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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너 있는 그대로
고창성당 김대영 베드로 신부님
2018.03.20. 저녁미사 강론
+ 찬미예수님
우리는 주일날, 고해성사에 대해서 잠깐 묵상했었구요, 어제 고해성사들을 많이 보셨고, 이제 고해성사에 관한 좀더 마무리 하는 그런 시간을 오늘 가지라고, 독서와 복음에서 정확하게 우리 흐름과 잘 맞는 그런 말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어떤 수사신부님이 사순절 특강한 것을 들었는데... 참 쉽게 설명하시고, 우리들이 아는 내용이지만 편하게 설명을 잘해주셔서 다시 한번 그 신부님의 강론을 토대로해서 제가 조금 덧붙여서 오늘 고해성사에 대한 부분을 매듭짓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데요.... 이 신부님은 ‘돌아온 아들(탕자의 비유)’ 이야기를 중간에 하셔요. 여러분들은 어제 고해성사 보실때에 여러분들이 회개하고 뉘우치고 가서 신부님께 말씀을 드리니까 하느님께서 사제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런 흐름으로 받아들이시잖아요, 근데 그 흐름은 틀린 것은 아닌데 온전히 맞다고도 할 수 없어요. 그것을 이 수사신부님도 ‘돌아온 아들’ 이야기에서 이것을 알려 주세요.
그러니까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이 뉘우쳐서 집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왜 들어가죠?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들어서...’ 들어갔다고 해요. 제 정신이 들었다는 말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가서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 이게 아니에요. 절대로.. 루가 복음 15장에서는 둘째 아들이 뉘우쳤다는 회개했다는 표현이 안나온다는 거에요. 제 정신이 들었다는 말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이제 굶어죽게 생겼어요. 그런데 안 굶어죽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 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회개해서 간 것이 아니었어요. 살려고 간 거지요. 안 굶어 죽으려고.
근데 집으로 오고 있는데 아버지가 아들보다 먼저 아들을 알아봐요. 그래서 버선발로 뛰어 나가시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그 신부님은 이런 부분을 지적하셔요. 짚어내시죠.- 아버지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아들이 뉘우치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용서하셨다는 거에요. 이 순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거에요.
그러면 언제 그 아들이 뉘우치는가? 렘브란트의 '돌아온 아들' 보면은... 아버지 손과 어머니 손... 그려 놓은 것 있잖아요. 그렇게 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 비로소 아들은 뉘우치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아! 뉘우치고 돌아와서 아버지가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는 이미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 들여주고 계셨고, 사랑하고 계셨구나!’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버지 품에 안겨보니까 ‘아! 내가 얼마나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가!’를 거기서 이제 뉘우치게 되는 거에요. 이 순서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 (수사)신부님께서는... 구약에서 보면 하느님 백성이 죄를 짓고 예언자가 나타나서 심판을 선포하고, 그러면 백성이 뉘우치고 하느님이 용서하는 그런 내용이 구약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후기예언서로 갈수록 하느님 백성이 죄를 짓고 예언자가 나타나는데, 먼저 하느님이 용서해 주시고 백성이 뉘우치는... 그런... 순서가 조금씩 바뀌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항상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해주신다는 거지요.
어쨌든 우리도 용서를 체험할 때 많이 변하잖아요? 뉘우칠때는 조금 변하는 것 같은데 다시 도루묵이 돼요. 그리고.... 사랑받을 때 많이 변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체험들이 많은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나누기로 하구요. 오늘은 길어질 것 같으니까 그 체험은 그냥 지나갈게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레지오 하시고 오병이어(무료급식) 하시면서 열심히 수행하시고 열심히 노력하시고 봉사하셔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을 때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지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준비됐을 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신부님 표현대로 하자면, 여러분 안에...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 안에 들어오셔서, 하느님께서 성령의 거처라고 말하면서, 다 치워주시면서 머물겠다는 거에요. 사실 우리가 노력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해서 하느님 자비를 받을 자격을 갖출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어느 세월에, 어느 세월에 이렇게 하겠냐는 거에요. 이게 안된다는 거에요.
