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산티아고-박응렬의 34일 915km의 까미노-1
지나온 과거가 낡은 비디오처럼 재생되었다
바람의 언덕을 넘고, 메세타 평원을 걸으며,
철의 십자가 앞에서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가장 많이 가는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국경을 통과하는 대표적인 순례길(800-915km)◂스페인 남부의 세비야에서 남북을 횡단하며 로마의 유적들을 감상하고 사색하면 걸을 수 있는 스페인 은의 길(1,000km)◂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비교적 짧은 거리로 소박한 마을과 바닷길을 걷는 포르투갈 길(630km)이 있다.
박응렬은 생강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로 까미노를 하였다.
까미노가 나를 순례자로 만들었다
까미노(Camino) : 길, 일반적으로 ‘순례길’의 의미)는 ‘몸의 길’과 ‘마음의 길’을 거쳐 ‘영혼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이 세 단계를 거치면서 변화가 온다. ‘몸의 길’을 지나 ‘마음의 길’에 해당하는 메세타 평원을 걸으면서 나는 완전히 변했다. 황량한 ‘메세타 구간’에서 지나온 과거가 하나씩 생각나면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즐거움에 눈물이 나고, 아쉬움에 또 눈물이 났다.
지나온 과거가 낡은 비디오처럼 재생되었다. 과거의 나와 새로운 나를 마주하며, 내가 나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나는 그렇게 순례자 모드로 변해버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까미노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 길을 걸으며 지난 60년 인생이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가슴 속 깊이 뿌리 내린 무게를 풀어내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바람의 언덕을 넘고, 메세타 평원을 걸으며, 철의 십자가 앞에서 떨쳐버리려 노력했다. 그 무겁던 짐이 바람을 타고 날아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난 눈물과 함께 가슴이 뻥 뚫린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몽파르나스 역에서 열차를 타면 바욘에서 한 번 갈아타고 생장에서 내린다. 테제베가 상당히 고급 열차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불편한 열차인 줄 몰랐다. 좁고 시끄럽고, 더욱이 빠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생장 역! 여기서 내리는 승객은 모두 순례자인 것으로 보인다. 다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스틱을 갖고 있다. 길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배낭을 멘 젊은이들을 따라가면 순례자 사무실이 나온다.
오랜 역사의 질곡이 배어있는 것 같은 성문을 지나 돌로 포장된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오르고 나면 고풍스러운 마을 전경이 펼쳐지는데 어느 중세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다. 이곳의 과일과 채소 등 특산물이 가득 쌓인 식료품 가게, 줄지어 늘어선 카페와 식당들. 어디나 사람들로 가득하다. 중세풍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 같다.
왜 산티아고에 순례자가 많을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곳이다. 어떤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어떤 이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또 어떤 이는 무언가를 버리려고……. 다양한 자기만의 무언가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고행의 길을 걷게 되는 걸까? 그 많은 길 중 왜 하필이면 산티아고 길을 택할까?
순례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정확히는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성인 야고보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첫 번째 순교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다 서기 44년에 헤롯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를 당했다. 그의 유해는 야고보의 제자들에 의해 이베리아반도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는 수 세기 동안 잊혀 지내다가 813년 별빛이 쏟아지는 지금의 산티아고에서 그의 무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한참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이 지역은 원래부터 기독교 세력이 살던 지역이었고, 이슬람 세력은 척박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 14㎞만 건너면 비옥한 이베리아반도가 있어 이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게는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복잡한 이베리아반도의 역사 중 산티아고에 순례자가 많은 이유와 관련된 사건들만 모아보았다.
이베리아반도에서 8세기 초 로드리고 왕이 즉위하자, 그 반대 세력이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를 엿보던 이슬람 세력은 별다른 저항 없이 수도 톨레도에 입성하여 불과 7년여 만에 대부분의 이베리아반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780여 년 동안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전쟁이 계속된다.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이 전쟁이 그 유명한 레콘키스타, ‘국토 회복 전쟁’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813년에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인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면서 기독교 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뭉치게 된다. 특히 844년 성인 야고보가 백마를 타고 나타나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는 사건을 계기로 성인 야고보는 기독교 세력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원래 기독교인들이 제일 중요시한 순례지는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점령당한 7세기 이후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로마’로 바뀌었다. 11세기 이후 ‘산티아고’가 새로운 순례지로 부상한 것은 이베리아반도의 상황, 즉 이슬람 세력을 추방하기 위한 레콘키스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두 가지 중요한 칙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산티아고를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가톨릭의 3대 성지로 지정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 야고보의 축일(7월 25일)이 일요일과 겹치는 해에 순례하면 모든 죄를 면제해 주고, 그 외의 해에 순례하면 절반을 감해준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중세 시대 기독교인들은 순례와 같은 육체적 고행을 통해 정신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종교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의 칙령은 산티아고 순례가 더욱 늘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 ‘별들의 들판.’ ‘야고보 성인의 무덤.’
· 산티아고(Santiago, Saint Iago)는 성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
· 콤포스텔라(Compostella)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 산티아고 가는 길.
(환경경영신문, www.ionestop.kr ,박응렬의 <그래서,산티아고>)