 대동강변 장면을 6월 초에 거쳐서 그해
10월 1일에 119회로 끝을 맺었다.
근 다섯 달 동안 연재가 진행되면서『장한몽』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연재가 끝남과 동시에 단행본도
출간되어 화제를 이어 갔다.
또 2년 뒤인 1915년 5월에는 역시 조중환이 펜을 든 속편이 다시『매일신보』지면에 등장해 전편보다
더 긴 분량으로 연말까지 연재되기도 했다.
"장한몽"이 1910년대 한국 극계를 풍미하고 있던 무렵 원작『곤지키야샤』의 주인공 "간이치"와 "오미야"
또한 지면을 넘어 극장 무대에서도 일본 대중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1918년에는 길거리에서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엔카시들이 만든 연극 주제가가 발표되어
큰 인기를 끌었고 이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한국으로 건너와서 "장한몽가"라는 노래로 유행하게
되었다.
"熱海の海岸散步する 貫一お宮の二人連れ"를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 이수일과 심순애의 양인이로다"
로 충실하게 번안한 "장한몽가"는 이미 1920년부터 당대의 인기곡으로 많은 노래책에 수록되었고 1925년
이후 음반으로도 수차례 발매되어 "장한몽"이 대중가요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데에 선구가 되었다.
무대극과 영상을 결합시킨 연쇄극(連鎖劇)으로 1920년 "장한몽"이 첫 선을 보인 이래 1926년 무성영화
"장한몽" 1931년 "수일과 순애" 1959년 "애정과 반항" 1965년 "이수일과 심순애", 1969년 신상옥 감독 판
"장한몽" 1973년 "가버린 사랑", 그리고 1987년 "성(聖) 리수일뎐" 등, 1980년대까지 영화화된 "장한몽"은
확인되는 것만 해도 여덟 편에 이른다.
토종 콘텐츠 "춘향전(春香傳)"이 1920년대부터 21세기 들어서까지 열다섯 번 정도 영화로 만들어진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외래종 가운데에는 "장한몽"을 능가하는 작품이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악귀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며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돈이다.
"장한몽"의 지난 역사는 그 돈을 아예 노골적으로 모든 가치의 우선에 두는 자본주의 체제가 한국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수일은 돈의 위력에 심순애를 빼앗겨 사랑을 잃었고 그 한에 스스로도 돈의 노예가 되었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상실과 상처에 괴로워하는 이들이 지금도 많다
"장한몽"에서 대중의 뇌리에 가장 깊이 각인된 장면이 “수일씨!” 붙잡는 순애와 “놓아라!” 돌아서는
수일의 모습이기는 하나 소설의 결말은 두 사람이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해피엔딩이다.
다소 진부한 감이 있다고는 해도 대중은 그러한 결말에서 언젠가 맞고 싶은 장차 자신의 행복을 미리
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아타미" 해변에 세워져 있는 동상-----
金色夜叉-唄;東海林太郞郞.松島詩子
순애야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란 말이냐" 이수일과 심순애의 비련을 그린
무성영화에서 변사가 외치는 유명한 대사이다.
1913년 소설가 조중환이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장한몽의 주인공인 이들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연극 영화
또는 대중가요로 리메이크되는 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본 도쿄의 남쪽 해안에 있는 전통적인 온천 관광지 "아타미(熱海)"는 도심에서 열차로 1시간 거리에
있어 잠시 다녀가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 바닷가를 거닐다 보면 이수일과 심순애를 만날 수 있다.
애타게 매달리는 순애를 걷어차는 수일의 모습을 묘사한 동상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는다.
신소설 장한몽은 일본작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쓴 연애소설 "곤지키 야샤(金色夜叉)"를 조중환이
번안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오자키는 오랫동안 아타미 온천에 둥지를 틀고 이 소설을 집필했는데 오자키는 그곳에서 토박이 친구가
겪고 있는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듣고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아타미시(市) 지역관광협회는 이 같은 관광자원의 호재를 크게 활용하고 있다.
1986년 지역 유지들에 의해 남녀 주인공 "간니치"와 "오미야"의 헤어지는 장면이 동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그 장소에 있던 소나무에 여주인공의 이름을 부쳐 "오미야노 마츠라" 명명하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또 관광객이 오면 센스가 작동해 이 소설에 대한 가요가 흘러나오게 한다.
"아타미 해안을 산보하는 간니치와 오미야 라는 이 두 사람"........
이렇게 시작되는 옛 노래는 신파 연극 무대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시민들은 아타미를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소설가 오자키를 지역 부흥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해마다 1월17일에는 오자키 축제를 열고 그의 유덕을 추모하며 동시에 관광객들도 불러들이고 있다.
소설의 제목 "곤지키 야샤(金色夜叉)"는 다이아 반지라는 물질적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배신당한 남자 주인공 간니치는 그 후 "금색의 야차" 즉 돈 귀신이 되어 복수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신소설 장한몽은 나라를 빼앗긴 민중의 설움과 김중배에게 농락 당하는 순애를
투영시키고 있다.
번안자가 옛 애인을 위해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순애의 모습에서 민족의 순결 즉 아이텐티티를
지키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결부시켰을 개연성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쨋건 동상 앞에서 두 사람의 포즈를 흉내 내며 기념사진을 찍어대는 젊은 관광객들을 본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도 사랑인 것 같다며 이수일의 따뜻한 가슴으로만은 살기가 힘들다는
현실적인 젊은이들이다.
첫댓글 박물관에 소장되어야할 만큼 오래 된 음악이네요 !
당시의 정서를 느끼보니 신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