저도 어떤 분들 만나면 “아직 준비가 안됐다.” 또... “다 알겠는데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좀 더... 먹고 사는 거 좀 더 해놓고나서 그 다음에 봉사 하겠다.”는 거에요. 저도 그래요. 저도 때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주님,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놀고 술마시고 조금만 더 있다가 철 들겠습니다.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이럴 때가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에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준비와 상관없이 먼저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거에요. 아버지는 지금 기다리고 계셔요. 근데 우리는 그걸 믿지를 못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하느님의 정의는 내가 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만, 하느님께서 마지못해서 조금 들어주시고, 뭐 좀 달라고 막 해야만 마지못해서 조금 축복을 주시는 그런 하느님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 일화를 드셔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하느님이 자비하신 줄은 알겠는데... 내가 고해성사 볼 때 마다 똑같은 죄를 고백하니까 너무 뻔뻔스럽고 고백도 잘 안된다는 거에요. 누군가 교황님께 찾아와서 이런 어려움을 호소를 하니까... 교황님께서 “우리 편에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데 지쳤으면 지쳤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데 지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내 편에서 자격이 있다 없다 이것을 따지지 말라는 거에요, 이 신부님은! 수사 신부님이신데... 그냥 지금 있는 자리, 여기 있는 모습, 지금! 여러분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서 이미 받아주신다는 거에요. 이미 지금 받아 주셨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묵시록 말씀하셔요. “보라. 나는 지금 문을 두드리고 있다. 너희들이 문만 열어주면 들어가서 함께 먹고 마실 준비가 되어있다.” 왜 문을 안 여냐 이거에요. 왜 지금이 아닌... 지금 문을 열라는 거에요. 지금! 괜찮다는 거에요. 너희가 치워서 못 치울 그런 상황이니까 내가 들어가서 치워준다는 거에요. 왜 그것을 못 믿느냐는 거에요. 하느님의 자비를.
여러분들, 이 분이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도 있는 그대로 계시는 분이라는 거에요.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그러면 우리가 그 하느님을 만나려면 우리도 뭔가 잘 살아서 무슨 굴비세트라도 가지고 가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지금 부족하면 부족한 그대로, 죄를 반복하면 반복하는 그냥 그 모습 그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거에요.
근데 이거 잘 안믿어지고 잘 안된다는 거지요.
그러시면서 이분께서... 우리가 그렇게 됐을 때,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하느님과 만났을 때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고 표현을 하세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향과 내가 원하는 그 초점이 맞추어지는 순간, 거기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표현을 하세요. 불치병도 낫고...
그러시면서 나병환자 비유를 드셔요. 길을 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시죠. 그런데 열 사람 중에 아홉 사람은 가고,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거에요. 이 신부님 말씀은 그거에요. 세상에 그 아홉 사람이 감사를 안 했겠냐는 거지요. 그 나병은... 여러분들이 아시잖아요.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지. 사람 취급도 못받았을 그런 천벌을 받은 거 같은 그런 병인데, 그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만나가지고 나았어요. 그러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가는데 마다 얘기하고 “감사합니다. 그 누군지는 모르지만 젊은 분,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을 왜 안가졌겠냐는 거에요. 근데 그 중에 한 사람만 와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렸는데 열 사람이 똑같이 감사했는데... 아홉 사람과 한 사람의 차이가 뭐냐 이거에요.
아....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더라구요. 아홉 명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치유 기적을 만났는데 한 명만 치유기적과 함께 구원을 만났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홉 사람은 치유만 만났구요, 한 사람은 치유도 만나고 구원을 만났다는 거에요. 아홉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만 받고 끝! 그리고 한 사람은 선물을 주신 그 분을 만났다는 거에요.
여러분 선물도 좋지만, 좋은데 선물이 구원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참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선물이 이렇게 좋고 아름다운데 주신 분은 얼마나 더 좋고 아름다울까 하는.. 그런 어떤... 주신 분에 대한 그리움. 그런 부분들... 이것이 구원과 연결된다는 거...
그러면서 이 신부님 표현은 이런 표현을 쓰셔요. “하느님께 자꾸 뇌물을 드리지 말라.” 는 거에요. 여러분,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있잖아요. 뇌물은 ‘Give and Take’에요. 내가 하느님한테 기도하는 것은 뭔가 속셈이 있는 거에요. 꿍꿍이 속이 있는 거에요. 했으니까 달라는 거에요. 선물은 그냥 놓고 가는 거에요. 저는 요즘에 여러분들이 반찬을 막 갖다 주셔서....여러분 그만 주셔도 돼요!
파김치가 3가지가 있는데, 정말 감사해요. 근데 누군지도 모르니 제가 감사하다는 말씀도 못드렸어요.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드립니다. 정말로... 그게 선물이에요. 받을 생각을 안하고 그냥 가시는 거에요. 가만히 놓고 가시는 거에요. 그렇다고 제가 자꾸 갖다달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다는 거에요, 저는. 지금 누군지 모르겠어요. 이것이 선물이에요. 하느님께 왜 뇌물을 드리냐는 거에요. 봉사했으면 끝이어야 되는데... 어쨌든 신부님 표현이 그래요.
그러면서 아오스팅 성인이 하셨던 말씀을 인용을 하시더라구요. 어떤 남녀가 결혼을 하는데 미리 약혼을 했어요. 신랑이 신부에게 약혼반지를 주고 1년 뒤에 결혼하자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이 신부가 반지를 받고 보니까 반지가 너무너무 좋은 거에요.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 반지에 빠져버려서 “준 신랑은 까먹고 준 반지에 마음을 빼앗겼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고 아오스팅 성인이 표현을 해요. 사람들이 막 웃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 선물만.... 우리는 (좋아)하는 거지요.
아! 진짜 그랬어요. 제가 중앙성당에서 보좌할 때 그때는 어린이 미사 때 사탕을 나눠줬어요. 근데 사탕 나눠주기 전에 제가 안수를 해 주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사탕과 안수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잖아요. 사탕은 잠깐 먹고 녹아 버리는 것이고, 이 안수는... 이것은 평생동안 이 아이에게 다가올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이 아이를 정말 하느님의 뜻대로 건강하게 밝게 자라게 해달라는 그 지향을 가지고 성령을 내려달라는 그 안수하고 얼마나 차이가 있어요! 아이들이 그걸 알겠어요. 모르지요. 그러니까 이놈들은 머리 숙이면서 눈은 벌써 사탕에.. 나는 지금 할려고 하는데 이미... 사탕에만 관심이 있는... 안수는 안중에도 없어요. ‘참, 저것이 내 모습이구나!’ 쟤하고 나하고 똑같은 거에요. 참 우스운 일인데 아오스팅 성인은 그게 우리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하느님을 진짜 만나면, 진짜 거기에 빠져들면 기가 막히다는 거지요. 근데 그것을 좋은데, 참 좋은데... 설명할 길이 없다는 거에요. 좋은데 참 좋은데 이 신부님도 어떻게 설명할지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체험들을 많이 말씀하시는데요. 저는 그런 부분들은 좀 생략을 하고...
여러분들이 정말로 삶의 목적이고 기도의 목적이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바로 여러분들이 바라던 행복이 올 것이냐 이거에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그렇다고 보면 여러분들이 지금 마음 속으로 바라고 있는 여러가지 복들은 기도의 목적도 아니고 삶의 목적도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면 뭐냐? 삶의 목적이 뭐냐? 이분이 산상설교의 그 말씀을 하세요.
“저 들에 핀 백합을 봐라. 염려 하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잘 입혀 주신다.”고... 그러니까 내일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내일 걱정은 내일 지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그러시면서 기가막힌 말씀을 이제 하신다는 거지요. 무엇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쪽박 찰 것이다’ 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구하면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나머지 것들도 곁들여서 다 주신다는 거에요. 저 참새한테도, 백합 꽃한테도 다 주시는데, 우리한테 안주시겠냐는 거에요.
근데 거기서.. 이 신부님께서 이걸 강조 하셔요. 그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우리라고 하니까 제가 조금 이런 걱정이 좀 돼요. 여러분 중에도 진짜 수준이 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정말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복(福)에 조금 더 기울어 지신 분들도 계세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오해없이 들으시길 바래요. 어쨌든 평균적으로 볼 때...
하느님을 먼저 찾으라는 것은..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할 때 덧붙여지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는 거에요. 그러나 그것은 덧붙여 주시는 것이지 제일 먼저 찾아야 될 것은 아니라는 거에요. 제일 먼저 찾아야 되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제 자녀들이 찾아오면 반가운 것은 봉투도 드리고 굴비세트에다가 막 사과를 사가지고 오면 반갑겠지요. 그러나 그걸 택배로 보내고 자식이 안와보세요. 1년에 한번 택배로 딸랑 보내고... 그러면 과연 부모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한테 다른 걸 봉헌할려고 하지 말고 나를 봉헌하라는 거에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금 좋다는 거에요. 하느님의 자비를 믿으라는 거에요. 지금 이 모습으로 그대로! 주름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뱃살 있으면, 저처럼 뱃살 있는 그대로를... 그냥 가면 된다는 거에요. 굴비세트를 안들고 가도 된다는 거에요. 물론 굴비세트가 나쁘다는 거는 아니에요. 가져가시면 좋아하시겠지만 그것에 너무나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거에요... 그 (수사) 신부님이 그리 말씀하시더라구요. 제 얘기 아니구요^^!
진짜 하느님은 액면가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이분도 그 장발장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장발장... 제가 주일날 말씀 드린줄 어떻게 알고 이 분이... 그 때 그 마지막에 장발장이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긴데요. “내가 젊었을 때는 미리엘 주교님,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서 하느님의 사랑이 뭔지를 배웠다”고...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가 뭔지를 알았는데... 자기 딸한테 유언을 하는 거에요. 코제트라는 그 딸한테 “너를 만나서는 이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그러니까 미리엘 주교님을 만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뭔지를 배웠어요. 그리고 그 자비를 받았으니까 그 딸한테는 그 자비를 어떻게 베푸는지를 배운 거에요. 그럼 자비가 뭐냐? 이게 중요해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다면, 여러분도 그 자비를 먹었으니까 그대로 그 자비가 먹은 만큼 나온다는 거에요. 먹은 사람만 나온다는 거에요. 사랑과 자비는!
진짜로 나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했다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여러분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긴다는 거에요.
그러면서 마지막 이런 결온을 내리셔요.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렇게 되어있다. 우리가 뉘우치고 막 거룩하게 되어서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은....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먼저 용서해주시고 기다려주셨던 그 자비와 사랑과 구원을 체험한만큼 나는 틀림없이 그만큼 개워낸다는 거에요. 먹은만큼 개워낸다는 거에요. 그것이 뭐냐? 감사라는 거에요. 감사!
마지막 결론이 감사에요!
오병이어의 기적, 성체성사의 기적을 말씀하세요. 예수님께서 그 빵 5개하고 물고기 2마리, 그것이 많아서 감사를 드렸겠냐는 거에요. 아니라는 거에요. 그것은 감사드릴 이유가 아니라는 거에요. 예수님 자신 있는 그대로, 지금 내가 나를 하느님께 내어 놓을 수 있는 그 상태를... 감사하다고 했다는 거에요. 매 미사때마다 우리는 ‘감사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매 미사때마다... 그렇잖아요. 안바뀐다는 거에요.
미사는 감사의 제사라는 거지요. 그러면서 삶의 목적과 기도의 목적은 결국 감사라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뭐 감사할 일도 없는데 뭘 감사하냐고.... 그냥 감사하라는 거지요. 감사하다보면 감사할 일이 생긴다 그러면서... 잘 아시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고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뭐 어떤 이런 논리 있잖아요.
제가 마지막 결론을 내릴께요. 제가 요즘에 상담을 해주는 사람이 몇 분 있는데요. 그분들 중에 한 분은 이런 분이 있어요. 제가 볼 때는 힘들지 않은데.. 힘들긴 힘들어요 그분 수준에서는... 힘들지 않은데 못견디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과거에 좀 전에 어떤 모든 상태를 90 이라는 상태에 있었다면 지금 한 80 정도로 떨어졌어요. 모든 상태... 안좋아진거죠. 근데 제가 볼 때는 아직도 80 이 남아 있는 거고.. 이 사람은 90 이 넘었을 때 좋은 줄을 몰랐어요. 상태가 좋은 줄을 몰랐고 지금 못견디는 거에요. 근데 저는 이것을 견디지 못하면 지금보다 나빠질 확률이 많아요. 그래서 지금 기도하고 견딜 수 있는 상담을 제가 하거든요. 근데 그 사람은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못하지요. 이해를...
이거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지금 여러분들이 힘들잖아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건강도 안 좋고... 근데 하느님께서 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은 뭐냐하면 이미 복을 주셨는데 못누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주신 복을 누리기에도 내가 벅찬데 더 주시겠냐는 거에요. 도저히 여러분들이 감당을 못하니까 하느님이 선물을 줄려고 해도 감당이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감사하지 못하면 더 줄이겠지요. 여러분들이 그 음식물 쓰레기를 다 버리잖아요. 너무 많아서... 근데 더 주시겠어요? 딱 맞게 맞는 만큼 주시겠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시면 지금도 가지고 있는게 참 많아요. 정말 많아요. 여러분.... 이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어디 요양병원에 누으실 수도 있잖아요! 저도 뭐 그것이 몇 년 차이일 뿐이지요. 그러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가진 것이 많아요! 근데 지금 삭신이 아픈 것 때문에 힘들다. 낫게 해달라고.... 근데 사실은 너무도 많이 누리고 있는 거에요.
어쨌든 이 신부님의 결론대로, 여러분들이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지막에 가야되는 곳은 바로 그 감사라고 생각해요. 그 감사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마음... 하느님을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 그리고 나를 있는 존재 그대로를 봉헌할 수 있는 그 자체에 대한 감사에요. 참 좋은데 저도... 설명이 참 부족한 것 같아요.
여러분, 고해성사 보시면서 하셨던 일련의 과정들 다시 한번 정리하시면서 매듭짓고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 길지만 제가 두서없이 설명을 드렸습니다. 필요한 부분들 잘 여러분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사랑한다, 아들아.
사랑한다, 내 딸아!
출처: 묵주의 9일 기도 메일 (오, 나의 주님) http://m.blog.daum.net/santi230/13555207
첫댓글 자매님이 찾아 올려주신 신부님 강론이 가슴을 치고 심장을 아프게 합니다. 너무 좋아요 정말 은혜충만이 받고 나갑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